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9, 20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 14:1-1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 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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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누엔(Henry J. Nouwen)이라고 하는 Harvard 대학교 신학과 교수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사츄세츠 주에 있는 정신지체자를 위한 L'Arche Daybreak 학원에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정신지체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그의 교수로서의 장래가 탄탄대로인데 그 영예와 보수를 포기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질문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책 한 권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In the Name of Jesus』(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정말 아는 길이 무엇일까?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 후에 그는 답변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길은 내리막길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작은 인기, 작은 권력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지체자 청년 아담군 곁에 있을 때 이런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르막길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리막길에서만이 복음서의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길”은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학문의 길은 학자나 학생을 학문의 완성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철학의 길은 철학자를 지식사랑의 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종교에서 길은 종교의 종점으로 종교인을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종점이기도 하지만 우리 믿음의 길이기도 하시다고 선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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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자신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를 측정하는 한 기준은 ‘세상 일로 지나치게 염려하고 근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본래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라 세상일에 근심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주위의 형편으로 조바심 내고 근심하던 사람들도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세상근심을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제자들을 떠나서 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요한 13:36).

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 근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국에 같은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는다’라는 말에는 ‘바라보다’ ‘의지하다’ ‘순복하다, 따르다’ 그리고 ‘사랑하다’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성도는 주위의 돌아가는 형편과 환경이 다소 기대와 다르게 그에게 임한다 하더라도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하신 계획의 장 중에서 그에게 좋은 것으로 복 주실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설명하심에 성(castle)이나 맨션(mansion)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방이 많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의 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은 무한대로 광활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자녀들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에서 열 사람의 찬송과 경배보다는, 백 사람의 찬송과 경배를, 백 사람보다는 만 사람, 만 사람보다는 백만 사람의 찬송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시되, 심령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하고 기쁜 찬송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할 방들이 많음”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심은 아버지의 집에 많은 방들을 장식하기 위하여 가신다는 뜻입니다. 방들이 많은데 현재는 주인 없는 방들이라 내부장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나라로 가심은 가서 방 주인이 될 사람의 개성과 취미에 맞게 각 사람의 방을 꾸미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성품과 믿음과 그들의 봉사를 아시기에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따라서 방의 크기와 장식을 달리 하십니다.
“하나님나라에도 차별이 있네요?”
“예,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별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의 능력과 수고와는 다른 불공평한 차별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봉사와 중심을 아시는 주님에 의하여 마련된 공평한 차별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중심을 드린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상급이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주어집니다.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도신경을 통한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맞이하실 준비를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산 자들은 장차 나타날 그들의 공력에 따라서 그가 예비하신 처소에 들이실 것이며, 죽은 자(믿지 않은 자)는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을 영접하여 주님 계시는 곳에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4절: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the way where I am going)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은 하나님나라인데, 하나님나라로 난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시며 먼저 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길이 되시고, 그 길을 가기를 원하는 성도들과 영으로 동행하여 주십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나라로 향한 그 길을 향하여 갔습니다.
성도들이 아는,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하늘 길」은 허무와 절망의 길이 아닙니다. 소망과 복락의 길인데 이 길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원열차를 타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 구원열차에는 믿음이라고 하는 표를 갖은 사람이 올라탈 수 있습니다.

5절: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삼 년여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 없이 들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늘 세상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임박한 이 순간까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바로 깨달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천국비유를 통하여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설명하셨는데도 제자들은 천국보다는 땅의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땅에 것에 골몰한 사람이 하늘의 것에 관하여 반복하여 듣는다고 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고 있지만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이 많지 않음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이 땅에 있음도 잘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사람들은 의심이 많고 믿음이 적기에 하나님의 땅에서의 축복과 약속을 증거하여도 믿지 않는데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은 더더군다나 믿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일 증거하는 것을 중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장차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그들이 지금은 깨닫지 못하나 그 때에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도마가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을 때 그는 멀리 인도에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하셨습니다.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나라로 향해 난 길이요, 예수님만이 참 진리이시요, 예수님 안에만 참 생명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는 삶은 때로 험해 보이고 고독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께서 그 길을 가는 성도와 동행하시기에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 길이 또 때로는 ‘좁은 길’이지만, 그 ‘좁은 길’로만 달려나가는 사람에게 기쁨이 충만합니다.

7-8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의 몸으로 사람들에게 오신 분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본체를 그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apart from Christ)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빌립의 질문은 자신이 무엇을 질문하는지도 모르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알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알았더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빌립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9-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해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신 것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 줄 알려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자신의 안에 계심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2-1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적인 삶을 사셨지만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람에게 내려오신 성령님은 모든 사람들 속에 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기에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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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소망이 하늘에 있습니까? 땅에 것에 지나친 욕심과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다가 땅에 묻히게 될 것이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그의 눈이 하늘을 바라보고 사모함으로 하나님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제한적이 아닙니다. 옆 사람이 들어가면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져버리는 경쟁적이거나 비좁은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 형제-자매들, 친지들과 이웃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기쁨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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