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22, 2026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하나님의 가계

이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 누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해 있었는가? 창세기 1 27절은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사람은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 ‘남자자카르’(זָכָר, zakar), ‘여자네케바’(נְקֵבָה, neqebah)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자신의 동산에 두신 남자 아담’(אָדָם, adam)과 여자 하와(חַוָּה, awwah)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두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다스리심 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였을 때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최초의 하나님의 가계는 깨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는 한 민족이나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보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개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에녹은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였으며( 5:22, 24),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다( 5:24). 따라서 더 이상 하나님의 가계가 존재하는 물리적인 장소는 없었지만, 에녹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노아도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였으며( 6:9),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노아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도 하나님의 가계에 속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이다. 곧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복을 주시며 다스리시는 경제적·정치적 통치 활동이다.

그 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가계에 속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약속하신 말씀과 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때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창세기 46 27절에 따르면 애굽으로 간 야곱의 가족은 모두 70명이었으며, 사도행전 7 14절에서는 7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75명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Septuagint)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에 정착하였을 때 하나님의 가계는 약 70명으로 확장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까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5:13; 7:6), 다른 본문에서는 43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12:40–41; 3:1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계수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때 이십 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이스라엘 남자의 수는 603,550명이었다( 1:1–46). 따라서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을 모두 포함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인구는 약 200만에서 3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가계는 더 이상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아브라함 한 사람과 그의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야곱의 가족 약 70명으로 확장되었던 하나님의 가계는 출애굽 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한 민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이방인들까지 자신의 가계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가계를 더욱 크게 확장하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 22절에서 모든 민족을 향하여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부르신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땅끝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이사야 52 7절은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소식과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 비록 이사야 시대에는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소식이 더 넓은 세계로 전파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사야 54 2–3절에서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신다. 장막을 넓히고 줄을 길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방으로 확장될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장막, 곧 가계를 모든 방향으로 넓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5 1절에서도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며,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그 초청에 응하여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계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것은 더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을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민족에게 전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계의 진정한 확장은 건물이나 재산의 증가가 아니라 생명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데 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때가 이르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의 참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한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 24절에서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 5–6절에서 제자들에게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것은 복음 전도의 범위가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순서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로, 그다음에는 사마리아로, 그리고 마침내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 8절에서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이방 세계,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려야 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어디에서나 역사하실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모든 민족과 땅끝까지 확장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도 모든 민족을 향하여 확장되어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 19–20절에서 제자들에게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복음은 이스라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했다.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었고( 2–7), 그 후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었으며( 8), 마침내 더 먼 지역과 이방 세계로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12–28). 이처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 전도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복음이 새로운 지역과 민족에게 전파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가계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을 향하여 계속 확장되어 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을 박해하던 사울을 부르셨다. 왜 그를 부르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9 15–16절에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하여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다( 22:21; 26:17 참조).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인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와 고난을 받는 바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로마로 보내지기를 원했는가( 25:10–12)?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 중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부터 이미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5:24, 28). 스페인은 당시 바울이 바라보던 서방의 매우 먼 지역이었다.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까지도 복음 전도를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복음을 더 먼 지역, 곧 땅끝까지 전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28:16). 바울은 사도행전 28 28절에서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자신이 세낸 집에 만 이 년 동안 머물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 28:30–31).

바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복음 전도의 여정도 이제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이자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남긴 마지막 권면과도 같은 서신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 2절에서 디모데에게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면한다. 복음 전도는 우리에게 상황이 좋고 유리할 때에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상황이 좋든지 나쁘든지, 때가 우리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울 자신이 박해와 체포와 투옥 가운데에서도 복음 전도를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하나님의 가계는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스데반과 빌립을 비롯하여 이름이 알려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확장되어 갔다. 신약 외경과 여러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으며,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여러 지역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몇몇 유명한 사도들의 사역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고 때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함으로써 복음은 더 많은 지역과 민족에게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가계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갔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로마 정부의 박해와 감시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로마의 카타콤(catacomb)은 주로 지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 죽은 신자들을 장사하고 그들을 추모하였다. 박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을 피난처로 이용하거나 그곳에 모였다는 전승도 있지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카타콤에서 집단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카타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찬송가나 완성된 형태의 신약성경 정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의 소망을 고백하였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언하는 삶은 세상의 재산이나 지위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

로마의 여러 카타콤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다양한 벽화와 상징들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식탁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장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신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을 모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묘사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그림과 상징들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죽음과 박해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이 세상의 삶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을 더욱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과 증언을 통하여 복음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계속 전파되었으며, 하나님의 가계도 더욱 넓게 확장되어 갔다. 

2세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은 체포되어 총독 앞에 끌려가 순교를 앞두게 되었다.[1] 그러나 총독은 폴리캅이 나이가 많은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나이를 생각하시오.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고 회개하여무신론자들을 없애 버리라고 말하시오.”

폴리캅은 잠시 침묵하였다. 총독은 다시 그에게 강요하였다. “맹세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소. 그리스도를 저주하시오!”

그러자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지만,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은 다시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시오!”라고 강요하였다.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한다면 분명히 들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고 싶다면, 날을 정하여 들으십시오.”

총독이 말했다. “나에게는 맹수들이 있소. 당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맹수들에게 던져 버리겠소.”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그들을 부르십시오.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에서 더 나쁜 것으로 돌이키는 회개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에서 의로 돌이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총독은 다시 말했다. “당신이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회개하지 않을 경우 불로 태워 버리겠소.”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당신은 잠시 타다가 곧 꺼지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장차 올 심판에서 악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폴리캅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이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부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86년 동안 자신을 지켜 주셨으며 자신을 구원하신 왕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죽음의 위협보다 강하였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쓴 소설 『침묵』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가톨릭 신부 프란시스코 가르페(Francisco Garrpe)의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온다.[2] 일본 관리들은 가르페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가르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일본 관리들은 가르페에게 배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을 바다에서 죽게 한다. 그들은 작은 배에 실려 바다로 끌려가 물속에 던져졌다. 가르페는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향하여 헤엄쳐 갔지만, 결국 그 자신도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가르페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대신, 죽어 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잃었다. 물론 가르페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침묵』에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문학적으로 보여 준다.

19세기 초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거의 6년 동안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였지만 한 사람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거나 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셨으므로 반드시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마침내 약 6년의 선교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첫 회심자가 나타났다. 저드슨은 그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저드슨이 오랜 세월 인내하며 복음을 전한 끝에 얻은 첫 열매였다. 처음에는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이후 복음은 그 지역에서 계속 확산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저드슨의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 그 결과를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책임은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이며,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 6절에서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한다. 복음 전도의 열매가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크게 나타날 것인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맡겨진 자리에서 신실하게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

에릭 리델(Eric Liddell, 1902–1945)이라는 스코틀랜드 육상선수가 있었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였으며 특히 100미터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100미터 예선 경기가 주일에 열리게 되자 그는 그 경기에 출전하기를 거부하였다. 영국 올림픽 관계자들과 유력 인사들이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경기에 출전하도록 그를 설득하였지만, 그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올림픽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다. 그러나 에릭 리델은 자신의 신앙과 삶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가장 유력했던 종목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였다. 그는 대신 400미터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에릭 리델은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 자신도 믿음의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갔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세운 삶의 원칙에 따라 살고자 하였다. 그의 선교사 생활은 때로 고통스럽고 가난하였지만, 하나님께 충실한 자신의 삶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생애는 『The Flying Scotsman』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소개되었으며, 후에는 그의 이야기가 영화 『Chariots of Fire』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 제목에 사용된불수레의 근원적인 성서적 근거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열왕기하 2 11절은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고 기록한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을 마친 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에릭 리델은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좋아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다. 그에게 운동선수로서의 명예와 성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에릭 리델보다 약 60여 년 후, 영국의 세단뛰기 선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966–)도 비슷한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목회자의 아들로 자란 그는 당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육상 경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일에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영국 대표 선발전의 세단뛰기 경기가 주일에 열리자 출전을 거부하였으며, 199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도 세단뛰기 예선이 주일에 열렸기 때문에 출전을 포기하였다. 그에게 당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세계적인 육상대회에 출전하여 명예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성경을 다시 연구하면서 주일에 운동경기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1993년부터는 주일에도 경기에 출전하였다. 이후 그는 세계적인 세단뛰기 선수로 성장하여 세계기록을 세우고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의 초기 신앙적 결단은 약 60여 년 전 에릭 리델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주일 경기를 포기했던 모습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교사의 가장 좋은 모범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파송된 선교사로서 예수님은 먼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이 땅의 옷, 곧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14)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주시는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목회자이자 성경학자인 존 스토트(John Stott)는 『Our Guilty Silence(우리의 죄된 침묵)』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할 기회가 있음에도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복음 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속되어 온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와 아브라함의 가정을 거쳐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으로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28:19)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명을 따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후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때로는 자신의 재산과 명예와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는 세대와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넘어 계속 확장되어 왔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에도 끝나지 않았다.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이 사명을 위탁받았다.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더 큰 예배당을 짓고,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며, 교회의 외형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한다는 것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건물의 크기나 재정의 규모만으로 평가될 수 없으며, 얼마나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세워 가고 있는가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을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바울이나 저드슨(Judson)처럼 먼 나라로 가는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사용하여 복음 전도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기회를 충실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이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책임은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이며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 역시 자신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복음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중요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교회를 확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고 있는가? 우리가 가진 건물과 재정과 인력과 모든 자원은 교회 자체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확장은 어떤 특정한 대형 교회나 유명한 부흥사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이름 없이 수고하며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도들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계를 확장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사용하여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데 반드시 큰 능력이나 많은 재산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직접 전하고, 어떤 사람은 선교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후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나타낼 수 있다. 각 사람에게 맡겨진 역할과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바울이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처럼(고전 3:6),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복음의 씨를 충실하게 심고 물을 주는 것이다.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복음 전도의 결과가 우리의 능력이나 재산, 교회의 규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수고와 충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다.

우리가 각자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처럼 복음 전도는 단순히 교회의 규모를 확장하거나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하는 중요한 길이다.



[1] 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3).

[2] Shusaku Endo, Silence (Picador Modern Classics, 2016).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란 무엇인가?

 

실제 비지니스 세계의 윤리적 문제

경제학에서 발생하는 여러 윤리적 문제 가운데에는 역선택(adverse selection)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있다. 역선택은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상황에서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정보를 정직하게 공개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문제와 관련될 수 있다. 반면 도덕적 해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발생하는 위험이나 비용의 전부를 자신이 부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기관이 그 일부를 부담하게 될 때 지나치게 위험하거나 무책임한 행동을 하게 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경우에 따라 자기 절제의 부족이나 지나친 사적 이익의 추구와 결합되어 경제윤리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다.

2007–2009년의 미국의 금융위기는 주택시장의 거품 붕괴뿐만 아니라 금융기관들의 과도한 위험 추구와 잘못된 동기 구조, 그리고 금융시장에서 나타난 여러 비윤리적 행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상업은행을 비롯한 여러 금융기관들은 주택담보대출과 관련된 주택저당증건(mortgage-backed securities, MBS), 부채담보부증건(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s, CDOs), 주택저당채권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mortgage obligations, CMOs) 등의 복잡한 금융상품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였다.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투자에서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고, 금융기관의 경영진과 직원들은 높은 보너스와 주식 관련 보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투자에 따른 위험의 상당 부분은 금융기관의 고객, 투자자, 주주 그리고 궁극적으로 금융시스템 전체에 전가될 수 있었다.

2007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주택시장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2008년 금융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일부 금융기관들은 파산하였고, 다른 금융기관들도 파산의 위험에 직면하였다. 금융시스템의 붕괴와 심각한 경기침체를 막기 위하여 미국 정부는 금융기관들에 대규모 구제 및 자본지원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부 지원에는 납세자의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신용의 흐름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부 금융기관에서 경영진과 직원들에게 거액의 보너스가 지급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일어났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받으면서도 경영진과 직원들이 높은 보상을 받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정당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자신들이 취한 위험으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그 비용의 일부를 정부와 납세자에게 부담시키면서, 성공했을 때의 이익은 자신들의 높은 보상으로 가져가는 행태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잘 보여 준다. 이것은 경제활동이 단순히 이익과 손실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정직, 절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직과 같은 경제윤리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의 특징

성경, 특히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모든 규제와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자신의 삶이 비윤리적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방종(self-indulgence)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윤리적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책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이다.

경제윤리 또는 기업윤리의 관점에서 무엇이 윤리적인 행동이며 무엇이 비윤리적인 행동인가? 가난하거나 부유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사람이 윤리적인지 비윤리적인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여전히 가난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도 종업원들을 착취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게으르고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한 결과 부유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가난 그 자체가 반드시 선한 것도 아니며, 부유함 그 자체가 반드시 악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떠한 방법으로 소득과 부를 얻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O. C. 페럴(O. C. Ferrell), J. 프레드리치(J. Fraedrich), L. 페럴(L. Ferrell)은 윤리적 문제를 판단하기 위한 기본적인 가치로 성실성(integrity), 정직성(honesty), 그리고 공정성(fairness)을 제시한다.[1] 이러한 가치들은 경제활동과 기업 활동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의 가치와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돈을 벌고, 재산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다른 사람들과 경제적 관계를 맺을 때 어떠한 성경적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가?

1.    정직(Honesty)

믿음의 사람들은 경제활동이나 사업을 할 때 고객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 3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정직과 공정은 단순한 개인적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경제활동의 중요한 윤리적 원칙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25 1316절에서도 경제활동에서의 정직과 공정을 강조하셨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서로 다른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거래의 기준을 조작하여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을 금하셨다.

잠언 13 11절도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라고 말한다. 부정직한 방법으로 쉽게 얻은 재물보다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을 통하여 조금씩 축적한 재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이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오래된 격언도 이러한 경제윤리의 중요성을 잘 표현한다. 사업에서 정직은 단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신뢰를 형성하는 중요한 자산이 된다. 고객들이 어떤 사업가가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그 사람과 계속 거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그를 소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직과 공정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가치인 동시에 지속적인 경제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2.    성실성(Integrity)

경제윤리는 또한 굽은 마음이나 부정직함이 아니라 성실성(integrity)을 요구한다. 잠언 11 3절은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성실성은 정직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인도하는 도덕적 기준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마음과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의 패역과 부정직은 결국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잠언 19 1절도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부정직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실성은 정직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패역함이나 굽은 행동은 부정직과 연결된다.

경제윤리에서 성실성이란 단순히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다른 사람이 보고 있든 보지 않든 동일한 도덕적 기준을 지키며,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원칙을 쉽게 바꾸지 않는 올곧은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경제활동에서도 이러한 성실성을 유지해야 하며,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3.    공정성 또는 공평성(Fairness or Impartiality)

공정성(fairness) 또는 공평성(impartiality)은 정직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모세는 신명기 10 17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며 뇌물에 의하여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으신다. 따라서 공정성과 공평성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윤리적 원칙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행동한다면 뇌물을 받거나 주지 않으며, 특정한 사람에게 부당한 특혜를 베풀지도 않는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사회적 지위,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거래 상대방이나 종업원을 차별해서도 안 된다. 경제활동에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이해관계자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경제윤리의 중요한 요소이다.

바울도 로마서 2 11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공평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에서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공정성과 공평성은 단순히 사업상의 좋은 정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경제윤리의 원칙이다..

4.    겸손(Humility)

건전한 기업윤리와 경제윤리를 위해서는 교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사업주나 기업가는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내세우기보다 종업원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야 한다. 고용주가 종업원들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대할 때 종업원들도 고용주를 신뢰하고 존중하게 되며, 자신의 일을 더욱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겸손은 개인의 신앙적 덕목일 뿐만 아니라 기업 안에서 상호 존중과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경제윤리의 원칙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러한 겸손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삶의 자세로 가르친다. 야고보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권면하며( 4:10), 베드로도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한다(벧전 5:5). 예수님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14:11). 이 말씀들은 자신의 지위나 능력을 내세워 스스로를 높이려는 교만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겸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삶의 자세임을 보여 준다.

예수님 자신은 이러한 겸손의 가장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으며,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다. 바울은 빌립보서 2 5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겸손을 설명하면서, 그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다( 2:7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2:9).

예수님의 삶은 참된 겸손이 단순히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앞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경제활동과 기업 활동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사업주와 기업가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과 성공을 자랑하기보다 종업원과 고객, 거래 상대방을 존중하고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종업원 역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동료들을 존중해야 한다. 이처럼 겸손은 기업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경제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게 하는 중요한 경제윤리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5.    검소함(Modesty)

경제윤리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이 아니라 검소한 삶을 요구한다. 잠언 15 16절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한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사치스럽게 살려는 욕망이 삶을 지배한다면 여러 가지 경제적·윤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기업이나 경제활동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소득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면 빚을 지게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얻으려다가 부정직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의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소득과 형편에 맞게 생활하고 지나친 소비욕을 절제하는 것은 개인의 재정관리뿐만 아니라 경제윤리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 1617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권면한다. 여기에서 육체의 욕망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욕망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검소함은 단순히 돈을 적게 쓰거나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하고,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에 지배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신의 만족과 과시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검소함과 절제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

6.    탐욕의 절제(Not Too Much Greed)

어느 정도 더 나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욕구가 지나쳐 탐욕(greed)이 되면 사람을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 잠언 28 25절은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라고 말한다. 탐욕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

전도서 5 10절도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은 쉽게 만족되지 않는다. 더 많은 돈과 재산을 얻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면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일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다. 돈을 버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의 더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할 수도 있다.

탐욕은 또한 사람을 뇌물이나 부당한 이익의 유혹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잠언 15 27절은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라고 말한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이 정직과 공정성보다 앞서게 되면 사람은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거나 뇌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은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기 쉽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2 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재물의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의 삶과 가치를 판단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려는 건전한 욕구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돈과 재물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탐욕은 경계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재물을 소유하되 재물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7.    근면(Diligence)

경제윤리는 게으름이 아니라 근면을 요구한다. 잠언 12 24절은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잠언 13 4절은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들은 단순히 부지런한 사람이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근면한 태도가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임을 보여 준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1 1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권면한다. 여기에서 “더욱 힘써”라는 표현은 신앙생활에서도 적극적인 노력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근면은 경제생활에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도 필요한 중요한 자세이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가난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도 여러 가지 경제적·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가난할 수 있다. 그러나 일할 능력과 기회가 있음에도 게으름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태도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수행해야 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이러한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한 달란트를 위탁받은 종은 주인이 맡긴 재산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땅에 감추어 두었다. 주인은 돌아와서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적어도 자신의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25:2627). 이 비유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에 대한 충성과 책임에 있지만, 경제윤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준다. 자신에게 위탁된 재산이나 자원을 아무런 노력 없이 방치하는 것은 책임 있는 청지기의 태도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시간, 재능, 재산과 기회를 게으르게 방치하지 않고 근면하고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한다.

8.    신뢰성 또는 신실함(Trustworthiness or Faithfulness)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신뢰할 없고 신실하지 못한 태도가 아니라 신뢰성과 신실함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 10절에서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것에도 불의하니라 말씀하셨다. 말씀은 신실함이 재산이나 책임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작은 일과 적은 재산을 맡았을 신실한 사람은 일과 많은 재산을 맡았을 때에도 신실할 있다. 따라서 경제생활에서의 신뢰성과 신실함은 일상적인 작은 거래와 작은 책임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4 2절에서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맡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위탁받아 관리하는 청지기를 의미한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 가운데 하나는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주인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관리하여 주인의 신뢰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재산과 자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재능, 능력과 기회도 하나님께 위탁받은 청지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위탁받은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자신의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뢰할 있고 신실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뢰성과 신실함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기업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청지기의 책임이며,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9.    너그러움(Generosity)

마지못해 베푸는 태도가 아니라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너그러움(generosity)도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 필요한 중요한 성품이다. 너그러운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과 자원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도 생각한다.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은 기업 활동에서도 종업원과 고객, 거래 상대방과 이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고 그들의 형편과 유익을 함께 고려하도록 한다. 따라서 너그러움은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과 기업 활동에서 나타나야 할 중요한 윤리적 태도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 67절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는 행위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 베푸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나누는 것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너그러움은 단순히 많은 돈을 주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위탁된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은 것 가운데서 나눌 수 있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신의 형편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재물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자발적인 너그러움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한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예수님은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으며( 8:32), 또한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셨다( 8:36).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무런 윤리적 한계도 없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거나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6 1–2절에서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계속해서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분명한 윤리적 한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그 자유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에는 일정한 윤리적 한계가 있다. 우리의 행동이 그 한계 안에 있을 때에는 윤리적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면 비윤리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 12절에서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단순히내가 이것을 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만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가, 아니면 해를 끼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 내가 어떤 것의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 재산, 소비, 쾌락이나 다른 욕망이 나를 지배한다면, 비록 어떤 행동 자체가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유익한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에도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 23절에서 이 원리를 다시 강조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고린도전서 6 12절의유익함이라는 기준에 다른 사람을세우는 것이라는 기준이 더해진다.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 24절에서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제적 의사결정을 할 때에도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결정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도 함께 추구할 때 온전해진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JOY(조이)라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JOY Jesus, Others, You의 첫 글자를 딴 이름으로,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잘 보여 준다. 첫째는 예수님(Jesus), 둘째는 다른 사람들(Others),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You)이다. 이러한 순서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생각하고, 그다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그 뒤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가르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중심적인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책임 있는 자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사할 때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8 9절에서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8 13절에서는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한다. 바울에게는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할 자유가 있는가 하는 것보다 그 자유의 행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14 13절에서도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믿음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제한은 자유의 상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행동 전반에 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경제생활은 우리가 매일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사고팔 것인지, 어떻게 돈을 벌고 사용할 것인지, 종업원과 고객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자신의 경제적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행사할 것인지와 같은 결정에서도 자신의 이익과 권리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경제적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자유의 한계는 단순히이것이 합법적인가?” 또는내게 이것을 할 권리가 있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가?”,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가?”, 그리고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에 의해서도 결정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단순히 법을 지키거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삶의 원칙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적인 경제생활과 기업 활동에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공정하고 겸손해야 하고,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절제하며, 자신에게 위탁된 일과 재산을 근면하고 신실하게 관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기꺼이 나누는 너그러움도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기업인은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기업 활동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종업원과 고객, 거래 상대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웃으로 존중하며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자유 역시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제적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지,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는 말씀을 경제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경제활동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1] O. C. Ferrell, J. Fraedrich, L. Ferrell, Business Ethics: Ethical Decision Making and Cases, 12th ed. (Cengage Learning, 2019), 5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