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7, 2015

“약할 때 곧 강함이라” (고후 12:1-10)

“약할 때 곧 강함이라” (고후 12:1-10)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트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1
노자(老子)는 그의 제자들에게 “연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게 얌체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습니다. 한 제자가 질문합니다. “사람들은 연약한 것보다 강한 것이 낫다고 하는데요?” 노자가 대답합니다. “강하면 쉽게 부러지나 연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세찬 바람이 불면 큰 나무는 뿌리째 뽑히지만, 연약한 갈대는 휘어질 뿐 부러지지 않는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쁘다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노자가 다시 대답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남의 미움을 받기 쉬우나, 어리석은 듯이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모두 좋아하느니라.” 그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합니다. “그렇군요.”

공자(孔子) 일행이 위(衛)나라에 들렸을 때, 위영공(衛靈公)이 공자에게 진법(陣法)--전쟁을 잘 하는 법--에 대하여 묻습니다. 공자는 자신은 인의 도덕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전쟁하는 법은 배운 것이 없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영공의 푸대접이 시작되고 그의 무도(無道)함에 실망하여 급히 위나라를 떠나 진(陣)나라로 갔는데, 그곳에서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는 자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곤경을 당합니다.
그 당시의 제후(諸侯)들은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과 정보를 얻는 댓가로 이들의 여비를 보조했고, 다른 유지들도 평소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여비를 보조하는 것으로 예(禮)를 표시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는데, 공자의 일행은 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공자의 제자 중 자로(子路)는 누구보다도 최고의 학문과 인품을 지닌 군자임을 자부하는 스승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토록 곤경에 빠지게 한 세태에 분개하여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군자 역시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합니다.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 그러나 소인은 곤궁하면 그릇된 일을 범하느니라.” 군자는 늘 곤궁하기 마련이지만, 소인과 다른 것은, 곤궁함에 처해서도 의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편)

위대한 문학가나 예술가의 삶을 보더라도, 그들의 생전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고통의 약함 속에 살다가 간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바울도 신약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주위에는 늘 많은 반대자가 있었고, 그의 복음은 동족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주님을 위한 삶은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과 핍박과 가난과 약함의 연속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세계 복음화의 큰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2
바울은 12장 1-4절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자기가 본 환상을 남의 이야기하듯 하고 있습니다.
그 환상을 말함이 아무 유익이 없지만,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간 그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경험인양 기술한 것이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어떤 사람이 바울인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그 경험이 누구의 경험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3인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성은 그가 경험한 이 신비의 체험을 14년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데 있는데, 이러한 경험을 새삼 지금 “부득불 자랑함”은 고린도 교회 내에 교인들을 선동하는 거짓 교사들이 환상과 계시를 자랑하기에 그가 체험한 환상과 계시가 그들의 것보다도 더 신비하고 큰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놀라운 은사의 체험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랑에 그치는 것은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14년이 지난 지금 3인칭의 표현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신비한 은사체험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이 신비적인 체험을 한 바울을 마치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도 이와 같은 신비체험에 몰두할까봐서입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보는 하늘(=공중)이요, 둘째는 그 하늘 밖에 있는 무수한 별들이 존재하는 하늘(=우주)이요, 셋째는 그 너머에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거하시는 하늘입니다.
바울은 그의 영혼이 몸과 함께 갔는지 아니면 몸은 말고 영혼만 갔는지 그 자신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셋째 하늘에 갔다고 말씀합니다.

이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도 부르는데, “낙원”(παράδεισος)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예수님께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생각해 달라’는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나오고, 두 번째는 오늘 본문(12:4)에 나오고, 세 번째는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 중에 있습니다.
낙원의 의미는 성도들이 육신으로 죽은 후 세상의 끝이 이르기 전, 곧 천국(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영혼으로 머무는 어떤 장소(눅 23:43과 고후 12:4 참고)라고 보기도 하고, 또는 천국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의 실재를 볼 수 있는 곳(계 2:7)이라고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하늘나라에서는 두 개념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으로 낙원에 이른 성도는 바로 그 순간에 거룩한 몸을 덧입고(지상의 시간으로는 대기하는 상태이지만) 눈물이 없고, 애통함이 없고, 저주가 없고, 밤이 없고,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낙원은 영혼의 대기장소일 뿐 아니라 영혼이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계 2:7 참조)에 낙원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제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말”(ἄρρητα ῥήματα)이란 ‘너무나 거룩하고 성스러워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말’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 야훼는 너무나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기에 글로 기록할 때에 넉자로 된 말(tetragram)인데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 점 네 개(....)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이를 읽는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은 그 점 네 개(....)가 야훼 하나님을 뜻하는 것임을 알므로 그 글자를 읽을 때 옷매무새를 바로 잡습니다. 또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은 발음할 수도 없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이름이기에 “야훼” 대신에 “아도나이(=주님)”라고 발음하고 앉아서 성경을 듣던 모든 백성들은 이 이름이 나오는 곳에서는 모두 일어나서 경외감을 표시합니다.
바울이 낙원에서 들은 말도 그와 같이 거룩하고 경건한 말이라 감히 표현하거나 발설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ἃ οὐκ ἐξον ἀνθρώπῳ λαλήσαι)이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는 ‘말로 누설함이 허락되어지지 않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어리석은 자랑을 계속하니 바울도 그들에 맞서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랑을 계속할 것이나 이것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울인지라 어리석은 자랑을 더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을 보호하는 입장에서는’ 자랑을 더 계속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모양으로) 익명(匿名)의 자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약한 것들”외에는 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11:30 참조).

6절에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본 것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고 경험한 것 이상의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하는 모든 말이 참말이라고 했습니다(11:31 참조). 그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말하지 않고 그만 두고자 함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환상과 계시 등 신비적인 은사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고 몰두하여 교회 안에 불건전한 (자기 자랑과 신비주의에 치우치는) 은사의 사모함이 있을까 염려함이라고 했습니다.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자고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혹은 더욱 연단시키시기 위하여 사단을 통하여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험을 주십니다. 사단의 시험으로(욥 1:6-12) 욥이 당한 고난이 그러하고, 다윗이 사단의 격동으로 인구조사함(대상 21:1)과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그의 낮아짐이 그러하고,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과정 중에,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의 사단의 시험이 또한 그렇습니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한 이 “육체의 가시”는 분명히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바울이 갖고 있던 육체의 병이라고 말합니다. 안질, 말라리아, 언어의 장애, 간질 등 다양하게 추정합니다. 또 다른 성경학자들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함, 그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방인의 사도가 된 후에도 계속 유대인 형제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로마인들에게 넘겨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바울의 가시가 무엇이냐?’ ‘그로써 그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나?’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바울이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함입니다.

8절에서 “이 육체의 가시가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말씀합니다.
이는 바울이 이 문제를 놓고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매어 달렸는가를 말해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웬만한 문제 같으면 한 번의 기도로써 주님의 응답을 얻었을 터인데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도 (긍정의)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의 위대성은 하나님의 부정의 응답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습니다(모세, 다윗, 예수님, 바울). 많은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매어 달릴 때 이를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바울은 그가 간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즉,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됨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항상 ‘Yes 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No 도 있습니다. 바울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No이었습니다.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지라. 이러므로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연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육신이 약하고, 받은 바 은사와 능력이 적은 반면, 어떤 크리스천들은 부하고, 건강하고, 받은 은사와 능력이 많습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데, 정작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은 일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이고 궁핍하게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로써 그의 고통을 참을 수 있으며 그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2-4절에서, “또한 그(=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음은,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가 벼리어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 온전하여집니다. 우기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는 때는, 내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이기보다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어부와 세리, 그밖에 세상의 눈으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12제자를 선택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미련함과 약함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보다 지혜롭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에 ‘No'로 응답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케 하시는데 이는 바로 우리가 연약할 때에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강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온전하다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그렇게 절실하게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을 바라보기보다는 자기의 온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머물고 나타납니다.

따라서, 10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 모든 일이 잘 되어나갈 때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 것 같은데, 성경 속의 예들에서와 실제 주변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더라도 그렇지 않음을 봅니다.
어려운 환경과 고통과 궁핍과 약함 가운데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기도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형편이 좋아지면 쉽게 간구함과 감사의 생활에서 떠남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간교함이요 약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강하심이 우리의 약함 가운데 나타나시니까 우리가 일부러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자청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과 형편과 위치에 놓여 있더라도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강하심을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바울이 사람으로서는 온전에 가깝고 성령충만한 분이었지만 그에게도 미치지 못함이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Yes”로 응답되어지지 않음이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우리 원함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믿음의 사람 바울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재 형편이 고통이요, 궁핍이요, 수치일 때 또한 바울을 생각해보며 위로를 얻습니다. ‘바울과 같은 하나님께 참으로 가까이 간 사람도 고통과 궁핍과 능욕과 곤란의 삶을 살았는데 나도 이만하면 괜찮은 것이지’ 자족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였던 것같이 현재의 약함과 곤란과 고통을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강함과 온전함과 지혜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미련함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 (고후 11:16-33)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 (고후 11:16-33)

 
 11: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노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21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성을 지킬새
     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1
그레샴(Thomas Gresham, 1519-1579)은 16세기 영국의 무역상으로 런던 거래소의 설립자로 유명하고 재정에 밝았으므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재정고문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588년에 여왕에게 재정상의 충고를 담은 서한을 바쳤는데, 그 첫머리에 “악화는 양화를 구축(驅逐)한다”(The bad money drives out the good money)란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하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는 지폐가 없었고 화폐는 은화(銀貨) 아니면 동화(銅貨)였습니다. 왕은 재정상의 궁핍을 덜기 위하여 명목가치(face value)와 실질가치(real value)가 같은 은화(銀貨)만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는 동화(銅貨)도 발행하여 함께 유통시킵니다. 그리하면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와 같은(혹은 때에 따라서는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에 앞서는) 양화(良貨)인 은화는 장롱 깊숙이로 자취를 감추고 실질가치가 형편없는 악화(惡貨)인 동화만 시중에 유통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정량의 화폐가 유통되지 못하므로 경제는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레샴의 법칙”은 요즈음도 유효한데 화폐유통을 설명하는 법칙으로서가 아니라(요즘의 화폐인 지폐는 실질가치는 거의 없고 명목가치만 있음) 사회의 일반적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적절한 말입니다. 정치인들이나 행정관리들이나 기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부패하나 교활한 재주 있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청렴하며 능력 면에서는 뛰어나나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거나 줄이 없는 사람들을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정치인과 공무원이 욕을 먹고, 교사의 도가 땅에 떨어지고, 목회자가 거짓말쟁이처럼 여겨지는 것도 바른 정치인과 공무원, 바른 교사, 바른 목회자는 그 설 자리와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권모술수의 정치인, 부정한 교사, 삯군 목회자의 위치와 목소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대우받는 사회적 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사회·정치·경제적 현상이 비단 16세기 이후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양화 중에 양화이신 예수님도 악화들(=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내몰림을 당하셨고, 양화인 바울 역시 거짓 교사들이란 악화들에 의하여 온갖 중상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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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악화인 거짓 교사들과 맞서 싸우고자 할 때, 스스로 양화로 남아 있기를 그만두고 악화의 모양으로 자신의 어리석은 육체의 조건과 수고를 자랑하겠노라고 선포합니다. 그 까닭은 그러하지 아니할 때 악화들이 온통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어지럽히고 그 가치관을 도착(倒錯)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제 어리석은 자랑을 담대히 하고자 함은 그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이리 떼와 같은 거짓 교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16절에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따라 그의 겉모양을 자랑함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인 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울입니다. 그가 알고 자랑하기로 작정한 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고전 2:2)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스스로 몇 번이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3, 17)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불의나 불이익을 당하는 문제라면 “차라리 속아 줄 수도 있지만”(고전 6:7 참조) 하나님의 교회가 어지럽힘을 당하는 문제라면 그대로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교활함과 농간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고린도 교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같은 어리석은 자로 자신을 낮추어서 그들의 어리석음에 호소합니다.

17절에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지금 육체의 모양대로 자랑하고자 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익한 줄 누구보다 바울이 더 잘 알기에 “어리석다”(ἄφρων, foolish, senseless, ignorant)는 말을 반복하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외적 조건을 자랑함이 주님 안에서 하는 자랑이 아니요, 주님을 따라서 하는 자랑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다만 어리석은 자의 모양대로, 어리석은 자를 상대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에게 자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노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님을 자랑할 때, 이는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되는데, 육체를 따른 자랑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오직 씁쓸함과 무익함만이 있을 뿐인데도 바울은 이 일을 자신도 하겠노라고 합니다.

19절에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고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풍자적으로 표현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주님 안에서) “지혜로운 자”이었더면 “어리석은 자들”(거짓 교사들)을 “기쁘게 용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혜 있는 척 하나 그들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진리와 거짓이 무엇인지 분별도 못하면서 얼마나 대중적인 인기와 성향에 따라서 몰려가고 있습니까?
정작 용서를 발할 때는 용서하지 아니하면서, 용납하지 말아야 될 불의와 사단의 그림자는 얼마나 많이 용납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0절에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自高)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라고 탄식합니다.
“누가”란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입니다. 자칭 “지극히 큰 사도”라고 하는 이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그들의 육체적 모양을 자랑하며 헤집고 다니는데도 누구 하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너희로 종을 삼거나”고 함은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인데 유대주의자인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시 “율법의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것이 “율법을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율법이 그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아니요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구원에 이를 것임을 강조함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유자로서 그들이 기쁘게 마땅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잡아먹거나”란 험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잡아먹힌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들의 행태를 살피면, 그들의 재산과 시간과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서가 사이비 교주를 위해서 온전히 바치고 있음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저렇게 엉터리 같은 말을 믿고 따를까?’하며 옆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정작 본인은 죽자사자 하며 잘못된 것을 좇아갑니다. 이것이 “잡아먹힌 자”의 모습입니다.
“사로잡거나”고 함도 “잡아먹거나”와 비슷한 표현으로써 거짓 교사가 부리는 대로 고린도 교인들이 아무 이견도 달지 않고 복종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지시를 받는 것이야 잘하는 일이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교사의 지시를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거짓교사들에게 사로잡힌 자”가 된 까닭입니다.
“자고하다 하거나”라고 함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에 자신들의 세상 학문과 배경을 뽐내고 자신들을 높이는 모습입니다.
“뺨을 칠지라도”는 거짓 교사들이 그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고린도 교인들을 농락하고 주무르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답답하게도 은사가 있다고 은사를 자랑하고, 지식이 있다고 지식을 자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이 거짓 교사들을 진짜 “지극히 큰 사도들”인양 받들고 그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응큼한 이리들로써 호시탐탐 이 순한 양을 통째로 삼킬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21절에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라는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원문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영어성경을 번역한 현대인의 성경은 위의 구절을, “부끄럽긴 하지만 우리는 너무 약해서 차마 그런 짓은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이 헬라어 원문에 가깝습니다(κατὰ ἀτιμίαν λέγω, ὡς ὅτι ἡμείς ἠσθενήκαμεν).
바울은 자신이 너무 연약하여서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일들--“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치는”--은 도무지 할 수 없음을 부끄럽지만 인정한다고 말씀합니다. 풍자적(諷刺的)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외적 조건을 자랑한다면, 그러한 외적 조건, 육체적 조건과 수고에 대한 자랑은 나도 담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했습니다.
“히브리인”이나 “이스라엘인”이나 “아브라함의 씨”가 유대인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인데 바울이 이와 같이 세 명칭으로 열거하는 것은 거짓 교사들이 그들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이 세 다른 명칭들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본래의 뜻은 “강을 건넌 자”라는 의미로 갈대아-우르(바벨론의 옛 명칭)를 떠나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 서남쪽으로 이동한 아브라함의 후예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언어적인 구분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인”이라고 함은 야곱의 자손을 의미하는 말로 “이스라엘”이란 말이 “하나님과 씨름한 자”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고 하는 축복이 담겨져 있듯이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이요 축복을 주신 민족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약속의 자녀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를 생산할 수 없는 육체적 상태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축복하셔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셨는데 바울은 그 자신이 바로 이 약속의 씨에서 이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가 소아시아 닷소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가 설령 유대인을 자칭한다고 하더라도 어줍잖은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가 언어적으로, 인종적으로, 또 약속의 자녀의 의미에서 유대인 중에 참유대인--정통 유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3-27절에서 바울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그의 외적 수고와 고난들을 열거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의 직임을 자랑한다면 바울 자신은 “정신이 없는 자처럼 어리석게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수고와 고통과 위험 등에서 더욱 더 넘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겪은 수고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신 25:3 참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행전 16:22, 23, 33, 37) “한 번 돌로 맞고”(행 14:19)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내고”(행전 27:41), (전도) 여행을 다닐 때에 “강의 위험(=강의 범람이나 끊김으로 인한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유대인들의 방해로 겪은 위험)”(행전 9:23-25, 29; 14:5-7, 19)과 “이방인의 위험(=헬라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대항으로 인한 위험)”(행전 16:16-23; 19:23-41; 17:1-9, 13-15)과 “시내(市內)의 위험(바울이 전도하던 여러 도시에서 겪던 위험)”(행전 14:19, 16:2-22; 17:1-7)과 “광야의 위험(=여행을 할 때 지나던 광야에서 겪은 위험)”과 “바다의 위험(=수로로 전도지에 갈 때 겪은 바다에서의 폭풍 등)”과 “거짓 형제의 위험(=잘못된 복음으로 바울을 괴롭히고 중상하던 자들로 인한 고통)”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그의 외적 고통을 열거하며 어리석은 자랑을 합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그가 겪은 수고와 고통과 위험과 헐벗음을 열거함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까? 내가 이런 엄청난 수고와 고통을 당하였으니 알아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그의 외적 수고와 고통을 열거함은 참된 그리스도 일꾼의 표가 무엇이며 이 모든 일을 겪음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내세움은 있었지만 그들의 “사도”와 “일꾼”을 자칭함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들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28절에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육신으로 당한 고통을 계속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염려하는 그의 내적인 수고요 고통입니다.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라고 함은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그가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들이 거짓 교사들과 이단 교리들로 인하여 혹시 잘못된 길로 빠지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목회를 감당하고자 하는 목사님들에게 이러한 내적 고통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고통스러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일신상의 일이 아닙니다. 그의 개인적인 기도가 응답되어지지 않아서, 재물이 없어서 고통스럽고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아서, 교회가 숫적으로 영적으로 부흥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워합니다.
바울이 새삼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내적 고통을 말하는 것은 혹시라도 (거짓 교사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바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나 오해가 있는 교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그위에, 바른 목회자의 수고와 염려가 무엇인지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여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부터 이제라도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29절에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 사랑함이 얼마나 극진한지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의 약함이 곧 그의 약함이 됩니다.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의 넘어짐이 마치 자기의 잘못인양 그렇게 애타하고 가슴 아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전에는 저의 신앙만을 생각하면 되었습니다. 좀더 나가서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돌아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인) 부족함이 나의 부족함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목사가 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교인의 믿음 없음이 나의 믿음 없음이 되고, 교인의 영적인 잠에 취해 있음이 나의 영적인 잠에 취해 있음이 되고, 교인의 게으름이 나의 게으름, 나의 탓인 양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의 믿음이 진보하고 기도모임에 열심을 내면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인 양어깨가 들썩해지지만,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기도모임에서 떠나 있으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요 나의 탓인 양어깨가 처집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자랑이요, 목회자의 염려요 고통입니다.

30절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 맞서서 육체를 따라 그의 외적인 조건과 수고, 내적인 수고들을 자랑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를 위하여서는 참으로 무익하고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고 무익한 자랑을 통하여서도 고린도 교인들이 누가 과연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참 사도요 거짓 사도인지 분별할 수만 있다면, 그의 (무익한) 자랑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서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부득불(=반드시) 자랑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약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함은 그리할 때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 10).
그의 육체적 가시를 자랑하고, 유대인 동족들에게 복음을 갖고 나아갈 때 반대에 부딪히고 거부당함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31절에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육체를 따라 외적인 조건을 자랑한 것도(22절), 외적인 수고와 고통을 자랑한 것도(23-27절), 사도로서 내적인 수고와 염려를 자랑한 것도(28-29절), 또 그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함도(30절) 듣기 좋으라고, 읽기 좋으라고 그저 겉모습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고백이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진실된 사랑의 표현임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들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32-33절에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성을 지킬 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그의 구주로 영접한 뒤 그의 삶은 180도 변하였습니다. 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행전 9:21-22).
이에 그는 다메섹에 거하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고 그들은 그를 죽이기로 공모하고 그들의 음모로 아마도 다메섹을 다스리는 아레다 왕(Aretas IV, 아라비아의 왕으로서 9 BC - 40 AD 동안 나바티아[Nabataea]를 통치함.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 안티파스의 장인이기도 함)의 방백이 그를 붙잡으려고 그의 거처로 군사를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성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행전 9:23-25; 수 2:15 참고).
바울이 이 이야기를 여기에 언급함은 그도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사람인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의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음은 그의 연약함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강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연약함을 더욱 더 자랑할 것입니다.

3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공의와 정직이 반드시 승리하는 곳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공평하고 거짓된 것들이 공평하고 진실한 것들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따라갈 것이 무엇입니까?
불공평하고 거짓된 것들이 만연(蔓延)하여 있다고 하여서 분별없이 그것들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이 세상임금을 좇을 때(엡 2:2) 우리는 여전히 그의 노예요, 그에게 사로잡힌 자요, 그에게 잡아먹힌 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단에 속한 것을 분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자랑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세상에 속한 재물을, 명예를, 지위를, 학위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는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우리의 주님을 자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이 어리석은 자랑일지라도 그 자랑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 가운데서도 주님과 그의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바랄 것은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약함과 능력의 약함과 환경의 약함을 자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능력이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우리 안에서 온전하심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