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 10:1-21)
1
양은 온순하고 흰털을 가진 깨끗한 짐승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양은 미련하고 재주가 없고 깨끗하지 않은 짐승입니다. 양은 많은 부족함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곧잘 집으로 돌아오지만, 양은 쉽게 바른 길(right paths)을 잃고 다른 길로 갑니다. 양은 바른 길에서 떠나면 그 스스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합니다. 양이 바른 길에서 떠남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목자는 양을 바른 길-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둘째로, 양은 자기방어의 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밤송이처럼 생긴 가시로 자기를 보호하고, 카멜레온은 몸을 주변색갈과 동일하게 변화시켜 위장하고, 스컹크는 독가스를 분출합니다.
그러나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방어할 수 있는 기술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독을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서 안전합니다.
목자에게 지팡이(rod)와 막대기(staff)가 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rod)는 한 끝이 굽어져있는 것인데, 이로서 수풀을 헤치거나, 양이 가시덤불에 걸렸을 때 굽어진 끝으로 빼냅니다.
약 2 feet 가량 되는 목자의 막대기(staff)는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무기입니다. 막대기 끝에 날카로운 금속을 달아 사자나 곰, 기타 맹수의 공격 때 이들을 쫓습니다. 목자가 맹수로부터, 거친 자연조건으로부터 양들을 지킬 것이기에 양들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자의 함께 함으로 안위를 얻습니다.
셋째로,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집단행동의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양이 무리를 지어 다닌다고 해서 무리로 방어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룩말이나 소들은 떼를 지어서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지만, 양은 겁이 많아 무리를 지어도 방어의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위험이 찾아오면 흩어집니다.
목자가 없는 상태에서 한 마리의 늑대나 이리가 무리가 들어오면 각각 흩어져서 제 갈 길로 갑니다. 이사야서 53장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떠나실 때,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질까 염려하셨습니다.
한 양이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그 뒤를 따르던 양들도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죽는 줄 모르고 줄줄이 따라 떨어집니다.
한 양이 독초를 뜯어먹고 죽으면 다른 양들도 독초를 뜯어먹고 죽는다고 합니다.
넷째로,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양은 생존을 위한 풀도 물도 스스로는 찾을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기에 그는 배고프지 아니하며 목마르지 아니 합니다.
해서 다윗은 시편 23편 2절에서 “그(=목자 되신 하나님)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섯째로, 양은 보기보다 깨끗하지 않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양과 같은 우리 인생은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씻겨 주실 때 우리는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부족한 양을 목자 되시는 주님이 사랑하신다고 증거합니다. 양이 미련하고 부족하고 생존능력이 없는 짐승이지만, 목자를 따라나갈 때 오히려 그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양과 비슷한 짐승으로 염소가 있습니다. 염소는 뿔이 있어 생존능력은 양에 비하여 낫지만 아무나 뿔로 들이받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들과 사람들을 좌편과 우편으로 나누시는데, 미련하고 힘이 없고 방향감각이 없지만 목자의 인도를 잘 따른 양은 우편 구원의 반열에 서게 하시며, 그의 힘을 믿고 때로 덤비고 자기의 길로 가는 염소는 좌편 멸망의 반열에 서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2
1-3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목축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마을마다 공동 소유로 양의 우리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이리와 짐승 떼와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약 3m 정도의 높이로 울타리가 처졌고 밤이 되면 목자들은 그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었고, 문지기는 그 앞에서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들을 노리고 몰래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는데 절도요 강도였습니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양들을 훔쳐 팔아먹고자 아무도 모르게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날이 밝으면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찾으러 우리로 갑니다. 문지기는 당연히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4-5절: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이 냄새를 맡지 못하고 방향감각이 없으며 싸울 능력도 없지만, 한 가지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이 있지만, 양들의 생존방법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가며 그가 인도하는 초장으로 가 꼴을 먹는 것입니다.
그의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를 때에는 그 목소리가 낯설므로 오히려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6-8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비유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의 문이라고 함은 양 우리로 양들이 들어가고 양 우리에서 나가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양 무리인 이스라엘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요 사두개인들이요 제사장들인데 그들은 목자가 아니고 절도요 강도인 까닭에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아니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9-10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말미암아’로 번역된 헬라어 ‘δια’는 ‘통하여’(through)라고 번역함이 더 좋은데,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문이 되시며 목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들어가게 하며 나가게 하며 그들을 인도하실 때 그들이 꼴을 얻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도적이 온 것은 그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십니다.
11-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1절과 14절에서 반복하여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선한 목자 되심’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고 양의 주인도 아닌 까닭에 위험이 닥치면 도망갑니다. 삯군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의지가 없습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그의 양들도 그를 압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이름으로 압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성격으로 압니다.
선한 목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는 것같이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양들을 압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왜 목자를 필요로 합니까?
양들은 목자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방향감각이 없어서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양들은 어떤 풀이 먹기에 좋은 풀이요 어떤 풀이 독초인 줄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해서, 양들은 목자가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때에 비로소 마음껏 풀을 뜯을 수 있습니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란 이스라엘 밖 이방인들 가운데 목자 되신 예수님께 인도함을 받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로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님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버릴 때 그는 목숨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목숨을 버리심은 그의 목숨을 빼앗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버리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실 권세와 다시 얻으실 권세가 있다고 하십니다.
19-21절: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귀신들려 미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을 아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결코 미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3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의의 길로,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양이 미련한 것 같이 우리는 미련한 자일 뿐입니다. 주님께 우리를 주님의 지혜로 인도하여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양식을 먹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꼴만 먹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미련하고 힘이 없고 공격과 방어의 능력이 없는 자이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늘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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