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2, 2015

“성숙(成熟)한 감사” (하박국 3:16-19)

“성숙(成熟)한 감사” (하박국 3:16-19)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所出)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1
저는 예수님의 기적들 중에 남자 장정만 5,000명(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지 않은 수)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좋아하고, 비유들 중에는 ‘달란트의 비유’를 가장 좋아합니다. 아마도 제가 경제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과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인간구원(영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경제계획의 놀라우신 비밀과 우리 인간들을 경제적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달란트의 비유’를 현대판으로 각색하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한 회사의 사주(社主)이며 최고경영자(CEO: chief executive officer)인 사람이 6개월 간 외국여행을 떠나면서 세 사람의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업무수행 능력과 과거의 실적에 비추어, 첫 번째 사람에게는 50,000불을 주면서 ‘자네의 능력대로 이 돈으로 무언가 해보게’ 말했습니다. 또 두 번째 사람에게는 20,000불을 주면서 똑같은 말로 당부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사람을 불러서도 10,000불을 주면서 똑같은 말로 당부하였습니다.
50,000불을 맡은 직원은 시장조사를 철저히 한 후에 50,000불로 컴퓨터 및 부품 판매 대리점을 차렸는데 사업이 잘되어 점포를 하나 늘이고, 또 하나를 늘일 수 있었습니다. 20,000불을 맡은 사람도 시장조사를 잘 한 후에 인터넷을 이용한 옷장사를 하였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0,000불을 맡은 사람은 경영주의 돈으로 사업을 했다가 혹 실패하여 돈을 잃기라도 하면 힐책을 당할까 두렵기도 하고,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벌여놓은 일이 많아 시간도 별로 없을 것같아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가 거래하는 은행에 있는 안전보관함(safe-deposit box)에 경영주가 그에게 맡긴 10,000불을 고스란히 집어넣었습니다.

6개월 뒤에 경영주가 돌아와서 그가 돈을 맡겼던 직원들을 부릅니다. 50,000불을 맡겼던 직원에게 묻습니다: “그래, 자네는 그동안 그 돈으로 무엇을 했나?” 그 직원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지난 6개월 동안 컴퓨터 대리점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번창하여 50,000불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참 잘했네. 그렇게 열심히 사업을 구상하고 확장시킨 자네가 마음에 드네. 나의 사업 파트너가 되어주게. 이제부터 자네는 직원(employee)이 아니라 나의 동업자(partner)이네.”
다음에는 20,000불을 맡았던 직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네, 저는 요즘 인터넷 장사가 유망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인터넷을 이용한 옷 판매를 하였는데, 지난 6개월 간 20,000불의 순이익을 남겼습니다.” “참 잘했네. 그렇게 독창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성실로 일한 자네가 마음에 드네. 이제부터는 자네를 직원(employee)이 아니라 동업자(partner)로 대하겠네. 내 동업자가 되어주게.”
마지막으로 10,000불을 맡았던 직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저는 사장님이 안 계신 동안 제 마음대로 사업을 한답시고 일을 벌이다가 혹 손해를 보면 사장님이 노하실 것 같아서 사장님의 돈을 안전한 저의 은행의 금고함에 넣어두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사장님이 저에게 주셨던 지폐 그대로 여기 있습니다.” 경영주는 그에게 말합니다: “자네가 나를 잘못 보았네. 만약 자네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손해를 보았더라도 자네가 그 일을 열심히 하였다면 나는 그것을 더 기뻐하였을 것일세. 자네가 그렇게 실패하는 것이 두려웠다면 적어도 나를 위해서 이 돈을 6개월짜리 CD(certificate deposit, 정기예금)로라도 은행에 예금하였더라면 내가 5% 이자 수입은 얻었을 것 아닌가? 자네는 무사안일주의의 사람이구먼. 자네는 사업하기에 적합지 않으이. 자네를 직원으로라도 두고 싶은 생각이 없네. 우리 회사를 떠나게.”
이 비유에서 경영주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의 회사는 그의 교회이고, 직원들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며, 그가 맡긴 돈은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달란트이며, 직원들에게 원한 사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시장조사를 하였다’고 함은 주님의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로 준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감당하다가 혹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해보는 것이 두려워서, 비난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 일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보다는 혹 실패하고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열심히 주인의 일을 자기 일같이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을 더욱 칭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교회 일이나 교회 안의 기관의 일이 이 비유에서 경영주가 그 직원들이 감당하기를 원했던 사업입니다.
교회 또는 기관의 사업을 감당할 때 우리는 그 일이 바로 내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과 성실로 창의적으로 기도하며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기관은 사람이 적어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많고 적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십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열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아니면, 다섯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열심 있는 다섯 명으로 못 이룰 사업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바울은 그의 나이 35세를 전후하여 다메색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래 30여 년을 주님의 사업을 경영하였지만 늘 두 세 사람, 많아야 십명 안팎의 사람들과 동역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실라, 바울과 디모데 등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경영하는 비결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가? 나에게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업 파트너로 삼으시고 같이 일을 해나가고 사업을 확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게도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번뿐아니라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기를 원하시는 까닭이며, 실패와 고난을 통하여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마음을 갖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추수감사의 의미는 열심히 일하여 마땅히 거둘 바를 거둔 사람이 이를 거둘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허락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혹 수확이 나의 노력과 예상보다 적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함은 수확이 전혀 없을 수도 있는데 이만큼이라도 허락하신 데 대한 감사입니다.
추수철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버려 수확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어도 좋습니까?
성경은 이럴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하는(thank God)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think God) 사람이요, 이러한 사람에게 종국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평안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박국의 감사를 봅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 경에 살았던 남방왕국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핍박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악이 관영(貫盈)하고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는 유다를 갈대아인을 들어 징벌하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하박국은 또, ‘하나님께서 어찌 하나님을 경외치 않으며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인 갈대아인(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징벌하려고 하시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이 장차 속히 다가올 것인데, 그때에 모든 악인은 그들의 악으로 징벌되고, 의인은 그들의 믿음으로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에 하박국은 3장에서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 찬양의 기도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고 했습니다.
갈대아인을 들어 유다를 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박국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심한 두려움에 쌓입니다.
갈대아인의 무리가 유다 백성을 치러오는 환난의 날이 임박한 것을 알기에 그의 뼈속까지 두려움이 저미어오며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의 집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겨보지만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으며 떨리고 또 떨립니다.
임박한 환난으로 인한 그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갈대아인들이 유다를 유린(蹂躪)할 때 예루살렘의 집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며 산과 들과 밭은 황폐케 될 것입니다.
그때 무화과나무는 무성치 못할 것이며,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적인 상실( total loss)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상실의 슬픔과 고통으로, 낙담함이나 좌절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늘 평안하고 고통이 없고 좌절이 없고 슬픔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 하기에 때로는 더욱 큰 고통을 받고, 슬픔을 당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크리스천은 거기서 그저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줄 압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과 무력감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승화(昇華)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감사와 기쁨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취한 몇 가지 일로 인하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잠간의 감사와 기쁨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외형적인 환경으로 따지면 하박국에게는 감사할 건덕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현재 악인의 번성함을 보며 고통 당하고 있고, 이 세상에서 앞으로 그와 그의 조국 유다에게 일어날 일이란 기쁨이나 즐거움하고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를 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가 바라보는 감사의 조건들은 이 세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까닭입니다.
이 세상의 감사의 조건들이 순간적인 것에 불과한 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감사의 조건들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한 순간의 기쁨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외적인 모습으로는 내가 다 잃은 사람이요, 고통중에 있는 사람이요, 절망에 쌓여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때에도 내게 감사함이 넘쳐남은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의 무거운 짐을 벗기신 까닭이요, 내게 구원의 즐거움을 베푸신 까닭이요, 내 앞에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기쁨을 두신 까닭입니다.
이를 믿으시고 소망하십니까?
우리 가운데 즐거움과 기쁨과 찬양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신앙고백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의 근원은 세상의 권세도 재물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주장하시매 나에게 힘이 샘솟습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사슴의 발은 가볍고 빠릅니다.
여기에 낙담하고 좌절하여 주저앉아버리는 모습이 없습니다.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사슴과 같은 민첩한 발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십니다.
높은 곳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과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곳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애굽 땅에서 그 동포 히브리인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땅에 피하여 40년을 죽은 듯이 소망도 없이 지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은 곳,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엘리야가 850인의 이방 선지자들을 물리쳤지만, 악녀(惡女) 이세벨의 말을 들었을 때 낙담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하여 유다 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두려움으로 차라리 죽기를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부르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강건케 하시며,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편기자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부르시되, 하나님의 거룩하신 산 시온에 오르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갱신하기 위함이며, 이제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케 하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를 지킨 그의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이 세상의 갇힘으로부터 자유케하시며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도(now and here)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셔서 우리로 그의 성산(聖山)에 올라 소망(所望) 중에 하나님과 교통케 하십니다.

                                                                       3
오늘 본문의 하박국은 사람의 눈에는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는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양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감사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은 바울은 매맞음 가운데, 갇힘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상실로 인한 슬픔이 있을 수 있으며, 헐벗음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 수 있으며, 절망 중에 하나님께 원망을 발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아주 쓰러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 소망을 발견하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혼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감사를 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성숙(成熟)한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크리스천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감사절기” (신명기 16:13-17)

“이웃과 함께하는 감사절기” (신명기 16:13-17)

 
 16: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1
“미국의 추수감사절” 하면 생각나는 것이 터-키(turkey, 칠면조)입니다. 또한 그 날에는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터-키와 다른 푸짐한 음식을 같이 나눕니다.
제 가 미국에 처음 와서 뉴욕주 빙햄톤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첫해 추수감사절에는 같이 공부하던 다른 한 여학생과 함께 그곳 아이비엠(IBM) 회사에서 일하시던 미국인 부부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서 그 집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분은 제가 다니던 미국인 교회(Calvary United Methodist Church)의 평신도 지도자(lay-leader)였는데 참으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으며 삶에 배어 있는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버 지니아에서 공부할 때에도 추수감사절 방학(break)을 맞아서 건축학을 공부하던 미국인 룸메이트의 초대로 스텐톤(Staunton, VA)-미국의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의 고향-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곳 한 장로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이곳저곳 흩어져 살던 그의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모이고 서로가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그의 식구들과 함께 그리 멀지 않은 양로원에 계신 그의 할아버지·할머니도 찾아뵈었는데 참으로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 와 같이 미국인들 중에 더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할 때에 주위에 소외된 삶을 살거나 혼자 사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추수감사절을 같이 즐기는데 이것이 참으로 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명하시되 구약의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초막절(혹은 수장절)의 절기를 지킬 때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모여 연락하라(잔치를 베풀고 즐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미 국의 추수감사절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면, 가장 최초의 기록은 1619년 12월 4일 39명의 영국인 개척자들이 버지니아(Virginia)주 찰스시티(Charles City) 부근, 제임스 강(James River)가에 위치한 버클리 농장(Berkeley Plantation)에 도착했는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이날을 “감사의 날”로 지키기로 정했다고 합니다.
최 초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추수감사절은 영국 성공회로부터 핍박을 받던 청교도들이 1620년 12월 26일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플리머스(Plymouth) 항구에 도착하고 정착한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맞이한 수확의 계절에 드린 것입니다.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은 배를 타고 오는 약 2개월간의 힘든 항해에 거의 절반의 사람들이 죽고 남자 78명과 여자 24명이 살아서 도착하였으나 그 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신대륙에서의 절망과 굶주림으로 또 절반의 사람이 죽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621년 늦은 봄이 왔을 때 그들은 희망을 갖고 씨를 뿌렸고 마침내 가을에 기쁨으로 풍성한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총독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는 3일간의 축제를 공포합니다.  그들은 경작에 도움을 준 인디언 친구들을 초청하고, 인디언들은 터키(칠면조)와 사슴을 잡아다 주어 함께 나누어 먹으며 추수감사제를 즐겼습니다.
1789 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대통령은 11월 26일을 국가적인 추수감사절로 공포했고, 1863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은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였으며, 1941년부터는 11월 4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킬 것을 법으로 확정한 후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삼대 명절로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무교절은 유대력으로 정월 십오일(레 23:6)로 유월절(정월 십사일, 레 23:5) 다음 날로 칠 일 동안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무교병을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인의 손에서 “급속히” 구원해주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칠 칠절(맥추절, 초실절, 오순절)은 한 해에 처음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칠 주(seven weeks)를 계수한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16장 10절에 “네 하나님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이모작을 하게 되는데 칠칠절은 봉에 한 해의 첫 수확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리며 외롭고 가난한 홀로 된 자의 삶을 사는 이웃들과 함께 즐기라고 하셨습니다.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은 유대력으로 칠월 십오일(레 23:34)로서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인데, 첫날에 성회가 있고 제 팔일에도 성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칠칠절이 봄에 한해의 첫 수확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절기라고 한다면, 초막절은 가을에 한 해의 마지막 수확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레 위기 23장 39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39절) ... 너희는 매년에 칠 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41-43절).”고 말씀하십니다.

2
13절에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초막절은 장막절 또는 수장절(출 23:16)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집 앞에 초막을 짓고 이 기간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심은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하면서 머무는 곳에 초막을 짓고 생활하던 시절을 되새기면서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그들과 동행하시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초막절의 시기는 한 해의 추수를 마친 때입니다.
백성들은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면서 그들의 40년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총에 감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 해의 수확을 풍성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일주일을 보냅니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이라고 함은 온갖 곡식의 수확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수 장(收藏)한 후에”는 ‘거두어들여 모아 놓은 후에’입니다. 즉, 온갖 곡식, 과실 등의 수확물을 다 거두어드린 다음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거기 거하면서 그들의(혹은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들 조상들의) 40년 광야생활을 되새겨 보고 또한 지나온 한 해 동안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컸는지 생각하고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14절에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宴樂)하되”라고 했습니다.
명절을 지킬 때에는 다 함께 모여 기쁨을 함께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외되고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수확 안에서 즐거움을 같이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칠 칠절에 대한 규례를 설명한 신명기 16장 11절에서도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라고 했습니다. 절기를 지키되 임의의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 곧 중앙 성소에서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칠 일 동안”이라고 하심은 잠시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고 잊어버릴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칠 일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생각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입니다.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업의 경영을 비롯하여 우리 삶의 구석구석까지 온전하신 축복으로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空手)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16장 1절부터 언급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3대 절기에 관하여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맥추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맞이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중앙 성소에 모여 하나님께 제사드릴 것입니다.
제 사드리러 하나님께 나아오되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양을 따라 “그 힘대로”--합당한 예물로 제사를 드리고 감사를 표시할 것입니다. ‘힘에 지나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힘대로”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11-12절에서 헌금에 대하여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한 바울의 권고이기도 합니다. 또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각 절기를 맞을 때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무엇입니까?
무 교절(유월절)을 맞을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급속히” 건져내심을 “평생에” 기억하고 감사할 것이요(신 16:3), 칠칠절(맥추절, 오순절)을 맞이할 때 그들은 애굽에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그들에게 아무 수확이 없었지만 이제 자유자로서 봄에 한 해의 첫 수확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이요(신 16:12),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맞이할 때 40년 광야생활 중에 함께 하시며 가을에 한 해의 풍성한 총 수확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의 은총에 감사할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절기 감사에 대한 규례가 언제 그들에게 주어졌습니까?
그 들이 애굽을 출발할 때(출 13:1-9),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그들이 아직 시내산에 머물 때(출 34:18-24; 레 23:4-8, 15-21, 33-36)에 절기와 각 절기의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아직 수확을 거두기 시작하지 아니하지만 장차 풍성한 수확을 주실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광야생활에서 소망 중에 감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삼대 절기에 상당하는 크리스천의 절기가 있습니다.
어 린 양의 피의 제사인 유월절로 시작을 알리는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일과 부활주일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킴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급속히 건지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일과 부활주일을 기억하고 지킴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급속히 건져주심을 감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 월절 이후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계수하고 그 다음 날은 칠칠절(오순절)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크리스천의 절기는 성령강림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칠절(오순절)에 첫 수확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성령강림절에 우리에게 성령으로 처음 기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칠칠절이 봄에 한해의 첫 번째 수확에 대한 감사라고 한다면 초막절(수장절)은 가을에 한해의 마지막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대한 감사라고 했습니다. 초막절(수장절)에 해당하는 크리스천의 절기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해의 마지막 수확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우리를 알곡 신자로 거두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곡물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때를 하나님의 마지막 때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9장 37-38절에서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고, 13장 30절에 “둘(=곡식과 가라지)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 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추수 일꾼임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심에 감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곳간의 알곡으로 거두어들이실 것임에 감사할 것입니다.
따 라서 이 즐거움과 감사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여 고통 중에 살아가는, 소외되고 마음이 가난한 우리 이웃들과 나누어가져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추수의 일꾼들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파하여 그들을 하나님 구원의 풍성함에로 초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추수의 기쁨과 감사는 더욱 더 커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