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9, 201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 11:1-3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 1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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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가는 길입니다. 우리들의 날마다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활과 생명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천국으로 난 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210장 1절에서 찬송가 기자는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 길이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나가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우리가 주님과 함께 걷는 이 길이 ‘천국으로 향한 길’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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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과 마르다, 마리아와 나사로와의 관계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이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는지 복음서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으실 때마다 그들의 집에 유하시든지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여긴 여인이요,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위해 봉사하며 희생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을 때 죄인인 한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씻은 것으로 되어있고(누가 7:36-39), 마태복음 26장 6절 이하와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에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해서,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발 또는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일곱 귀신 들리고 죄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다른 복음서의 증언과 다르게 마르다의 동생이요 예수님의 친구인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를 설명하실 때 그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거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이르는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 하신 것으로 미루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는 선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요 조용하고 선한 사람인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예수님께 전하여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별로 동요를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심은 “아주 죽을 병이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가 죽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육신의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죽음에서 불러 내심으로 그에게 그러한 능력을 부여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능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시려 나사로가 병들었으며 잠깐동안 ‘육신의 죽음의 잠’을 자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10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다 함을 들으셨지만 이틀동안 그 계시던 곳에 더 머무르심은 인간의 능력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유대 땅으로 가는 것이 겁이 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는데 다시 가자고 하시니 제자들은 혹시 죽을까 두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에 다닌다’는 말씀으로 아직 그의 죽음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11-16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서 반복적으로 나오지만 믿는 성도들의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요 소망 없는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잠자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 5:39).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8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잔다”고 표현하였으며,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죽은 성도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시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 되실 것을 보이실 것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7-20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오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으며 돌무덤에 이미 장사지낸 상태에 있었습니다. 17절에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한 것은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39절에 기록된 대로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의 미신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서 사흘 안에는 혹 죽음의 경계를 넘지 않아서 살아 돌아올 수가 있지만, 사흘이 지나면 죽음의 경계를 확실히 건넜기에 살아 돌아올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다음에야 베다니에 이르신 것은 그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시는 일이 사람의 능력이나 그들의 미신을 뛰어넘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21-27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맏으러 나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의 첫 번째 부분,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는 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었던 것일 것입니다. 해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청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많은 치유의 사역을 목격하고 들은 터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분,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한 고백은 그저 막연한 고백이지 확신이 있어서 한 고백은 아닙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신 줄 알았다면, “저의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은 “네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마르다는 “네 오라비가 마지막 때에는 다시 살리라”고 들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의 말씀은 ‘상식 밖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지 사흘도 아니고 나흘이 지난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나 미신으로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현재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먼 훗날 마지막 때의 일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믿음의 고백이라고 하는 것들도 현재의 고백이 아니라 때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적인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 베푸시는 분임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대한 고백도 사실은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고 선포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포하심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대답은 여전히 예수님의 기대와는 거리가 멉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는 예수님을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그의 고백은 그저 입술의 고백일 뿐 삶의 고백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갑니다. 입술로는 마르다와 비슷한 고백을 하지만,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서 그의 삶을 주관하시는 삶은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28-37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마르다가 마리아에게로 가서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다고 전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예수님께 아룁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의 한 말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처음 맞이하여서 한 말 중에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가 믿고 있던 고백만을 한 것으로 미루어 마리아는 마르다보다는 신중한 성격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같이 마리아도 예수님을 오라비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도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되심은 아직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시고, 마리아와 그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사” 우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잠시후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인데 왜 우십니까?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퍼하는 것을 보시며 그들의 잠시 잠간의 슬픔에 동참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고통 당할 때 무관심한 분이 아니시요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며,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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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을 믿으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이미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섰으며,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믿을진대, 바라볼진대, 우리의 삶에 더욱 확신과 생명력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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