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4, 2016

“은혜로 인한 구원” (에베소서 2:1-10)

“은혜로 인한 구원” (에베소서 2:1-10)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말씀합니다. 이 분이 큰 교회 전도사로 재임하던중 모처럼 기회를 얻어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천 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을 충실히 잘 전하기 위해서 열심히 설교준비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가지고 크리스찬의 경제윤리를 설교하고자 준비하는데 자꾸만 한 장로님의 얼굴이 그의 설교준비의 길을 막습니다.
그 장로님은 어떤 분인가 하면 자그마치 빌딩 아홉 채를 소유하고 땅도 상당하여 당시 개인소득세 납세실적이 한국전체에서 상당히 상위 권 안에 들어있던 분입니다.
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윤리를 말씀 그대로 설교하고 싶었지만 그 장로님이 부담이 되어 결국 우회적인, 변죽을 울리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르기를, 그 장로님이 설교 내용의 속 뜻을 깨닫고 아홉 채 빌딩과 땅의 얼마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습니다.
설교를 마친 이 전도사님께 그 부자 장로님이 다가옵니다: “전도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아니 젊은 전도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그렇게 잘 하십니까?” 하면서 기쁜 낯으로 악수를 청합니다. 그러나, 기실 그가 “은혜 많이 받았다” 한 것은 전도사님을 통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의 일부를 나누어줄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보니, 그 장로님의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해석으로는, 재산을 그대로 갖고 있는다고 해서 크게 죄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전도사님의 설교가 그 분의 귀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이 없이 많은 재산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 은혜로 생각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삶 가운데 부담으로 생각되는 것에 관한 설교를 듣기를 원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가려운 귀를 그대로 두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시원하게 긁어주기를 원합니다.
전혀 언급이 없으면 그것을 갖고 사는 것이 계속 부담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에 관한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것이 죄가 아니요 허물이 아니라는 해석을 듣고자 함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는 것 같은데 야단치지 않으시면 계속 불안한 가운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에 관하여 말씀하시되 “얘야, 그건 잘한 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괜찮은 일이야.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해도 돼”라고 하시면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가책되는 부분에 대해서 설교를 듣기를 원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잘못을 지적받기 보다는 그가 잘못된 것 같다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괜찮다”는 해답을 구하기를 원하며 만일 목사님이 그렇게 해준다면 설교를 통해서 은혜받았다고 여기게 됩니다.

바울도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귀가 가렵다”고 하는 표현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자기 삶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람의 표현에도 있지요. “다른 사람들이 내 욕을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질간질하지?!”
그러면 근본적으로 이 잘못된 부분을 돌여내야 할 터인데, 그러자니 너무 아깝고 잃어버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해서, 그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해줄 설교자를 구하되, 그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습니다. 즉, 직언해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줄 사람 두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마태 19:16-22; 마가 10:17-21). 그 사람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여전히 한 가지 부담이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재산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늘 부담꺼리가 되던 중에 영생(永生)에 관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는 예수란 선생을 만나서 그 분의 변호를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듣기를 원한 대답은, “당신이 재산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권세와 부귀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당신은 지금 이 모양 그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직설적이십니다. 그가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는 자신의 부담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라하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이 부자 청년 관원은 어떠해습니까?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 10:22)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나의 허물을 고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설교자가 그래도 좋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한 뜻을 변경하여 이브를 미혹하는 옛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구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만 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회개하지않은-뉘우치고 고치지 않은-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이요 기억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2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1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그들에게 주사 그들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알기를 원하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알기를 원하고, 그들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는 이 하나님은 또 어떤 분이신가 하면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어 없었던 우리를 살리신 분입니다.
너희들의 죄와 허물은 그대로 갖고있어도 괜찮다 하시면서 살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 보게 하시며, 이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게 하심으로 살리셨습니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기 전에 에베소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하면 이 세상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믿지않는 자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에게 공중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 사단은 그로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을 타락시킴으로 잠간동안 하나님에 대항하여 승리한 것 같은 착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착각을 더하여주시듯이 그로 땅에 권세까지 허용하셨습니다.
해서, 그가 이 땅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인간의 타락에 부채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단에 대한 징계를 쌓아가시는 것이며, 사단의 자녀들로 발견되는 인간은 물리치시고, 이러한 미혹과 시련 가운데서도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우리 인간이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구원계획이십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사단의 권세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이 가운데 순종치않는 자는 하나님께 순종치않아 타락한 천사인 사단에 속한 불순종의 아들들입니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뿐아니라 우리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는 하나 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과 마음의 원함에 따라 행하였기에 이방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마음의 원함대로 살 때 진노의 자녀로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요한은 요한1서 2장 15-16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요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좇지않는 삶이 우리의 원함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할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4-5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사정을 안타까와 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무엇이든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 큰 사랑을 인하여”(διὰ τὴν πολλὴν ἀγάπην)라 함은 원뜻에 가까운 표현은 “많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신 까닭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되 한 번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많이, 늘 사랑하시기에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오래참으심으로 기다리시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 마련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구원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하실 때, 1장 20절에 보는 바 대로, 죽은지 사흘이 지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했는데,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실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십니다.

“은혜로(χάριτι)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는데, “은혜로”라고 표현하든 “은혜를 인하여”라고 표현하든 같은 뜻입니다.
헬라어 문법에서는 “instrumental dative"(수단적 보격)라고 하는데, ”by means of"(...을 매체로 하여)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매체로 하여(=수단으로 하여)”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이 “은혜” (χάρις)는 햇빛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외됨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내리 비췹니다.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모든 사람이 악인(惡人)이었습니다. 그 모든 악한 사람들, 아담의 타락이후에 어둠의 자식들인 우리에게 따사한 은혜의 빛을 내리쪼이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리셨습니다. 그것은한 사람도 예외됨이 없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믿음의 통로로 들어올 때 그 통로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통로로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
과거에 여러차례 거절하고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 앞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믿음의 통로를 계속 마련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 끝날까지 이를 거부한 사람은 마침내 그가 가는 길이 끊겨있음을 발견하며 그 일생의 길 다음에 구렁(pit)이 놓여있어 영생이 있는 천국으로 건널 수 없으며 결국 이 구렁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일생의 어느 때에 그리스도라고 하는 통로에 들어선 사람은 그 믿음의 긴 통로가 끝날 때쯤에 햇빛보다도 더 밝은 천국이 그 앞에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6-7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5절 괄호안에  있는 “은혜로 인한 구원”에 대한 언급으로 잠시 끊긴 것같은,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만 하늘에 올리우셔서 오른 편에 앉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늘로 올리우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십니다.
하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 모든 인간을 살리시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살리시되 한 세대에 특정한 사람만 살리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서 모든 인간들에게 풍성한 빛의 은혜를 밝히셔서, 모든 인간들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를 인하여”는 5절에서 설명한 대로 “은혜를 수단으로 하여”--곧, 하나님의 은혜의 햇빛이 각 사람에게 비취매“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διὰ πίστεως)라고 했는데 이는 영어성경에서 “through faith"라고 했듯이 ”믿음을 통하여“입니다.  “믿음의 통로를 통하여”라고 제가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통로에 들어가는 일조차 우리의 선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세상의 기준으로 행위가 선한 사람 앞에만 믿음의 통로가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통로가 놓여있고, 믿음의 통로에 들어서는 사람이 들어서지 않는 사람보다 행위가 선한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혜를 인하여 믿음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통로를 들어서는 사람이 들어서지 않는 사람보다 행위가 더 선한 사람은 아닌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더욱 부르짖어 간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하여 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곧, 은혜받을 만한 마음을 갖고있는 사람입니다.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인하여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심”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셨던 선한 일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처음 사람 아담과 이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일입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진 인간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함을 얻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곧,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다름아닌 새로운 피조물로서 과거 불순종의 자식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께서 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Sunday, January 17, 2016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 (에베소서 1:15-23)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 (에베소서 1:15-23)
         
  1:15  이로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들고
     16  너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
컴퓨터에 관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은 컴퓨터 저장 용량과 계산법을 표시하는 단위로 비트(bit)와 바이트(byte)라는 용어를 듣게 됩니다. 비트(bit)는 컴퓨터 저장용량을 표시하는 최소단위로 ‘binary digit'란 말의 축소어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계산은 0에서 9까지의 숫자로 표시하는 십진법인데 컴퓨터의 저장은 0과 1 중의 선택인 이진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십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진법의 컴퓨터 저장원리를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컴퓨터 용량과 기억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로 바이트(byte)는 8 비트(bit)로 이루어지는데 한 bit의 선택이 두 가지 중에 하나이므로 순열(permutation)의 방식으로 28, 곧 256가지의 다른 표시중에 선택이 가능합니다. 보통은 한 바이트(byte)에 한 숫자 혹은 한 문자, 혹은 한 표시기호를 집어넣는 것이 편리하고 쉽지만, 내가 표시하고자 하는 것이 다양하여져서 256가지 표시방법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면 한 바이트(byte)로 모든 것을 표시하기가 불가능하여져서 두 바이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십진법과 이진법의  표시와 계산방법 중 어느 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그야, 당연히 이진법이 쉽겠지요.
십진법은 0에서 9까지 열 중에서 선택과 계산을 하는 것이요, 이진법은 0과 1 둘로 이루어진 계산이기 때문입니다.
십진법 중의 선택과 이진법 중의 선택에서도 당연히 이진법 중에서의 선택이 쉽습니다.
그러나 십진법에 익숙해있는 우리에게 이진법은 많은 경우에 십진법 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십진법의 수를 이진법의 수로 전환(轉換)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익숙해있는 십진법을 세상의 지혜와 총명이요, 세상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이진법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얻기 위한 것이요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십진법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을 0으로 표시하기로 하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을 9로 표시하면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게 표시됩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있게 “예, 저의 믿음은 9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지 못합니다. “저의 믿음은 아마 5나 6쯤 될껄요,” “저의 믿음은 아직 2나 3에 불과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전적으로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면 0,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삶이면 9라고 표시하십시오’ 라고 질문하면 “예, 저의 삶은 9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예, 저의 삶은 아마 3이나 4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대답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익숙한 것이 십진법의 질문이요 대답이기 때문이고, 회색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취향상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극(極)은 피하고 대충 중간노선을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산과 선택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산과 선택은 이진법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중에 하나입니다.

먼저 십진법의 질문을 이진법으로 바꾸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0으로 표시하고 믿으면 1로 표시하십시요’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자신있게 믿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은 십진법에 익숙해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질문도, ‘세상의 정과 욕심을 추구하는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십니까?’로 바뀌고 우리의 대답도 0과 1 중에 결정을 해야 할며, 우리의 삶 자체도 둘 중에 하나의 선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두 가지중에 한 가지입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 ‘구원이냐? 멸망이냐?’지,
‘너는 세상에서 열 중에 4정도만 나를 믿었으니 네 몸과 영혼의 4/10만 구원받고, 나머지 6/10은 멸망받아라’ 하시며, 몸중에 가슴 위는 천국에 머물게 하시고, 가슴 밑은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것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재물(財物)로 대표되는 세상 것을 선택하든지 둘 중에 결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15-16절: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이를 인하여” (διὰ τούτο)는 “그러므로” 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 무엇이며, 하나님 뜻의 비밀이 무엇이며, 경륜--구원계획을 알게 하시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를 하나님의 기업--자녀로 삼으시고, 자녀삼으신 자에게는 그 보증으로 (증거로) 성령을 주셨다고” 설명했는데, 나에게 들리는 바로는 너희도 그에 합당한 믿음을 갖고있고 성도들 간에 사랑을 나눈다고 하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할 것이요 또한 하나님께 계속 간구함으로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17-1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8-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의 간구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주사” 하나님 뜻의 비밀--곧 경륜 (인간구원계획)을 알게 하셨는데, 17-19절에서 두 가지를 더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지혜 (σοφία)와 계시 (ἀποκάλυψις)의 정신 (πνεύμα)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ἐπιγινώσκω) 원하십니다
지혜는 세상 지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인간들에게 밝히시고자 혹은 보이시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정신으로 번역한 프뉴마((πνεύμα)는 “영, 성령”입니다.
즉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사”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다(ἐπιγινώσκω)는 뜻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12절에서 바울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마귀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있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알게 하시고 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 (καρδία)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 기업의 영광의 풍성,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1-23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시고 이어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눈도 “마음의 눈”입니다. 이 눈이 탐욕스러우면, 우리의 몸도 탐욕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 마음의 눈이 어둡고 병들어 있으면 우리의 육신의 몸도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의 육신도 영도 밝음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센쉬(Shen-hsiu)라고 하는 중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한 편의 시를 벽에 써놓았습니다:
           몸은 보리나무요, 마음은 그 앞에 서있는 밝은 거울과 같도다. 
            항상 거울을 깨끗이 닦아서 먼지가 그 위에 붙지 않게 하라.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곧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깨끗이하는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본 그의 선생 희냉(Hui-neng)이 또 한 편의 시를 그 옆에 씁니다:
           예전부터 보리나무도 없었고 밝은 거울도 서있지 않았노라.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어디에 먼지가 붙으리요?

제자 센쉬(Shen-hsiu)는 정결한 마음을 갖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승 희냉(Hui-neng)은 ‘무심(無心)’이 부처의 길이라고 대답합니다.
선과 악을 생각하는 마음 자체를 없게 하는 것이 부처가 되게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악(惡)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아래이요, 선(善)을 생각하는 것이 그 다음이요, 제일 위에 것-곧 부처가 된 사람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일생을 좌선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고 이리할 때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결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생각하는 선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입니다.
곧, 이 눈은 영의 눈인데 성령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비로소 뜨임을 받습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고자 구름 떼같이 몰려오지만, 엘리사는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눈---영의 눈을 통해 그를 옹위하는 하나님의 능력, 천군천사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눈은 센쉬가 말한 대로 마음을 깨끗케 하는 뼈를 깍는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우리 가운데 영접하며 그 분께 나의 중심을 드리는 결단의 순간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아서 더욱 더 믿음을 견고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20-22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바울은 20-22절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신 그 능력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시는 능력 (δύναμις)은 어떤 것인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그리스도를 사흘만에 부활시키신 능력이요, 그를 하늘로 올리우시고 그의 우편에 앉게하신 능력이요, 그에게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신 능력이요, 그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되게 하신 능력입니다.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연합입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에 지체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그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층만 (πλήρωμα)은 ‘차고 넘칠 정도의 상태’를 말합니다.
옛날 시골에 가면 정겨운 아주머니가 큰 밥그릇에 밥을 퍼주는데 밥그릇 위로 쌓이게 퍼주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는데, 타락한 우리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로 다시 부르심은 우리가 잃었던 “충만케 됨”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3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함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도 나타나사 그들을 부활시키시며 그들로 하늘 위로 올리우시며 그들의 이름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는 축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서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의 눈을 밝게 하여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역사와 능력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신 교회에 속한 백성에 합당한 일들을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