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31, 2014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고전 16:13-24)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고전 16:13-24)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오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1
큰 배가 대양을 항해하다가 대풍을 만났습니다. 며칠을 비바람과 싸우며 고생하던 끝에 배는 거의 파선하였으나 불행중 다행히도 인명에는 큰 피해없이 무인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선원들은 이 망망대해(茫茫大海)의 무인도에 있는 그들을 누가 언제 발견하여 구원해줄 것인가 낙담이 크기만 합니다. 선장은 “아직은 여름이라 산의 열매를 따먹고 밖에서 자도 되지만, 얼마 안 있어 겨울이 될 터인데 그때까지 우리들이 발견되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밭도 일구고 집도 짓자”고 선원들을 독려합니다. 상심하고 있던 선원들도 하루 이틀 지나면서 다시 기운을 차리고 선장이 말한 대로 집을 짓기 시작하며 비상시를 대비하여 마련해 놓았던 곡물과 채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일구기 시작합니다. 밭을 일구던 이곳 저곳에서 얼마 안 있어 금은보화가 발견됩니다. 아마도 이 섬에 오래 전에 해적들이 보물을 숨겨놓았던가 봅니다. 보물이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자 선원들은 밭을 일구는 일은 팽개치고 보물찾기에 온통 혈안이 되어 다닙니다. 집 짓는 일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겨울은 다가왔는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년여가 지난 뒤 봄이 되었을 때 어느 배가 그 섬을 발견하고는 잠시 쉬었다가 가기 위하여 섬에 정박합니다. 배에서 내린 선원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보물을 움켜쥐고 죽어 있는 해골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보물을 두고는 두 세 해골들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보물에 눈이 어두워 밭을 일굴 생각도 않고 집을 지어 겨울을 대비할 생각도 않고 보물을 끌어 앉고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2
13절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말씀합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네 가지로 권면합니다.
첫째는 “깨어라”(γρηγορείτε)고 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라’(be alert)는 뜻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믿음에 굳게 서라”(στήκετε ἐν τῇ πίστει)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바탕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재물이나 지위나 학문이 아니라 믿음 위에 서되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남자답게 행동하라”(ἀνδρίζεσθε, act like a man)고 했습니다.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것은 ‘용기있게 행동하라’(be courageous)는 뜻입니다. 어떤 환난이나 고통 중에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잘 견디라는 뜻입니다.
넷째는 “강건하라”(κραταιούσθε)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육신은 약하여도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연약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이 아니며 강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고 강건한 사람은 육신의 연약함이 그의 하나님 사랑함의 강열한 뜻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13절에 열거한 네 가지 권면 위에 한 가지 권면을 더하는데 그것은 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πάντα ὑμών ἐν ἀγάπῃ γινέσθω)는 권고입니다. 사랑은 우리 크리스천 믿음과 삶의 완성입니다.

15-16절에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스데바나와 그의 집은 그리스보와 가이오(고전 1:14)와 함께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서 사역할 때 세례를 베푼 얼마 안되는 사람들 중에 들어있습니다(고전 1:16). 특히 가정(family)으로는 처음 세례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이 귀한 것은 이들이 성도 섬기는 일에 헌신한 까닭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서 성도를 섬기는 사람들과 또 주님의 일을 위하여 동역하는 사람들과 육신의 피곤함을 무릅쓰고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권합니다. 이리할 때 교회는 평안하고 분쟁이 없으며 살아서 역동할 것입니다.

17절에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 언급이 없기 때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으나, 이들이 바울을 찾아온 것을 바울은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바울에 대해서 무관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던 바울이었는데, 고린도에서 멀리 이곳 에베소까지 찾아준 그들이 고맙습니다. 바울의 권면에 귀 기울이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염려하는 바울이지만 그들의 방문은 그러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합니다.

18절에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 말씀합니다.
“시원케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파우오(ἀναπαύω)는 (심령에) 휴식을 주다, 긴장을 풀어주다, 편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분당이 있다, 음란의 문제가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시끄럽다, 공중예배의 문제로 소란하다 등등 온통 좋지 않은 소문을 들어서 염려와 근심이 쌓였었는데, 이들을 대한즉 그가 염려한 것만큼 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심령이 얼마간의 평안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또한 바울의 처방과 권면과, 위로의 편지를 그들에게 전할 것이기에 고린도 교인들의 심령도 놓임을 얻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이러한 사람들--문제를 완화시키고 사람들 간에 얽힌 오해와 불만을 풀어주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함을 지적합니다.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 했습니다. “알아 주다”(ἐπιγινώσκω)란 ‘인정해 주다’는 뜻입니다.

19절에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된 대로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브리스가) 부부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던 것이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행전 18:4).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수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동행합니다(행전 18:8).
소아시아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이들을 여기에 머물게 하여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 아굴라와 브리스가(브리스길라)는 에베소에 있는 그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사용하도록 내어 놓았습니다.
바울이 후에 고린도에 가서 삼 개월을 머물면서(행전 20:3) 로마서를 쓸 때에 아굴라와 브리스가(브리스길라)는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철거령으로 쫓겨났던’(행전 18:2) 로마에 다시 돌아가 있었습니다(롬 16:3).

현재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가,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의 소식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순조로운 일과 어려운 일, 기쁜 일과 괴로운 일, 즐거운 일과 슬픈 일을 서로 전하고, 그 문제들을 놓고 서로 기도하고 위안하는 일이 성도들의 마땅히 할 바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입니다.

20절에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ἐν φιλήματι ἁγίῳ; with a holy kiss)는 초대 교회 주의 만찬(Lord Supper)의 의식(儀式)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롬 16:16, 고후 13:11, 살전 5:26, 벧전 5:14...“사랑의 입맞춤”)은 성도간에 사랑의 표시요 또한 용서의 표시였습니다.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 가리지 않고 거룩한 입맞춤이 주의 만찬 예식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얼마 후에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성도 간에 행해졌고, 그러다가 더 뒤에 와서는 폐지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성도간에 용서와 화해의 교제와 문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말씀합니다.
바울의 육체적 조건이 열악(劣惡)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의 나이가 60세가 넘었습니다. 지금은 60세가 장년의 나이요 한참 일할 때지만 바울 당시에는 60이면 노인 중에 노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바울은 눈이 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만(행전 9:18), 이후로 그의 눈은 성치 못하고 쉬 피로하고, 눈물이 나고, 글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갈 4:15 참조). 그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보는 바 대로 이 문제(“육체에 가시”, 고후 12:7; “육체의 약함”, 갈 4:13 참조)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평생을 그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역사하신 “예수님의 흔적”이기에(갈 6:17) 그는 육체적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의 눈이 이와 같기에 그의 편지는 대서(代書)되어집니다.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서했고(롬 16:22), 고린도전서는 소스데네가 대서했습니다(고전 1:1). 그러나, 바울은 편지들이 그에게서 온 것임을 보이고 또한 그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마지막 부분의 문안인사는 친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도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고, 골로새서 4장 18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여건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바울만큼 좋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선교사로서 이곳 저곳을 다녀야 하는데 눈이 성치 못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고자 하셨을 때 그가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가끔 교우님들이 교회 봉사를 잘 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정들을 말씀합니다. ‘나는 무엇이 이래서’, ‘나는 무엇이 저래서’ ...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의 외적 환경이나 육체적 사정이 정말 어려워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감당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종국에 하나님의 날이 이를 때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성 예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전체를 통하여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사랑을 따라 행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장 1절에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했고, 8장 3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했고, 13장 사랑 장에서 모든 은사들을 활용함에도 사랑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했고, 14장 1절에는 은사를 구함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오늘 본문 16장 14절에도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피상적(皮相的)이고 관념적(觀念的)인 사랑은 아닙니다. 성도들 사이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질 수 있는 실천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갇히고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병든 성도를 보고 구제하고, 도와주고, 방문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말씀한 대로 구제하고 희생하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만 자기 만족이나 자기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이 사람도 사랑을 따라 행한 사람은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의 영혼이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데, 그를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방임하는 사람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이며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믿지 않는 자의 모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했는데, 원어는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또는 μαράνα θά 또는 μαράν ἀθά)로 아람어의 음역으로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원의 표시입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 22장 20절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원한 것과 같은 소망입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널리 사용하던 소망의 인사말이며 성찬예식을 행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한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믿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재림이야말로 인생의 목표이요 최대의 소망입니다. 하기에,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기원하는 사람들은, 13-14절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대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용기있게 행하고), 강건하고, 모든 일을 사랑을 따라 행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23-24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로 편지를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함께하심과 사랑의 빛에 노출되고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reflect)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들어온 사람은 이제 다시 그 은혜와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인 사랑”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기에,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3
고린도 교회 안에 여러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당의 문제가 있었고, 음란과 송사의 문제가 있었고,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는 문제--그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문제가 있었고, 공중예배시 성령의 은사의 오용(誤用) 혹은 남용(濫用)으로 교회가 소란하고 혼동과 무질서에 빠지는 문제가 있었고, 그리스도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문제가 있었고, 고린도 교인들의 인색함과 무관심함으로 구제나 기타 형제 돌봄의 실천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서 바울은 그들을 권면할 때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사랑의 결핍으로 야기된 것이므로 “너희는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을 기쁨으로 맞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믿음에 굳게 서있고, 남자답게 용감하게 행동하고, 어떠한 환경과 여건 중에서도 늘 강건하여야 할 것이며, 모든 것 위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현대 교회의 문제들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불일 듯 열망함이 없는 것, 교회를 위한 뜨거운 기도와 눈물의 간구가 없는 것, 충성스런 교회 봉사와 헌신이 없는 것, 형제·자매의 아픔과 상실이 나의 아픔과 상실이 되지 못하는 것, 교회 안이나 밖에서의 삶이 하나님보다는 세상과 타협하고 교제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사랑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사랑을 따라 형제·자매를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여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용기 있고, 강건하며, 사랑으로 행하는” 크리스천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 (고전 16:5-12)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 (고전 16:5-12)

           
 
  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過冬)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1 
어떤 타운에 (평생을) 살기 위해서 이사온 사람은 자기가 정하는 교회를 (평생의) ‘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곳에 장기간 머문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곳을 떠날 기약이 있는 사람은 ‘내 교회’라는 생각을 잘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학생으로 박사학위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적어도 4년 이상 길어지면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한 곳에 머물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다니는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 언젠가는 떠날 교회라고 생각하여서 교회봉사의 의사와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어떤 교회를 평생토록 다닐 것이기에 ‘내 교회’이고 나는 언젠가 떠날 것이기에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교회생활을 충성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며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잘 경영하지 못하게 합니다. 잘 경영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땅속에 묻어두게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여행을 계획하며 여행을 하고 있는 과정(itinerary) 중의 삶입니다. 어떤 곳에 6개월을 머물든지, 일년을 머물든지, 아니면 십년을 머물든지 있는 곳에서 우리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맡기신 달란트를 잘 경영해야 할 것입니다.

다메색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바울의 일생은 항상 여행하고 있는 과정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에베소 교회로서 삼년동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삼년의 기간도 떠날 것이 예정되어 있던 삼년이었습니다. 각 교회가 모금한 은혜를 예루살렘에 전하여주기 위하여 속히 떠나기를 바라던 기간이었습니다. 떠날 것이 예정되어 있고 그의 마음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있다고 바울이 하나님 일 감당함을 등한시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가 어떤 지방에 한달을 머물든지 하루를 머물든지 주님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이 십년 이상을 애착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라고 할지라도 어떤 유감스런 일로 인하여 혹은 교회가 어려워서 그 교회를 떠나게 되면 그 교회를 향하여서는 눈길을 돌리고 싶지 않고 그 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개척하고 단지 일년 육개월 동안 목회한 고린도 교회의 시끄러운 문제들을 위해 평생을 기도하고, 마음을 쓰며,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랐습니다.

2
5-6절에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은 소아시아의 에베소 지방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20:31)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한 기간이 3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의 일을 하고 있던 바울이 한 곳에 3년씩이나 머문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터인데 그 이유인즉 각지방의 교회들마다 모금의 일정한 금액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갔던 것입니다. 모금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되, 바울은 넉놓고 할 일없이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기간동안에도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항구 밀레도로 내려와서 배를 타면 바로 고린도에 도착할 것인데 그리하지 않고 마게도냐를 지나서 고린도로 가고자 함은 빌립보 교회를 위시한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의 헌금을 거둔 후 고린도 교회가 위치한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자 함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겨울을 보내고자 함은 그 기간동안에 고린도 교회에 당부한 모금이 완성되어 그로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모금이 완성됨으로써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나의 갈곳”인 예루살렘으로 향하고자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보면,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히 퍽 많은 사람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디도 일행, 고후 8:16-24)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보다 일년 늦게 모금을 시작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 이미 모금을 완성하였는데 아가야 교회들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아가야 지방에 대한 방문계획이 상당히 지연되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이 아가야 지방에 석달을 머물지만 이 석달은 그 해 겨울을 그곳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일년을 더 기다린 다음의 일입니다. 이 고린도에 석달을 머물면서 바울은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 편지 안에서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가난한 성도들에게 연보를 전해 준 다음에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의 성도들을 보기 위하여 로마로 갈 계획이 있음을 언급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서반아까지 갈 뜻을 비춥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장 25-28절에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기도하고 소망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 다음에는 로마로 갔지만, 로마로 감에는 자유인의 몸이 아니라 사슬에 메인 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지만 바울의 시간과 원함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과 뜻 가운데 응답하여 주심을 봅니다.

7절에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나는 길에 마주치는 정도의 잠간만의 상면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들과 얼마간의 기간을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마치 (속썩이는) 자식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비록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마음은 늘 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그곳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에게 크리스천의 마땅히 지켜 행할 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행전 18:11).

8-9절에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순절(Pentecost)은 유월절(Passover)이후 오십일째 되는 날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에 보면 오순절에는 각 지역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 절기를 기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에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으며, 유월절을 기산점으로 오십일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기를 원함은 소아시아 지방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칠 효과적인 기회가 넓게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을 가르칠 기회가 많은 것과 함께 대적하는 자도 많았으며 위험도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이하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바울의 복음 증거가 큰 실효를 거두자, 데메드리오를 비롯한 은장색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을 해하고자 소동하였습니다.

10-11절에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9장 21-22절에 “이 일(에베소에서의 교회 개척)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자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5장 25-28절에 나오는 바울의 로마 여행계획이 언급되어 있고, 디모데와 에라스도의 마게도냐 파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그에 앞서서 마게도냐에 파견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아직도 아시아에서 복음증거할 광대한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며(8-9절)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들에서의 모금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10절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를 위해서 특별한 당부를 한 까닭은 아마도 디모데가 소심하고 연소(年少)하여서 그를 무시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염려하는 바울의 자상한 배려입니다. 디모데의 나이가 20대 초반쯤이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십년이 지난 뒤에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인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여전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때의 나이가 삼십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그 위에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따르는 그룹이 있었는가 하면 그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냉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소심하고 연소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심에 바울의 동역자요 중요한 일군으로 쓰임받음을 우리는 봅니다.

여기에 “형제들”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에라스도를 비롯하여 디모데와 함께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 여행에 함께한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12절에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왜 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를 한 번 가보라고 권하였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분파의 문제에 대한 원만한 해결과 화해를 모색하고자 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6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볼로에 대한 기록은 고린도전서 이외에 별로 없어서 그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아볼로가 처해 있는 상황이 고린도를 갈 형편이 못되었는지 아니면 그 자신이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의 일에 다시 말려들어가고 싶지 않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고 하여서 아볼로가 갈 시간은 있으나,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노력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번역되었으나, 뜻과 시간(기회)은 아볼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항입니다. 해서,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를 사용하셔서 갈 의사(意思)를 주시고 기회(機會)를 주시면 그가 가리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의사에 따라서 우리의 일을 결정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일군이 될 때, 나의 시간과 의사까지도 더 이상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을 운행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3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많은 여행 계획을 세우고 또 실제로 이곳 저곳을 여행합니다.
우리의 일생 그 자체가 여행하는 일정(itinerary)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여행계획을 마련하여 주시며 그 여행하는 기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마련하신 여행계획이 다소 나의 원함과는 다른 것일 수 있으며, 때로는 나의 원치 않는 곳을 여행하게 하실 수 있지만, 오늘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받고자 하는 바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것이며, 이런 사람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크신 능력과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Sunday, August 24, 2014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 (고전 16:1-4)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 (고전 16:1-4)

           
  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捐補)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가지고 갖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1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어느 지역의 나무들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쳐서 꼿꼿이 서있다가는 당장 부러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강한 바람을 묵묵히 잘 견디어 온 “무릎을 꿇고 있는 나무들”로 나중에 악기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이올린입니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견디어온 나무로 만들어진 바이올린은 맑은 음을 내는데, 그 나무가 얼마나 강한 바람을 견디어온 것이냐에 따라서 얼마나 더 맑고 아름다운 음을 내느냐도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도 세찬 바람이 불어치는 세상이라는 지역에 서있는 나무들과 같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바람의 강도가 더욱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강한 바람 가운데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도 결정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때로는 더욱 심한 고난과 시련을 주시기도 하는데, 이는 그 자녀를 정금(正金)으로 빚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정금 같이 귀하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어떤 강한 시련과 고통의 바람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낮은 자세로서 묵묵히 환난을 인내하면서 견디고 연단되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바라는 바 소망--곧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바 은혜는 큰 것이라도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고 남이 섭섭하게 대한 것, 나에 대해 해를 가한 것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다 기억하여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원수는 물에 새겨서 쉽게 잊어버리고 은혜는 돌에 새겨서 두고두고 기억하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free gift)이기에 우리는 하찮게 여기거나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값이 없다”는 것은 하찮은(valueless)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priceless) 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귀한 은혜이기에 우리는 이를 마음 판에 새기고 오래오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갈라진 요단 강을 건널 때에 열두 지파가 각 지파 별로 요단 가운데에서 돌을 취하여 강 건너 가나안 땅 입구 길갈에 세우게 합니다.
여호수아 4장 6-7절에서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닥이 드러난 요단 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같이, 신약백성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요단 강을 건너 영적 가나안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돌비에 세기어 기념하고 마음판에 새기어 잊지 아니한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판에 새기어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실 때, “너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올바로 기억하는 것은 온전한 지킴을 동반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억하라(Remember)"에 합당한 삶이 아닙니다.

머리로만 알고 입술로 고백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심령에 새기고 행함으로 나타난 믿음이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같이 하시는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은혜를 지켜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지켜 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자녀들 간에 은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형제에게 자매에게 이웃에게 베푼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지켜 행하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 25:35-36).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오천명의 무리(남자 장정만)와 빈들에 계실 때 저녁이 되어 시장기가 동하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찌할 것을 여쭈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어라.”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오늘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누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나타나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실 때 성경은 또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마태 14:19-20). 제자들을 사용하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시기 위해서 그 자녀들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현재 이 세상을 사는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제일 큰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인데, 성경은 둘째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요한일서 4:20) 이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 이웃 사랑이 믿는 사람에게는 “은혜의 나눔”을 통하여,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증거(전도)를 통하여 실천되어집니다. “은혜의 나눔”은 영적인 것 뿐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1차, 2차 전도여행 중에 그가 개척하고 목회하던 교회들이 있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 캠페인을 벌였던 여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목회자나 선교사 중에 돈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자칫하다가는 ‘복음(福音)에 장애거리’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3차 전도여행 기간 몇 년 동안(52-56 혹은 57년)을 열심히 모금운동을 바울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가난한 형제를 돌봄이 크리스천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합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해서는 바울의 4대 주요서신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진행순서대로 살펴보면, 첫 번째는, 3차 전도여행 전에 기록한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 “다만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노라.”고 했고,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16장 1-4절, 즉 오늘 본문말씀이고, 세 번째는, 고린도후서 8-9장 두 장에 걸친 장장의 역설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감당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본을 받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고린도후서 8장 13-14절에서는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9장 13-14절에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모금이 완료되어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쓴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와 아가야(고린도, 아덴)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방 크리스천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진 빚이란 신령한 빚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방에 전파되어졌기에 그렇습니다. 신령한 것으로 진 빚을 물질적인 것--육신의 것으로 갚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사도행전 18장 2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데, 18장 23절에 “(바울이)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이때에 어떻게 모금할 것인가 갈라디아 교회들(the churches of Galatia)에게 당부한 것 같습니다.

연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게이아(λογεία)는 모금(collection) 혹은 기부금(contribution)의 의미로서 “자발적인 사랑의 헌금으로서의 선물”(a gift comparable to the voluntary love offerings,「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입니다.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언급함에 돈에 해당하는 아르구리온(ἀργύριον) 혹은 아르구로스(ἄργυρος)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 헌금되어진 돈은 더 이상 세속의 의미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일에 성도들이 헌금한 물질을 우리는 ‘돈’이란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예물(禮物)’ 혹은 ‘헌물(獻物)’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돈은 세상에 속한 사람(크리스천이든 아니든)이 세상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예물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한 것은 갈라디아 지방에 교회가 하나가 아닌 까닭입니다.
갈라디아는 한 작은 도시가 아니라 미국의 주(state)와 같이 넓은 지역입니다.
거기에 있던 교회들은 건물로 존재하던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 중 어떤 집을 사용하는 가정교회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십여명 혹은 몇십명의 무리가 모일 때마다 조금씩 헌금을 하도록 권하였습니다.

2절에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매주일 첫날”에 했는데, 매주일 첫날은 “주일(Sunday)"입니다.
나타난 기록을 보면, 처음 교회가 형성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때에는 어떤 곳에서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고 또 어떤 곳에서는 안식후 첫날 곧 주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울이 전도를 했던 이방의 교회들에서는 주일에 예배를 드렸는데, 기존의 안식일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에 예배드림이 더 설득력이 있기에 후에는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으로 통일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제칠 안식교회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하는데 매주일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번에 연보를 거두어들이는 어려운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뜻이 들어 있습니까? 가난한 성도를 기억하고 구제함은 연례행사처럼 한 번 작정하고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크리스천의 삶 중에 기억하고 실천할 일입니다. 그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3절에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아직 에베소에 머물면서 소아시아 지방에서의 모금운동을 하고 있으면서 보낸 편지인데, 이제 바울이 소아시아 지방의 모금운동을 마치면 그리-스 반도로 갈 것인데, 먼저 마게도냐를 들른 다음 고린도 교회가 있는 아가야로 갈 것을 말씀함입니다.

예루살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 전도여행을 하고 있던 바울이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는 바대로(또한 20:34 참조) 3년이나 에베소 교회에 머물었던 까닭은 모금이 지지부진했던 것도 한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형편이 좋지 않아서 가난한 성도를 위한 모금운동에 적극 참여치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인색(吝嗇)함으로 인하여서 이리 빼고 저리 뺐습니다. 하기에, 이 편지를 보낸지 일년이 지나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보내면서 장장 두장에 거쳐서 크리스천의 봉사의 직무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너희의 인정한 사람”이란 고린도 교회를 대표하여서 모금한 것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갈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에게 바울이 편지를 아울러 예루살렘에 보내겠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했는데, 여기서 “너희의 은혜”라고 표현한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한 모금을 “은혜(χάρις)”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너희의 은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성도를 통한 실천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반향(reflec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빛을 비추어주신 것같이 우리 크리스천들도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써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절에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 말씀합니다.
각 교회가 모금(collection)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대표들을 뽑아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러나 바울이 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면 바울이 그들과 함께 갈 것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예루살렘에 많았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그의 앞에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후에 모금한 연보를 갖고 각 교회의 대표들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결의에 찬 말씀이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 나오는데,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희생이 따르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여야 합니다. 입으로는 이것저것 할 것처럼 말하고 의논하면서 이를 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아닙니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물이 아니라 돌에 새김이 있습니까?
마음의 비석에 깊이 새기고 기억함이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어떻게 나타나집니까? 헐벗고 갇히고 병들고 굶주린 이웃을 돌아봄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삶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으로 믿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앞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 가운데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이들을 돌봄을 통하여서 주님 사랑함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삶 가운데 실천하며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