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3, 2026

평균의 경제학

평균의 경제학

 

위탁(委託)된 소유권(所有權)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인정하는 인간의 사적 소유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고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브 엘워트(Steve Elwart)는 이를 “위임된 소유권(delegated ownership)”이라고 일컬었지만,[1] 나는 이것을 “위탁된 소유권(entrusted ownership)”이라고 부른다.  

위탁(委託)과 위임(委任)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강조점에는 차이가 있다. “위임(委任)”은 자신의 권한이나 직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대신 행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재산 자체보다는 권한이나 책임 또는 직무를 맡기는 데 초점이 있다. 반면 “위탁(委託)”은 재산이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소유자는 여전히 따로 존재하며, 그 소유자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관리와 사용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관계가 강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인간에게 재산과 자원을 맡겨 관리하고 사용하게 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표현하기에는 “위탁된 소유권(entrusted ownership)”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재산은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소유로 인정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청지기이다. 따라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절대적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진정한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책임 있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신다(창 1:28).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더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금

구약성경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규정들이 나타난다(출 23:10–13; 레 19:9–10; 23:22; 신 14:28–29; 15:1–11; 24:19–22).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출 23:10–11). 또한 하나님께서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신 14:28–29). 이처럼 하나님은 토지와 십일조를 통하여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를 원하셨다.

니클(K. F. Nickle)에 따르면,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는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는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규정은 지역 공동체에까지 확대되었다. 공동체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바구니 모금(basket collection)에 일정한 금액을 의무적으로 부담하였으며, 가난한 주민들은 이를 통하여 그 다음 한 주 동안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고 설명한다.[2] 이러한 바구니 모금의 전통은 오늘날 교회에서 헌금 바구니를 사용하여 헌금을 모으는 관행과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물질적인 구호를 보낸 초대교회의 사례는 사도행전 11장 27–30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때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의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행 11:29–30; 참조 11:28). 이때 바울은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가 마련한 구호금을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대규모 모금 운동을 추진하는 데에도 중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와 나눔은 바울의 선교 활동에서 부수적인 일이 아니라, 초대교회 시절부터 그가 직접 참여했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모금 운동

바울은 그의 주요 네 서신인 로마서 15장 25–28절, 고린도전서 16장 1–4절, 고린도후서 8–9장,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9–10절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다루고 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생활 방식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매우 가난한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이 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모금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시키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모금 운동에 참여하여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영적인 유익이 그들이 드리는 헌금 자체의 금전적인 가치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바울은 이 모금 운동을 통하여 서로 다른 지도자들과 신앙적 입장 아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연합하고 화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특히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헌금한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넘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에게 자신의 생활비를 위한 돈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 운동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지역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사람들을 파송하면서 이 모금 운동을 추진하였다.  

바울을 배척하고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로마서 9–11장에서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잘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그의 생애 동안 적어도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하였다(행 13:1–14:28; 15:36–18:22; 18:23–21:14). 바울의 제3차 선교 여행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세운 여러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모아 심한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물질적인 가난과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았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일 년 전에 약속하였으나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던 모금을 마무리하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보다 훨씬 가난한 형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모금 운동에 참여한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을 좋은 본보기로 제시하였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보다 늦게 모금을 시작하였지만 기꺼이 참여하여 이미 그 일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참여한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특히 주목할 것은 마게도냐의 믿음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많은 연보를 드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은 그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음에도 자원하여 자신들의 힘에 지나도록 연보에 참여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연보는 단순히 돈을 내는 행위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었으며, 바울은 이러한 나눔을 “은혜”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른 성도들과 나누었다. 따라서 그들의 나눔은 물질적인 풍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을 돕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덕행, 곧 그들의 헌금과 관대함을 칭찬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헌금과 관대함(고후 8:2–5)은 하나님의 은혜(고후 8:1)에서 나온 것이다.[3] 배럿(C. K. Barrett)은 고린도후서 8장 1절에서 ‘카리스’(χάρις, charis)가 신학적인 의미의 “은혜”로 사용되고, 8장 4절에서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 “마게도냐 사람들의 관대함은 곧 하나님 자신의 관대함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셨으며, 그 결과 그들이 관대한 사람들이 되었다.”[4] 이 본문에서는 두 번째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이지만, 첫 번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고린도후서 8장 2절에 나타난 그들의 관대함이 더욱 귀한 것은 그들이 가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기꺼이 자신들의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헌금은 자발적이었으며, 기쁨으로 드린 것이었고,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관대한 것이었다(고후 8:2–3).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그리스도인의 나눔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찾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은혜”로 번역된 말은 ‘카리스’(χάρις, charis)이다. 푀르스터(Foerster)에 따르면, “바울에게 있어서 ‘카리스’(χάρις, charis)는 구원 사건에 대한 그의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은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호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다.[5]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이러한 은혜는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자기희생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난함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으며,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과 나눔의 근거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은 단순한 자선 행위를 넘어, 먼저 자신에게 베풀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예수님 자신의 삶의 모범을 따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요하셨으며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심으로 가난한 그의 백성을 그 안에서 부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영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우리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게 하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면하였으며, 그들의 나눔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원하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과 후에 우리의 물질적인 소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관대하게 나눌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었으며,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자신을 가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처럼,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도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어 줌으로써 다른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였다. 그 중요한 평행점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고후 8:12).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모금을 마무리하려는 열심을 보이라고 권면하였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에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원하는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빚을 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다른 사람들과의 나눔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빚을 더하면서까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6]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에서 평균(이소테스, ἰσότης, isotēs)의 경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3–15).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와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 사이에 공평한 균형, 곧 평균을 이루는 것이었다.[7] 여기서 ‘평균(平均)’은 모든 사람이 정확히 같은 양을 소유한다는 산술적 평균이라기보다,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의 ‘이소테스’(ἰσότης, isotēs)가 가리키는 “많이 가진 자의 남음과 적게 가진 자의 부족함을 조정하여 서로의 필요가 채워지는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아가야와 마게도냐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과 물질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바울에게 매우 공평한 일로 보인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7절에서 “저희가 그들을 기뻐서 섬겼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한다. 즉, 아가야와 마게도냐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영적인 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갚는 것은 바울에게 공평한 나눔이었다.

고린도후서 8장 14절 하반절의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풍요를 이방인들과 나누었듯이, 이방인들도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그 성도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롬 15:27). 둘째, 지금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유대인 성도들과 나눈다면, 훗날 이방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유대인 성도들이 자신들의 물질적인 또는 영적인 풍요를 이방인들과 나누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배럿(Barrett)은 바울이 “훗날 고린도 교회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형편에 있게 된다면, 그들이 이방인 형제들과 자신들의 것을 나눌 것이라는 의미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8] 배럿은 첫 번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로마서 15장 27절에 비추어 볼 때 그것 역시 평등 또는 공평한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평균” 또는 “공평한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 

평균(平均)의 경제학

바울에 따르면, 평균의 경제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풍요를 지금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훗날 다른 때에, 지금 우리의 풍요를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그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풍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된 우리와 그것을 나누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적인 나눔을 통하여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평균 또는 공평한 균형을 이루게 된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돕기 위하여 우리가 빚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든 적든, 그것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평균의 경제의 근거는 출애굽기 16장 18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후 8:15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 사람이 먹을 만큼 만나를 거두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었고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었다(출 16:16–17). 출애굽기 16장 18절은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거나 지나치게 적게 소유하기보다 그들 사이에 평균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도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었다. 그러자 남겨 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출 16:19–20).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12절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설명하며,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에게서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이라는 신령한 것을 전하였으므로, 그들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인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은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데 조금이라도 장애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물질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무런 장애 없이 전파되는 것이었다.[9]

대신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빚진 자로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을 통하여 영적인 풍요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에 빚진 자가 되었으므로, 이제 심한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과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나누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대하여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다시 한번 바울의 평균의 경제를 보여 주는 기본 원리를 잘 나타낸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복음이라는 신령한 것을 나누어 받았으며,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육적인 것, 곧 물질적인 것으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섬기게 되었다. 한쪽은 신령한 것을 나누었고 다른 쪽은 육적인 것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워 준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나눔을 단순한 자선 행위로 보지 않고, 신령한 것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그 기본 원리가 있다.[10]

지금 자신에게 어떤 것이 풍족하게 있다면,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도 훗날 자신들에게 풍족한 것이 있고 우리에게 그것이 부족할 때 자신들의 풍요를 우리와 나누게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 시간, 토지, 노동 등과 같은 물질적인 풍요일 수도 있고, 사랑, 은혜, 복음 등과 같은 영적인 풍요일 수도 있다. 이처럼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자신에게 현재 풍족한 것을 부족한 사람들과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상호적인 나눔의 원리에 기초한다.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번성하고 증가하여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먹이시고 그들이 모두 배부르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 각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셨지만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의 가난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고후 8:9)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복을 받고 영원히 살게 하셨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 곧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던 무리를 먹이셨으며, 그들에게 서로 나누는 삶을 가르치셨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러한 나눔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그리고 주인과 종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균의 경제를 가르쳤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균과 하나 됨을 강조하며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균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의 모든 사회적 차이가 사라진다는 의미라기보다, 그러한 차이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나 신분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는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16절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하나 됨을 강조한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던 장벽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너졌음을 설명하며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한다.

이처럼 갈라디아서에서는 인종과 사회적 신분과 성별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강조하고, 에베소서에서는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장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무너지고 둘이 “한 새 사람”과 “한 몸”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평균은 모든 사람의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동일하게 만드는 획일적인 평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에 참여하는 평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단지 물질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종이나 민족, 성별, 사회적 계층, 부의 정도, 나이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차이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차이 때문에 어느 누구도 차별받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높거나 낮은 존재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바울의 평균의 경제를 이어받은 존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물질적인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르셨으며, 이것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섭리적인 경제적 사명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영적인 부를 부유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르셨으며, 이것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섭리적인 영적 사명이라고 말한다(고후 8:14 참조). 따라서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자 종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들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평균의 경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는 획일적인 경제적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위탁된 소유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풍족한 것이 있을 때에는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그리고 훗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풍요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가 채워질 수 있다. 이러한 나눔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평균(이소테스, ἰσότης, isotēs)은 많이 가진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고 적게 가진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모두의 소유를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5)는 원리에 따라 서로의 풍요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평균의 경제는 물질적인 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간, 노동, 재능, 사랑, 은혜, 복음과 같은 우리 삶의 모든 풍요에 적용될 수 있다. 그 궁극적인 모범은 부요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후 8:9). 따라서 평균의 경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것을 서로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줌으로써 모두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랑과 나눔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평균의 경제는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과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첫째, 성경이 말하는 평균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소득이나 재산을 가져야 한다는 획일적인 평균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받은 능력과 맡은 일과 소유한 것이 다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풍요로운 반면 다른 사람은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권하면서 말한 평균의 목적은 가진 사람의 나눔을 통하여 부족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있었다.

둘째, 성경의 평균은 강제적인 재산의 동일화보다 자발적인 나눔을 강조한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도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다른 성도들을 돕는 일에 자원하여 참여하였다(고후 8:1–5). 바울은 그들에게 억지로 재산을 내놓으라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응답하여 자발적으로 나누는 삶을 보여 주었다고 칭찬하였다. 따라서 성경의 평균은 모든 사람의 소유를 강제로 같게 만드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기꺼이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셋째, 이러한 나눔의 가장 중요한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그의 가난함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고 말한다(고후 8:9).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단순히 부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남는 것을 나누어 주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내어 주심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균의 경제는 자기중심적인 축적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는 삶을 지향한다.

넷째, 성경이 말하는 평균은 물질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신령한 것을 나누어 받았고, 그들은 다시 육적인 것으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섬겼다(롬 15:25–27). 한쪽은 신령한 것을 나누고 다른 쪽은 물질적인 것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따라서 평균의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이다.

다섯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균은 사람의 가치를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한다(갈 3:28).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한 새 사람”과 “한 몸”으로 만드셨다(엡 2:14–16). 이러한 하나 됨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현실적인 차이가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차이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와 신분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재산과 소득이 사람의 가치와 사회적 존중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이러한 가르침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경제적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어느 정도의 소득과 재산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회의 일부가 풍요를 누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음식과 주거, 교육과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어려움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자신의 풍요를 다른 사람의 필요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기업과 사회도 경제적 성장의 혜택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집중되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정부도 모든 사람의 소득과 재산을 똑같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지향할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의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조세와 사회보장, 교육과 직업훈련, 공정한 경제적 기회의 제공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개인의 책임과 경제활동의 동기를 지나치게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를 실제적으로 채워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평균의 경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의 풍요가 부족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그것은 획일적인 결과의 평균보다 사랑과 나눔을 통한 필요의 충족을 지향한다. 또한 물질적인 차이를 넘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불평등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평균의 경제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통하여 누구의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현대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모든 사람을 똑같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것을 나누며, 아무도 기본적인 필요에서 소외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불평등을 획일적인 동일화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본받은 자발적인 나눔과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삶을 통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1] S. Elwart, “Biblical Principles of Economics,” Koinonia House (October 1, 2011).

[2] K. F. Nickle, The Collection: A Study in Paul’s Strategy (Alec R. Allenson Inc., 1966), 93–94.

[3] 최건수, 『약할 때 곧 강함이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5 — 고린도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1), 221–223쪽.

[4]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Harper & Row, 1973), 218.

[5] Foerster, TDNT, vol. 9 (1974), 393.

[6] 최건수, 『약할 때 곧 강함이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5 — 고린도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1), 234쪽.

[7] 같은 자료, 235.

[8]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Harper & Row, 1973), 226.

[9] 최건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4 ― 고린도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0), 238쪽.

[10] 최건수,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1 ― 로마서』 (서울: 쿰란출판사, 1999), 318–322쪽.

 

 


Friday, October 2, 2026

가계의 경제란 무엇인가?

가계의 경제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의 가계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활동과 지침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것은 거시경제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경제를 살펴본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의 통치와 관리의 많은 부분이 정부에 위탁되어 수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제는 국가나 사회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계는 그 안에 속한 수많은 개인과 개별 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와 관리는 각 개인과 가계의 일상적인 경제생활에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개인이 어떻게 소득을 얻고, 무엇을 소비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과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도 하나님의 경제와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 전체를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그 가계를 구성하는 개인과 개별 가계의 경제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계 전체에서 개개인 또는 개별 가계의 경제로 관심을 옮기고자 한다. 이것은 개인이 자신과 자신의 가계를 위하여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 연구의 미시경제학적 관점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은 자신이 소유한 재산과 자원의 절대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따라서 개인의 경제적 의사결정은 단순히 자신의 효용이나 만족을 극대화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계를 어떻게 그의 뜻에 따라 책임 있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개인과 가계의 경제의 출발점이다.

만족(滿足)의 극대화(極大化)

경제학에서 각 개인의 경제적 목표는 소비자로서 자신의 효용, 곧 만족이나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기업의 소유자로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를 의미하는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 oikonomia)의 첫 번째 의미는 “청지기직 또는 가계의 관리”이다. 각 개인은 소비자이든 기업의 소유자이든 가계의 관리자로서 자신과 자신의 가계가 얻는 만족을 극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개인은 자신의 경제활동을 통하여 어떻게 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경제활동이란 무엇인가? 경제학에서 개인의 경제활동은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곧 소비자로서 그리고 생산자로서 하는 의사결정을 말한다. 개인은 소비에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을 더 많이 얻거나 생산 또는 사업을 통하여 더 많은 소득이나 이윤을 얻을 때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비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가계와 소비자들도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인 기업과 생산자들도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효용이나 만족 또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과 방법은 비그리스도인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 가계와 소비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가운데 자신의 효용과 만족을 극대화하며, 그리스도인 기업과 생산자 역시 그러한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하고 극대화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어떻게 극대화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극대화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가계를 돌보고 관리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가계가 더 큰 하나님의 가계에 속해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산과 소득과 자원을 그의 뜻에 따라 책임 있게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효용 극대화는 단순히 자신의 물질적 만족을 최대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계를 올바르게 관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데서 얻는 만족까지 포함한다.

청지기의 직분

휴 웰첼(Hugh Whelchel)은 그의 글 「성경적 청지기직의 네 가지 원리」(“Four Principles of Biblical Stewardship”)에서 다음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첫째, 소유권의 원리, 둘째, 책임의 원리, 셋째, 책무성의 원리, 넷째, 보상의 원리이다.[1]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유 가운데 작은 부분을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것임을 인정할 때 웰첼의 네 가지 원리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가계라는 작은 단위를 청지기로서 돌보고 관리하는 출발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창 2:15).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신의 동산을 맡기시고 그것을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 또는 관리자의 역할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 23-24절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토지나 집이나 재산 또는 돈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계를 잘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 주는 말씀과,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 또는 이 땅의 거류민으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모세는 신명기 10장 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라고 말한다. 시편 24편 1–2절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에녹(창 5:22), 노아(창 6:13), 아브라함(창 12:1–3), 모세(출 3:4 이하),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세속적인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과 자신에게 맡겨진 위탁된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가계를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 또는 관리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모세는 신명기 8장 17–1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키며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재물을 얻고 그것을 증가시킬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소유로 인정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맡아 관리하고 사용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하는 청지기이다.

다윗도 역대상 29장 14절에서 하나님께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조차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소유한 돈과 재산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유하고 사용하도록 허락하시고 맡겨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탁된 소유권과 청지기직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의 가계 관리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2–4절에서 영리한 청지기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영리한(그러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들었던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영리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그를 칭찬하였다(눅 16:8). 그러나 그의 부정직함이나 불의함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청지기가 영리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부정직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는 세상의 관리자보다 더욱 영리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0–12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충성된”이라는 형용사의 말은 ‘피스토스’(πιστός, pistos)에서 온 것이며, “맡기겠느냐”라는 동사의 말은 ‘피스튜오’(πιστεύω, pisteuō)에서 온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재산 또는 가계를 관리하는 우리는 신실하고 충성된(πιστός, pistos)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주실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함과 충성됨(πιστός, pistos)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권은 진정한 의미에서 궁극적인 소유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위탁된 소유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유는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참된 소유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서로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이 그 달란트를 자신들에게 소유물로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자신의 재산인 달란트를 그들에게 맡기고 여행하는 동안 그것을 관리하게 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4절). 그러나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은—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암시한다—종들에게 맡겼던 달란트를 모두 거두어 가지 않고, 처음에 맡겼던 달란트와 그것을 통하여 얻은 이익을 그들이 가지도록 하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28–29절에서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종에게 주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주인의 소유였으며 종들에게 관리를 위하여 맡겨졌던 달란트가 결산 후에는 충성된 종들이 가지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달란트 비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청지기직과 장차 주인이 돌아와 결산할 때 충성된 청지기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함께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영적 은사를 주시고(롬 12:6–8; 고전 12–13장; 엡 4:11; 벧전 4:11), 그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더욱 효과적이고 지혜롭게 관리하게 하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적 은사의 참된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이 재물이든, 토지이든, 영적 은사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이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가계 경제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과 자원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재물과 토지, 시간과 노동, 재능과 영적 은사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며, 우리의 소유권은 궁극적인 소유권이 아니라 위탁된 소유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의사결정의 목적은 단순히 자신의 효용이나 만족을 극대화하거나 더 많은 재산과 이윤을 얻는 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신의 가계를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자신의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 많든 적든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자랑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도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청지기의 비유들이 보여 주듯이,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맡긴 것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언젠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에 대하여 결산하실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계 경제란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것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하는 청지기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자신의 가계의 참된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각 개인이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자신은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소득과 재산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소유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가계의 경제를 운영하는 목적은 단순히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이 소비하며 재산을 증가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그의 뜻에 따라 지혜롭고 책임 있게 관리하는 데 있어야 한다.

첫째, 자신의 능력과 재산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사용하여 소득을 얻고 재산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신 8:17–18). 따라서 경제적인 성공을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소득의 범위 안에서 지혜롭게 소비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가계의 경제에는 수입뿐만 아니라 소비, 저축, 투자와 같은 여러 가지 의사결정이 포함된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하고, 충동적인 소비와 지나친 사치를 피하며, 현재의 필요와 미래의 필요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저축과 투자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산을 보존하고 증가시키며 장래의 필요에 대비하기 위한 책임 있는 관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셋째, 지나친 부채를 경계하고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맞게 살아야 한다. 부채는 주택 구입이나 교육, 사업과 같이 필요한 목적을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부채는 개인과 가계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따라서 돈을 빌릴 때에는 현재의 필요뿐만 아니라 앞으로 갚을 능력까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며, 빌린 것은 성실하게 갚아야 한다.

넷째, 가계의 경제적 목표를 자신의 만족에만 두어서는 안 된다. 경제학적으로 개인은 자신의 효용과 만족을 극대화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을 사고, 얼마나 소비하고, 어디에 투자하며,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만족을 주는가?”뿐만 아니라 “이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해야 한다.

다섯째,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를 다른 사람의 필요와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는 자신의 가계만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더 많이 맡겨 주셨다면 가족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과 믿음의 공동체를 돌아보고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말한 평균의 원리처럼, 우리의 풍요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는 데 사용될 때 재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여섯째, 돈을 삶의 목적이나 주인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재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가족을 돌보며 다른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중요한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마 6:24), 그리스도인의 가계에서는 재물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하여 결산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청지기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주인에게 맡은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란 단순히 재산을 많이 축적한 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많이 벌었느냐 적게 벌었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관리하였느냐가 더 중요하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소득을 얻고, 필요한 것을 지혜롭게 소비하며, 미래를 위하여 저축하고 투자하고, 지나친 부채를 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 이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에서 하나님을 가계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1] Hugh Whelchel, “Four Principles of Biblical Stewardship,” Institute for Faith, Work & Economics (November 26,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