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 20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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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교부 신학자였던 아타나시우스(Athansius)는 그의 책 “말씀의 성육신(The Incarnation of the Word)”에서 왜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야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가 육신이 되신 원인'입니다. 그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육체의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 그 누구도 아닌,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구주만이 썩어질 것을 썩지 않을 것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형상이신 예수님만이 사람을 재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을 것을 죽지 않을 것으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참되신 아버지의 독생자 되신 말씀만이 아버지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우상을 파괴하실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의 삯은 지불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 삯은 사망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중에 오셨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은 터무니없고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대응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11세기 중세의 신학자였던 안셀름(Anselm)도 그의 책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나(Cur Deus Homo)”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올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안셀름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하실 수 없으시기에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사람들 중에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강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속성과 인간의 죄에 연약한 속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는 그 스스로 인간에게 내려오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희생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그들의 죄와 허물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은 죄와 허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어떤 만족할 만한 것을 지불해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지불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그의 상실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만족할만한 대가(代價)를 스스로 지불하시고 그가 사랑하는 인간을 죄와 허물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들 가운데 인간의 모양으로 사람들 사이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대속적인 사랑을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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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의 “태초(太初)”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보다도 더 먼 근원적(根源的)인 태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가 천지창조 즈음의 시기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천지창조는 물론 하늘의 천사들도 아직 창조되기 전,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시던 때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무한한 영속성 가운데 존재하시는 그 말씀에 대한 기술입니다.
“말씀이 계시니라”고 표현한 것은 성자 하나님의 존재 형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부하나님은 하나님의 대표격으로 말씀과 지혜 또는 생각을 포함한 전부를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자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 또는 지혜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때 ‘삼위일체’(Three Persons in One Nature)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성부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성자하나님(아들 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라는 세 가지 위격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중에 성부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체(main body)이시고, 성자하나님은 본체이신 성부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고, 성령하나님은 본체이신 성부하나님의 지혜(Wisdom) 혹은 생각이십니다.
요한은 이 말씀이신 성자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 혹은 생각이 말씀으로 표현될 때 그 ‘말씀’이 하나님(성자하나님)임을 밝힘입니다.

2-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의 창조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실 때, 궁창을 만드실 때,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실 때, 땅 위의 생물들과 식물들, 바다의 물고기들을 만드실 때 ‘가라사대’의 창조였습니다.
‘가라사대’의 창조는 곧 말씀으로 역사하시던 성자 하나님과의 ‘협력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 곧 성자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함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하기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함은 생명은 사람들에게 밝음을 주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해서, “생명의 빛”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비추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그의 구원사역을 깨닫지 못한 세상사람들의 영적 무지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6-8절: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6-8절에서는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은 누구인가 하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사람이요 그의 증거로 인하여 사람들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자 한 사람입니다.

9-11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비취셨습니다.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하면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의 오심과 오심의 이유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팔레스틴 유대 땅에서 태어나셨으나 대부분의 유대인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출생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마다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란 뜻입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경 속의 많은 증언들 중에 이 말씀보다 더 귀하고 감격스러운 말씀이 드뭅니다.
태초로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성자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외형을 표현할 때, 육신(flesh: σάρξ)이라고도 하고 몸(body: σώμα)이라고도 합니다.
몸(body)은 사람의 외형에 대한 긍정적(肯定的)인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람이 부활(復活)할 때 썩지않을 몸, 영광의 몸을 입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육신 혹은 살(flesh)은 사람의 외형에 대한 부정적(否定的)인 표현입니다. 같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blood)과 육(flesh)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고오신 인간의 외형은 낮고 천한 모습, 썩어질 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입고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와 고통과 슬픔을 몸소 체험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주시기 위함이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고통과 슬픔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이심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영광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영광은 무엇인가 하면 해에서 나온 햇빛과 같습니다.
햇빛이 비췸을 보면서 해를 생각합니다.
영광은 본체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와 엄위를 헤아리게 하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머무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 11절(비교: 역대하 5장 14절)에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하나님, 역대하 5:14)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영광을 봄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에 비유하셨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의 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본체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χάρις)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데 인간을 구원하여주심입니다.
진리(ἀληθεία)는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입니다. 말씀으로 계신 그리스도의 영속성(永續性)입니다.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합니다.
그가 세례요한보다 육 개월 정도 뒤에 태어나시고 사역도 그보다 뒤에 시작하셨지만 세례요한은 증거할 때에 그가 자기보다 앞서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이전, 아니 세상 만물이 생성되기 훨씬 이전인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은혜에 은혜를 받습니다.
이 은혜를 어떤 영어성경은 축복(blessing)이라고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으로 믿는 성도들이 받는 것은 은혜의 빛-복이라는 것입니다.

17절: 율법은 모세를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시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타내기 위함이지 이것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무한하시고 변치 않는 사랑과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에녹이, 노아가,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표현하지만, 그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자들이요 빽빽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그림자 또는 뒷모습 또는 영광을 본 사람들입니다.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을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사랑하시기에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더 나타내시기 위함이심입니다.

                                                                            32,000년 전에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 삶 가운데 느껴지십니까?
17세기에 살았던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는 “Wär' Christus tausendmal in Bethlehem geboren und nicht im mir--ich wäre doch verloren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천 번을 나셨다고 해도, 내 안에서 나신 바 되지 않았더면 나는 여전히 잃은 자였으리라).”고 증거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안에 2,000년 전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는 경험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