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 6:20-26)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 6:20-26)

       
                                                                         1
요(堯) 임금이 화북지방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땅에 사는 봉인(封人)이 요 임금에게 “임금님께서 재물을 많이 취하시며, 아들을 많이 낳고, 장수하시도록 기원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러자 요 임금이 미소를 띄우며 대답합니다. “그 뜻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재물이 많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가신 일이 많을 것이며,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끊어질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오래 살면 그만큼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겠는가? 이것들은 덕을 쌓는 데는 한갓 쓸모 없는 것들이오.”
재물, 많은 아들들, 장수가 세상 복의 기준이라고 할 것이지만 이것들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곳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재물도 많고 자식들도 여럿 있어서 행복하여야 할 터인데 그 자신은 전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자식들은 여러 가지로 속을 썩여서 없느니만 못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은 끝도 없어서 늘 만족이 없습니다.
그가 하루는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남루한 옷을 입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부자가 이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은 무엇이 그렇게 좋길래 덩실덩실 춤을 춥니까?” 가난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나에게 세 가지 기쁜 일이 있어서 춤을 춥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은 대답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으로 지으신 것이요, 둘째는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요, 세 번째는 지금 나를 부러워할 사람은 없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너무나 좋아 춤을 춥니다.”

                                                                             2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는데 비하여 누가복음 6장 20-49절은 평지수훈(平地垂訓)이라고 불립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 (언덕)에서 설교를 하셨다고 했는데(마태 5:1), 누가는 평지에서 설교하신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누가 복음 6장 17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平地)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성이 있고 역설적입니다. 그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갖고 있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은 그것을 이 세상을 사는 관점에서 풀어 해석하고자 하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20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되기 위하여 예수 믿고 부자 되기 위하여 교회 나오는 사람에게 이 말씀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겠습니까?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해석하였는데(마태 5:3), 누가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누가 6:20)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건 “심령이 가난한 자”이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가난으로 인하여 세상에 큰 소망을 두지 못하는 자라도 그에게 임할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와 같이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없는 자가 바라볼 수 있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너무 커다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죽음이 참으로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남겨놓고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커다란 재산을 관리하여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 부를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력함과 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것을 끝까지 붙들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물질적인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까?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에 의존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더 클 때 그렇습니다.
마 태복음 19장 23-24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 10:23-25; 누가 18:24-25).
왜 그렇습니까?
천국으로 향한 문은 좁은 문인데 부자는 양손에 이것 저것 움켜쥔 것이 많아서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의 관련구절을 보면,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고,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 태가 영적인 갈급함과 애통함에 관심을 가진데 반하여, 누가는 육적인 주림과 울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영적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배부름을 얻는 것과 같이 육적인 굶주림을 당하는 자에게도 주님께서 배부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슬픈 일을 많이 만나는 성도마다 위로하시고 웃을 일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을 찾고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사람들의 판단과 기대와 다릅니까?
사 람들이 판단할 때 ‘그 사람은 무난한 사람이야’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함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책망함을 받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고 멀리하고 악하다’ 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네가 나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였구나, 버린 바 되었도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어서 이리로 오라’고 하는 주님의 극진한 대접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 증거한 사람들 중에 미워 버린 바 되고, 갇히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외칠 때,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심한 푸대접을 받습니다.
미가야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바로 전할 때 그는 아합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인의 궁중 선지자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아합왕에게 싫어 버리고 갇히는 바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할 때 그의 예언을 싫어하는 방백들에 의하여 매를 맞고 옥에 갇힐 뿐만 아니라(렘 37장) 진흙 구덩이에 강제로 처넣어짐을 당합니다(렘 38장).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매 므낫세왕에 의하여 톱으로 베임을 당합니다(히 11:37; 위경 ‘이사야의 순교와 승천’ 참조).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할 때 유대인들은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돌로 쳐죽입니다(행전 7장).
베드로와 바울, 기타 예수님의 제자들의 순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자신도 세상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여느 중한 범죄자들 중에 한명과 같은 여김을 받으셔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상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주님을 인하여 세상사람들은 미워하며, 멀리하며, 욕하고,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도 --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칭찬은 세상사람들의 것과 다름을 아시기 바랍니다.

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예레미야가, 엘리야가, 아모스가, 미가야가, 기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외치던 많은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매를 맞고, 욕을 먹고, 싫어 버린 바 되었습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고, 주님을 증거하다가 나에게 욕이 돌아오고 화가 임할 때 슬퍼하거나 상심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하며, 바른 증거를 받을 때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주위의 박해에 기뻐하고 뛰놀아야 할 것인데, 이는 박해가 심한 만큼 하나님의 상도 큰 까닭입니다.

24절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부요한 자”는 그의 삶의 가치가 온통 재물에 쏠려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을 지키고 모으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감수하고자 합니다. 그에게는 재물보다도 더 귀한 것은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보다도 재물에 우선을 놓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화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25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의 축복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배부른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배고픈 자”--“주린 자”를 돌아봄이 없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자기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교만한 맘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임할 화를 선포하십니다.

“이제 웃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세상의 일로 웃는 자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온통 세상에 쏠려 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짓밟고 자신의 권세와 부를 쌓아갑니다. 이러한 자는 결국에 애통하며 울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26절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의외적인 말씀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세상 기준으로는) 원만하고 성격이 좋은 사람일 것인데 이러한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남이 싫어하는 소리는 안하고 남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 하는 사람일텐데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말하여야 할텐데 듣는 사람이 그것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듣기좋은 소리를 함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교회지도자로서 목사님이 생각해봅니다. ‘내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일본사람들이 나와 우리 교회사람들을 싫어하고 욕하겠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되나? 또 내가 거부함으로 인하여 우리 교인들이 다치면 쓰겠나?’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작정합니다.
이 목사님의 결정이 바른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거짓선지자들에 대하여 요한1서 4장 5절에서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가 있습니다.
참선지자의 선포하는 말이 귀에 거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의 말은 은근하고 귀에 솔깃합니다. 따라서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은 거짓선지자의 말을 따라갑니다.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에 미가야라고 하는 참선지자와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인의 거짓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미가야는 참말을 선포하니 그의 말이 악함과 허물투성이인 아합왕의 귀에 좋게 들릴 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400인의 궁중선지자는 온갖 좋은 소리로 아합왕의 귀를 즐겁게 해줍니다. 아합왕이 거짓선지자들을 좇을 때 그는 아람군대와의 길르앗라못 전투에서 패하여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판단과 칭찬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절 구경을 갔는데 부처님께 절하지 않으면 중들이 싫어한다고 부처님께 절하는 크리스천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좋은게 좋은거 아닙니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칭찬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화가 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욕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을 받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3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이제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paradox)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세상사람들이 싫어하는 모습을 우리가 즐겨 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비로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아니 오히려 더 움켜쥐고 하나님께 속한 것도 얻으려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미 부요한 자이며, 이미 배부른 자이며, 이미 웃는 자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세상 것으로는 가난하여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모하며, 지금 세상에서는 주린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양식을 사모하며, 현재 세상에 속한 것으로는 기쁨을 삼을 수가 없어서 우는 자이기에 하나님 안에서 웃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