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요한 14:16-31)
1
고대 근동나라들(ANE)의 신화들 가운데 등장하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들 중에는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메소포타미아의 마르둑(Marduk) 신도 있고,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다스린다는 에레쉬키갈이라고 하는 여신도 있고, 풍요를 공급하는 바알(Baal) 신이나 땅의 여신이라고 하는 아세라(Aserah) 등이 있지만, 이 신들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것도 명령하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참으로 존재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신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상상(imagination) 가운데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그들의 기원과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허구이지 실재로 존재하는 신들이 아니므로 그들을 만든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사람들을 향하여 그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명령하시며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자녀로 삼으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약속을 바라보며 나오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평안을 공급하여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통하여 그들을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교회를 출석할 때,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외형적인 삶이 갑자기 좋아져서, 순탄하여져서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극히 드문 예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의 형편은 여전한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달음으로 인하여 오는 평안입니다.
세상의 삶은 여전히 힘든데,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내가 느끼기에 오는 평안함입니다. 나는 여전히 육신의 고통을 느끼는데 주님께서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알기에 찾아오는 행복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된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평안케 합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오라 부르심이 나를 평안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아는 것이 나를 평안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아는 것이 나를 평안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림을 알고 고백함이 내게 평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임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께서 영으로 여러분 안에 함께 하심을 날마다 발견하고 고백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죄와 허물의 짐, 염려와 근심의 짐을 내어 맡기기를 바랍니다.
2
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떠나심을 염려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그들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 번역하면, ‘돕는 자’(Helper), ‘상담자’(Counselor), 또는 ‘위로자’(Comforter)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 안에 거하고,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는 영이십니다.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떠난 삶을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그의 가르치심을 받은 제자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의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고 하신 약속은 오순절 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일차적으로 이뤄지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기에 때로 더딘 것 같을지라도 꼭 이뤄질 약속입니다.
19-20절: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조금 있으면”이라고 함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되실 때를 가리킵니다.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라고 하심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이라고 말씀하심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강림하실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영으로서 제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요,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예수님도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시겠다고 약속 주셨습니다.
22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2절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그리하므로 그들의 임금이 되시지 그러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직접 대답하시는 대신에 제자들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3절은 21절 말씀의 반복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은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리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를 사랑하는 자요,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내가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행함을 통하여 아내가 남편이 자기를 사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이 자기를 공경하고 사랑함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모님의 원하고 명하는 바를 자식이 듣고 될 수 있는 대로 행하고자 노력함을 보며 알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아무리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하더라도 남편의, 아내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더라도, 그분의 원하고 명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치 아니하고 지켜 행하기는 더더군다나 원치 아니할 때 이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의 판단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나의 삶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5-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구약시대가 성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역사하신 시기라고 한다면, 구약과 신약을 잇는 중간지점에는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뒤를 이어 성령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시기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심은 그들로 하나님의 뜻과 명하심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더욱 더 주님의 뜻을 밝히 깨달아 알아 지키고자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함께 다니고, 먹고 자고, 말씀의 가르치심을 받았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게 크게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이 세상에서 보다 나은, 출세한 자의 삶을 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자 함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요,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마음에 번민함과 고통 중에 지내시고 피와 땀방울을 흘리시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로,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실 때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고자 인사청탁을 하는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의 문제로 분이나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제 바뀝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매 이제 예수님께서 사신 공생애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분이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치시고 당부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를 사는 모든 성도들도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 전까지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요 세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삶 가운데서만 이해되지 그 이상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까?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에게 임하실 때 비로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 생각나고 알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를 사는 성도들은 그들에게 성령의 임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들어도 깨달아 알 수 없고, 온전히 지켜 행할 수가 없습니다.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들도 여전히 이 세상임금인 사단이 주장하는 “이 세상”(this world)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 때, 고통이 없거나 어려움이 없거나, 폭풍이나 풍랑이 없거나, 가시밭길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세상의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 앞에도 이러한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른 것인데 우리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도 때로는 광야 길을 헤매고, 때로는 사막길을 다니고, 때로는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때로는 큰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 위를 항해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그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십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황무지에도 장미꽃이 필 수 있으며 사막에도 물이 나며, 고통과 괴로움 중에도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마음이 평안하여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여객선의 밑창으로 내려가면 자이로스코프(gyroscope 또는 gyrostabilizer)란 것이 있는데(비행기에도 있음), 이것은 파도가 심할 때 배가 평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장치입니다.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배가 안정되고 평형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도 우리 인생의 항해에서 자이로스코프와 같은 역할을 하여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의 시련에 있을 때에도, 비바람과 폭풍의 중심에 있을 때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하시며 평안을 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일시적인 근심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근심이나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습니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시고 또 얼마 후에 다시 오심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4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성도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시는” 사역을 그들이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들에게 기쁨이 클 것입니다.
29절: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언의 위대성은 그 예언의 성취에 있습니다. 구약에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그의 공생애, 고난,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언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성도들로 하여금 보고, 알고,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하나님께로 가심)과 다시 오심을 미리 말씀하심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에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참됨을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30-31절: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상관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주장하는 대로 일이 되가는 것처럼 보일 터인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서의 사역이 이 사단의 사역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이 역사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 같지만 기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되어짐입니다.
3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인데, 이로서 그는 힘을 얻고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평안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매 어떤 시험이 오나 곤고가 오나 담대할 수 있으며 어려운 처지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들판 한 가운데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고, 보혜사 성령의 위로와 가르치심을 받으며, 주님의 평안으로 말미암아 항상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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