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0, 2012

"어리석은 교인들" (갈라디아서 3:1-5)

"어리석은 교인들" (갈라디아서 3:1-5)


성경구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1-3)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리석은 일들을 생각하고 행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함으로써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거나 칭찬 대신에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초(楚)나라의 재상 소양(昭陽)이 위(魏)나라를 쳐서 군대를 와해시키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은 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齊)나라를 공격합니다. 제나라의 민왕은 크게 걱정하며 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으로 와 있는 진진(陳軫)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습니다. 진진은 “염려 마십시오, 폐하. 소인이 곧 초군의 진지를 찾아가 침공을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초나라의 초군의 진영으로 소양(昭陽)을 찾아가 그와 회견합니다.
진진은 소양에게 묻습니다. "초나라의 법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적군을 무찌르고 적장을 죽이면 어떤 벼슬이 주어집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벼슬은 상주국(上柱國: 최고의 공로를 세웠을 때 주는 벼슬), 작위는 집규(執珪: 최고의 작위)가 주어질 것이오.”
진진이 다시 묻습니다. "그보다 높은 지위는 없습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오직 영윤(令尹: 재상)이 있을 뿐이요."
진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습니다. "영윤은 고귀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왕도 영윤을 두 사람씩 두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소양에게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초나라의 제사를 맡은 사람이 임금의 시종들에게 큰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시종들이 서로 말합니다. '몇 사람이 마시자면 감질이 나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린 사람이 마시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뱀을 그린 사람이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뱀의 몸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려고 왼손으로 술잔을 잡고 오른 손으론 뱀의 발을 그리면서 '난 발까지 그릴 수 있어'라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그가 발을 그리고 있는 사이에 뱀의 그림을 완성한 두 번째 사람이 술잔을 빼앗으며 말합니다. '뱀은 원래 발이 없네. 발을 그리면 안 되는 걸세.' 이렇게 말하고는 술을 마셔 버렸습니다. 뱀의 발-사족(蛇足)-을 그리던 사람은 결국 술을 마시지 못한 것입니다.
진진은 소양을 보며 말을 잇습니다. “어떻습니까? 대감은 이미 초나라의 영윤(令尹: 재상)이시고 이미 위나라를 공격해 장군을 죽이시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이제 또 제나라를 침공하시고 승리하신들 무슨 보람이 있으시고, 더 이상 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히도 지시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는 뱀에다 발을 그리는 격이 됩니다.” 소양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군사를 거두어 초나라로 돌아갔습니다(<<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우리의 어리석음 가운데는 이만하면 충분한데 그 이상을 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리자 걱정이 되는 신심(信心)이 큰(?) 아내는 새벽기도까지 다니면서 '남편의 새로운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를 아는 그의 친구 되는 분이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면 잘 될 터인데"라고 조언하자, 이 분은 속으로는 약간 꺼리지만,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께도 기도드리고 부처님께도 불공을 드리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신심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는 (출 20:5, 신 5:9) 괘씸죄를 짓는 결과를 낳습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아직 카톨릭 신부로 있을 때, 자신의 죄가 온전히 용서된 것 같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로와진 것 같지 않아 성 베드로 성당 앞의 계단을 자기 마음에 죄 용서받은 것같이 느껴질 때까지 계속하여 기어서 오르내리는 고행(penitence)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은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온전히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사족(蛇足)을 다는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지 금도 카톨릭에서는 그들이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한 세계 여러 고행의 장소에 신자들이 가서 고행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프랑스 루르드에 '거룩한 계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마리아가 18번 나타났기에 거룩한 장소로 지정된 곳이라고 합니다. 로마교황청은 1년에 4번 이곳에 와서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모든 신자들에게 연옥(煉獄)에서의 9년 간의 속전(면죄: indulgence)을 약속하여주고 있습니다. 카톨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고행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처럼 느껴지지지만, 이러한 고행의 제도 속에 있는 카톨릭교도들에게는 이것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죄짓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토라'라고 하여 십계명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여러 사항들을 주셨습니다. 토라의 원래의 의미는 "지시사항, 가르치심"인데, 이를 속박과 제한의 의미의 "율법"으로 만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토라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인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법 규정으로 만든 것입니다.
안 식일을 예로 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세부사항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십리 이상을 걷는 것,' '나무의 가지를 꺽는 것,' '몸을 지나치게 움직이는 것' 등등 이러한 것은 안식일의 규정을 범하는 것이므로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고 하나님께 과잉충성하는 의도에서(?) 스스로 정하여 놓고 이를 정한 사람들도 이 규범의 속박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행위같지만 하나님의 뜻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안 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더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을을 범하였다고 분을 내며 송사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는 그들이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심중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세부규칙을 만듦으로 스스로 율법 속에 갇히는 자가 되는 모습입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종교행위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해서, 전에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기쁨이 넘쳤는데, 지금은 모든 교회의 일이 짜증스럽고 남을 비난하는 입술이 내게 있지는 않습니까?
전에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직분이나 체면치례의 봉사나 의무 기타 외형적인 것에 너무 신경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에, 주일날 예배드릴 때만 믿음이 있는 것 같고  거룩한 척 하는 종교인은 아닙니까?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에게 바울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의 의무로서 속박 지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율법('즉, '하나님의 지시')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함의 즐거움과 자원함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숙한 표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