Sunday, April 29, 2012

“내가 참포도나무요” (요한 15:1-17)

                                                “내가 참포도나무요” (요한 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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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국선교의 비전을 갖고 중국대륙의 문을 두드린 영국인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헌신하기 위해 중국에 왔고 자기를 바쳐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태양 빛이 비취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주는 나무이신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스스로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을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환경과 형편을 이기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인 한에 있어서 성도들은 모든 환경과 여건을 이길 수 있으며 좋은 과실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을 포도나무로, 나라(또는 민족) 전체는 포도원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 7절에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사람이라.”고 했고, 예레미야서 2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해 “내가 너를 순전한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라고 말씀하시고, 호세아서 10장 1절에서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에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포도원을 마련하시고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심으시며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안에 속하여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수분과 양분을 섭취하기보다는 다른 이방우상의 진액을 받고자 하였기에 뽑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포도나무로서 이스라엘이 농부인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참포도나무로 이 땅에 심으시고 성도들을 이 참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 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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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성도의 연합으로서 교회는 그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는 남편이요 성도의 연합으로서 교회는 그의 아내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요, 성도의 연합인 교회는 그 몸이며, 성도 각 사람은 몸을 구성하는 지체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성도들은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와 성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1절: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내가 참포도나무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라고 칭하신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이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그들에게 임하였기에, 그리스도께서 참이스라엘로, 참포도나무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이 어떤 것인 줄 보여주고자 하심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독립된 나무로서는 풍성한 열매를 맺기가 힘듭니다. 이는 그 나무가 심기어 있는 토양과 위치한 환경에 지배를 많이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열악한 토양과 거친 환경을 변화시키시는 힘을 그 안에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독립된 나무로 심으시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게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였는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포도나무가 되시며 신약 성도는 가지일 뿐입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農夫)라
하나님 아버지를 농부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성도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이 잘 성장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풍성하고 싱싱한 과실을 얻기 위하여 병들어 마른 가지들은 잘라 냅니다.

2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와 과실을 맺는 가지
모든 가지들이 다 잘 자라고 과실을 맺으면 좋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농부는 벌레 먹거나 병든 가지들을 잘라주어 다른 건강한 가지들에게 더 많은 수분과 양분이 가게 합니다.
농부는 과실을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다듬어주어 더욱 싱그럽고 풍성한 과실을 맺게 하고자 합니다.
                                                  
3절: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이미 깨끗함
제자들은 지난 삼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씀의 자양분을 먹고 양육되었기에 깨끗하고 기본이 갖춰진 가지들입니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건강하고 깨끗한 가지들입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리스도 안에 거함
사실 포도나무의 가지는 그에게 선택의 권한이 없습니다. 그 가지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스스로 떨어져 나갈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로서의 가지인 성도들은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자유의지로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인지 떨어져나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좋은 권고사항이 아니라 강권적인 명령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를 출석하는 한에 있어서 교인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즉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심은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에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참포도나무의 가지가 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있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옴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영역(domain) 안으로 들어감입니다.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심은 포도나무가 가지에게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듯이 말씀의 수분과 양분을 가지인 성도에 공급하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제자들 안에 들어오시고 성장시키심입니다.

실제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에서는 가지들이 어떤 특정한 포도나무에 붙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지만, 사람들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잠시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 있다가 스스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가 아닙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나갔기에 수분과 양분을 받지 못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가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라고 1절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1절에서는 그 이전의 열매맺지 못한 이스라엘과 구분하여 “참”포도나무라고 하시고 농부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셨는데, 5절에서는 가지들인 제자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스스로 포도나무가 되어서 열악한 토양과 거친 환경을 극복하고 풍성한 열매를 내는 힘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풍성한 열매를 내게 하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이라고 함은 4절의 명령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맺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결코 맺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4절, 5절, 6절과 7절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이요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이기에 열매는커녕 말라비틀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가지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서 불에 던져 살라질 뿐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제하는 사람은 장차도 하나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할 것이지만, 현재 그리스도와 교제가 단절된 삶을 사는 사람은 장차에도 단절만 있을 뿐입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와 성도간에 연합이 견고하고 말씀을 통한 교제가 건강할 때, 포도나무의 가지인 성도는 농부인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시고, 15장 16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4장 14절에서는 “내(=그리스도)게 구하면”이라고 하시고 15장 16절에서는 “아버지께 구하든지”라고 하심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아버지와 본체이심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나무에 관한 말씀은 주로 과실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3절에서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1장 18-22절과 마가복음 11장 12-14절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과실이 없음으로 인하여 저주거리가 되어 말라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비유하신 두 번째 이유는(첫 번째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구약의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의 대체) 포도나무의 존재목적이 오직 과실을 맺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꽃을 피우는 나무가 아니요, 관상(觀賞)용의 나무가 아니요, 땔감으로 필요한 나무가 아니라 오직 열매를 위한 나무입니다. 포도 열매는 탐스럽고 풍성합니다. 포도송이들이 탐스럽고 풍성한 것 같이 성도들의 풍성한 결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통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들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과실을 많이 맺으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스승에게 제자는 그 스승의 사상과 학문을 계속 이어나가 꽃을 피우고 결실이 있게 하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듣는 학생에게 아무런 진보나 결실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학생일지언정 제자는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disciple)라는 용어를 사용하심에 “과실을 맺음”을 전제조건으로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과실 또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적 열매인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갈 5:22-23)--와 외적 열매인 전도를 가리킵니다.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심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10절에서 설명하십니다.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실 때 하나님의 계명을 즐겨 지키시고 죽기까지 지키셨습니다.
성도가 그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즐거움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를 사랑치 않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지키기를 원하시는 그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율법의 재해석도, 바울의 이방인들을 향한 권고도, 요한의 새 계명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이 한 마디 사랑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또는 형제) 사랑”인데, “(눈에 보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사랑에 관한 성경전체의 요지입니다. 이 “사랑”은 믿음의 가장 확실한 외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11절: 내가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기쁨을 충만하게 함
한 대상을 사랑하는 그 자체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 남편 또는 아내를 사랑하기에 그를 위한 헌신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그 안에 간직하고 공생애를 사실동안 사람들을 위한 나눔과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으로 표현하셨기에 그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그의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나눠주기를 원하십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기쁨을 제자들 안에 있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2-15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장 34절에서 이미 하신 말씀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3장 35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본문 14절에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우리를 그의 친구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로 여기심은 아버지께 들으신 것을 알게 하심입니다.
17절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하셔서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심이 결국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6-17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과실을 맺게 하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신 것은 과실을 맺게 하고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 알게 하십니다.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포도나무 되신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요, 서로 사랑함으로 풍성한 과실을 맺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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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4, 5, 6, 7절).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여 있음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 수분과 양분인 말씀으로 성도들 안에 들어오시고 머무르시며 성도들을 성장하게 하심입니다. 그로 인해 내적인 과실과 외적인 과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쁨을 그 안에 충만히 경험케 되며 그들도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있는 가지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모함이 여러분 안에 있으며 그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여러분 삶 가운데 있습니까?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며 그의 말씀을 듣고자 하며 그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심으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과실을 맺으며 그리스도의 기쁨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게 임하는 놀랍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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