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하나님의 가계
이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 누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해 있었는가?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 ‘남자’는 ‘자카르’(זָכָר, zakar), ‘여자’는 ‘네케바’(נְקֵבָה, neqebah)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자신의 동산에 두신 남자 ‘아담’(אָדָם, adam)과 여자 하와(חַוָּה, ḥawwah)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두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다스리심 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였을 때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최초의 하나님의 가계는 깨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는 한 민족이나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보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개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에녹은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였으며(창 5:22, 24),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다(창 5:24). 따라서 더 이상 하나님의 가계가 존재하는 물리적인 장소는 없었지만, 에녹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노아도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였으며(창 6:9),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노아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도 하나님의 가계에 속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이다. 곧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복을 주시며 다스리시는 경제적·정치적 통치 활동이다.
그 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가계에 속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약속하신 말씀과 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때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창세기 46장 27절에 따르면 애굽으로 간 야곱의 가족은 모두 70명이었으며, 사도행전 7장 14절에서는 7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75명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Septuagint)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에 정착하였을 때 하나님의 가계는 약 70명으로 확장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까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창 15:13; 행 7:6), 다른 본문에서는 43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출 12:40–41; 갈 3:1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계수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때 이십 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이스라엘 남자의 수는 603,550명이었다(민 1:1–46). 따라서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을 모두 포함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인구는 약 200만에서 3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가계는 더 이상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아브라함 한 사람과 그의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야곱의 가족 약 70명으로 확장되었던 하나님의 가계는 출애굽 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한 민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이방인들까지 자신의 가계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가계를 더욱 크게 확장하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장 22절에서 모든 민족을 향하여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부르신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땅끝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이사야 52장 7절은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소식과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 비록 이사야 시대에는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소식이 더 넓은 세계로 전파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사야 54장 2–3절에서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신다. 장막을 넓히고 줄을 길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방으로 확장될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장막, 곧 가계를 모든 방향으로 넓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5장 1절에서도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며,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그 초청에 응하여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계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것은 더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을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민족에게 전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계의 진정한 확장은 건물이나 재산의 증가가 아니라 생명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데 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때가 이르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의 참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한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24절에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5–6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것은 복음 전도의 범위가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순서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로, 그다음에는 사마리아로, 그리고 마침내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이방 세계,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려야 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어디에서나 역사하실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모든 민족과 땅끝까지 확장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도 모든 민족을 향하여 확장되어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복음은 이스라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했다.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었고(행 2–7장), 그 후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었으며(행 8장), 마침내 더 먼 지역과 이방 세계로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행 12–28장). 이처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 전도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복음이 새로운 지역과 민족에게 전파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가계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을 향하여 계속 확장되어 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을 박해하던 사울을 부르셨다. 왜 그를 부르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9장 15–16절에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하여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다(행 22:21; 26:17 참조).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인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와 고난을 받는 바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로마로 보내지기를 원했는가(행 25:10–12)?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 중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부터 이미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롬 15:24, 28). 스페인은 당시 바울이 바라보던 서방의 매우 먼 지역이었다.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까지도 복음 전도를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복음을 더 먼 지역, 곧 땅끝까지 전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행 28:16). 바울은 사도행전 28장 28절에서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자신이 세낸 집에 만 이 년 동안 머물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행 28:30–31).
바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복음 전도의 여정도 이제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이자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남긴 마지막 권면과도 같은 서신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면한다. 복음 전도는 우리에게 상황이 좋고 유리할 때에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상황이 좋든지 나쁘든지, 때가 우리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울 자신이 박해와 체포와 투옥 가운데에서도 복음 전도를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하나님의 가계는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스데반과 빌립을 비롯하여 이름이 알려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확장되어 갔다. 신약 외경과 여러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으며,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여러 지역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몇몇 유명한 사도들의 사역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고 때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함으로써 복음은 더 많은 지역과 민족에게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가계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갔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로마 정부의 박해와 감시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로마의 카타콤(catacomb)은 주로 지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 죽은 신자들을 장사하고 그들을 추모하였다. 박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을 피난처로 이용하거나 그곳에 모였다는 전승도 있지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카타콤에서 집단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카타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찬송가나 완성된 형태의 신약성경 정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의 소망을 고백하였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언하는 삶은 세상의 재산이나 지위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
로마의 여러 카타콤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다양한 벽화와 상징들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식탁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장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신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을 모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묘사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그림과 상징들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죽음과 박해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이 세상의 삶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을 더욱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과 증언을 통하여 복음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계속 전파되었으며, 하나님의 가계도 더욱 넓게 확장되어 갔다.
2세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은 체포되어 총독 앞에 끌려가 순교를 앞두게 되었다.[1] 그러나 총독은 폴리캅이 나이가 많은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나이를 생각하시오.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고 회개하여 ‘무신론자들을 없애 버리라’고 말하시오.”
폴리캅은 잠시 침묵하였다. 총독은 다시 그에게 강요하였다. “맹세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소. 그리스도를 저주하시오!”
그러자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지만,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은 다시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시오!”라고 강요하였다.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한다면 분명히 들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고 싶다면, 날을 정하여 들으십시오.”
총독이 말했다. “나에게는 맹수들이 있소. 당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맹수들에게 던져 버리겠소.”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그들을 부르십시오.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에서 더 나쁜 것으로 돌이키는 회개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에서 의로 돌이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총독은 다시 말했다. “당신이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회개하지 않을 경우 불로 태워 버리겠소.”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당신은 잠시 타다가 곧 꺼지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장차 올 심판에서 악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폴리캅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이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부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86년 동안 자신을 지켜 주셨으며 자신을 구원하신 왕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죽음의 위협보다 강하였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쓴 소설 『침묵』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가톨릭 신부 프란시스코 가르페(Francisco Garrpe)의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온다.[2] 일본 관리들은 가르페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가르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일본 관리들은 가르페에게 배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을 바다에서 죽게 한다. 그들은 작은 배에 실려 바다로 끌려가 물속에 던져졌다. 가르페는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향하여 헤엄쳐 갔지만, 결국 그 자신도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가르페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대신, 죽어 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잃었다. 물론 가르페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침묵』에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문학적으로 보여 준다.
19세기 초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거의 6년 동안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였지만 한 사람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거나 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셨으므로 반드시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마침내 약 6년의 선교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첫 회심자가 나타났다. 저드슨은 그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저드슨이 오랜 세월 인내하며 복음을 전한 끝에 얻은 첫 열매였다. 처음에는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이후 복음은 그 지역에서 계속 확산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저드슨의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 그 결과를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책임은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이며,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한다. 복음 전도의 열매가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크게 나타날 것인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맡겨진 자리에서 신실하게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
에릭 리델(Eric Liddell, 1902–1945)이라는 스코틀랜드 육상선수가 있었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였으며 특히 100미터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100미터 예선 경기가 주일에 열리게 되자 그는 그 경기에 출전하기를 거부하였다. 영국 올림픽 관계자들과 유력 인사들이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경기에 출전하도록 그를 설득하였지만, 그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올림픽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다. 그러나 에릭 리델은 자신의 신앙과 삶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가장 유력했던 종목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였다. 그는 대신 400미터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에릭 리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 자신도 믿음의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갔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세운 삶의 원칙에 따라 살고자 하였다. 그의 선교사 생활은 때로 고통스럽고 가난하였지만, 하나님께 충실한 자신의 삶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생애는 『The Flying Scotsman』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소개되었으며, 후에는 그의 이야기가 영화 『Chariots of Fire』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 제목에 사용된 ‘불수레’의 근원적인 성서적 근거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열왕기하 2장 11절은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고 기록한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을 마친 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에릭 리델은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좋아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다. 그에게 운동선수로서의 명예와 성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에릭 리델보다 약 60여 년 후, 영국의 세단뛰기 선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966–)도 비슷한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목회자의 아들로 자란 그는 당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육상 경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일에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영국 대표 선발전의 세단뛰기 경기가 주일에 열리자 출전을 거부하였으며, 199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도 세단뛰기 예선이 주일에 열렸기 때문에 출전을 포기하였다. 그에게 당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세계적인 육상대회에 출전하여 명예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성경을 다시 연구하면서 주일에 운동경기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1993년부터는 주일에도 경기에 출전하였다. 이후 그는 세계적인 세단뛰기 선수로 성장하여 세계기록을 세우고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의 초기 신앙적 결단은 약 60여 년 전 에릭 리델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주일 경기를 포기했던 모습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교사의 가장 좋은 모범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파송된 선교사로서 예수님은 먼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이 땅의 옷, 곧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주시는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목회자이자 성경학자인 존 스토트(John Stott)는 『Our Guilty Silence(우리의 죄된 침묵)』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할 기회가 있음에도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복음 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속되어 온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와 아브라함의 가정을 거쳐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으로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9)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명을 따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후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때로는 자신의 재산과 명예와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는 세대와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넘어 계속 확장되어 왔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에도 끝나지 않았다.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이 사명을 위탁받았다.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더 큰 예배당을 짓고,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며, 교회의 외형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한다는 것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건물의 크기나 재정의 규모만으로 평가될 수 없으며, 얼마나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세워 가고 있는가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을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바울이나 저드슨(Judson)처럼 먼 나라로 가는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사용하여 복음 전도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기회를 충실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책임은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이며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 역시 자신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복음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중요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교회를 확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고 있는가? 우리가 가진 건물과 재정과 인력과 모든 자원은 교회 자체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확장은 어떤 특정한 대형 교회나 유명한 부흥사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이름 없이 수고하며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도들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계를 확장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사용하여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데 반드시 큰 능력이나 많은 재산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직접 전하고, 어떤 사람은 선교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후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나타낼 수 있다. 각 사람에게 맡겨진 역할과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처럼(고전 3:6),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복음의 씨를 충실하게 심고 물을 주는 것이다.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복음 전도의 결과가 우리의 능력이나 재산, 교회의 규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수고와 충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다.
우리가 각자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처럼 복음 전도는 단순히 교회의 규모를 확장하거나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하는 중요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