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시편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시편 23:1-6)


1
‘목사’라는 말에 해당하는 영어단어가 세 개가 있는데, priest, minister와 pastor 입니다.
Priest는 구약의 제사장직에 해당하는 말로서, 교인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세례와 성찬의 성례전을 베풀고, 예배의식을 진행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Minister는 헬라어 διακονος에서 유래된 것으로 deacon 집사라고도 번역되는데, 교회행정을 담당하고 봉사하는 일을 맡은 일꾼(servant)이란 뜻입니다.
Pastor는 ‘목회자’란 뜻으로 교회란 목초지 또는 목장(pasture)에서 하나님의 양인 교인을 인도하는 목자(shepherd)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목사는 목자의 본을 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라 양들을 잘 인도해야 할 것인데, 요즈음 교회들은 목사가 목자의 역할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고, 교인 또한 양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염소가 되고자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면, 가끔 산에 흰 줄이 여러 개로 가있는 장면을 발견하는데 가까이 가보면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행렬(行列)입니다. 어느 여행자가 목동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따르는 양들이 모두 몇 마리나 되는 줄 압니까?” 그는 “모릅니다” 대답합니다.
“그럼, 당신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때 잃어버린 양이 있는 줄도 모르겠네요?!”  “아니요, 압니다.”  “나는 나의 모든 양을 이름으로 압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4-15절(또한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시고, 10장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다고 하십니다. 양은 이러한 선한 목자를 전적으로 따르며, 그를 의지하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푸른 초장에서 꼴을 먹고 물가에서 물을 마십니다.

2
이 시편을 지은 다윗에게 전쟁은 끝없이 계속됩니다. 그의 장인 사울과의 싸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의 쫓김.... 물론, 다윗에게 평안한 때도 있었지만, 그의 생의 많은 부분이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 시에서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두 개의 비유적 표현(imagery)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5-6절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시편 23편은 함축적으로 표현된 시지만,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하나님의 자상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1-4절에서는 목자로, 5-6절에서는 하늘의 집 주인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간략한 두 단어('여호와 로이')의 표현이지만, 말하는 사람의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한 것처럼,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했습니다.
“나의”란 표현으로 다윗은 천지주재(天地主宰)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목동의 일을 하였던 다윗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양들을 물과 꼴로 마시우고 먹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며, 사자와 곰과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였기에, 그와 이스라엘을 먹이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자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으로 나에게 공급해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실 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
다윗은 무엇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어 느 한 가지도 부족함이 없다는 확신에 찬 표현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기고 있고 그의 처들이 대낮에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도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지으신 이--하나님께 그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맡기는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은 참으로 미련하고 재주가 없는 짐승입니다. 양에게는 집단행동의 본능이 있습니다. 한 양이 독초를 뜯어먹고 죽으면 다른 양들도 독초를 뜯어먹고 죽는다고 합니다. 미련한 양은 도살장(屠殺場)에 끌려감에도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 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부족한 양을 목자 되시는 주님이 사랑하신다고 증거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도 염소로부터 구분되어 양의 반열에 서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마태 25장). 이는 양이 재주가 없고 미련한 대신에 목자가 주는 꼴만 먹고 그의 인도함에 따라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로 해(害)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꼴을 먹고 풀밭에서 눕게 하시며 마실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곳에서 쉬게 하십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네페쉬')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소생시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슙'의 원 뜻은 ‘가던 길을 돌이키다, 돌아오다’(return)인데 이에서 ‘회개하다’(repent)와 ‘소생하다, 회복하다’(restore)의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가던 길을 돌이키다”--즉, 바른 길로부터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는데 이에서 돌이켜 원래의 바른 길--하나님의 길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의의 길”--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불의의 길로 가던 사람이 방향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옴이 ‘회개하다’입니다. 죄의 길은 사망의 길이었는데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온 사람에게는 생명의 소생(蘇生)이 있습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곧잘 집으로 돌아오지만, 양은 쉽게 바른 길(right paths)을 잃고 다른 길로 갑니다. 양은 바른 길에서 떠나면 그 스스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합니다. 양이 바른 길에서 떠남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목자는 양을 바른 길-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다윗이 현재 처하여있는 처지는 그로 미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그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고 또 만인이 보는 대낮에 지붕 위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합니다(삼하 16:21-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낙망과 고통으로 그릇된 길로 행할지 모르는, 좌절하여있는 영혼에게 힘을 주시고, 생명력을 불어넣어 소생시키시며, 그릇된 길로 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양들이 의의 길로 행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함인데(“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원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므로 영광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양이 먹을 수 있는 풀이 항상 평지에만 있으면 좋을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평지의 풀이 다 없어지면,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고지나 혹은 골짜기로 다닙니다. 길이 험하여서 해를 당할 것 같지만, 목자의 인도에 따라 행할 때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지금 여러 가지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지경이지만, 그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주님의 같이하심-임마누엘(Immanuel)-을 느끼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지팡이(rod)는 한 끝이 굽어져있는 것인데, 이로서 수풀을 헤치거나, 양이 가시덤불에 걸렸을 때 굽어진 끝으로 빼냅니다.
약 2 feet 가량 되는 목자의 막대기(staff)는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무기입니다. 막대기 끝에 날카로운 금속을 달아 사자나 곰, 기타 맹수의 공격 때 이들을 쫓습니다. 목자가 맹수로부터, 거친 자연조건으로부터 양들을 지킬 것이기에 양들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자의 함께 함으로 안위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행 안내자가 미국 여행자들에게 이스라엘 목자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절대로 양을 지팡이로 때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지팡이로 양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리며 몰고 지나갑니다. 여행 안내자는 민망해서 그에게 묻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도살꾼’이라고 합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4절에 어두워졌던 분위기가 5절에서 전환됩니다. 4절의 좌절과 침체가 극복되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의 장인 사울이 그를 죽이고자 하고 그의 아들 압살롬이 그의 목숨을 취하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미리부터 예비하신 상을 베푸십니다. 그의 적들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 앞에서 다윗과 마주 앉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서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어 그를 최고의 손님으로 우대하십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차고 넘치시는 축복입니다.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의 손님은 특별한 날에 초청받는다는 의미(意味) 이상의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그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계속되는 그 천국의 혼인잔치에 영원히 머무는 손님입니다.
다윗이 현재 여호와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정태적(情態的) 표현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 장차 머물 것이라는 역동적(力動的)이고 진행적(進行的)인 소망의 표현입니다.
목자 되신 여호와를 바라봄으로 세상의 삶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갖는 소망의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하십니다.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 가운데도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할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양과 같이 재주 없고 미련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목자이십니다. 그들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바위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갈 길을 모르고 헤맬 때에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을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십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이름으로 아시고,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에 우리를 부르시고, 그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우 리가 사망과 고통의 길을 혼자 가고 있다고 생각할 그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도 우리의 공급자,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풍족한 것으로 공급하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모든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매 우리가 안전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주님의 은혜가 무한하며, 차고 넘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를 원할 것이며, 이 때 주인이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의 자비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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