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7, 2014

“너희 몸으로 주께 영광 돌리라” (고전 6:12-20)

“너희 몸으로 주께 영광 돌리라” (고전 6:12-20)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制裁)를 받지 아니하리라.
     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알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너희가 하나님꼐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
육체적 관계를 배제(排除)한 순수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말로서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란 말이 있는데, 사실은 와전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플라톤(Plato, 427?-347? BC)의 작품 향연(饗宴, Symposium)에서 미소년(美少年)간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육체적 관계를 제외한 동성애를 의미하던 것인데, 현재에는 남녀간의 정신적이고 고상한 사랑의 뜻이 되었습니다. 정작 플라톤 자신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욕으로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의 글에 보면, 플라톤은 늙어짐의 유익함이 한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나이가 듦에 따라 성적 욕구(sexual drive)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현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갖고 살 때에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몸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한결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한1서 2:16)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노름하는 데 이력이 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노름으로 집안 살림을 들어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도 젊어서 노름하는 일로 매일 밤을 지새운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 믿고 그의 잘못된 옛습관을 버리기를 원하였습니다. 큰 결심을 하고 화투를 잡았던 손가락들을 절단합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손가락 절단의 아픔이 있기에 노름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그의 머리는 노름을 하던 그 짜릿한 재미가 그립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찬 결국에, 그는 발가락 사이에 화투장을 끼고 노름을 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만큼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매일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철저히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옛것을 사모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약함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드시 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평상시에는 인정이 많고 긍휼을 베풀며 의리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의 육체를 보고 육신의 정욕이 그를 사로 잡을 때 그는 선악을 구별 못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밧세바를 항상 자기의 품에 두기 위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한 밧세바의 남편, 헷 사람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계교를 요압에게 지시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의 선함이 육신의 정욕과 악함을 이기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솔로몬은 어떠했습니까? 젊어서는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구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군이었으나, 그가 육체적 욕망에 빠져들 때, 1,000명의 처첩들에 둘러쌓였으며 그들의 치마폭에서 그들의 우상을 섬김으로써 배역(背逆)의 죄를 범하게 되며 결국 국가가 분단되는 비극을 낳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육신의 소욕(所欲)에 져서 육신대로 산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하여 누누히 강조해온 바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애를 매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또, 로마서 7장 6절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음을 강조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택하심’에 관한 교훈을 수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지금, 그들은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을 그들 자신의 범죄에 대한 신학적 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 후반의 “그 자유로 육체적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한 말씀을 잊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制裁)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두 가지의 제한(유익이 되어야 하고,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이어야 함)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는 말은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상투적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받아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한 것은 사실이나”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어야 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익하거나 도움이 되는 행동이어야 할 것’이며, 둘째는 ‘아무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는 행동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적인 생각과 행동으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적절하게 이해되어야 하고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과 로마서 1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나,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도 주위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삼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떤 일을 할 권한이 있나 없나를 고려할뿐아니라 그의 행동이 그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이 다 그의 권한에 있으나, 그 자신이 통제할 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자유자로서 무슨 일이든지 원대로 할 수 있었으나 그 자신이 그리스도 이외에 어떠한 사람에게나 어떠한 것에게도 제재를 받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즉, 그는 어떠한 옛습관이나 관습에 자기 자신을 예속시키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옛습관을 벗어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옛습관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시 옛습관에 예속(隸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식물(食物)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는 구호를 내세웁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그들의 죄에 대한 철학적 변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식물이 배를 위하고, 배가 식물을 위하듯이,” “몸은 음란을, 음란은 몸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은 ‘몸을 포함하여 모든 육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선악의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식물은 식물이고, 배는 배이고, 성행위는 그저 성행위’이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처음 주님으로 받아들였을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자’임을 기뻐하고 그들의 구습(舊習)을 버린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이 떠나온 옛 노예의 땅, 애굽을 그리워하고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던 것처럼, 그들이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옛습관들로 돌아가고자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이므로 이제 모든 것이 그들에게 가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교인들이 그러하듯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그들의 죄된 생각과 습관들을 합리화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영특하여 잘못된 일에 대해서 그럴듯한 이유를 댈 줄 알았습니다.
현재의 우리와 같이 그들도 부도덕하여 죄악이 관영한 세상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창기와 관계를 갖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현재 술집에 가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었습니다.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전에 그러한 부도덕한 일에 관계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럴듯한 이유를 발견했을 때 옛습관으로 돌아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식물(食物)과 배는 하나님께서 서로를 위해서 만드신 것이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행위가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생각이 세상적임을 경고했습니다.
식물과 배는 일시적인 것으로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폐하여버릴 것이나, 몸은 영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이 ‘몸’이란 말은 헬라원어로는 소마(σώμα)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인간의 육체 곧 물질적인 부분뿐아니라 우리 인간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몸은 16절의 육체(σάρξ)--물질적인 부분뿐--와는 달리 우리의 인격이나 품성도 포함하는 우리의 자아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의 육신과 인격을 모두 포함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의 행실을 자제하고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몸은 우리 실체의 중요하고 의미있는 부분이며 그 행동은 우리의 인격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은 우리의 인격과 자아를 포함한 것으로, 부활할 때 우리가 입을 옷이며 영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몸’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13절 후반에 있듯이, 주를 위한 몸입니다.
바울은 몸이 단지 성적 쾌락이나 기타 다른 유희를 위한 도구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단순히 생체적인 기능을 위해서만 창조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배가 식물을 위한 것이라면, 몸은 주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결혼생활의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몸의 사용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만, 결혼생활도 몸의 궁극적인 사용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이 우리 영과 함께 그의 사랑과 구속사업의 대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몸입니다.
14절에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다시 살리셨을뿐아니라 우리도 그의 권능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식물과 육신으로서의 배는 썩어질 운명이지만 몸과 영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식물과 배의 관계는 사람의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 몸과 주님의 관계는 지속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부활 때 썩지않을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게 될 우리는 주님의 사업과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21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화롭고 성결한 영을 영원히 보존할 그릇으로 살림을 받을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15절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현재와 장래에 주님을 위할뿐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몸의 일부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로마서 12장 5절에서 바울은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귀히 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은 몸의 각 지체입니다.
몸의 각 부분인 각 성도들은 다른 부분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길입니다.
교회의 생활에서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서로를 용납하고 감싸주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전부이시며 교회의 머리 되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행을 비롯한 부정(不淨)한 옛습관들을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16-17절에서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으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몸”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합하는 자는 세상과 한몸’이 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思慕)하는 우리가 세상의 음란한 것이나 부정한 것과 연합할 때 우리는 다시 썩어질 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로마서 6장 19절에서 바울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고합니다.

16-17절에서 육체(σάρξ)와 영(πνεύμα)을 대조해놓고 있습니다.
창기(娼妓)와 합하는 자는 한 육체(肉體)가 될 것이고, 주(主)와 합하는 자는 한 영(靈)이 됩니다.
즉, 세상과 짝하는 자는 부정하고 썩어질 것이 되며, 주와 짝하는 자는 신령(神靈)하고 영원(永遠)한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신령한 것이 부정한 것과 함께 섞일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5-6절에서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聯合)하기를 원할진대, 우리는 세상의 부정하고 음란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구분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님의 전(殿)입니다.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우리의 몸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권한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표현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대속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피값을 치르고(=속전[贖錢]) 사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몸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사신 바된,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을 성결되게 보존해야 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죄를 나단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회개(悔改)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51:10-12).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세상의 악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정하고 음란한 이 세대를 본받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장차 나타날 영광에 들어가도록 미리 정하여 주신 주님께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롬 12: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어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디어진 세상 사람의 양심으로 매일 매일 똑같은 부정과 불성실과 음행의 죄를 반복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사하여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오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 밖의 방종(放縱)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옛습관을 그대로 덧입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하여 다시 새롭게 결단함으로써 구습(舊習)을 벗어버리고 우리가 떠나온 옛땅을 잊어버리고,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몸의 삶--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의 송사의 문제” (고전 6:1-11)

“교회 내의 송사의 문제” (고전 6:1-11)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1
예배나 어떤 성경모임이나 기도모임에 참석하던 사람이 한 번 빠지면 마음에 자책감(自責感)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이건 두 번 빠지고 세 번 빠지면 자책감을 갖는 대신에 자기의 빠지는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합니다. ‘그 예배가, 모임이 나의 신앙적인 바람들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든지, ‘그 모임에 누구로 인하여 나의 신앙이 자라기는커녕 시험을 받는다’든지, ‘꼭 그 모임이 아니더라도 혼자 기도하고 성경 봄으로써 나의 신앙을 자라게 할 수 있다’든지, 아니면 ‘나의 바쁜 일을 하기 위해서 당분간 주님의 일을 뒤로 미루겠다’든지... 그러나 이러한 말이나 생각 등으로 자기 변명 내지는 자기 정당화를 한 사람들의 신앙이 그 이후에 나아지는가 하면 99%이상이 정체(停滯) 내지는 퇴보(退步)를 걷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고 함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함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혹은 세상 일로 하도 바뻐서, 혹은 다른 성도들도 자기의 안일함에 동참케 하기 위하여 그리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그 날(=주님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한 번 모이던 것을 두 번 모이고, 두 번 모이던 것을 세 번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혹은 빠져들기 쉬운 것이 안일(安逸)함입니다. 무사안일주의(無事安逸主義)입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평안하면 좋을 것같습니다. 나에게 아무 걱정, 근심이 없으면 신앙이 잘 자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설적(逆說的)인 말입니다만, 신앙의 성장은 평안할 때보다 고난이 많을 때, 역경이 많고 시간에 쪼들릴 때 더 많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신앙생활 잘 하겠습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후에 과연 여유가 생길 것인가?’도 의문이고, 혹 여유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는 세상살이에서 고생한 것을 보상받기 위해서 쾌락에 탐닉하는 삶은 살지언정 좋은 신앙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늙고 병들게 하는 것은 육체적 나이이기 보다는 정신적인 늙음입니다.
‘내가 쓸모 없구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구나,’ ‘나는 아무 비전이 없다’는 생각들이 그 사람을 무익한 사람으로 만들고, 치매(癡呆)나 다른 병에 걸리게 합니다.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비전(vision)을 갖고 산 미국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요 교육가인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말대로 ‘우리 앞에 넘을 산이 없어질 때’ 우리는 인생의 끝에 서게 됩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전이 있는 성도가 모인 교회’는 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장(成長)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비전이 있기에 그 비전을 위해서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게 합니다.
비전이 있기에 그 비전을 위해서 깨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면서 안락하게 잘 사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또 다른 오류는 믿음과 실생활이 따로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연륜으로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보면 분명히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는 성경 가운데서도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장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문제들에 있어서 말씀이 제시해주는 대로 우리가 살기만 한다면, 그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집단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기관이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는데 그 의논들이 성경의 적용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성경은 접어두고 자기의 생각들만을 주장하고 자기의 생각들로 다른 사람의 의견 제시에 반대함을 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송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교인끼리의 다툼이 있을 때 그 판단을 교회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판단을 받는데, 상대방이 막무가내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정말로 옳은 사람이 이것이 억울하여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보기 위하여 세상법정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차라리 불의(=불이익)를 당하라.”고 합니다. “차라리 속아주라.”고 합니다(7절).

한인 교회에 종종 일어나는 교회 건물이나 재산을 둘러싼 목회자와 장로들 간의 갈등과 법적 소송이나 지난 번 한국의 장관부인 옷 로비 사건으로 인한 같은 교회 여집사의 권사에 대한 법적 소송 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법칙에 따라 살고자 하는가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법적 소송을 제기한 적은 없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법칙에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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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訟事)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 하느냐?고 말씀합니다.
‘다른 이’라고 함은 같은 교회 내의 형제 혹은 자매입니다.

세상의 판관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간에 판단 받을 일이 있을 때 이를 세상 법정으로 갖고 가는 대신에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시비거리를 잘 찾는 사람들은 아마 ‘세상 판관 가운데도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그 사람들이 불의한 자들입니까?’고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씀하고자 함은 어떤 문제에 대한 적용 법칙이 세상 법정과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은 배상(賠償)과 보응(報應)의 법칙을 적용하지만, 교회내에서는 사랑과 용서의 법칙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현재는 세상의 일들이 성도와 별로 상관이 없지만(5:12),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이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될 때 성도들이 세상의 악한 자들의 판단의 주체가 됩니다.
말라기서 4장 3절에 “또 너희(=의인)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서로 다투고 세상 법정으로 나가기를 서슴치 않는 일을, 바울은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천국의 기업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같은 교회의 형제나 자매로 인하여 당하는 불이익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작은 일”이란 것입니다.
성도의 천국 기업에 비교하여 “지극히 작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 했습니다.
판단은 보통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데, “천사를 판단한다”고 함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의 지위가 천사보다 위에 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주님의 날이 임할 때 성도들은 그들을 괴롭히던 타락한 천사들이 무저갱에 갇히는 심판을 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과 천사를 판단할 권세까지 가진 성도들이 자신과 교우의 문제를 갖고 그들의 판단의 대상이 될 세상의 불의한 자들에게 판단을 의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교회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세상의 판관은 세상사람들에게는 중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나 바울은 이 사람들이 교회의 믿음의 기준으로는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5-6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 거듭 반문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평상시에 하나님의 말씀 법칙에 따라서 살아간다면 교우들간에 어떤 다툼이 있을 때 이들의 문제를 말씀에 기초하여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이 말씀을 접어놓고 세상의 학식과 판단으로 살아가기에 교회 안의 일이라도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대신에 세상 법정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두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 번째는 형제로 더불어 송사하는 그 자체입니다. 차라리 조금 불이익을 당하면 그것으로 끝날 일인데 조금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두 번째는, 다툼이 안 일어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다툼이 일어나도 교회 내에서 믿는 자의 믿음의 지혜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 지혜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송사꺼리의 근거를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송사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완연한 허물”이 됩니다. 세상 법정에서 승리하더라도, 하나님의 판단 가운데는 ‘패한 자’가 됩니다. 어떤 다툼거리, 송사거리가 있을 때 하나님의 법정에서 진정한 승리는 불의당함을 감수하는 자세입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이 하나님의 말씀 법칙에 따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하지 않고 불의를 감수함이 때로는 죽기보다 힘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불의를 당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불이익이 가장 큰 것 같고, 자신이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이를 감수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참으로 바보같고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이신 마태복음 5장 39-40절에서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訟事)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른 편 뺨을 맞을 이유가 있어서 맞은 것이 아닙니다. 속옷을 빼앗길 잘못을 하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입니다.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용하는 줄 뻔히 알면서 이용당해 주는 것, 상대방이 나를 속이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것,  상대방이 나를 뒤에서 욕하는 줄 뻔히 알면서 그 사람을 품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에게 거기까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8절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의 형제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그와는 반대됩니다. 우리가 오히려 불의를 행하고, 우리가 오히려 속입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삶의 모습입니까?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迷惑)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세상 법정에 나가는 불의를 행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할 때, 그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성도는 세상 살 동안에 당하는 작은 불의를 오히려 기쁨으로 감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하나님보다 세상에 속한 것을 더 사랑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지나치게 쾌락에 취하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ㅡ-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자ㅡ-나, 후욕하는 자--남을 욕하거나 비방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남의 것을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우리가 가질 때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그 믿음이 ‘나의 삶이 어떠해도 좋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그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며 나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에 합당한 자녀되게 하여줍니다.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을 때,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십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설파(說破)한 로마서의 6장 1-2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씀함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죄와 결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송사를 하는 자가 여전히 있고, 음란을 행하는 자가 있음에도 이와 같이 씀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바램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영적인 자녀들로 생각하기에(4:14) 그들이 속히 이러한 잘못됨에 돌이켜서 성령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의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혹은, 바울의 권면을 따라 그러한 삶에서 돌이킨 자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부요한 삶이 약속되고 보장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의나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교회의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리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속임을 당하는 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세상 사람의 눈에는 바보같이 보이는 성도가 될 때,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며, 교회 밖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여유이요 관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