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 2013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 (사도행전 4:5-12)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 (사도행전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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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는 세 자음으로 구성된 어근(root)으로 그 뜻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윗은 다바드(דוד)에서 온 이름입니다. 다바드에는 일차적 의미로는 ‘흔드는 것’과 관계된 의미들--흔들다(swing), 흔들어 움직이다(rock), 안고 어르다(dandle)--이 있고, 이차적으로는 ‘사랑하는 것’과 관계된 의미들--귀여워하다(fondle), 사랑하다(love)--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 1절에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나의 사랑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도디’이고 ‘사랑하는 자’라고 할 때는 ‘도드’(דּוֹד)입니다.
해서, 다윗의 이름도 ‘사랑하는 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다윗의 이름에는 더 깊은 뜻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즉, 다윗의 이름은 이중적 의미로 ‘흔들다’와 ‘사랑하다’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흔들다’와 ‘사랑하다’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요?
가장 직접적인 연관은 엄마가 사랑하는 어린아이가 무엇이 불편하여 보챌 때 ‘흔들면서 어릅니다.’ 해서, ‘사랑하는 아이를 귀여워하되 흔들며 어르며 귀여워하는 모습’에서 ‘흔드는 것’이 사랑하는 표현임에서 ‘흔들다’와 ‘사랑하다’가 같은 어원에서 파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 ‘흔들다’와 ‘사랑하다’의 더 중요한 영적 연관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그 자녀를 온상에서 키우려고 하지 않고 거친 들판으로 내모는 이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격언에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여행을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쉽고 편안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험한 인생을 경험하게 합니다.
독수리는 그 새끼의 집을 벼랑 끝에 짓고 또 나는 훈련을 시킬 때 새끼를 물고 높은 공중으로 치솟아 그대로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날개짓을 못하고 그대로 떨어질 것 같으면  쏜살같이 내려가 그 새끼를 받기를 되풀이하며 그가 제 힘으로 날 때까지 반복합니다. 그러는 동안, 날지 못하는 새끼는 얼마나 위태롭게 느끼겠습니까?
사자는 사랑하는 새끼들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낭떠러지를 기어올라오는 새끼들만 강하게 키웁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내 종 다윗’이란 표현이 구약성경에 아홉 번(왕상 11:36, 38; 대상 17:4; 시편 89:3, 20; 렘 33:21, 22, 26; 겔 37:24) 나옵니다.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을 사울 다음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다윗의 혈통과 고향에서 구세주가 탄생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종 다윗을 온실 안에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마구 흔드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평안 가운데 있은 때가 드문 왕입니다.
주변국가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 그의 장인 사울과, 아들 압살롬과, 그의 부하들과 전쟁을 합니다. 전쟁에서 그들에게 쫓겨서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흔들림과 쫓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거의 절반인 73편이 다윗의 기도시입니다.
주여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나의 모든 죄를 사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부르짖음은 그가 당하는 곤고와 환난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간구입니다.

성경에서 “구원하다”란 말은 다윗의 시편들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위험한 상황이나 그물에서 벗어나다,’ ‘깊은 구덩이나 수렁에서 빠져나오다,’ ‘죄와 허물의 사함을 얻다,’ ‘병이 낫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모세’(Moses)의 이름도 '건지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인들의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하였기에 어린아이인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는데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상자를 물에서 건져내었기에 ’모세‘라고 이름하였습니다(출 2:10).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과 고통의 땅 애굽에서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그 고통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마련하십니다.
‘건짐’이란 의미의 모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어 광야 40년 동안 가나안 땅을 향하여 광야에서 행진하다가 요단강 동편 느보산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에 올라 거기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기 전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할 지도자로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를 택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란 하나님은 이 여호수아를 통하여 모세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을 완성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은 죄와 허물과 고통의 땅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벗어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애굽은 무엇이며, 홍해는 무엇이며, 광야는 무엇이며, 요단은 무엇이며, 가나안 땅은 무엇입니까?
애굽은 우리가 아직 크리스천이 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하고, 홍해를 건넘은 신앙생활의 시작을 말하고, 광야는 신앙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말하고, 요단강을 건넘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요단강을 건넘은 또한 성령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의 육적 죽음이기도 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거기에 영적인 가나안 땅인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에게 구원이란 영적인 가나안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미치는 영역입니다.

성도는 이 지상을 살 때에도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며 살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명령하심에 온전히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할 때, 그의 마음 속에, 그의 가정 안에, 그가 속한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수아를 통하여 육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해서 육적인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인 가나안 땅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므로 영적인 구원을 이루십니다.
‘예수’란 이름인 헬라어적인 표현으로 히브리 이름으로는 ‘예수아’ ‘여호수아’입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그의 자녀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주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이미 이사야서 61장 1절에 예언되어 있는데,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 받는 것,’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는 것,’ ‘갇힌 자가 놓임을 받는 것,’ ‘병든 자가 치료받는 것,’ ‘눈먼 자가 눈 뜨임을 받는 것,’ ‘귀신들린 자가 귀신에게서 자유로와지는 것’ 등등 이 모두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받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의 구원의 표적들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구원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구원--고통에서 잠시 벗어나며, 병에서 나음을 얻으며, 마음의 번민에서 평안을 얻는 것--은 다른 종교와 철학과 명상을 통하여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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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절: 이튿날에 관원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즉 오후 3시 경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미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겨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전 3:6)고 할 때에 그 앉은뱅이가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행전 3:1-8).
이에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놀랄 때 베드로는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이 빌라도에게 고소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그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때 말씀을 들은 자들 가운데 믿는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몇을 붙잡아 그들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질문함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치며 그들이 잡아 빌라도에게 넘기고 죽게 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일을 무슨 권세로 증거하였느냐는 질문입니다.

8-10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가 제사장들이나 관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까닭입니다.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는 아직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기 전이라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이 있었기에 그의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나음에 관하여 증언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가 건강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앉은뱅이의 나음을 ‘구원’(9절)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원의 보편적인 의미입니다.

바울도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지방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는데,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행전 14:9)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전 14:10)고 명합니다.
그리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뛰어 걸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종종 말씀하시는데, 병에서 나음을 얻었다는 의미로 구원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병 나음은 영원한 구원의 예표이지 최종목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해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으로 옮겨갑니다.

11-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에게 버림 당하심을 가리킴입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7절에서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사야서 28장 16절에서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초돌이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라, 죽지 아니하리라, 곧 구원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지 않고 살림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케리그마’ 즉 선포입니다.
여기에 토를 달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그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번복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아버지께로 가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구원인데 오직 길 되시고 생명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만 가능합니다.

천하에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의 서적을 읽음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들음으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연구함으로 이 세상을 사는 인생의 지혜와 덕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도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구원을 베풀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가게 하는 구원을 베풀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며,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시요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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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얘기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행한 한 특강에서 "나처럼 평범한 목사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로 말문을 열고, 자신의 지난 목회여정에 대한 간증을 주로 이야기했다. 조 목사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하며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이며 마음 속에 있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별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합니다. 불교는 불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 행동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서 지나쳐서 베푸는 자신의 생각에 관용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너무 편협하다’란 비난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을 지키고 믿고자 하는 것이라면, 비난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12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상 삶을 살 동안에도 기뻐하고 또 나가서 그를 증거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행전 2:1-4)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행전 2:1-4)

                                                                        1
성령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주로 하나님의 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신약에서는 성령, 하나님의 영, 하나님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 아들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 지혜의 영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잠언서 8장(22-31절)은 성령을 지혜로 표현하고 있는데, 지혜이신 성령께서 “그가(=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거기 있었고”(27절)라고 표현함으로써 미리부터 계신 지혜의 영--성령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지혜라고 함은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은 깨닫게 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시면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오고,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그들도 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더 큰 일”이란 무엇입니까? 마태 15장 21절이하(또한 마가 7:24이하)에서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는데 고쳐달라’고 간청할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냉정하게 대답하심으로 냉정하게 그 여인을 물리치십니다. 그 여인이 믿음으로 계속 청원하매, 그 믿음을 보시고 딸을 치료하여 주시지만,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이스라엘 중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오셨기에 공간적(지리적)으로 제한을 받으실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제한을 받으셔서, 예수님이 사시던 2,000년 전 팔레스틴 지역에서만 사역하실 수 있었지, 현재를 사는 우리들 각 사람 가운데는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또 다른 보혜사’(Another Helper) 성령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증거케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시간적으로도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초대교회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영으로 믿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거하시매 육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크고 많은 일들을 우리를 통하여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누구이십니까?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성령은 보혜사(Helper)로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시고, 하나님의 심중의 계획과 뜻을 우리로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구약의 기간을 성부하나님의 시대라고 한다면, 구약과 신약의 중간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성자하나님의 시대이며, 그리스도 다음의 신약의 기간은 성령하나님의 시대입니다.
즉, 현재는 하나님께서 영으로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감찰하시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사십일을 지상에 더 머무르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전 1:4)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야 할 이유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대로, 첫째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권능을 받기 위함이며, 둘째는 그리함으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믿는 사람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권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뒤나미스’(δύναμις)인데, 영어의 다이나마이트(dynamite)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폭발하는 힘”이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다이나믹(dynamic)--역동적인--항상 개혁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하게 합니다.
우리의 불신하던 마음이 변하여 믿음의 마음이 되고, 옛 사람의 모습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그 기사와 이적과 치유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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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감람산(Mt. Olive)에서 승천하실 때 500명가량이 이를 지켜 보았는데,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흩어지고, 120명의 제자들이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나 오순절날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십니다.

    1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120명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니까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또한 2장 47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되 순전함과 열심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왜 고넬료와 그 가정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자 했습니까? 사도행전 10장 2절에 “그(=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이와 같이 찬송과 기도로 마음이 열리고 준비되어 있는 심령들에게 임하십니다.

성령께서 칠칠절이라고도 하는 오순절에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심은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입니다. 오순절(칠칠절)은 레위기 23장 15-16절에 있는 대로, 유월절을 기산점으로 계산합니다. 유월절(踰越節: Passover)은 '초태생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나 인방에 발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자의 죽음을 면한 날로서 아빕월(유대인 월력으로 정월) 십사일(금요일) 저녁입니다. 이 유월절에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됨”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유월절로부터 일주일간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다음 다음날(아빕월 십육일), 즉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 다음 날로부터 칠 안식일을 채운 다음 날(=주일)입니다. 신약성도의 달력으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로부터 일곱 번째 주일이 오순절--곧,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순절(五旬節)에 그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소제의 새로운 것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오순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전통은 1,400여년이 흐른 뒤에서 계속해서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절기를 맞이하여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찾아 모이고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렸음을 봅니다.
오순절을 칠칠절이라고도 하는데, 칠칠절은 ‘7’이 7번 있으니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는 의미인데, 바로 이날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약속하신 것인데, 그 이전 85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요엘서 2장 28-32절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 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과 유다의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둔하여서 말씀을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을 맞아 각처로부터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를 알게 합니다(행전 2:16-21).

    2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성령을 표현함에 “비둘기”라고도 하며, “바람”이라고도 하며, “불”이라고도 합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온유하심,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음, 그리고 “불”은 죄를 태우고 마음을 뜨겁게 하는 성령의 특성입니다. 또한 바람과 불은, 지진과 구름과 함께, 구약에서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알게 하는 표징입니다(왕상 19:11-12).

이 바람같은 소리가 있되, “급하고 강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의 급박하고 강권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주위를 의식함으로 머뭇거리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추호도 지체함이 없이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고넬료 가정을 방문한 베드로가 동행한 유대인 형제들의 눈을 의식하여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물세례 줌을 망설이자 성령이 강권적으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 임하시는 성령세례가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야, 베드로는 그들에게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한 사람에게만 임하지 아니하고 “온 집에 가득하게” 채워졌습니다. 성령의 큰 바람이 일어날 때 그 바람은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느끼게 합니다.

    3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했는데, 이는 불과 같이 뜨거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 49절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불은 (불의) 심판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성령의 속성으로서 우리 마음에서 뜨겁게 일어나는 주님께로 향한 열심인데, 이 불은 성령이 강림하신 오순절 날에 비로소 믿는 사람의 마음에 붙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뜨거움으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열정을 쏟습니다. 불과 같은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더러운 것을 태워버리실 뿐 아니라,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고, 우리의 영에 불을 붙여서 주님께로 향한 열심이 타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불 가운데서 이사야에게,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불은 바람과 함께 하나님의 강림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6-18절에,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의 혀”에서 “혀”란 말함을 뜻합니다. 방언을 영어로 “speaks in tongues"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졌다”고 함은 여러 혀들-방언들-로 말함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을 교만한 지식의 마음으로 알고자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언어를 가르시고 혼잡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함이셨는데, 오늘 오순절 날 여러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은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전(逆轉)의 섭리”(God's will of the reverse order)이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되, 인간의 지식과 논리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4절: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충만”은 믿는 사람들이 추구하여야 할 상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아직도 마음에 평화가 없고 기쁨이 없고 이전의 삶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이, 아니 하나님이란 빽을 등에 업고 더욱 탐욕스럽게 땅에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성령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우리의 교만한 자아는 죽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온전히 우리를 주장하는 삶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매, 오순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천하 각국으로부터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의 말로 제자들의 증거하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행전 2:5-11). 성령이 모여서 기도하던 무리에게 강림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아는 선배 목사님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선교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데, 참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 표까지 사주시며 오라고 하시기에, ‘덕분에 영국 구경을 할 기회가 생겼구나’ 속으로 기뻐하며 들뜬 마음으로 영국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쯤인가 남겨놓고 선배 목사님이 말씀하길, ‘이번에 최목사가 와서 동시통역을 맡아주어야 되겠어’라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미국에서 오랜동안 공부하고 살아왔으니까 영어에 관한 한 도사가 되어 있는 줄 아셨던 모양입니다. 이제까지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한 적은 몇 번 있지만, 한국어를 영어로 통역한 경험은 없었기에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출발 일정이 잡히어 있고 비행기 표도 마련되어 있고 마음도 들떠 있었는데, 못 맡는다고 할 수도 없어서 무거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출발 전부터, 비행기 안에서, 또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번 선교집회에서 동시통역을 맡게 되었는데, 제발 통역의 은사를 허락하시어 은혜로운 집회가 되게하여 주십시오. 저 때문에 집회가 망쳐지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선교집회에는 영국 목사님들, 한국 목사님들과 직분자들을 포함하여 40여명쯤 참석하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하루에 4번의 모임으로 5일간 계속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는 하였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집회시간에 긴장된 마음으로 통역에 임했는데, 놀랍게도 (몇 번 해본 경험이 있는)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일보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한국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일이 더 쉽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영어를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회를 위하여 제게 ‘통역의 은사’(gift of interpretation)를 허락하신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하게” 허락하심은 복음의 말씀이 증거되어지게 하시는 주님의 뜻임을 절실히 깨달은 집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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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바람과 불 가운데 우리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이 바람같이 불어치심으로 온 교회에 속한 성도들로 그분을 경험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이 불길을 일으키심으로서 우리의 죄와 허물의 더러운 것을 태우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즉시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속사정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아니고는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은 또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경륜과 비밀을 알게 하심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