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8, 2016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에베소서 3:14-21)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에베소서 3:14-21)

           
  3: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1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기독교를 소망의 종교 혹은 기쁨의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기쁨이 넘쳐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8절에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했습니다. 이를 “hope against hope"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소망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예상을 초월(超越)하시며 모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 할레스비(O. Hallesby)는 그의 기도(Prayer)라고 하는 책에서 교회에 다니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절박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어왔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유익은 무엇이며 주님을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이 주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 예를 여러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3-15절에서 아벨을 죽인 가인이 자신이 죽임당할 것이 두려워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던 가인까지도 보호하시겠다고 응답하십니다.

요나서 1장 14-16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 선원들이 요나 까닭에 대풍이 그들에게 임한 줄 알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며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요나서 3장 4-10절에서 악독이 가득 넘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할 때, 니느웨 백성은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를 입고 금식을 선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실 뿐아니라 그들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기록된 대로, 일생동안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아뢸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강도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영원한 행복이 있는 낙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아직 교회에 나오기 전, 아직 믿음이 없을 때 절박한 일로 하나님께 간구를 드린 경험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와 그의 고유의 권한 가운데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혹”(perhaps)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확실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드려지는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에서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23-2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2
1장 15절이하에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시며, 마음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과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며 장차 그들을 살리실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1:15-19)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능력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또 몇 가지로 간구드립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 가운데 거하시며,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그들 믿음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며,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이 그들 가운데 더욱더 충만케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14-15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나 해와 달과 별들, 공중의 새들과, 지상의 사람들, 짐승들과 나무들과 풀들과, 바다속의 물고기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며 해서 이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무릎을 꿇고 비노니”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때로는 서서 기도하며, 때로는 엎드려 기도하며, 때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엎드려 기도함”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복(自服)하는 자세이며,
“무릎을 꿇고 기도함”은 기도를 드림에 간절함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서 6장 10-11절에 보면  다니엘이 그의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그의 조국과 동족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간구하고 감사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사랑하여서 그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천지만물의 주인되시며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이 잘 표현되어있습니다.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ἔσω ἄνθρωπος=inner man)을 강건하게 하옵시며
 
사람에게 영이 다스리시는 속사람과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지배하는 겉사람(ἔξω ἄνθρωπος=outer man)이 있습니다. 이 겉사람에 육신까지 포함시키기도 하고 위치만-니같은 분은 육신을 바깥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속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2-23절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아래 놓이기를 원하는데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배를 받는 지체(肢體)라고 표현된 겉사람은 죄의 법아래 놓여있고 사단의 유혹으로 나를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겉사람의 역사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나의 삶에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기 전까지는 나의 속사람이 거의 대부분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겉사람에게 지배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는 원하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나의 속사람을 다스리시는 성령께 나를 내어맡기고 그 성령께서 나의 겉사람까지 주장해달라고 간구할 때 그래서 나의 겉사람을 죽이는 노력을 하기로 결심하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이 말씀하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하는 고백을 날마다 생활 가운데 할 때 비로소 나는 속사람뿐아니라 겉사람까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이 속사람을 베드로전서 3장 4절에서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갚진 것이니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through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강건하게 해달라고 간구드리는데, 이는 성도의 속사람은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에 놓인 까닭입니다.
이 속사람이 성령을 통하여 강건하여 진 사람은 그의 주장과 생각을 성령께 양보함으로써 겉사람--성품--까지 변화되어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말씀을 사모함과 하나님과 기도로 깊은 교제를 가짐으로써 가능합니다.

17절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17절 전반에 이 속사람을 위한 기도가 이어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곧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성도들의 마음에 계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속사람에 살리는 영으로서 들어오신 성령-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시며 우리 속사람을 강겅케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이의 원동력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드릴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시며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십니다.

17절후반부터 19절까지의 세 가지 기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간구입니다. 

17절하: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박히고 믿음의 바탕위에 세워진 교회의 터가 굳어짐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인간의 주장과 생각과 이익을 위한 믿음이라면 이는 뿌리가 얕을 것이며 또한 터가 굳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성도의 속사람이 강건하여지고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고 이러한 성도의 모임인 교회의 터가 더욱 굳어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知識)은 말씀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을 통하여서 얻어집니다.

19절: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간구하노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간구하는바와 같이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차원(dimension)이 어떠합니까?
옛계명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요한복음 13장 34절(15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옛계명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조금 떼어서 나누어주는 사랑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계명인 예수님의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말씀 속에 들어있듯이 나의 것을 조금 떼어주는 사랑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아낌없이 다 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측량할 길 없는 그리스도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사랑의 다함없음을 깨달아, “모든 것을 내어주되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 간구하되,
“하나님 사랑의 충만한 것으로 에베소 성도들의 사랑을 더욱 더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다함없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설명하실 때,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20-21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20-21절에서 바울은 성도의 간구하는 바 모든 것을 들으시되 풍성하게 들어주시고 넘치도록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미합니다.
20절에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관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말씀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능력이 많으시며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간구함에 귀기울이시며 우리가 구한 것보다도 더 풍성한 것으로 공급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3
우리는 오늘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 또 우리가 사랑해야 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매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서 속사람이 강건하여지기를 구하되, 이 속사람을 다스리시는 성령님께서 속사람뿐아니라 우리의 겉사람도 다스리시고 변화시키심으로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우리 믿음의 뿌리가 깊어지며 믿음의 반석위에 세워진 우리의 교회의 터가 더욱 굳어지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서 더욱 더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나타나고 더욱 더 풍성하게 채워지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이방인 사역” (에베소서 3:7-13)


“바울의 이방인 사역” (에베소서 3:7-13)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1 
그리스도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는 우리들은 새들의 생태(生態)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조류학자의 관찰입니다. 철새 기러기들이 이동하기 위하여 하늘을 날 때 역(逆) V자를 그리며 납니다. 이 대열 속에서 각각의 새가 날개를 저으면 그것은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해 상승기류를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체 기러기 무리는 혼자 날 때보다 최소한 70% 이상의 더 먼 거리를 더 빠르게 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한 마리의 기러기가 V자 대열에서 이탈하는 순간 그는 더 큰 대기의 저항을 느끼게 되며 해서 재빨리 대열에 합류한다고 합니다. 대열의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가고 이내 다른 기러기가 앞장을 섭니다.
뒤쪽의 기러기들은 앞서가는 기러기들이 속도를 유지하고 그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냅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울음은 곧 격려의 메시지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사냥꾼의 총에 부상을 입어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함께 동행하여 도와주고 보호해줍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뭅니다. 그런 다음에야 두 마리(혹은 세 마리)의 기러기는 하늘로 날아올라 다른 기러기들의 대열을 따라잡아 합류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인생의 여정을 살아감을 자전거타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의 패달 밟는 일을 중단할 때 자전거가 쓰러지는 것같이 인생에서 삶의 동작을 중단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을 살고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나는 혼자 일인승 자전거의 패달을 밟으며 나의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평탄한 길이나 내리막길을 갈 때는 별 어려움 없이 잘 달립니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오르기는 참으로 힘에 벅찹니다. 장시간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평지길도 힘에 버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이제 일인승 자전거가 아니라 이인승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그리스도로 뒤에서 패달을 밟게하고 나는 앞에서 핸들을 조정하며 패달을 밟고 달립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바라는 것은 단지 나의 목적지를 가기 위해 나를 도와달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내가 알아서 내 길을 갈테니까 주님은 단지 나를 도와 패달을 열심히 밟아주시고 해서 내가 나를 위해서 정한 목적을 이루게 해주세요’ 하고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뒤에서 나를 도와 묵묵히 패달을 밟아주시던 그분이 나보다 더 강하시고 지혜로우시고 갈 바를 잘 아심을 깨달은 사람은-우리는 이 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기꺼이 그리스도께 앞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뒷자리에서 패달을 밟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앞자리로 옮겨 앉으신 그리스도께 목적지까지 잘 인도하여 달라고 요청(要請)합니다.
내가 핸들을 잡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있는지 알고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핸들을 잡으신 다음에는 나는 때로 그분이 왜 이길로 자전거를 몰고가시나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주님은 짓궂으셔서 때로는 가파른 산길과 돌투성이의 자갈길로 자전거를 몰고가십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어쩔줄 몰라하는 나를 뒤돌아보며 한눈을 찡끗 하십니다. 주님은 자전거 타기의 명수이십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자전거 타는 솜씨가 어떤지 몰라 불안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이제 주님이 핸들을 몰고 가시는 그 길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나 혼자라면 엄두도 못낼 험한 산길을 주님과 함께 힘차게 패달을 밟으며 그 산길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가 내게 생깁니다.
뒷 자리에서 패달을 밟는 내가 이 길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도, 이제는 지쳐서 도저히 더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할 때도 주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힘들면 패달 밟는 일을 조금 쉬어도 좋아. 내가 네 몫까지 할테니까’ 하시며 힘차게 패달을 밟으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강하고 믿음직스런 분이십니다.

2
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이 복음을 위하여”에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가운데 육신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모든 이방인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일군이 된 것이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심이요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파케 함이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신다는 증거란 뜻입니다.
또한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을 그래도 사랑하셔서 사용하심이 주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여기에 일군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로서 여기에서 집사(deacon)란 말이 나오고, 목사(minister)란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집사나 목사나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평신도들은 주님의 일군인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 하게 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교회봉사를 함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8-9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을 맡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말합니다.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강당케 하십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히어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자를 사용치 않으시고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를 사용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일을 이루십니다.
이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고백하는 바울을 들어 이방의 사도로 삼으시고 그를 사용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한 풍성한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전파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복된 풍성한 은혜를 이방 가운데 주시는지 그 은혜와 비밀의 경륜을 이방인들에게도 알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할수만 있으면 모든 인간들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곧 인간 구원계획입니다.

10-11절: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政事)와 권세(權勢)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각종 지혜-은 전에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알려졌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은 아마도 천사들과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의 세력까지 포함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데, 교회에 먼저 알려진 다음에 교회를 통하여 그들에게까지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사랑하실 때 우리는 천사들보다도 더 하나님가까이에 있고 하나님의 비밀을 천사들보다도 먼저 듣는 존재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간구원계획은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 낙원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작정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옛뱀의 유혹으로 타락할 때 지체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을 마련하여 놓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가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구원계획 가운데 우리는 오직 우리의 길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전에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은 오직 두려운 존재요 심판의 하나님이셨는데,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나에게는 담대함이 생기며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때를 따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지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은 담대함을 얻어 당당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간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히브리서기자는 10장 19-2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로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고 우리의 빌 바를 하나님께 아뢰게 합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이 비록 갇힌 몸의 상태이지만 바울은 기쁨이 넘칩니다. 그가 당한 모든 수고와 환난과 매맞음과 옥에 갇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계획을 전파함으로 이방인들도 하나님과의 화목에 이르고 구원받게 함일진데 이 어찌 감사꺼리가 아니요 찬양이 아니겠습니까?
에베소 성도들이 낙심할 일이 전혀 아니란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러하므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영광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옥에 갇히기까지의 전도와 수고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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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군됨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보잘 것 없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므로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이를 무한한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여러분을 일군삼으심에 감격이 있습니까?
바라기는 바울의 감격과 감사와 찬양이 여러분 삶 가운데도 풍성히 넘치고 해서 주님 뜻대로 사용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우리 모두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