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14, 2014

“겉사람은 후패하나” (고후 4:16-18)

“겉사람은 후패하나” (고후 4:16-18)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여서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죽음이라는 이 세상 삶의 종착역(終着驛)입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진행하는 속도가 나이와 비례합니다. 다섯 살 아이는 시속 5마일의 속도로 진행하기 때문에 구경할 것 다하면서 가는 데도 여전히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종착역이 영원히 이르지 않을 곳으로 여겨집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시속 20마일의 속도로 달립니다. 시속 20마일이래 봤자 그렇게 속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직도 창밖을 통하여서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한눈을 좀 팔더라도 생이란 차를 운전하는 데 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마흔 살 장년의 나이에 이른 사람은 40마일의 속도로 달려가기에 이제는 제법 속도감을 느끼며 자기가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음을 느끼나 아직은 여유가 있는 듯이 주위를 둘러봅니다. 예순 살이 넘어 60마일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은 이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딴전을 피우며 운전하다가는 사고가 날 것입니다. 전에는 이것저것 다 둘러보아도 아직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 모든 사물이 휙휙 지나가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종착역에 이를 것이 점점 가시화(可視化)됨에 따라 조금은 초조하고 불안하여집니다. 조금 더 나이 들어 팔십이 지나면 이제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고 했습니다.
속도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생에 대한 후회감과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을 세상에 대한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생의 종착역 뒤에는 분명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련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많아짐은 어쩐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요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6-1900)의 「도리안 그래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란 소설을 잘 아실 것입니다.
평생을 외형적인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겉사람이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도리안 그래이는 소원대로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의 초상화(肖像畵)가 대신 나이를 먹어갑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젊고 아름다운 용모를 유지하는 도리안 그래이를 칭송하지만 자기의 서재에서 추하게 늙어가는 그의 초상을 혼자서 확인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그는 분(憤)을 삭일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일그러지고 추하게 변한 자기의 초상을 칼로 찌르고 또 찌릅니다. 그랬더니, 초상은 변하여 그의 젊을 때의 미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대신에 자신은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초상화의 늙고 일그러지고 추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죽어갑니다. 도리안 그래이는 겉사람으로 영원히 아름답고 젊은 모습을 간직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겉사람이 젊음을 간직하는 대신에 그의 속은 죄와 허물의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이 되어 그의 초상화에 반영된 것입니다.
 
2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4장에서 “낙심하지 아니하다”를 세 번(1, 8, 16절) 반복하고 있습니다.
반복(反復)은 강조(强調)를 표현하는 것으로써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낙심해서는 안 되며 낙심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1절에 “이러하므로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했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맡은 자이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빛의 자녀로서 밝고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했는데, 이는 우리 미련하고 연약한 인생이란 육체에 ‘이 보배’-하나님의 영광 (또는 영광을 아는 빛)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능력의 복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할 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속사람을 날로 새롭고 강건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함과 주장함을 받는 사람은, 따라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매일 새로워짐을 경험합니다.
제가 아직 한국에 있을 때 한 미국인 선교사를 알고 지냈는데 그분의 이름이 아일라 깁스(Ila Gibbs)입니다. 이분은 당시 60세의 나이에 인공심장을 소유하신 분이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사시면서 서울 영락교회 청년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고, 또 매주 목요일마다 광주에서 인천까지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시면서 4시간의 거리를 보수도 받지 않고 오셔서 저희 교회의 선교사 지망 청년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영어성경 가르치기가 끝날 때쯤 되면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숨도 몰아가면서 쉬시지만, 저의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시고 난 다음날 아침은 또 새로운 기력을 회복하십니다. 그리고는 명랑하고 활기 있게 저에게 인사를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매일 하루 분량의 신선하고 새로운 생기를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주신다’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나이듦에 따라 얼굴과 목에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백발로 바뀌어감이 반드시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현상이지만은 않습니다. 정작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나이가 듦에 따라 자기는 무용(無用)한 사람이라, 무익(無益)한 사람이라,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정신의 노쇠(老衰)입니다.

바울이 16절에서 말씀하는 겉사람(ἔξω ἄνθρωπος=outer man)은 사람의 육체와 함께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배를 받는 영역입니다. 속사람(ἔσω ἄνθρωπος=inner man)은 사람의 깊은 곳, 곧 영(靈)의 영역인데, 하나님의 사람은 속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2-23절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의 법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 아래 놓이기를 원하는데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배를 받는 지체(肢體)라고 표현된 겉사람은 죄의 법 아래 놓여있고 사단의 유혹으로 나를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성령의 다스리심 아래 놓여있는 속사람은 이 세상 임금인 사단도 어쩌지 못하는데, 죄의 법 아래 놓여있는 겉사람은 끊임없이 미혹당합니다.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겉사람의 껍질인 육체만 후패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의 미혹 앞에 겉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후패되어 갑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기서 몸이라 번역된 헬라어 소마(σώμα)는 사람의 육체(사륵스, σάρξ)와 생각과 의지를 포함한 겉사람 전체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에게는 겉사람의 활동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나의 삶에서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기 전까지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겉사람에게 지배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나의 속사람의 바람대로 생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6절에서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through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강건하게 해달라고 간구드리는데, 이는 성도의 속사람은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에 놓인 까닭입니다. 이 속사람이 성령을 통하여 강건하여 진 사람은 그의 주장과 생각을 성령께 양보함으로써 겉사람--성품--까지 변화되어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말씀을 사모함과 하나님과 기도로 깊은 교제를 가짐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러할 때 육체라는 겉사람의 껍질 속에 감추어진 겉사람의 알맹이--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는 우리의 자아(自我)는 속사람과 함께 새로워지고 강건하여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 바울은 이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겉사람)도 살리시리라.”고 역설(力說)합니다.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은 평안하고 유복한 가운데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높이기 보다는 자신을 높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련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지 않고, 찾지 않고 있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때로는 환난을 주심으로 강권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어려움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고 말하실 분은 오히려 그 마음에 걱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고, 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잘못을 범함에도 부모의 징계가 임하지 않는 경우는 그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여 버린 자식으로 여길 때입니다. 혹은 참아들이 아니라 의붓자식일 경우입니다.
징계의 수단으로서의 고난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거나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생에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잠시 뿐이요 경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현재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것이며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장 큰 고통도 생의 종착지에 다다를 때에 그칠 잠시 뿐의 고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턴넬(Tunnel)의 고통이요 다른 하나는 동굴(Cave)의 고통입니다. 턴넬의 고통이란 끝이 있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끝없이 긴 것같지만 어둠의 연속이던 턴넬의 끝에 다다를 때 밝음이 오듯이 사라질 고통입니다.
동굴의 고통이란 끝이 없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항상 그 동굴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중하게 여겨지건 경하게 여겨지건, 모두 끝이 있는 턴넬의 고통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 턴넬의 길이는 짧습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연단의 한 방편으로 여겨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를 발합니다.
동굴의 고통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속적인 것인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끝과 함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고통이란 육체의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영원히 죽는(eternal dying), 그러나 죽음과 고통의 끝이 없는 영속적인 죽음이요 고통입니다.

이생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이 아무리 크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잘 견디어나가는 사람은 이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현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각종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중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중한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찬송하며 산 사람에게는 그 중한 환난이 경한 것으로 여겨질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는데,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위로의 말씀을 합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다른 고난이나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할 것은 우리의 바라보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지나갈 잠시의 영광이나 기쁨이나 평안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인이 남편을 병으로 잃고 외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청난 빚까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단 5분만이라도 하늘 나라를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이 고통을 견디겠나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그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네게 하늘 나라를 보여주면 너는 지상에서 단 일초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게 된다. 고통을 참고 견뎌라. 하늘 나라는 반드시 있단다.” 이것이 위로가 되어 그분은 소망 중에 그에게 임한 고통을 잘 견디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현재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은 다만 잠시 뿐이요 지나갈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과 상통하는 크리스천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4-25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잠간이면 지나가는 현재의 세상에 속한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상과 기업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3 
늙음에 관한 글입니다. “당신은 마흔 살에도 늙을 수 있고 여든 살에도 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이에서도 만일 당신이 늙었다고 생각하거나 배울 것을 모두 배웠다고 여길 때, 당신은 정말 늙은 것입니다. ‘나는 너무 늙어서 그것을 못해’라고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내일을 약속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청년의 활동에 아무 흥미를 못 가질 때,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자기가 말하고 싶을 때, 달콤한 옛날들이 회고될 때 당신은 정말 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사람의 속사람은 성령께서 다스리심으로 인하여 매일 새로워집니다.
이 사람은 겉사람의 껍데기인 육체의 늙고 병듦에도 낙심하거나 소망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을 무용지물로 여기지 않을 것인데, 이는 속사람을 주장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겉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날마다 새로워지고 강건하게 되고, 소망 중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이 사람은 또한 현재에 환난이 임하더라도 온전히 잘 견딜 것인데 이는 그가 바라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한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매일 속사람이 강건하고 새로워지는 삶을 살고 겉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건강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찾아 행하되 하나님의 축복하심 가운데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15)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15)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
이탈리아의 위대한 바이올린 주자(奏者)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가 수준 높은 청중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이올린의 줄 하나가 뚝 끊어집니다. 순간 청중들은 깜짝 놀랍니다. 파가니니가 이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숨을 죽여 가며 주시하고 있는데,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또 한 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래도 파가니니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을 가지고 연주를 계속합니다. 얼마 안 있다가 세 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집니다. 파가니니는 잠시동안 연주를 멈춥니다. 그런 후에 바이올린을 한 손으로 높이 들고는 “줄 하나와 파가니니”라고 외칩니다. 그는 다시 노련한 기술과 뛰어난 솜씨로 그가 선택한 곡의 연주를 마저 끝냅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그에게 보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에도 이와 같이 줄이 계속 끊어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출세의 줄이 끊어지고, 건강의 줄이 끊어지고, 금전의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소망 중에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의 줄’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의지하던 장로님이 등을 돌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권사님이 뒤에서 그를 비방하고, 열심히 도와주던 집사님이 멀어지면, 그의 목회가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 그 교회는 그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던 것이 하나 둘 끊어질 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줄’입니다. 장로님은, 권사님은, 집사님은 목회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지만 그를 사랑하사 외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속물(代贖物)로 주시고 그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항상 변함이 없으십니다. 목회자가 이를 깨닫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 다시 전적으로 매달릴 때 그는 그가 감당하는 목회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고자 할 때 그에게 철저한 실망과 배반을 경험케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이러할 때, 이 목회자가 경험하는 철저한 실망과 배반은 그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쓴 약’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담임목사님이 아니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때로 실망하고 때로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목회자가 증거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전혀 실망함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온전하시고, 홀로 기쁨과 소망의 근원(根源) 되시기에 그렇습니다.

2
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ἐν ὀστρακίνοις σκεύεσιν, in earthen or clay vessels)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보배”란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또는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해석은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이고 드러나니까 어떤 것으로 해석하여도 좋습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this precious treasure--this light and power that now shine within us(이 귀중한 보배--즉, 지금 우리 안에서 비취고 있는 빛과 능력)”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우리 인간의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육체입니다.
우리의 부서지기 싶고 나약한 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귀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고 생명을 주는 복음을 증거할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은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생명의 복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사건을 잘 압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괴롭히던 미디안과 싸움을 하고자 할 때 기드온에게 모여든 백성의 수가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명하시어 이중 2만 2천 명을 돌려보내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사기 7장 2절은,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自矜)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일만 명을 물가로 내려가게 하시고 그들이 물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서 두 그룹으로 구분케 하십니다. 즉, 물을 마시되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과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개의 핥는 것같이 핥아먹는 자들로 나누게 하십니다. 물을 핥아먹은 사람의 수가 삼백 명이었는데 이 삼백 명만으로 수십만 명의 미디안 군대와 대적케 하십니다. 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 군대 진중에 들어가서 그들을 치는데,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세 대로 나뉘어서 미디안 군대의 진중에 숨어 들어간 삼백 명의 용사가 일제히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할 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적군들끼리 서로 칼로 죽이는 역사를 이루시어 기드온과 삼백 용사로 큰 승리를 거두게 만드십니다.
삼백 용사가 든 항아리의 영적 의미는 사람의 육체요,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횃불은 성령의 불--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빈 항아리와도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되 성령(복음)의 능력으로 채우셔서 ‘이 세상 신(=임금)’인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복음의 능력과 빛이 어두움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심은 이 세상 임금을 물리치고 구원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짐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느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할 수만 있으면 만사형통(萬事亨通)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평안하고 유복한 삶을 바람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항상 그렇게 평안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험산준령(險山峻嶺)이 놓여있고 연속적인 파도가 몰려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원치 않는 환경과 형편 가운데 놓여질 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의 자세와 내면의 상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그의 심령을 가득 채워서 찬송이 나옵니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가 469장 4절)

바울의 삶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바울을 욕하고 중상한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확신하기에 싸이지 아니합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사역한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해서, 목회자로서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내게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낙심하지 않음은 사단의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고자 함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핍박과 환난이 몰려옵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당하는 사역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같이하시고, 말씀하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버려진 자가 아니라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심을 더욱 견고하게 느낍니다.
바울이 당하는 환난이 극에 달하여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가혹한 태형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하고, 배가 풍랑에 파선하여 그의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에도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회의(懷疑)하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에게 영생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습니다.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죽인 것(τὴν νέκρωσιν τού Ἰησού)”이란 바울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the death of Jesus, RSV, NIV; the dying of the Lord Jesus, KJV)입니다. 따라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늘 삶 가운데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삶 가운데 늘 생각하여 깨달아 안 사람에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의 놀라우신 은혜가 그 가운데 나타납니다. 성령이 이의 보증(保證)이 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4-5절에서 바울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탄식할 것이 없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를 살리시는 이의 영이신(롬 8:11 참조) 성령께서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이를 우리 마음에 증거해 주십니다.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산 자”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효력)을 바라봄으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자입니다(요한 5:24 참조). 육체적 죽음의 위험에 처해짐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그가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서 다른 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생명)을 우리 마음에만 간직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두움(=사망)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도 빛(=생명)을 비추기 위하여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자 함입니다.
어차피 육체는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이란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직면하게 되는 죽음의 위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증거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북한에 숨어 들어가서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그 중에 한 사람이 증언하는 북한에서 행해진 공개처형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 사람의 크리스천이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공개처형장에 끌려오기 전에 이미 두들겨 맞아서 온 몸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을 개를 끌 듯 질질 끌어오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속주머니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작은 성경책이 땅에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침내 총살형을 당하였는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태연하고 평안하여 보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육체적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을 강건케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保證)을 그들에게 보이신 까닭입니다.

13절에 “기록한 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고로 또한 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기록이란 시편 116편 10절을 가리킵니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그의 믿음의 고백은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7-8절).”고 함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고로 증거하겠다고 서원합니다.

바울도 이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구원을 베푸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증거해야 할 것인데, 그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며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길가에 늘어선 무리들과 함께 제자들은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누가 19:38)고 소리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 19:40).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하여 잠잠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케 하십니다.

14절에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믿는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 그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 20장 5절은 ‘첫째 부활’이라고 했는데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고 거룩한 것은(계시록 20:6)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며 면류관과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랑과 상급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이는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여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인하여는 우리에게 자랑과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항상 그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들이 바울의 복음 증거함을 듣고 받아들여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까닭입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그들을 권면할 때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15절에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에 처해지기를 자청하고 그의 믿는 바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기에 힘씀은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은혜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져서 더욱 더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발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더욱 더 커다란 영광을 돌리고자 함입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처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비방은 우리 자신들 때문에 야기된 것들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세상을 편하게 살고자 하다가 겪는 는 나 자신을 위한 고난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고난 당함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작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을 위한 고난은 참으로 값진 것이며 이를 잘 감당할 때 그만큼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도 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의 복음 증거함을 통하여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접할 수 있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더 많은 입술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 (고후 4:1-6)

“우리가 전파하는 것” (고후 4:1-6)  
       
 
  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게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괴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1
교회의 집사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랜드캐년(Grand Canyon)을 여행하다가 저녁 어스름한 때에 절벽 가까이에 다가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데 운이 좋게도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 매달려서 겁에 질려 소리칩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습니까? 누구 날좀 도와주세요.”
한동안을 불렀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습니다.
그는 절망감에 훌쩍 훌쩍 울면서 거의 포기한 듯 중얼거립니다. “제발 나좀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를 구해 주마. 너의 하나님이다.”
“주님이 거기 계시니 저는 이제 살았습니다. 저를 빨리 붙잡고 올려주세요.”
“너는 교회의 직분자니까 나를 잘 믿겠지?!”
“주님, 제가 주님을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도 가끔은 나가고요, 성경도 시간이 나는 대로 읽고 기도도 생각나는 대로 하고요, 변변치 못하지만 십일조 생활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질문은 나중에 하시고 우선 올려주시기나 하세요.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아요.”
“아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네가 나를 믿느냐?”
“그럼은요. 제가 틀림없이 주님을 믿습니다. 아이고 빨리 살려 주세요. 나 죽습니다.”
“그래? 네가 나를 믿는다면 이제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그렇지만......주님.....나뭇가지를 놓으면......”
“정말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한참동안 그 집사님은 머뭇머뭇 무엇이라 말할 것같이 있다가 소리칩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이 없소?”
평안시에는 믿음이 있는 것같이 보이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곤경이나 위기 상황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일 때는 어렵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절망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판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의 방법만 헤아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고 물리쳐 버립니다.

한 타운(town)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단이 이쯤이면 여기서는 더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타운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그동안 사용하던 물품들을 무빙세일(Moving Sale)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그들의 삶에서 넘어지게 하고 그에게 굴종하게 하는데 사용된 물품들 중에 교만과 자만과 완고와 게으름과 미룸이란 품목들이 고가의 가격표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전시한 품목들 중에 가장 비싼 품목은 절망(낙심)이었습니다.
고객이 묻습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비싼가요?”
사단은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이 절망(낙심)이란 도구를 사용하여 거의 모든 사람의 삶속으로 파고들어 온갖 종류의 해악을 끼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장 아끼는 도구입니다.”
키에르케고르(Sören A. Kierkegaard, 1813-55)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하는 일이 조금만 틀어지면 낙심하고 절망할 때 그 사람은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어떤 실패를 경험하면서 또 다른 시도(試圖)를 하는 대신에 낙심하여 그저 주저앉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생에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패배(敗北)는 실패(失敗)가 아니라 낙심(落心)이요 절망(絶望)입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일군이 되어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의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또한 긍휼하심을 베푸시어 낙심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직분을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여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여서 항상 평안함 가운데 거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젖먹이의 믿음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과 시련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것을 능히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어미사자가 새끼사자를 강하게 키우기 위하여 일부러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과 같이, 우리를 시련의 절벽 아래로 내몰아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우리가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함으로 우리의 삶에서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직분을 감당할 때 우리의 낙심함은 사단이 바라는 바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낙심의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주기를 원합니다. “너는 그것을 할 수 없어. 너는 절망일 뿐이야.”라고 우리가 포기하고 그에게 굴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절망의 속삭임’에 쓰러지지만, 이 때에도 하나님을 전력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직분을 잘 감당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도 긍휼의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 했습니다.
교인들 앞에서는 멀쩡한 말을 하는 목사가, 장로가 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을 함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신이 직분자이거나 교인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자신을 모르는 사람 중으로 숨어드는 일은 잘못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사기나 기만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도무지 어떤 분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말씀의 능력과 효력을 무효로 만드는 사람인데, 이는 기실은 그가 말씀을 믿지 못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찌 저 모양이냐?’ ‘저런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는 죽어도 안 다니겠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저런 사람도 축복하시고 구원하신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은 안 믿겠다.’ ‘저런 사람이 가는 천당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까닭이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까닭이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게 하는 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이며 이 사람은 사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지언정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되면 이 사람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전에는 직분이 부담이 되었는데 이제는 직분이 귀하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구원의 보증이신 성령께서 이 사람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매 이 사람의 삶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어 가는 까닭입니다.
직분자의 일을 감당하되 영광스럽고 귀하게 여기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나 보지 않는 곳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간교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사람을 바라보며 ‘나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다.’ ‘저렇게 가난과 어려움 가운데도 평안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의 하나님이 저를 도우시나 보다.’ ‘저 사람의 삶을 보니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가 보다’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9-20절에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믿음의 사람은 그의 입술과 삶의 복음 증거를 통하여서 각 사람 마음에 교만으로 인하여 드러나지지 않고 있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게 만들며 그 자신이 믿음의 사람인 것을 무언(無言) 중에 삶으로서 스스로 천거하게 합니다.

3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그의 입술과 삶으로 전파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시요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영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른 삶의 모습으로 전심을 다하여서 증거하였기 때문에 그의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확신이 바울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하기로 작정된 사람일뿐입니다.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昏迷)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 신”인 사단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로 계속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단이 사람들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방해함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취는 것을 차단함인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도 하나님을 찾는 사모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보는 바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외형이 아니라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미쁘시고, 신실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공평하시고, 정직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타락함으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아담과 이브의 자손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고 의지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던 믿음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전에는 불순종의 결국이 죽음인 것을 알고 이를 두려워하였는데, 한 번 불순종의 죄를 범하매 그 양심이 무디워지고 영원한 죽음의 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5절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그 가운데 갖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Savior)이시며 오직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가 온전하고 바른 삶을 살기에 힘씀은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무슨 신령한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과 오직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이 주어짐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종이 됨을 아울러 증거합니다.

6절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고 하심은 창세기 1장 3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하심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이 있기 전의 상태에 대하여 창세기 1장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기 전 천지는 창조되기는 하였지만 혼돈이요 공허요 흑암의 깊음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빛을 비추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취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은 혼돈이요 공허요 흑암의 깊음뿐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소망이 없고 절망과 죽음의 깊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심으로 소망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사도 요한의 증언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3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4절). ...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9절)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머물며 어두움의 임금인 사단의 노예로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움은 절망이요 죽음인데, 하나님은 소망과 생명의 빛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추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두움의 삶을 벗어버리고 빛으로 나오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8-9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과연 빛의 자녀들인지 아니면 여전히 어두움의 자녀들인지는 우리의 삶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곧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이로써 우리가 빛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영혼의 깊은 잠에 취하여 있어서 죽은 자들과 함께 누워있는 것을 원치 아니 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일어나서 그리스도의 밝음 가운데 머물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써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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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자만과 완고와 강퍅과 미룸과 절망의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믿는 사람을 넘어뜨리고자 하나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자 할 때 우리를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나온 사람은 돌이켜 어두움으로 숨어드는 일을 행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일을 벗어버리고, 속임과 간교의 일을 더 이상 행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온전하고 정직한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짐을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