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6, 2014

“함께 죽고 함께 살고” (고후 7:2-4)


                           “함께 죽고 함께 살고” (고후 7:2-4)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1
선다싱(Sundar Singh, 1889-1929)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 시크교도의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비판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통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인도와 티베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특히 힌두교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선다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신학교수가 그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힌두교가 기독교와 비교하여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선다싱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학교수는 그의 간단한 대답에 만족할 수가 없어서 다시 질문합니다.
“힌두교에는 없는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기독교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크리스천으로 개종시킨 것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학교수는 여전히 그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질문합니다.
“내가 질문하고자 한 의도가 당신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군요. 내가 묻고 있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신봉하도록 만든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선다싱은 세 번째 질문에도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크리스천이 되게 하는 것은 기독교에 다른 종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고매하고 독특한 가르침이나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있는 까닭이 아니란 것입니다.
옛사람을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하는 것은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요한 1서 5장 12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8장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국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언어 가운데 ‘상생(相生)의 정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살게 하는 정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중상함으로 서로 죽이는 ‘상살(相殺)의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존중하되 합리적이고 국가발전을 위한 것일 때에는 받아들임으로 서로 살게 하는 정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기를 원하는 이러한 정치를 하지 못하고 늘상 파행적이고 서로 죽이는 국면만 초래합니까?
그것은 남이 제안하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나의 것만 주장하고 상대방이 받아들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상생(相生)의 정치를 하자고 외치면서 속으로는 남은 죽이고 혼자만 사는 ‘독생(獨生)의 정치’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야(與野)가 서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고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만 죽어납니다.

2
2절에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χωρήσατε ἡμάς, make room for us in your hearts).”고 당부합니다.
6장 13절에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πλατύνθητε καὶ ὑμείς)”라고 권고한 것에 대한 반복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받아들일 여지(room)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체면 치례로 마지못하여 형식적 화해의 제스처(gesture)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속으로부터 받아들이라고 청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회의 목사님과 기둥 장로님이 어떤 일로 사이가 벌어져서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회 차원의 예배에서, 화해를 요청하는 시간을 통해서 서로가 악수하고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제는 잘 지내자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 두 분 사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교회 내에서 목사-장로의 갈등이 사라지는구나’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화해의 모양은 그럴 듯 했지만, 그 화해의 악수와 눈물은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영접한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은 장로님이 목사님에 대하여 불만이 있던 교인들 얼마와 함께 교회를 떠나는 사태로 매듭지어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대하여 사도로서 자신을 변론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사역할 때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밝힙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흥하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덕목들입니다.
사무엘이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앞에서 한 일에 대해서 사무엘상 12장 3-4절에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지도자가 바로 되고, 한 사회의 지도자가 바로 되고, 한 국가의 지도자가 바로 되어 모든 것에서 떳떳할 때 그 교회, 사회와 국가는 건강하고 밝게 될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의 부정부패가 있으므로 정경유착(政經癒着)의 문제가 나오고 한 국가나 사회의 올바른 조정(調整)과 발전(發展)이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씀은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이러한 자들로 매도(罵倒)하였던 것같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안위의 기도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였던 바울에게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악의가 가득찬 거짓 교사들에 의해 바울은 불의를 행한 사람이요, 다른 사람에게 해롭게 한 사람이요, 또 속이는 자의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누명을 쓰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재 바울이 벌이고 있는 모금 캠페인(8-9장)을 잘 마무리짓기 위하여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을 하라고 하자, 이를 기회 삼아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돈을 탐하는 자이며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한 것 중에 얼마를 불의하게 착복하였다고 중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한 돈을 운반하기 위하여 그가 신임하는 디도와 다른 두 사람을 보내었는데(고후 8:16-24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트집을 잡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7-18절에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반문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 앞에서도 그의 투명성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3-35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3절에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며 그와 그 일행의 일을 변론함은 그들을 나무라고 죄를 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에 미혹되어서 바울을 한 가지로 욕할 때에도 바울은 그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원함은, 6장 11-13절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들을 향하여 마음을 넓히고 활짝 열어 그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들도 바울 일행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공동체로서 “함께 죽고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하여 비난의 말, 원망의 말과 정죄의 말은 접어 두기를 원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만이 배부르고, 상대방이 죽게 되든 말든 상관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고 협력하는 삶입니다. 상대방을 욕하고 비난하고 죽이는 삶이 아니라, 상대방을 용납하고 위로하고 상대방과 함께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더 깊은 의미는 ‘세상에 대하여 함께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에서 함께 등을 돌리고 떠나서 하나님의 온전한 표상이신 그리스도께로 함께 향하는 삶입니다.
불의와 죄에 대하여 함께 죽고 의와 진리에 대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는 데, 여기서 연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8-9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 앎이로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은 서로 연합하고 서로 위할 때 죄와 불의에 대해서는 함께 죽는 자들이 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의에 대해서는 함께 사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불의와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의와 진리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되 바울 혼자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과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4절에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I have the highest confidence in you, and my pride in you is great. You have greatly encouraged me, you have made me so happy in spite of all my suffering. (나는 여러분을 매우 신뢰하고 있고, 여러분에 대한 나의 자랑이 큽니다. 여러분은 나를 크게 위로하고 있으며, 나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왔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비난하고 중상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여전히 자랑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말썽 많고 말 많고 그를 욕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로 전도로 인하여서 세상 우상을 섬기는 데서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이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여전히 신뢰하고 자랑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바울에 대한 신뢰와 자랑도 여전하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들을 부정적인 눈과 마음으로 대하기를 원치 않고 긍정적으로 대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비난과 중상의 말이 바울을 괴롭게 하고 섭섭하게 한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을 생각하기를 원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 가운데서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여전히 머물러 있음으로 위로를 얻고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적 부모인 바울에게(고후 6:13 참조) 고린도 교인들이 말썽꾸러기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갖고 있는 믿음의 자녀이기에 바울에게는 소중하고 위로와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바울이 일생을 통하여 전도하고 목회하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만들고 길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양육된 사람들이 현재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이 장차 더욱 온전하고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하고, 현재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과 곤고 가운데서도 그가 양육하고 기도하는 믿음의 자녀들로 인하여 위로 받고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들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함께”란 연합의 공동체적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열고, 마음을 넓혀서 다른 사람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각 지체인 우리 믿음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하여 함께 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함께 사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어려움 가운데서 서로 위로하고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그런 삶을 살게 합니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살리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Sunday, October 19, 20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고후 6:14-7: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고후 6:14-7:1)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1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몽주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시조(時調)로써 불충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악을 도모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나는 비록 희고 깨끗한 몸이요 성결한 삶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짝하여 지내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했습니다. 비슷한 종류, 비슷한 성격의 새들, 짐승들, 사람들끼리 모이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간신들과 짝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간신이 되고, 역적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역적모의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살게 되면, 종종 믿지 않는 남편이(아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갑니다. 남편이나 아내 중에 어느 한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이면 주일날 교회 가는 일에 있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그러다 보면 서로 타협하게 되고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위에 믿지 않는 친구들이 많다 보면 이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종종 크리스천의 삶과는 동떨어진 일들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교회 안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자(孟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맹자의 집은 처음에는 공동묘지 근처였는데 어린 맹자는 종종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기에, 곡을 하거나 관을 묻는 흉내를 내면서 놉니다. 아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는 이곳이 아이를 키울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여서 이사를 갑니다.
이사를 간 곳이 시장 근처였습니다. 맹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며 흥정하는 흉내를 내면서 놉니다. 어머니는 그곳도 아이를 키울 곳이 못된다고 판단하여 다시 이사를 합니다.
이번에는 서당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서당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그 흉내를 내면서 놉니다. 비로소 맹자의 어머니는 마음이 놓이고 그곳에서 정착을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바르고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가난한 살림에 세 번을 이사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은 주위의 환경과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사람임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맹자가 웬만큼 장성하여 집을 떠나 타지방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가 어느날 돌아왔습니다. 이때 맹자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학문이 얼마나 진보하였나 묻습니다. “네 학문이 어느 정도 나아졌느냐?”
맹자는 대답합니다. “그대로입니다.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그만둘까 봅니다.”
그러자 맹자의 어머니는 칼로 짜고 있던 베를 끊어버립니다. 맹자는 영문을 몰라 떨면서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묻습니다.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네가 공부를 그만 두는 것은 내가 베를 끊는 것과 같다. 군자는 학문에 힘써 이름을 내고, 모르는 것은 물어 지식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만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지고 세상에 나가서는 위험을 멀리하게 된다. 그런데 너는 지금 공부를 그만 두려고 하니, 앞으로는 심부름이나 하면서 생계를 걱정하게 될 것이다. 베를 짜서 생계를 꾸려 가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여자가 생업을 그만두거나 남자가 덕을 닦다가 타락하면 도둑이 되거나 남의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어머니 말씀에 충격을 받고 맹자는 분발하여 학문을 쉬지 않고 쌓았으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 들어가고 이름을 후세에 전하게 됩니다.
이 고사를 단기지교(斷機之敎), 즉 베를 끊으면서 준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화하는 삶을 살고자 힘씀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온전을 이루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14-16절에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가나안 거민들과 어떠한 사귐도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7장 2절 이하에 보면, “... 그때에 너는 그들(=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기는커녕 인정이 없고 잔인하게까지 여겨집니다.
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악의 속성에 물들기 쉽다는 사실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5장에는 이스라엘 중 어떤 자들이 이방 모압여자들과 음행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 이천 명을 염병으로 죽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하게 될 때 그들의 우상들--그들이 하나님보다 앞에 놓는 것들--을 아울러 섬기게 되고, 이러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 중 방백들과 두목들을 포함하여 어떤 자들이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에스라 9:3).
느헤미야도 유대인들이 이방사람들과 혼인할 때, 느헤미야 13장 25-27절에서,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다시는 이방 여인들과는 절대로 혼인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의 사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극명하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던 이방 족속들인 우리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의 사귐과 교제를 강조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믿는 사람들끼리의 혼인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잘 몰랐을 때 혹은 실수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사람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2절 이하에서 배우자와 그대로 살되 남편의, 아내의 구원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14절)고 권고합니다.
이 세상 인구의 80% 이상이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요,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에 사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들이 문화적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나 참 믿는 사람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일체의 접촉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접촉을 갖지 않으려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믿는 사람들만이 집단으로 수도원 생활을 하거나 신앙촌과 같은 촌락을 형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형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라고 명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세상 중에 살아야 할 것인데, 세상에 살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하여 그들의 삶의 모습대로 살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Do not be mismatched)고 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들이 이끄는 대로 세상에 속한 자의 사욕(私慾)을 탐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신명기 22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실 때,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한 멍에에 메워) (밭을) 갈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와 나귀는 크기와 성격과 선호가 각각 다른 짐승으로 함께 보조를 맞추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습니다.
소와 나귀의 다름으로 밭 갈기가 더디 되는 일은 있어도 함께 망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멜 때에는 함께 망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배우자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형제나 자매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자녀를 둔 사람도, 혹은 믿지 않는 친구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배우자나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자녀나 친구의 세상적인 주장이나 선호에 따라가는 삶을 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것이 쉽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는 자와의 교제나 결혼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는데 신약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에서 온전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의 품성이나 모습은 여전히 유혹에 약하고 세상적인 것에 빠져들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믿는 사람들에게 로마서 12장 2절에서 권면할 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로 대조시킵니다.
첫째로,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이신데 불법을 범하는 자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긴 바 된 사람이 돌이켜서 불법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불법이 무엇입니까?
살인이나 강도나 도적질이나 간음만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 하나님의 명령과 뜻대로 살지 않음이 죄요 불법입니다.

둘째로,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14절)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온 자들인데 아직도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모할 일이 없습니다.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들을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바울이 말씀한 대로 먼저 이 음성을 듣고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나온 사람으로서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빛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15절)라고 했습니다.
벨리알(Βελιάρ; לעילב)은 구약(舊約)에서는 “쓸모없는 자”(worthlessness, uselessness), “비류”, “멸망”(ruin, destruction), "불의“(wickedness)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삼상 25:25; 삼하 16:7, 20:1, 22:5; 왕상 21:13; 시편 18:5; 잠언 16:27).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the War Scroll, the Thanksgiving Hymns, the Community Rule, the Damascus Document 등)에서는 ‘어둠의 자식들’과 ‘벨리알의 자식들’이란 말이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즉, 여기에서 벨리알은 ‘사단,’ ‘악이나 어둠의 세력’이란 뜻입니다.
신약(新約)에서는 이곳에만 나오는데 ‘사단’ 혹은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혹은 사단이 조화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과 사단의 권세 가운데 놓인 사람이 조화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넷째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15절)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고 그가 바라보는 것은 위에 것인데, 믿지 않는 자의 관심은 세상 나라와 세상에 속한 부와 지위와 명성이고 그가 바라보는 것은 땅에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16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둘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가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에 두어야 할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아스돗 사람의 우상 다곤의 당에 두었을 때 다곤의 상이 무너져 내려버리고 사람들에게는 독종의 재앙이 임합니다(삼상 5장).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여기에 제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카비 형제들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하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맨 먼저 하신 일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그곳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신 일입니다.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면서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나무라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 3:16-17, 6:19).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각 믿는 사람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을 둘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결한 생각과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에 두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16절에 인용한,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레위기 26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2장 38절에서 다시 약속을 주십니다. 지금은 패역한 유다백성들이고 그로 인하여 바벨론 왕에게 붙인 바 될 것이지만 70년 후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 27절에서도 동일한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17-18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52장 11절에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정결케 할지어다.”고 말씀합니다(에스겔 20:34, 41 참조).
또 이사야서 43장 6절에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출 4:22; 삼하 7:8, 14; 렘 31:9 참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 그의 백성이 아닌 자,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들과 함께 거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불의한 자들이요, 하나님은 정하시기에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부정한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그를 본받아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7장 1절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권면합니다.
이 약속을 가진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17절).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16절).
셋째로,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됩니다(16절). 우리의 하나님이시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리라(18절)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요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되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으로써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당부합니다.

3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동안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에도, 직장에도, 사회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세상의 악이나 불의를 도모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속하여 있어야 합니까?
불법에 속할 것이 아니라 의에 속할 것이요, 어두움 가운데 누워있는 자가 아니요 빛 가운데 거하며 빛을 발하는 자들이어야 할 것이요, 벨리알--사단에게 속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할 것이요, 우상(偶像)의 일을 꾀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류의 이야기가 동서양에 각각 전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야기는 중 일연의 삼국유사 제2권에 나오는 신라 48대왕 경문왕의 고사(古事)인데, 그(응렴)가 왕위에 오르자 갑자기 귀가 나귀의 귀처럼 길어졌습니다. 왕후와 궁인들은 그의 비밀을 모르는데 오직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으나 평생에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가 다가오자 그는 도림사(道林寺: 경북 월성군에 있던 절)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향하여 외칩니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 그리고 이 사람은 죽었는데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소리가 납니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 경문왕은 그 소리가 싫어서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대신에 산수유 나무를 심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거기에서는 이제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라는 소리만 났다고 합니다.
서양 판에서는 복두장 대신에 이발사가 등장합니다. 당나귀 귀와 같이 긴 귀를 가진 어느 임금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감출 수가 있었는데 그의 머리를 잘라주는 이발사에게는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그에게 겁주며 다짐을 받되 “만약에 이 사실을 발설하면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임금의 비밀을 알게 된 이발사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이러다가는 얼마 못 가서 죽을 것같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시원스럽게 소리나 지르고 죽어야지’ 하고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숲을 향하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냅다 소리지릅니다. 그랬더니 속이 후련하여지고 시름시름 앓던 병도 씻은 듯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바람이 불 때 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메아리쳐서 들렸습니다.
동서양에 전래되어온 이 이야기가 무엇을 뜻합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에게 들은 말이나 나만 알게 된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속내를 친한 사람에게 믿고 드러내는데 그것이 그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너만 알고 있어’ 하고 전한 얘기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과 귀를 거쳐서는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의 귀에까지 돌아오매 이 사람은 그가 처음 이야기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실망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만의 약점이 아닐진데 그 사람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비밀스런 이야기가 다시 자기 귀에 돌아올 때,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넓은 마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도 사람들을 대함에 서툰 점이 많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 중에 가끔 저에게 “목사님, 제가 교회 생활을 잘 모릅니다. 지적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목회 초년시절에는 그것이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 줄 모르고 그 사람의 고칠 부분을 발견하면 제 딴에는 그를 생각하여서 지적하여 줍니다. “OO 교우님, 교회에서는 (혹은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렇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면 십중 팔 구는 그 다음에 관계가 소원하여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싫은 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이 처음에는 야속하고 섭섭하였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의 약점인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나는 이와 같은 약점이 없다고 딱잡아 얘기하지 못할 것은, 그러는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없는 다른 모양의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은 협력하여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함께 이루어나갈 사람들인데 때로는 서로 오해하고 갈등하고 마음을 닫아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은 바로 보지 못하고 상대방만의 약점만 바라봄이요, 상대방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며, 아니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자 입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를 비방하며 입을 벌리지 않고 귀를 막고 마음을 좁게 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이 마음을 넓힌 것과 같이 그들도 마음을 넓힐 것’을 당부합니다.

2
11절에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대로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 지방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고(2-3절), 안식일 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습니다(4절). 후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8절).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과 정성으로 가르치다가 기한이 차매 떠났습니다.
바울은 떠난 후에도 늘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권면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적어도) 두 차례의 편지(고린도전서와 알려지지 않은 다른 편지, 고후 2:9)와 두 차례의 방문으로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권면하고 해결하는 일을 돕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무슨 유익을 얻고자 이리 했습니까?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고린도 교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가 깊어가고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져갑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떠난 후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그들을 부추겨서 바울과 그들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은 오직 바른 말씀 전파함과 사랑과 권면인데, 거짓교사들의 이간으로 이것이 지나친 간섭과 잘못된 교리의 전달로 오해되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 간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목회자와 가까이 지내는 교인일수록 종종 후에 목회자에게서 더 멀어지고 목회자를 비방하는데 앞장 설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만큼 목회자의 약한 모습들이 잘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있는데, 이분은 교회를 처음 출석하거나 아직 직분을 맡지 않은 교인들하고는 참으로 관계가 좋습니다. 그분들은 이 목사님을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목회자라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집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면서는 점점 사이가 벌어지는데, 왜 그런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회의를 통하여서 그 목사님의 인간적인 약점들이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설교와 심방만 가지고는 가장 훌륭하였던 목회자가 회의를 통하여서 목사의 자질과 부르심까지 의심받는 지경으로 전락을 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지나친 치우침이 문제입니다. 그분에게 (인간의 약점이 없다는) 지나친 기대를 갖지 않았었다면, 그분에게 (인간의 약점이 많다는) 지나친 실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시되 완전한 사람들 중에서 부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니, 종종 말씀드리지만, 오히려 부족함이 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부르셨습니다(고전 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권세를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기(calling) 때문’입니다.

바울은 베드로나 안드레나 요한이나 야고보나 마태 등과 같이 어부나 세리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학문이 있었고 배경도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약점이 없었습니까?
눈병으로 눈꼽이 끼고 몰골이 형편없습니다. 말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 말에 능하지 못하였습니다(고후 10:10). 그런가 하면 성격이 지나치게 직선적(直線的)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갈 2:11-14).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나무람이 없었겠습니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함이 지나치게 올곧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한 주위에 적들이 많았습니다.
다수의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향하여 마음을 닫은 것은 이와 같은 주위의 반대자들에 의한 농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할 때,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며, 예루살렘 공회로부터 파송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참 선생도 아니고, 그가 가르친 교리는 정통교리가 아니라고 비난합니다. 그 위에 그가 교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요 주제 넘는 일이라고 부추깁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입을 다물고 귀를 막고 마음을 좁히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바울은 먼저 입을 열어 너희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대화하기를 원하고 너희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12절에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악화는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십 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을 알고 지낸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딴 사람이 되는 예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장점들과 단점들이 그 사람 가운데 있었는데, 사이가 좋을 때는 그 단점들이 눈에 띄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난 A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 사람 참 몹쓸 사람이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만 B의 오해일 따름입니다. A는 원래부터 그런 약점을 그 가운데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다만 어떤 일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문제는 상대방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됩니다.

몇 년의 오랜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한 남녀가 어이없게도 3개월도 채 살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어떻게 몇 년동안 매일 만나면서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들이 몇 개월도 같이 살지 못합니까? 연애기간동안 같이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의 약점들이 노출되어 있는데도 보지 못하다가 결혼을 하여 같이 살매 약점들이 하나 둘 빠른 속도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목적을 위하여 약점을 일부러 숨기고 있어서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약점이 널려 있는데도 보지 않다가 상대방의 약점이 나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하매 그것에 대하여 새삼 분개하고 따라서 그 사람을 욕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바로 나의 잘못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알면 가까이 지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가까이 지낸 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런 사람인 줄 알고도 가까이 지냈다면, 설령 내가 불이익을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약점을 용납하는 넓은 마음이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나의 옹졸함이 나의 잘못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대하여야 합니까?
나에게 약점들이 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약점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령 내가 그것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나를 속인 상대방을 세상법정에 송사하고 싶을 정도로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바울이 권면하는 바는 차라리 속아주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반문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 귀를 막고 마음이 좁아져서 이를 거부함은, 바울이 전에는 교묘히 자신을 위장하여서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가 이제 새삼 알게 되어서 마음이 좁아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됨됨이에 대하여 속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열두 사도들의 부르심과는 다르지만,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고전 1:1; 고후 1:1) 자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의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이 참된 것을 그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고 함은 바울이 그들에게 오해거리를 주어서가 아니고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서 마음의 문을 닫은 탓으로 대화의 단절과 서먹함이 있게 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너희 심정에서(ἐν τοίς σπλάγχνοις ὑμών) 좁아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심정”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논’(σπλάγχνον)은 창자, 내장, 심장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영어에서 가까운 표현은 ‘거츠’(guts)입니다. 즉, 사람의 정제되어지지 않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연의 감정(one's inmost self or feelings)--사랑, 미움, 노여움 등--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깊은 곳 속마음으로부터 문을 좁혀 바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부추김을 받고 바울을 향하여서 마음의 문을 닫은 것입니다.

13절에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고합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대하는 이상으로 넓은 마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자녀의 변명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호통을 치는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이미 자녀의 커다란 잘못을 용서하여 줍니다.
거짓교사들의 부추김으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의심하고, 그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그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작정한 고린도 교인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섭섭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어린 자녀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대함에 이와 같이 영적인 부모의 심정으로 넓은 마음으로 대하는데, 너희도 그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나를 대하여달라고 권고합니다. 열린 대화는 한쪽만의 노력과 자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모두 마음을 넓히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단절될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녀에게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들을 것을 강요할 때, 자녀가 부모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말문을 열지 않을 때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대화가 단절될 때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주장을 일방통행적으로 전개할 때입니다.
목회자와 교인의 대화가 단절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나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라고 교인의 듣기를 강요할 때, 교인이 세상의 말로써 목회자를 코치(coach)하고자 할 때 목회자-교인의 대화가 단절됩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 마음을 넓힌 후에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한 것 같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교인들 상호간에 마음을 넓히고 상대방과 대화하고 그들을 듣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어집니다.

3
우리가(목회자와 교인들, 교인들 상호간) 서로의 약점들을 모릅니까?
대개는 두세 번만 만나보면 상대방의 장점이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가 약점이 있는데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약점이 나에게 불이익으로 작용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의 약점이 내게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손해를 끼치게 될 때 그 사람은 나에게 갑자기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때로는 그 상대방이 목사일 수 있고, 때로는 다른 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권고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방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의 입을 열고 마음을 넓힌 후에, 상대방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당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대화가 재개될 것이며,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