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8, 2015

“고린도후서를 마치면서” (고린도후서 13:11-13)

“고린도후서를 마치면서” (고린도후서 13:11-13)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1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갈등을 경험한 사람들이 목회자 없이 평신도들끼리만 모여 교회생활을 하면 마음도 편하고 잘 될 것 같아 한국에 평신도교회를 유행처럼 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목회자보다 성경적 지식이 없으란 법이 없고, 성경연구야 굳이 신학교에 가지 않고도 독학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평신도가 목회자보다 기도를 못하란 법이 없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무릎을 꿇다 보면 목회자보다 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평신도에게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하면, 축도권이 없습니다. 시원찮은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안수를 받은 목사인 한에 있어서는 축도권이 있는데, 아무리 기도를 잘하고 성경에 통달한 평신도(장로나 집사)라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축도권이 없습니다. 목회자로 인하여 심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따로 교회를 세운 터라 그깟(?) 축도권쯤 없으면 어떠랴 하는 마음으로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곤 하는데, 한동안은 그런 대로 견디어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예배를 마무리한 것 같지 않고, 드린 것 같지 않아 평신도교회의 유행은 잠시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아직 목사안수를 받기 전 상태인 전도사로서 교회를 사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도 축도의 권한이 그에게 없습니다. 축도권은 세례·성찬을 주관하는 권한과 함께 안수 받은 목사에게 부여된 독특한 권한입니다. 목회자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중을 축복할 때 그 기원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이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마치려고 하매, 몇 가지로 더 권면의 말씀을 하고, 사도의 축도권을 활용하여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말썽도 많고 탈도 많으나 그가 매우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2
11절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가” 살펴보고 확증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이제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를 권고합니다.
“기뻐하라”(χαίρετε)고 합니다. 성도의 표된 것 중에 두드러진 것이 그의 삶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 전도여행을 하고 때로는 반대에 부딪히고 비난꺼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을 늘 표현하기를 원했고 또한 그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기뻐할 것을 늘 권면합니다. 바울의 서신 도처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쁨의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반복적으로 기뻐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4절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했고, 1장 18절에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고, 2장 17-18절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고, 2장 28절에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했고, 3장 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기뻐하라“)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했고,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기뻐함은 기도함과 감사함과 함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곧, 기뻐함과 기도함과 감사함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성도의 표가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고 있으니 죄짓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도의 기뻐함이 중요합니다. 이는 성도의 기뻐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온전케 되라”(καταρτίζεσθε)고 말씀합니다.
“잘못을 고치고”(mend) “온전을 향하여 노력하라”(strive for perfection, make complete)는 권면입니다. ‘나는 이대로 괜찮습니다. 나에게 설교하지 말아요. 나는 고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결코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바른 지적에 귀를 기울이고, 모르는 것을 배우고자 하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잘못된 것을 끊임없이 바로 잡고자 하는 사람이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끊임없이 온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온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온전하여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온전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온전하지 못한 사람인가’ 발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전치 못함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온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위로를 받으라”(παρακαλείσθε)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죄와 허물의 문제에 대해서, 고통과 환난과 슬픔에 대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것 괜찮아요” “다들 그렇게 사는데요”라고 하는 사람의 말은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버리기로 작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고 자복하는 세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가 함께 하심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어 간구하는 자의 슬픔과 고통을 모른 척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시편 30편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라”(τὸ αὐτὸ φρονείτε)고 권면합니다.
헬라어 프로네오(φρονέω)는 ‘생각하다, 마음을 갖다, 마음을 품다(think, have in mind)’의 뜻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로서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는 시끄러운 잡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뒤로 가거나 옆으로 가기가 십상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도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τὸ αὐτὸ φρονήτε)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하다”란 말은 달리 표현하면 “동일한 마음을 품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마땅히 품어야할 “동일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τούτο φρονείτε ἐν ὑμίν)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함”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는 것”인데, 이러할 때 그들은 마음을 비우고 낮추어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대로 행동하며 각자의 죄된 자아(自我)가 여전히 펄쩍펄쩍 뛸 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평안하라”(εἰρηνεύετε)고 권면합니다.
불화와 다툼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사도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신 평안(평화 또는 화평)은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어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그러나 곧 잃을까봐 불안한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보장받은 자의, 동록이나 도둑이 침입할 수 없는 하늘창고에 보화를 쌓는 사람의 뿌듯하고 영속적인 마음의 평안입니다. 성도들은 여러 가지 다른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그 가운데 갖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천국 백성의 평안입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아는 것보다 더 큰 위로와 든든함이 없습니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 불안하여 함은 하나님께서 혹 안 계신 것이 아닌가 또는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험한 산길을 갈 때에나 깊은 골짜기를 갈 때에나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만 한다면 이 사람은 불안하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의 일생이 쫓김과 고통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절)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확언합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합니다.
 “거룩한 입맞춤”(holy kiss)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인사법이었습니다(고전 16:20). 처음에는 남녀 가리지 않고 행하다가, 후에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행하다가, 더 후에는 악수로 대체되어졌습니다.
성도간에 서로 문안함은 다른 성도의 필요가 무엇인지, 형편이 어떠한지 아는 방법이며 이로써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성도의 마땅히 할 바는 자기만 위하지 아니하고 남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필요를 보충하여주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의 “모든 성도”는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마게도냐 지방의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한번도 고린도 교인들을 본 적이 없지만 한분 하나님 안에 거하고 동일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에 이른 형제·자매로서 성도들의 문안과 영적인 교제는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축도함으로써 편지를 마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도 대제사장들이 축도를 하였는데, 그 축도의 전형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즉,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머물게 된 신약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도는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본 절은 바울의 서신들에 등장하는 축도들 가운데 가장 온전한 형태로서 현대 대부분의 교회들의 목사님들의 축도의 전형입니다. 축도의 제일 먼저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축도는 바울의 모든 서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0절에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했고, 고린도전서 16장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했고, 갈라디아서 6장 18절에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했고, 에베소서 6장 2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고 했고, 빌립보서 4장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고 했고, 골로새서 4장 18절에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2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6장 21절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22절에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도서 3장 15절에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빌레몬서 1장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은혜(χάρις)는 나의 행위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용서와 선물을 체험케 하는 선하시고 친절하신 뜻(grace, kindness, glory, goodwill)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롬 5:6, 8, 10)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하나님 앞에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사랑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엡 6:23 참고).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환난과 곤고와 어둠과 깊음과 사망 가운데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가능케 합니다.

그 위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성령이 각 사람 가운데 교통하심으로 각 사람의 필요와 간구를 생각나게 하시며, 성도와 하나님간에 역사하사 성도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3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기뻐하며”“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그리스도께 속함의 표징입니다.

그 위에 삼위 하나님의 축복--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끊임없이 항상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여전히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주장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전반을 통하여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선동과 미혹으로 말미암아 “바른 복음”과 “바른 예수”와 “바른 영”에서 떠나 있는(고후 11:4 참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그들을 권면하고 나무라고 바로잡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소연하는 어조로, 때로는 엄한 어조로 목소리를 바꾸어 보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전달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또한 현대 교회들의 잘못을 생각나게 하시며 이제라도 바른 복음과 ‘바른 예수’와 ‘바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도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표된 것과 삶의 증거들을 발견할 것을 권유하고 계십니다.

 

“바울의 간구와 권면” (고린도후서 13:5-10)


“바울의 간구와 권면” (고린도후서 13:5-10)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6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1
중국 무협영화를 보든지, 요가나 선(禪) 기타 어느 도를 닦기 위하여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사부(師父) 혹은 매스터(Master)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시키는 일이 거의 비슷합니다. 물을 길어오는 일이라든지, 장작을 패는 일이라든지, 마루를 닦는 일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단순 노동을 반복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이 단순하고 유치하며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서 거부하는 사람은 그가 원하는 무술이나 도(道)의 높은 경지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왜 이와 같이 지루할 정도로 단순한 일을 반복하게 하고 순종을 요구하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무술이나 도의 기초를 닦는데 걸림돌이 되는 불필요한 자존심을 버리게 하고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주장을 배제하게 합니다.
일정 기간 묵묵히 잘 견디어 냄으로써 기본적인 순종의 자세를 인정받은 사람에게 이제 무술이나 도의 기본을 배울 기회를 주는데, 무술의 기본기나 기본적인 도의 연마에 또한 많은 기간과 공을 들이게 합니다. 그런 다음 본격적인 무술의 동작이나 도의 진리를 가르쳐주는데, 이렇게 하여야지만 비로소 단단하고 바른 무술인이나 도인(道人)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여서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은, 그렇지 아니할 때 저차원적이고 경망스럽게 자기를 드러내는 무술인이나 도인밖에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도의 기본을 익히는 훈련을 잘 견디어 냈음에도 중간에 (허세의)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무술이나 도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또한 허다합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이 바르고 잘 다듬어진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기본을 익힘이 필요합니다. 기본을 제대로 잘 갖추지 못한 사람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항상 젖이나 빨고, 여전히 세상에 속한 것을 따라 살며 자신을 드러내는, 크리스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있기 쉽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특히 교인들이 귀한 이민교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1-2세기 당시의 교회들은 신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이라고 하여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그가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기에 필요한 신앙 교리와 고백을 갖추었는지 살피는 일정한 기간을 두었습니다. 이 기간을 잘 견디지 못하고 카테키즘(Catechism: 교리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비로소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세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세례문답을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를 주며, 아직 크리스천으로서의 죄사함의 확신도 없고 믿음의 고백이나 삶이 없는데도 직분자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바른 교회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자기 확신이 있음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스님이 “나는 30년 동안 좌선(坐禪)을 해왔기 때문에, 번뇌(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어지럽히고, 귀찮게 하고, 사로잡혀 방황하게 하고, 더럽히는 정신작용)가 말끔히 없어졌습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를 듣고 있던 어떤 큰스님이 초상집에서나 하는 조문(弔問)의 인사를 합니다. “정말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습니까?”
그러자, 자기의 오랜 좌선 수련을 자랑스럽게 말했던 스님은 화를 내면서 그런 조문의 인사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대듭니다. 큰스님은 대답합니다. “번뇌가 있어야만 벗어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번뇌는 벗어나고 깨닫는 밑천입니다. 스님은 (번뇌가 없다고 하니) 그 밑천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어질 때는 사람이 죽은 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상심이 되셨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송원스님의 「알기 쉬운 반야심경(般若心經) 」에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곤고(困苦)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 자신만으로는 곤고함이 있음을 말씀함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참고)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죄에 노출되고 죄로 인하여 넘어지기 쉽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나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다 순조롭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 자신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과 생각으로 인하여서 안타까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느 크리스천들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본받고 있던 바울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험상궂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의 거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이르른 까닭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오랜 교회생활을 하여 이미 거룩하여져 있다면, 여러분에게 이제 성령도 필요없고, 기도도 필요 없고, 교회생활도 필요 없을 것이며, 부족한 목회자의 설교말씀과 성경공부는 더더욱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심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삶의 부족함을 주님께 아뢰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더욱 강하신 능력과 은혜를 간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Check up on yourselves. Are you really Christians? Do you pass the test? Do you feel Christ's presence and power more and more within you? Or are you just pretending to be Christians when actually you aren't at all?"(너희 자신을 점검해보라. 너희들은 진실로 크리스천들인가? 시험에 합격했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너희 속에 더욱 더 느껴지는가? 아니면, 너희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그저 크리스천들인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는가?” 또는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울만한) 믿음(의 삶)을 갖고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하늘에 올리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도 안에 계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곧, 성령께서 그의 안에 계심이 느껴지고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성도의 안에 있는 줄 무슨 증거로 알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예로서는 성령의 은사들(고전 12:8-10, 28-30; 롬 12:6-8 등)과 열매들(갈 5:22-23)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또한 그의 깊은 속으로부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싶은 마음이 샘솟아납니다.
만일 이러한 증거들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아직 믿음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버리운 자들”(ἀδόκιμοί: failing to meet the test, disqualified)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의 시험(점검)에 불합격한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믿음의 삶 가운데 거하지 못한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심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6절에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자”입니다. 곧, 그는 크리스천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에게 성령의 은사들과 열매들이 있습니다. 그의 깊은 속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싶은 의욕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바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가 그리스도의 믿음에 속하여 있는 자임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그의 하는 권고나 나무람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뜻 가운데 되어지는 것임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7절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함이 어떠한가 단적으로 표현한 절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아니하더라도, 바울이 믿음에 있는 자가 아니라고 여기더라도, 바울이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악을 행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자들이 되게 하심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지 않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람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figure of speech)입니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바울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될 그의 열망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이 악은 버리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이로써 바울이 옳은 사도이요 그의 권고의 말이 옳았음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원함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타난 삶의 열매로써 그들의 믿음이 바른 것이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참 크리스천된 자들임을 보고자 함입니다.

8절에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안에 항상 역사하시기에 그는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진리 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계시고 그를 인도하시기에 바울이 행하기를 원함은 “오직 진리를 위한 일뿐”입니다.

9절에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고 낮은 자로 사람들에게 오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한 자가 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13장 4절).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는 원래 부요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이 우리로 부요한 자 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또한 그리스도의 예를 본받아 약한 자, 가난한 자가 되기를 자청합니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약한 자가 되어 때로는 비난꺼리가 되고, 때로는 능욕당하더라도,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강한 자가 되기만 한다면 바울은 이를 기뻐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강하여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바울이 간구하는 바인데,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성숙한 크리스천들이 되기만 한다면, 바울은 그 자신이 약하게 되는 것--멸시당하고, 비방당하고, 웃음꺼리가 되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10절에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2절에서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함으로 강한 징계의 의지를 보인 바울이지만, 이는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역설(力說)입니다. 사도로서 바울이 원함은 징계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 중에 죄지은 자들의 회개--죄에 대한 뉘우침과 고침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원함이시기도 합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 하겠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만나기를 원하는 바울에게 또한 두려워함이 있다고 했습니다(고후 12:20-21). 그의 사랑하는 영의 자녀들인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치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원치 않는 징계를 그들 중에 행사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원치 않는 대면을 피하기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권고하고 또 권고하는 것입니다.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인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을 세울 권세도 주시고 파할 권세도 주셨는데(치리권), 바울이 간절히 원하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을 파함이 아니요 그들을 강하게 세우고자 함입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거짓 교사들과의 잘못된 관계의 청산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인정함과 순복함이 필요합니다.

3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교인이라고 하는데, 교인이 곧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교인은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느끼지 못하고도 (정기적인) 교회 출석만으로도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또한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는 보증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너희가 크리스천인가 아닌가 진단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믿음이 있는가? 너희가 믿음에 속하여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는지,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울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알쏭달쏭합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줄 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의 속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는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원함이 있는지로 알 수 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역사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시험에 통과한 성도들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그 믿음의 결과로서 악을 멀리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기 진단에서 아직 크리스천의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고 하여서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긍극적으로 주님의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고 자녀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징계와 심판으로 임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랑과 긍휼로서 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