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26, 2013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누가 19:1-10)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누가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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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내를 한눈에 잘 보기 위하여 엠파이어 스태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에 올라갑니다. 시카고 시내의 전경을 보기 위하여는 시얼스 빌딩(Sears Building)에 올라갑니다. 서울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하여는 남산 타우어에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관이나 경치를 더 잘 보기 위하여 높은 곳에 오르거나 더 가까이 가고자 합니다.
오래전에 저의 가족과 일주일간 아리조나(Arizona), 네바다(Nevada), 유타(Utah)와 캘리포니아(California)의 네 주를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경치와 다른 볼 거리등을 구경하였습니다. 자연의 장관들과 신비 등을 더 잘보기 위하여 때로는 높은 곳에 오리기도 하고, 때로는 내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가까이 가기도 하였습니다.
아리조나에서는 세도나(Sedona)에 있는 자연의 바위 위에 세워진 채플(Chapel of the Holy Cross)이 장관이었고, 플랙스태프(Flagstaff)에서 40번을 타고 동쪽으로 35마일에 떨어져있는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자리인 메티오 크래이터(Meteor Crater)를 보기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또한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을 감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오묘함을 느꼈습니다.

유타의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 역시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에 못지 않게 자연 창조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솔트 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의 몰몬교 행정건물(Administration Building) 옥상 위에서 내려다본 몰몬 사원과 그 주변 건물들이 있는 시가지는 참으로 잘 정돈되어있고 아름답다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사원 안과 주변에서 몰몬교 안내원들의 친절과 웃음은 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테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Forest Park) 역시 그 경치가 그랜드 캐년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화씨 70-80도의 초여름의 기온인데도 해발 9500피트(2850미터) 위에 위치한 호수는 여전히 얼음이 얼어있었으며 산들은 눈이 덮여 있었습니다. 요세미테 골짜기(Yosemite Valley)에 있는 두 거대한 폭포는 물보라를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요세미테 폭포(Yosemite Falls)라고 불리는 폭포는 그 폭포의 높이가 700미터에 이른다고 합니다. 샌디에고(San Diego)의 해변에서 넓은 태평양(Pacific Ocean)을 바라다 보면서는 그 건너편 저 멀리에 있을 한국 땅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연경치의 장관과 신비를 보기 위하여 때로는 더 가까이, 때로는 더 높이 오르고, 때로는 더 멀리 운전하여 가보기도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서 보고자 하는 것들을 잘 볼 수가 있었는데, 만일 짙은 안개가 끼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높이 오르고, 아무리 가까이 가더라도 우리의 보고자 하는 바를 밝히 볼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의 모습을 더 잘 보기 위하여 때로는 높은 곳으로 오르고 때로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서 의심의 안개가 걷혀져야 할 것이며 근심의 구름이 사라짐으로 우리의 영의 눈이 밝히 떠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가 보기 원하고 경험하기를 원하는 주님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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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누가는 18장에서 몇 명의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18장 9-14절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세리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18장 15-17절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그에게로 오고자 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8장 18-30절에서는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에 관하여 묻습니다. 18장 35-43절에는 거지 소경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18장에 나오는 네 사람--세리, 어린아이, 부자와 거지 소경의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세리장으로서 그 당시 로마인과 유대인들 모두로부터 멸시 당하고,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동족을 팔아먹는 죄인처럼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더 잘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간 그는 또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영의 눈이 가려져 진리를 볼 수 없고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1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예수님께서 그의 때가 이르매 고난 당하시고 죽기 위하여 갈릴리를 출발하시어 사마리아를 지나 여리고 지방으로 내려오십니다. 이 여리고는 1,400여 년 전에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두 정탐군을 미리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았던 곳입니다. 그 당시 이 지방에 살고 있던 라합이라는 창기는 믿음으로 정탐꾼을 숨겨주고 그로 인해 이방인이지만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2절: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이 여리고에 지금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원래 “의로운 자”란 의미인데, 그 의미 대신에 동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으며 싫어버린 바 된 그입니다.

3-4절: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도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하나같이 메시아를 고대하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 예수란 사람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도 하며, 그가 지금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하여 올라오는 길인데, 이곳 여리고를 지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소문대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따르는 무리들과 구경나온 사람들의 행렬과 더불어 마을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나 삭개오는 키가 작아 제자들과 무리들에 쌓여 걸어오고 계신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생각하다 못하여 예수님을 똑똑히 살펴보고 그가 과연 참으로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이신가 알아보고자 뽕나무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보고자 하되”의 헬라어 동사 “제이테오”(ζητέω)는 “구하여 찾는다, 살핀다, 추구한다”(seek, look for, search)는 뜻입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 보니 예수님의 행렬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고 그 행렬은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그 뽕나무 밑에 오자 멈춰 섰습니다.

5절: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우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인자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의아합니다. ‘아니 저 분이 어떻게 처음 보는 나의 으름을 아실까? 저분이야말로 그리스도 이심이 틀림없어.’
예수님이 삭개오를 이름으로 아신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미리 아셨고, 물위를 걸으식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가룟 유다가 그를 팔 것을 미리 아시고, 그가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미리 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심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삭개오의 집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에시아의 권위가 담긴 말씀이며 구원사역의 강권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임하는 구원의 호가실성입니다.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그를 알아보시는 예수님이 의심할 여지 없이 메시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주저함 없이 급히 뽕나무에서 내려오고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합니다.

7절: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자 수근거립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저 죄인과도 같은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가? 그가 과연 메시아인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심은 당연합니다. 그가 이와 같은 죄인, 멸시받는 자, 낮은 자를 부리기 위하여 오신 까닭입니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나눠주겠습니다. 내가 또 다른 사람의 것을 부당하게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삭개오는 메시아를 만나고 구원받은 기쁨을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이와 같은 기쁨의 표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색하고 기쁨이 없는 살아간다면, 이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그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삭개오의 행위가 의로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신 바 된 것은 그의 행위로서도 아니요 율법으로서도 아니요 할례로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창 15: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와 그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신 것은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녀, 곧 믿음의 자녀임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기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삭개오는 외적으로는 로마인에게 천대 당하고 유대인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불쌍한 죄인이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 메시아를 사모하고 구원받기를 간구할 때, 그로써 메시아를 마음 중심에 영접할 때, 예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그와 그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사역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십니다.
우리가 전에는 “잃어버린 자들”(lost ones)이었는데 예수님을 우리 마음 중심에 영접함에 “찾아진 자”(found ones)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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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키가 작음”은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내적 약함입니다.
우리의 평안함이, 세상으로 향하는 지나친 욕심이, 이생에 대한 자랑과 교만이 우리의 내적 장애요인입니다.

“많은 사람”은 주변적 장애요인입니다.
이들로 인하여 우리는 또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현 사회의 물질만능주의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빈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세상의 많은 유혹이 이러한 주변적 방해물입니다.
이와 같은 내적, 주변적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시며 기쁨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의 눈으로 밝히 바라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체면이나 지위, 그동안의 잘못된 편견일랑 모두 던져 버리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가고자 하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밝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주저함 없이 우리는 급히 내려와 그를 우리 마음 중심에 영접하고, 삭개오와 같이 변화되고 기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누가 10:38-42)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누가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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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E. C. Willard, 1839-1898)라고 하는 여류 사회운동가가 있었습니다. 1839년에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여성이었는데 대학재학 때에는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과 정치가로 꿈을 펼쳐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19세 때 큰 병을 얻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기도 하였는데 그때 병상에서 그녀는 그가 건강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치겠노라고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한 그는 대학을 마친 후 교육자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노스웨스턴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의 교수가 됩니다. 그의 나이 35세일 때, 그는 두 가지 초빙 제안을 받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1870년대) 연봉 2,400달러의 노스웨스턴대학의 총장으로의 초빙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푼의 수입도 없이 그 다음날부터 무엇을 먹을까 염려해야 하는 기독교여성절제회의 시카고 지부장으로 일해 달라는 초빙이었습니다.
밤새 고민하며 이 초빙에 대하여 기도하던 그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압박이 있었고 그는 기독교여성절제회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제회의 금주운동은 당시 종교 사회운동의 중요한 사업이었던바, 그의 활약은 눈부시게 전개되었습니다. 금주운동 뿐아니라 여성지위 향상, 노동자지위 향상 등에도 큰 성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일푼의 보수 자리를 택한 윌라드의 선택은 보통사람에게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 같았지만, 그의 이러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절제운동과 여성과 노동자의 지위향상은 두드러진 것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있었던 땅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간에 가축을 위한 목초지 문제로 싸움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이 롯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절).
이에 롯은 당장 눈에 좋아 보이는 요단 온 들,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하여 떠납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눈에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은 가나안을 택하게 되었는데 이 땅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으로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창세기 25장에서 이삭의 아들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 사이에서 당장의 배고픔을 모면하고자 야곱이 주는 팥죽 한 그릇을 택하고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헌신짝처럼 넘겨줍니다.
이러한 에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과소평가한 잘못된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선택의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생활에서 또 우리 신앙의 삶에서 어떠한 선택과 봉사와 헌신을 할 것인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도 선택의 원리(Principle of Choice)는 중요합니다.
경제학 중에서도 소비자이론(Consumer's Theory)은 선택에 관한 이론입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그의 만족(또는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수입은 제한되어 있고, 그 제한된 수입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선택을 하느냐를 결정합니다. 만족극대화를 위한 선택은 내가 세상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느냐, 하늘의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 교인이긴 한데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닌 사람, 그리고 영에 속한 사람,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인 육에 속한 사람과 교인인 육신에 속한 사람의 돈에 대한 소비선택에는 사실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 즉 교인이긴 한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사람은 그의 생활패턴도 여전히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 내는 돈이 없는데 육신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 헌금을 낸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사람이 교회에 내는 헌금은 아직은 기쁨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내면 하나님이 축복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또는 천국생명보험 정도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교인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간에 지출선택의 가장 큰 차이는 헌금액수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별하여 놓느냐 아니면 쓰고 남은 것으로 헌금하느냐 하는 마음의 차이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같지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신 것은 구별된 제사냐 아니냐는 차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이렇게 큰데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봉사는 아주 잘하는데 이를 드러내기 원하는 사람, 봉사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 봉사를 잘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봉사는 잘하는데 하나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봉사는 전혀 하지 않는데 하나님 말씀은 들으려고 하는 사람, 봉사도 잘 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마르다는 봉사는 잘 하는데 이를 약간은 드러내기 원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말씀 듣기를 원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육의 음식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더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봉사와 대접을 잘하지만 (우리가 알 듯이 순전한 나드향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기 위하여 옥합을 깨뜨린 여인입니다),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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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절: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어느 날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사는 마을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들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북동쪽,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들르겠다고 통보하신 것 같지는 않고 길 가시다가 그들이 생각나셔서 갑자기 베다니로 발길을 향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즐겁기에 그가 베다니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합니다.                                                   

    39절: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갑자기 모셔드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한 식사준비로 마르다의 집은 온통 법석입니다.
마리아도 아마 마르다를 도와 음식을 장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베다니 마을에 사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마리아는 음식을 여러 가지로 장만하는 일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에, 아마 한두 가지의 음식을 만든 후에, 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앉습니다.

    40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도와주던 마리아가 가고, 마르다는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도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를 원하였기에 이것저것 많은 것으로 준비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는 분주한 마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이 더디기에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분주하고 상한 마음은 그의 뜻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데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 대접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을 원하시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원하심과는 무관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면서 그 일이 잘 진행되지 않으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야속한 심정으로 무례를 범합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도중이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
마르다는 마음 속이 너무 편치 않기에 자기 집으로 모셔드린 귀한 손님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41-42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개인적이며 친근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집을 방문하신 손님으로서 그 주인의 잘못됨을 묵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지적해 주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르다의 문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음”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사랑함입니다.

우리도 이와같은 오해로 주님께 잘못을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좋아하시며, 그것을 들어주고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우리의 기도함과 간구함으로 주님을 번거롭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이미 피곤하실 터인데 나까지 주님께 여러 가지로 간구하여서 주님을 더욱 더 피곤하게 해드리지 말아야지 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관심이 육적 양식에 있으셨던 것이 아니었듯이 교회생활에서 우리의 주관심도 먹는 것에 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친교를 위하여 먹고 마실 것이지만 그러나 이 일에 지나친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창립예배나 장로-집사 장립예배에 가보면, 그 교회 여전도회원들이 멀리서 오신 손님들을 예배 후의 식사로 잘 대접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일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예배가 시작되고 강사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도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는 여전도회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설교를 듣는 것보다도 음식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마르다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세상의 것으로 그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경청하여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식사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접이나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하고 기쁘시게 하는 일에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며 그 말씀에 따라서 봉사하고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을 위해서 대접하기를 즐겨하고 봉사하는 일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잘하는 일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봉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은 항상 주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때로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는 것은 우리의 봉사의 초점이 주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나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자기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을 때 불평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봉사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영적 기준으로 판정되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도 이를 다 지켜보시는 주님께서 후에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년조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봉사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헌신은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리되, 우리들이 쓰고 남은 것으로서가 아니고 첫째의 것으로 드리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말씀에 기초하여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도훈련” (누가 10:1-20)

                                                 “예수님의 전도훈련” (누가 10:1-20)

                                                                          1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요, 교회를 벗어나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전도라고 할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 믿는 사람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는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메색 도상에서 빛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이 강조한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이렇게 큰데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유언적인 말인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전도함은 크리스천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인 것을 강조하는데,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바울에게만 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입술을 닫아두고 있는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때는 과묵한 것이 미덕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입술을 벌려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도를 잘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전략이나 책자를 사용합니다.
대학생 선교회(CCC=Campus Crusade for Christ)는 4영리라고 하는 소책자를 사용하여 일대일(man to man) 전도를 합니다. 사영리란 네 가지 영적(靈的) 원리로서 제 1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이고, 제 2는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이고, 제 3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은 그를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이고, 제 4는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입니다. 이 사영리 책자를 전도대상자에게 읽어주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할 의사를 밝히면 그와 함께 영접기도를 해줌으로 끝마치는데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는 경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해서, 실망하거나 위축되기 쉬운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맡은 자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할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안 들이거나 그들의 선택의 몫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복음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이 나중에 그가 들은 복음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경우가 허다히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커네티컷 주에 살 때에는 몰몬교에 속한 사람들과 통일교에 속한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짝을 지어 저의 집 문을 두드리고는 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나이 많은 한국 분들이거나 고등학생 정도의 청년들인데 제가 목사임을 밝힘에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또 문을 두드립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렇게 문을 두드리다가 그들을 안으로 맞아들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눌라치면 목사라도 통일교도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대화하기를 거절당하여도 기죽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나곤 합니다. 우리 기성교회--특히 이민교회 교인들에게 몰몬(Mormon) 교도들이나 통일교에 속한 사람들의 전도의 열정이나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1절: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기도 하시며 전도의 예를 친히 보이신 후에, 70인 혹은 72인을 택하시고 그들을 각동 각처로 둘씩 파송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전도훈련이셨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이들 칠십 인에 의하여  전 세계 각처에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기틀이 마련되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씩 파송하신 것은 혼자 전도할 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기가 죽기도 하여 잘 할 수 없는 것을 두 사람이 할 때에는 왠지 용기도 생기고 실패해도 기죽지 않고 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다시 힘을 얻어 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2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때에도 그랬고 또한 지금도 추수할 일군들이 많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는 교회가 작기에 일군이 적다고 하는데, 큰 교회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 같이 감당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추수하는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간구하되 ‘일군들--전도자들--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의 일군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추수할 때 누구나 다 일군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나이나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할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할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우리를 주장하시며 우리로 하나님의 일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어보실 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한 것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절: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께서 70인을 파송하시는데 아직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처음 내어보내시는 까닭에 그들이 전도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할 것인지, 전도를 하다가 해를 당하지는 않을 것인지 염려되시기도 합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람의 준비를 갖추지 말고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존하라는 뜻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전도의 중차대한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문안하는 일이라도--에 정신을 빼앗기거나 다른 사람과 노닥거리다가 전도의 일 그 자체를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5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전도할 집에 들어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전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에서 바울은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에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                                                   

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6절: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평안할지어다”라고 했을 때 그 집 사람이 평안을 받아들이면 그는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기에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지만, 그가 평안을 거절할 때 그 평안은 전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됩니다.

7절: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전도할 집에 머물며 전도자로서 그 집이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그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8-9절: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영접하는 자와는 교제의 떡을 나누며 병자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준비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10-11절: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영접하지 않는 자와는 상종하지 말되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상관이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은 전할 것이며, 이리할 때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 것이며 후일에라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12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저 날”이라고 하심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움이 믿는 사람에게는 축복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징계의 날이 될 것입니다. 소돔은 그들의 죄악으로 멸망당한 도시이지만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는 동네보다 가볍다는 뜻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말씀하심입니다

13-14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고라신과 벳새다는 이스라엘의 고을들인데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아니할 때 이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클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인의 지방인데 이들 이방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이 선포되었다면 이들은 오히려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로와 시돈은 징계를 면할 수가 있습니다.

15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종종 다니시며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한 곳인데, 그곳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때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뜻입니다.

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는 그들을 파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들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이요, 또 이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7절: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파송하신 70인이 돌아와 전도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일에 놀라고 기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에게 명령하였더니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신나서 보고합니다.

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미 사단의 권세가 추락한 것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곳에서 사단이 성도를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는 곳에서 사단이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19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모든 사단의 권세를 제어할 권능을 아울러 주셨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의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이러한 권능이 주어집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우리에게 왜 주어집니까? 우리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때 우리의 대적을 물리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러나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맺은 전도의 열매가 얼마나 큰지 하늘에 기록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해서, 우리는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인데, 이것이 하늘나라에서의 우리의 자랑이요 면류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전도는 우리가 해도 그만, 하지도 않아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반드시 행하여야 할 필수사항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가까운 친구가 우리와 함께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안타깝겠습니까? 우리의 가까운 사람으로 시작하여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의 진리를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랑이요 면류관이요 상급입니다. 전도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백부장의 믿음” (누가 7:1-10)

                                                 “백부장의 믿음” (누가 7:1-10)

                                                                          1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줄 압니다. 쉰들러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있는 유대인들을 살려내기 위해 한가지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는 수용소의 독일군 장교에게 뇌물을 주어 유대인들을 자기 공장에서 일을 시키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쉰들러는 유대인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을 나치의 수용소에서 자기의 공장으로 빼내어 살려냈다는 실화입니다. 전쟁 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유대인들이 쉰들러를 의로운 이방인으로 인정해주고 그의 기념비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쉰들러도 배타적인 유대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영접을 받은 것입니다.

                                                                          2
성경 안에도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켜 칭찬을 받은 자가 제법 많습니다. 그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는 백부장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에게 들려 왔습니다. 그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에 마음 문을 열고 오늘 본문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인생 길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로마 군대 백부장에게도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자기 집의 하인 종이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에서 가버나움으로 파견된 군대의 장교로 “백 명의 지휘관”을 말합니다.
신약에 소개된 대부분의 백부장들은 좋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책임자도 백부장이었는데 누가복음 23장 47절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을 비롯해 백부장에 대한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바울이 로마까지 이송당할 때 동행하던 백부장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어떤 신앙의 사람인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백부장은 사랑이 앞서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2절에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시의 종들은 짐승 취급도 받지 못하였지만 백부장은 그 하인이 병들어 눕자 안타깝게 여깁니다. 자기 하인의 질병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 왔습니다. 참으로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좋은 인격의 그릇입니다.
그 당시 하인만 무시를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유대인이기에 무시를 당할 수 있는데 그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인의 치료를 부탁한 것은 하인을 뜨겁게 사랑을 하였다는 증거입니다.

5절에 보면 백부장이 유대인을 사랑했는데 이는 아가페의 즉 하나님과 같은 이타적인 사랑을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위해서도 회당을 세우고 이방인이면서 유대인들에게 선행을 많이 베풀었으며 그들에게 존경받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인종적, 종교적인 편견을 뛰어 넘은 자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유대인 장로들이 간절히 구하기를 이 백부장에게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즉 은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배타적인 유대인들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은 이방인과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의 친구, 동역자가 있는지요? 여기서 백부장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요청에 수긍하여 백부장의 집을 찾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종을 헬라어로는 둘로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이 종을 헬라어 파이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파이스는 어린아이 소년이란 뜻입니다. 백부장은 자기 종을 아들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곧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입니다. 어떤 연유로 이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종의 신분인 이 하인을 상당히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을 향한 열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가진 것을 인해 사람을 차별하는 교만이 없습니다. 노예로서 가치가 없는 상태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어떤 병인가에 대해서 마태는 중풍병(마8:6)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죽게 되었다고 기록함으로 그의 병이 심각한 상태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끼리끼리 주파수가 맞는 사람만 사귀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탈무드에 장사할 때 물건을 먼저 팔려고 하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지금도 그 사랑을 주고 받는 복을 누리시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백부장은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와 간구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사랑이 앞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종을 위해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세가 있습니다. 백부장이 장로들을 대신 보냈던 것은 아마도 로마 군인의 신분으로 예수께 다가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 “주여 내 하인이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자기의 부모나 자신의 문제, 자기 가족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집의 종, 노예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이는 큰 믿음이 아니고서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실로 백부장은 겸손함이 앞서는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하루는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받는 성 어거스틴에게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어찌해야 선생님처럼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때 어거스틴은 겸손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제자들이 둘째는 무엇이냐 물었을 때에 어거스틴은 둘째도 겸손이라 답했답니다. 그럼 세번째는 무엇입니까? 결국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면 겸손해 집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됩니다. 모세의 겸손도 그렇습니다. 나는 부족하다라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울이 바울 즉 작은 자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마태 11장29절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셔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실려고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을 만나기에 부족하다고 표합니다. 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누가18장에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중 누구의 기도를 들었다고 주님은 말하시고 계십니까?

6절에 유대인 장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함께 가실새 백부장은 이 집에 거의 도착을 했을 때쯤 다시 친구들을 보내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7절에 있는 말씀처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입니다. 자신은 이방인 군인이고 예수께서는 메시야인데 감히 자신이 예수님께 다가 나설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셋째, 백부장은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소문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하나이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말에 대한 권세와 복종을 압니다.

백부장의 이 고백은 예수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즉 주님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믿은 것입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나을 줄 믿습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히브리서11:1의 말씀대로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합니다. 말씀만 하시면 공간을 초월하여 나을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혼까지 깨끗해집니다. 7절 말씀만 (에이페 로고)은 [말씀으로 명령하소서]입니다. 예수께서는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실 때도 모두 명령으로 고치셨습니다. 자신의 하인의 병도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이런 믿음으로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습니다. 9절에 예수께서 이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즉, 기대 밖의 놀라움을 표시하십니다. 예수님이 감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께서 과연 네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실 만한 분이 이 자리에도 계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정도로 감동시킨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는 이 부분에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명령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이는 "뒤돌리다, 원래대로"란 뜻입니다. 여기서는 "이미 병이 낳았다"는 말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으로 인해 병들고 죽어가는 종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오늘의 이 사건에도 편견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이나 칭찬받는 믿음이 있다면 그 결과 이런 기적을 체험하며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구약에도 믿음으로 요단강에 법궤를 메고 들어갔더니 강물이 멈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여리성을 돌았더니 성벽이 무너지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러 가니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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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라고 선포하신 즉시 하인의 병이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런 백부장의 편견없는 사랑과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주님을 감동시켜 칭찬받은 백부장의 믿음이 오늘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 6:20-26)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 6:20-26)

                                                                             1
요(堯) 임금이 화북지방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땅에 사는 봉인(封人)이 요 임금에게 “임금님께서 재물을 많이 취하시며, 아들을 많이 낳고, 장수하시도록 기원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요 임금이 미소를 띄우며 대답합니다. “그 뜻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재물이 많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가신 일이 많을 것이며,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끊어질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오래 살면 그만큼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겠는가? 이것들은 덕을 쌓는 데는 한갓 쓸모 없는 것들이오.”
재물, 많은 아들들, 장수가 세상 복의 기준이라고 할 것이지만 이것들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곳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재물도 많고 자식들도 여럿 있어서 행복하여야 할 터인데 그 자신은 전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자식들은 여러 가지로 속을 썩여서 없느니만 못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은 끝도 없어서 늘 만족이 없습니다.
그가 하루는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남루한 옷을 입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부자가 이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은 무엇이 그렇게 좋길래 덩실덩실 춤을 춥니까?” 가난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나에게 세 가지 기쁜 일이 있어서 춤을 춥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은 대답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으로 지으신 것이요, 둘째는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요, 세 번째는 지금 나를 부러워할 사람은 없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너무나 좋아 춤을 춥니다.”

                                                                           2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는데 비하여 누가복음 6장 20-49절은 평지수훈(平地垂訓)이라고 불립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 (언덕)에서 설교를 하셨다고 했는데(마태 5:1), 누가는 평지에서 설교하신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복음 6장 17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平地)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성이 있고 역설적입니다. 그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갖고 있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은 그것을 이 세상을 사는 관점에서 풀어 해석하고자 하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20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되기 위하여 예수 믿고 부자 되기 위하여 교회 나오는 사람에게 이 말씀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겠습니까?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해석하였는데(마태 5:3), 누가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누가 6:20)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건 “심령이 가난한 자”이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가난으로 인하여 세상에 큰 소망을 두지 못하는 자라도 그에게 임할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와 같이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없는 자가 바라볼 수 있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너무 커다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죽음이 참으로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남겨놓고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커다란 재산을 관리하여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 부를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력함과 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것을 끝까지 붙들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물질적인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까?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에 의존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더 클 때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3-24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 10:23-25; 누가 18:24-25).
왜 그렇습니까?
천국으로 향한 문은 좁은 문인데 부자는 양손에 이것 저것 움켜쥔 것이 많아서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의 관련구절을 보면,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고,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태가 영적인 갈급함과 애통함에 관심을 가진데 반하여, 누가는 육적인 주림과 울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영적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배부름을 얻는 것과 같이 육적인 굶주림을 당하는 자에게도 주님께서 배부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슬픈 일을 많이 만나는 성도마다 위로하시고 웃을 일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을 찾고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사람들의 판단과 기대와 다릅니까?
사람들이 판단할 때 ‘그 사람은 무난한 사람이야’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함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책망함을 받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고 멀리하고 악하다’ 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네가 나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였구나, 버린 바 되었도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어서 이리로 오라’고 하는 주님의 극진한 대접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 증거한 사람들 중에 미워 버린 바 되고, 갇히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외칠 때,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심한 푸대접을 받습니다.
미가야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바로 전할 때 그는 아합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인의 궁중 선지자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아합왕에게 싫어 버리고 갇히는 바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할 때 그의 예언을 싫어하는 방백들에 의하여 매를 맞고 옥에 갇힐 뿐만 아니라(렘 37장) 진흙 구덩이에 강제로 처넣어짐을 당합니다(렘 38장).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매 므낫세왕에 의하여 톱으로 베임을 당합니다(히 11:37; 위경 ‘이사야의 순교와 승천’ 참조).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할 때 유대인들은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돌로 쳐죽입니다(행전 7장).
베드로와 바울, 기타 예수님의 제자들의 순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자신도 세상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여느 중한 범죄자들 중에 한명과 같은 여김을 받으셔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상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주님을 인하여 세상사람들은 미워하며, 멀리하며, 욕하고,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도 --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칭찬은 세상사람들의 것과 다름을 아시기 바랍니다.

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예레미야가, 엘리야가, 아모스가, 미가야가, 기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외치던 많은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매를 맞고, 욕을 먹고, 싫어 버린 바 되었습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고, 주님을 증거하다가 나에게 욕이 돌아오고 화가 임할 때 슬퍼하거나 상심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하며, 바른 증거를 받을 때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주위의 박해에 기뻐하고 뛰놀아야 할 것인데, 이는 박해가 심한 만큼 하나님의 상도 큰 까닭입니다.

24절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부요한 자”는 그의 삶의 가치가 온통 재물에 쏠려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을 지키고 모으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감수하고자 합니다. 그에게는 재물보다도 더 귀한 것은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보다도 재물에 우선을 놓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화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25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의 축복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배부른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배고픈 자”--“주린 자”를 돌아봄이 없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자기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교만한 맘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임할 화를 선포하십니다.

“이제 웃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세상의 일로 웃는 자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온통 세상에 쏠려 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짓밟고 자신의 권세와 부를 쌓아갑니다. 이러한 자는 결국에 애통하며 울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26절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의외적인 말씀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세상 기준으로는) 원만하고 성격이 좋은 사람일 것인데 이러한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남이 싫어하는 소리는 안하고 남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 하는 사람일텐데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말하여야 할텐데 듣는 사람이 그것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듣기좋은 소리를 함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교회지도자로서 목사님이 생각해봅니다. ‘내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일본사람들이 나와 우리 교회사람들을 싫어하고 욕하겠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되나? 또 내가 거부함으로 인하여 우리 교인들이 다치면 쓰겠나?’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작정합니다.
이 목사님의 결정이 바른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거짓선지자들에 대하여 요한1서 4장 5절에서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가 있습니다.
참선지자의 선포하는 말이 귀에 거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의 말은 은근하고 귀에 솔깃합니다. 따라서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은 거짓선지자의 말을 따라갑니다.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에 미가야라고 하는 참선지자와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인의 거짓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미가야는 참말을 선포하니 그의 말이 악함과 허물투성이인 아합왕의 귀에 좋게 들릴 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400인의 궁중선지자는 온갖 좋은 소리로 아합왕의 귀를 즐겁게 해줍니다. 아합왕이 거짓선지자들을 좇을 때 그는 아람군대와의 길르앗라못 전투에서 패하여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판단과 칭찬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절 구경을 갔는데 부처님께 절하지 않으면 중들이 싫어한다고 부처님께 절하는 크리스천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좋은게 좋은거 아닙니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칭찬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화가 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욕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을 받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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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이제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paradox)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세상사람들이 싫어하는 모습을 우리가 즐겨 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비로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아니 오히려 더 움켜쥐고 하나님께 속한 것도 얻으려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미 부요한 자이며, 이미 배부른 자이며, 이미 웃는 자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세상 것으로는 가난하여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모하며, 지금 세상에서는 주린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양식을 사모하며, 현재 세상에 속한 것으로는 기쁨을 삼을 수가 없어서 우는 자이기에 하나님 안에서 웃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누가 5:1-11)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누가 5:1-11)
                                                                           1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그를 따라다닌 사람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를 반대하고 비난하고 고소하기 위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병 나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모세의 율법을 범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 말씀과 행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고자 함이 없었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꼬투리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구경 삼아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을 보고 놀라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태 12:39)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현세의 문제를 해결 받고 현세의 축복을 받기 위해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갔더니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고 배고품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도 자기를 드리고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 받고 현세축복의 목적을 위해서 따라갈 뿐이지 그 이상의 헌신을 하고자함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과 생각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으면 쉽게 떠나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좇음’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따르다 보니까 욕심이 나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시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부르심(outer calling)’입니다. 이 부르시는 음성은 누구나 다 듣습니다. 비판하고 트집잡기 위하여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이적을 구경할 요량으로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현세 문제해결과 축복을 위하여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라다닌 사람도 들었습니다.
현재의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되, 설교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도 듣고, 구경 삼아 방청객의 입장으로 앉아 있는 사람도 듣고, 현세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듣고,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듣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삶이 변화되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교회생활을 합니다.
왜 부르심을 듣고도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지 아니하며 증거하지 아니하며 삶의 변화가 없습니까?
이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inner calling)’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귀와 구경꾼의 눈과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만 갖고는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자기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내적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말씀과 삶을 좇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르심의 장소(場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저 숲 속의 현자의 은둔처가 아니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어부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대상(對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되 세상의 학문이 많은 자나, 종교 지도자나, 부자나 다른 특권 계층의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스스로 평범 이하의 우둔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되 일상적인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혹은 지혜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의 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되 그들이 생업에 분주하게 종사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그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                                                       

든지(마태 4:18; 마가 1:16) 또는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누가 5:2).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마태 4:21; 마가 1:19).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을 때 ‘너희들 정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지 않을래? 내가 너희에게 할 일도 주고 또 먹을 것도 줄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거나 사양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냐고, 자녀들 학교 따라다니랴, 음악레슨 시키랴, 운동시키랴, 또 차 태워주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의 때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때,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붙잡고 있는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하십니다. ‘나를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마태복음 8장 21-22절(누가 9:59-60 참고)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쑴하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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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도 그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4장에 보니까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확장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었지만 혼자서 감당하시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하나님 사역에 동참할 때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각 촌으로 제자들을 파송하신 일들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2,000년사를 살펴볼 때,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헌신된 성도들의 자기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을 드리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계속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을 내놓을 각오가 된 헌신된 성도가 많은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것입니다.

    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무리가 몰려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눅 4:43), 때로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힘을 재충전받으셨습니다.
그가 갈릴리 호수(또는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신 때에도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2절: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두 배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부의 배입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피곤한 육신과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시몬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도록 허락하였는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그의 말씀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권세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시몬아, 내가 네 배에 올라 타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매, 시몬은 “선생님, 그리 하옵소서.”라고 순순히 대답했을 것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몰려든 무리들의 관심사는 병 낫기와 귀신들림에서 벗어남과 세상에서의 양식을 구하는 것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전파하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에게로 그의 관심을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에 오르신 것은 그에게 몰려드는 인파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장차 그의 사역에 동역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성경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릴 장소까지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어려서부터 갈릴리 바닷가에 살아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고향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입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을 방문하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그 앞에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가만히 있지 못할 그인데, 오늘 이 낯선 사내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매, 그는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행하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분이 능력이 많다고 하길래 그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에는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까지는 그보다 낫다고 생각할 리 없는 시몬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절망감과 허탈함에서 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이력이 난 그였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을 때 그는 참으로 지치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그에게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낯선 남자의 권세 앞에 순종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그렇게 할 때 고기를 많이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앞에 계신 예수님의 권위가 그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기대에 앞선 순종과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약속들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데, 당장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습니다.
그러하더라도, 그 약속과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붙잡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함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그가 붙잡고자 한 것을, 믿으려고 한 그것을 얻게 됩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의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심히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시몬의 배와 함께 나간 다른 배를 불러 함께 고기를 담았는데, 그물에 걸린 고기는 두 배를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릴 때 이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10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얻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시몬은 고기를 많이 잡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내게 말씀하신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분이 누구시길래, 나의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고, 자연의 모든 현상까지도 아신 단 말인가?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시몬뿐 아니라 이 광경을 목도한 주위의 어부 모두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두 배 중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두 배를 가득 채운 큰 물고기를 싣고 두 배가 호숫가로 나오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놀라매 달려와서 함께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4:21; 마가 1:19 참조).

시몬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호칭이 “선생”(ἐπιστάτα)에서 “주님”(κύριε)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본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가르침을 배운 제자로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경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분은 그저 “선생”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분 같이 여겨졌습니다. 해서, “주여”(κύριε)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께서 시몬을 위시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에 속한 사람의 수를 늘려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심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이요,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만선(滿船)의 배를 저어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더 이상 고기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까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요 구원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릴(=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그물을 깁던 아버지까지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물은 어부의 생업의 중요한 수단이며, 배는 어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재산이요, 부친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포기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도구, 재산과 사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좇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세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follow)’, '동행하다‘(accompany)의 의미와 함께 ’제자가 되다‘(be a disciple)는 뜻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이러한 행동을 하게 했습니까?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었기에, 고민과 망설임 없이 가장 중요한 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삶에 놀라운 변화가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업을 모두 포기하고 다 목회자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목사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세상 기업을 경영하는 가운데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놀랍고 은혜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떤 주의 일꾼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혜롭게 사용하게 하시며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간 베드로는 후에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가복음 10:29-3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바른 목적을 위하여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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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를 좇아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전승(傳乘)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안드레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로써 복음이 세계로 전파됨에 밑거름이 되고, 요한은 소아시아 서해안의 한 섬 밧모섬에 귀향당하고 그후에는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임을--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앞뒤를 재지 않는 단순한 마음(simplicity)과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하는 가슴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으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with spirit and truth)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4:24).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며, 여러분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마음을 드리며 여러분의 가장 귀한 부분--시간, 몸, 재물과 생명을 희생하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내적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망설임과 주저함 없이 주님을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