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4, 2013

“예루살렘 입성(入城)” (마가 11:1-11)

                                           “예루살렘 입성(入城)” (마가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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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사회적 불안이 사람들의 심리를 불안케 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발걸움을 교회로 옮겨 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래전 오클라호마시 폭발물 사건 이후에 교회를 찾는 사람이 한동안 증가를 보였었는데,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여러운 시기에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남을 봅니다.
생을 자포자기 하거나 자살의 방법을 택하는 것보다 교회를 찾는 것은 매우 건설적인 해결책이나, 근본적으로 영적인 갈함이 없이 물질적·육적인 갈함만으로 교회를 찾음은 때로 좋은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곤경을 당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교회가 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교회를 찾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채워주려고 함이 교회와 교회에 속한 일군들이 감당해야할 임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의 수가 한때에는 장정만 5,000이요, 여자를 합하면 이보다 훨씬 많았을 터인데, 그들은 육적인 양식을 보고 예수님을 따른 터라, 예수님께서 정작 고난당하실 때에는 아무도 그 곁에 없었습니다.

한 생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고있는 길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의미없는 일생을 살 수 있으며, 아무리 고난의 삶을 살지라도 그 삶에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30여세의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그 일생이 인간구원의 삶이었기에 그의 생이 의미있는 삶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삶이나 요한의 삶이나 무식한 어부의 본업을 가진 면에서는 그들의 생이 의미없는 삶이 될 것인데, 주님을 위한 삶을 산 까닭에 의미있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 때, 그 사람의 생에는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3년여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까? 예루살렘 입성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처음 올라가신 것은 누가복음 2:21의 기록대로, 난지 팔일이 지나서 유대인들의 예대로 결례 (潔禮)--성결케하는 예식--를 행하려 한 때입니다. 누가복음 2:41에는 그 부모가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한 걸로 보아 적어도 매년 유월절 한 차례씩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살이 되시던 해에도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의 날들을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는데 아이 예수가 그들 일행 중에 알았다가 나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성전에 유대인들의 선생들과 함께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계셨다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할 때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았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반문하십니다(누가복음 2:48-49).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유월절의 절기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그가 초막절에도 비밀히 예루살렘에 가시고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시는 때의 절기도 유월절입니다.

유월절(逾越節)은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시고자 하나 애굽 왕 바로가 이를 가로막을 때, 죽음의 천사로 애굽인의 장자는 죽이시고 이스라엘인의 장자는 살리시게 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인들에게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십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인의 집과 애굽인의 집을 구별하여, 죽음의 천사로 하여금 애굽인의 집 장자는 죽이게 하시고, 이스라엘인의 집은 그냥 지나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하나님께 속한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의 희생양(Paschal Lamb)이 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연관된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이기 보다는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이스라엘 식민통치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이곳에 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영하는 그들의 기대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하는 이 예수님이 그들의 식민통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그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 통치를 상징하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또한 이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의미합니다. 장차 성도들에게 임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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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끌고 오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예수님의 입성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메시야의 입성에 대해서 스가랴서 9:9에, “시온의 딸아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되어있습니다.
                                                   
3절에 “만일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말씀합니다.

맞은 편 마을에 나귀 새끼가 매여있음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 주인이 나귀새끼를 순순히 내어주실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나귀 새끼의 참주인은 주님이시오, 주인인 것 처럼 보이는 그는 다만 그 관리를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가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시간을 드려라.” “너의 재물을 드려라.” “너의 몸을 드려라.” 우리가 주님께 묻습니다: “왜 그리 하십니까?” 주님께서, “내가 쓰고자 한다” 말씀하실 때, 지체하지 않는, 변명을 달지 않는 여러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중 우리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로서 이 세상을 살 동안만 맡아서 관리하고 경영할 뿐입니다. 누구의 원대로 관리하고 경영해야 할 것입니까? 주님의 원하심 대로 해야 할 줄 믿습니다.

4-6절에 보는 바 대로 맞은 편 마을에 들어간 두 제자는 거기에서 무 앞 거리에 매여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고 그것을 풀 때에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 하려느냐?’” 묻습니다.

여기 마가가 일부러 나귀 새끼의 주인이란 말을 쓰지 않음은 나귀 새끼의 참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대답할 때, 그들은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어줍니다.

7-8절에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지날 길에 펼쳐놓음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북방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의 집을 치기 위해서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가 왕이 되었다 함을 당치 않은 일로 여기던 사람들이 그가 여차여차 하여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열왕기하 9:13에 보니,  “무리가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는 왕이라” 말하며 그의 왕됨을 인정하고 그를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겉옷은 그 사람의 몸의 일부와 같은 것으로 겉옷을 깔았다고 함은 ‘자신을 낮추어 신하(臣下)로서 왕(王)께 복종(服從)하겠다’는 뜻입니다.

9-10절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합니다.

9절은 시편 118편 25-26절을 축소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호산나”라 함은 “호시아”와 “나”의 합성어인데, ”이제 구하소서!“ 하는 뜻입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群衆)이 ”호산나“ 하며 종려나무를 흔듦은 ”그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왕으로, 또한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당장의 구원을 청원함입니다.” 이 예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대리자로 그들에게 오심입니다.

10절은 시편 148:1을 다소 변경하여 인용합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들은 구원의 주님을 그들께 보내주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찬송합니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라  함으로써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이 그들이 염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주권의 회복을 위함이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이,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자 함이었음”을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고, 유대인들의 다수는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11절에 예루살렘에 이르신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 보시고 날이 이미 저물었음에 그의 친한 친구들이 있는 베다니로 가시고 다음 날 아침까지 거기 머무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월요일에 되어진 사건으로서, 그 다음 날 성전에 가시어 성전 안에서 장사하시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하나님의 전을 청결케 하시는 일로 시작하여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생에 가장 중요한 며칠을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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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눈먼 자도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손마른 자도 낫게 하시고,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도 낫게 하시고, 죽은 자도 일으키시고 하셨지만, 결국 이러한 치료의 사역이 무엇을 위하이심이었습니까? 그가 물위를 걸으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다섯 개의 떡덩어리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시고 (마태 14:17이하), 또 다른 때에 일곱 개의 떡덩어리와 두어 마리의 물고기로 4,000명을 먹이셨지만(마태 15:34 이하), 이 모든 기사와 표적들이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이는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나라가 어떠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으로 여러분의 영혼의 질병이 치료받아 온전하여지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사건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하나님께 청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주기도문을 입술로만 외지 마시고, 마음으로 간절히 청원하심으로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마가 10:28-31)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마가 1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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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에 유학 오려고 준비할 때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저의 장래계획을 아시기에 이번 기회에 ‘평신도선교사로 임명할 테니 미국에서 캠퍼스사역을 감당하라’고 거의 명령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의 직장생활 끝에 유학 가기로 결단한 터이라 공부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여겨진 까닭에 시간의 말미를 달라고 말씀드리곤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처음에 삼일금식을 하였는데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에, 일주일 금식계획을 세우고 금식을 끝냈는데 여전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는 성격상 평신도이건 목회자이건 선교사의 직분을 받게 되면 그 일을 꼭 감당해야 할 것으로 알았기에 칠일 금식이 끝난 뒤에도 선뜻 대답을 못 드렸습니다. 다시 십일 금식을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십일 금식으로 정한 날 첫 이틀동안에 예비군 기본교육이 있게되어 산에 올라가 예비군 훈련을 받음으로 열흘동안 나누어 사용하고자 했던 나의 모든 에너지가 전부 소모되게 되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사흘부터 나머지 팔일동안 금식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포기하고자 할 때 사흘부터 저에게 새로운 힘이 생겨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이 다 소모되어버리자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새 힘을 느끼게 되었는데, 나머지 기간동안 성령께서 힘과 능력으로 채워주실 때 연약한 육신과 의지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십일 금식이 끝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기에 평신도 선교사의 직분을 받고 힘든 유학생활과 캠퍼스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한 무리의 유목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빛이 그들을 에워싸며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지금부터 가능한한 돌을 많이 모으라. 그것들을 너희 배낭 속에 넣으라. 그런 다음 배낭을 짊어지고 하룻동안 걸으라. 내일 밤이 되면 너희들은 그 돌들 때문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것이다.”
그 빛과 빛 속의 음성이 사라진 후, 유목민들은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묵묵히 그 음성을 따라 돌을 배낭에 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투덜투덜 불평하면서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배낭에 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함이 무의미하고 시간과 정력만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무시해버립니다.
유목민들은 그들의 여정을 따라 하룻길을 행하고 또 밤이 되매 천막을 치고, 어제 그 빛 가운데 음성을 마음에 담고 있던 사람은 자신의 배낭에 담아온 돌들을 꺼내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제의 돌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불평하면서도 돌을 조금 담아온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다이아몬드를 갖게된 기쁨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많은 돌들로 배낭을 채워오지 못함에 아쉬운 마음입니다. 그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한 개의 돌도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통분해했지만 이제 돌이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이, 매일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함이 나의 생활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마치 무의미한 돌덩이를 배낭에 담는 일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의 짐으로 무거운 배낭을 더 무겁게 하며, 그렇지 않아도 세상의 일들로 시간이 없는데 쓸데없이 사용하는 시간같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기도의 돌들을 배낭에 담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는가 곧 알게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의 일들로 가득 찬 배낭을 지고 가는 사람이 현명한 것 같으나, 얼마 안 있어 세상의 짐들은 다소 덜어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채워진 배낭을 지고 가는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지 생각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타이타닉'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타이타닉호가 침몰해 들어갈 때 승객들이 생에 대한 애착으로 우왕좌왕하며 먼저 보트를 타고자하는 모습들이 우리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단면인 것 같아 씁쓸함을 줍니다. 그런 가운데 바이올린 주자가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가 364장은 생에 대한 비장함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세상의 삶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 30분을 무엇을 하며 보내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온갖 쾌락을 누려온 사람은 세상을 떠남이 너무 아까와 몸부림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로 오래 오래 살게 하실 것이지 왜 나의 생을 이와 같이 짧게 하시나 원망하면서 30분을 보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나와 함께 주심에 감사 기도하는 30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 30분을 연장하여 30시간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있는 인간에게 시간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한정적인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있어서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생에 대해서 진실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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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방문하여서 그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 물어본 사건에 이어지는 대화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그 부자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실 때에 그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시는데,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10:23)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재물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이 많은 자는 그 재물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사랑함보다 더 크고 탐욕이 가득해지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욕심이 그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도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 문으로 들어서는 대신에 세상 것을 추구하다가 스스로 망하게 됨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와 다른 제자가 어떻게 했는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28절에,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갈릴리 바닷가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실 때에 그들이 배와 그물을 놓아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후 삼 년여 세월을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보면서 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삼고자 함을 보면서 은근히 욕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함보다도 이 세상에서 그들의 출신 신분으로는 누릴 생각조차 못했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이 눈앞에 다가왔어도 이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자리에 대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그렇다-아니다 대답하시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해야할 일--버려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화 가운데 우리가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동문서답(東問西答) 식의 엉뚱한 말씀이십니다. 이는 그만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는 반증입니다. 그 당시의 제자들만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기대를 한 것이 아니라 요즘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님을 바라봄도 예수님의 생각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예수님께서는 아십니다.

29-30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갖고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인데 그러나 그 목적이 분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어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은 이유가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함이었다면 이들은 바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좇은 것은 아닙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우리의 소유나 관계를 버리는 것도 나의 이해관계보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함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앞에 제자들과의 대화내용이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을 좇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이 보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교회에서 주장하고 목소리를 내려하고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드러냄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면 제자들간에 다툼이 있었듯이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도 다툼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교회 다툼의 요인중 상당수가 제직 선출과 서로 다른 주장의 충돌임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 목적이 잘못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버릴 것을 말씀하시는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고자 할 때 나는 비로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함이 자기의 소유를 부인함이요 세상에서의 나의 관계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심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는 삶입니다.

창세기의 성경귀절 중 제가 자주 인용하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아브라함의 순종의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동산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하시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옛 뱀의 미혹에 그들이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그 땅에서의 그들 자신의 유익을 더 생각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할 때 그를 바치기로 작정한 것은 이삭을 사랑치 않음이 아니요 하나님께 순종함이 더 중한 일임을 그가 안 까닭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믿음의 좋은 본을 신약백성들에게까지 증거하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귀한 것을 버리는 결단을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하시는데 내세뿐 아니라 금세에서도 축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수양을 허락하시고 이삭을 그의 믿음의 아들로 돌려주셨습니다.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에는 재산이나 부모, 형제, 자매, 자식의 가치를 깨달아 알지 못하였는데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이를 포기하고 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됩니다.
전에는 부모, 자식과 형제, 자매가 육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도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영적으로도 나의 귀한 혈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나에게 핍박이 함께 옴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핍박을 이길 힘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사람중에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당할 핍박이 너무나 커서 일시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기쁨이 영원히 넘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이를 능히 견딜 수 있습니다.

31절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지 오랜 사람중에도 그 말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가운데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 가운데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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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입니까? 목사이고 장로이고 집사이고 직분이 있고 없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 가운데도 잘못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직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여서 그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영생을 소유한 성도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로는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결심만으로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만을 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면서도 교회에서 하나님 보다도 나와 나의 주장들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베드로가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주님께 말씀드리지만 자연인 베드로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결점투성이의 인간이었습니다.
그에게 오히려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그를 변화시키시고 그를 충만히 채우실 때, 비로소 그는 온전히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성령의 충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여러분의 삶의 전부를 여러분의 삶의 중심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자 청년의 근심” (마가복음 10:17-22)

                                           “부자 청년의 근심” (마가복음 10:17-22)
                                                                        1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입니다. ‘빈 손 들고 왔다가 빈 손 들고 간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말이지만, 이 말의 뜻을 잘 아는 만큼 담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공수래공수거’는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삶의 법칙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삶의 법칙입니다.
전도서기자는 5장 13-15절에서 재물이 주는 폐단과 연관하여 공수래공수거의 진리를 기술합니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폐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6-8절에서 족한 줄 아는 생활과 연결하여 공수래공수거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살던 오두막을 빌려 ‘선택한 가난의 삶을 사는’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범우사, 1976, 1999)란 수필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만한 것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를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 신앙생활의 실제(實際)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지혜와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고 더욱 더 많은 것에 얽매이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기도의 제목들이 무엇입니까?
주님, 더욱 더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더욱 더 좋은 집을 주시옵소서.
더욱 더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주시옵소서.
더욱 더 높은 지위를 주시옵소서.

우리가 듣는 신앙의 간증들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살 때 이것저것 얻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랐더니 이런 것들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 간증이 주류를 이룹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많은 간증의 내용들이 과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까? 바울의 기쁨과 감사와 일치한다고 여겨집니까?
아니면, 시편에 주를 이루는 많은 다윗의 찬양과 감사의 시들과 일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속화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2
17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달려왔습니다.
그 사람은 마태, 마가와 누가복음을 종합해보면, 부자인 것을 알 수 있고(마태 19:22; 마가 22; 누가 18:23), 청년인 것을 알 수 있고(마태 19:20, 22), 관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 18:18).
이 사람은 부자, 청년, 관원입니다.
게다가, 뒤에 나오는 대로 도덕심도 뛰어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혼이라면 일등 신랑의 조건을 갖춘 사람인 것 셈입니다.
세상에서 부러워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에게도 인생의 고민이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부자, 청년, 관원의 고민은 보통사람에게는 너무 사치하게 여겨지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약간의 돈만 더 있어도 삶이 편하여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젊음만 있어도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지위가 있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부자, 청년, 관원은 부러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 달려온 청년은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꿇어앉았다’고 함은 예수님께 겸손과 경의를 표함이요 그의 말씀을 듣겠다는 태도를 보임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에서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태 19:16)라고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18:18)에서는 ‘선한 일’ 대신에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는 것이 선한 행위로써 얻어지는 줄 알았기에 ‘무엇을 해야 또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청년의 그 짧은 질문에 몇 가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하신 분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 청년이 예수님을 윤리선생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은 그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 되시지만, 청년관원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윤리선생으로 여기며 ‘선하다’고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우리 인생(人生)은 선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저희는 부패하고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 14:1-3; 53:1-4)라고 했고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는 영생에 관하여 가르쳐 줄 분은 하나님이시지 세상의 선생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유한하며 약한 존재인데 어떻게 영생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까?
공자님은 솔직하여 그의 제자들 중에 자로(중유)가 죽음에 관하여 물을 때 대답하기를, “아직 사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했습니다(논어 선진편).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생은 죽음도 그 이후에 있을 영생에 관하여는 더욱더 알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19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세 번째는 영생이 무슨 선한 일을 통하여 얻어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영생의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지만,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음은 더 더욱이 몰랐습니다. 부자 청년이 생각한 영생의 개념은 아마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없이 형통하게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현재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와 젊음을 그냥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모든 권세와 부를 소유한 다음에 불로장생(不老長生)하기 위하여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고자 사방으로 사람들을 보낸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도 언젠가는 자기도 늙을 것이라는데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인데, 해서 세상에서 오래 걱정 근심 없이 오래오래 사는 의미로서의 영생의 비결을 혹 사람들의 말에 선지자라고도 하며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이 사람이 알지나 않나 하여서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계명들은 십계명 중 6, 7, 8, 9, 10 계명과 5계명입니다. 부모공경의 5계명을 포함하여 6계명에서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런 계명들을 지킴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20절: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부자 청년은 ‘아 그거였구나’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자신 있게 한 대답이 거짓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이러한 계명들을 의무감으로 지킨 것이지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지킨 것은 아닙니다. 보통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현재에도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 청년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삶의 모습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별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나오고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되어져야 할 것인데, 아마 이 청년도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듣고 배운 교육을 따라 별 생각 없이 그렇게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6가지 계명을 나열하셨습니까?
영생이--물론 청년이 생각한 영생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지만--이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계명들이 무엇이며 왜 지키는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계명들은 이웃사랑-형제사랑의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의 의미에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형제사랑의 마음’ 없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사랑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계명들을 지키기 때문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들을 사랑하기에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부자 청년이 기대한 것과 같은, 이 세상에서 늙음과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신령하고 영원한 삶입니다.

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부자 청년의 말과 생각 가운데 있었던 네 번째 잘못은 영생이 움켜쥐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에 관하여 질문한 것은 그가 현재 갖고 있는 부와 지위와 젊음에 금상첨화(錦上添花) 격으로 영생을 더하기 원함에서였습니다.
그러하면 그의 삶이 완전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요 나눠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사랑하시기에 말씀을 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때로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말씀들처럼 여겨집니다. 해서, 종종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겠지,’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여전히 들어주시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찜찜한 마음은 줄어들지 않고 기도는 점점 사그러집니다.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도,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함 가운데도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 주심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그가 계명을 지키는 정신 또는 마음입니다. ‘왜 이러한 계명들을 지키는가’인데 곧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커다란 도전의 말씀입니까?
‘네가 참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느냐? 그러하다면, 너의 있는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그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했지만, 기실은 외형적 모습 뿐이요 진정한 사랑의 마음에서는 아니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년의 부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함의 장애요인임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물로 드리라”(창세기 22:2).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도전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로 주님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주변 조건들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할 때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버릴 때 하늘에 보화를 쌓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것을 움켜쥐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아무 것도 주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청년이 원하였던 영생의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던 일을 계속하며 더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지만 그것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9장 27절(마가복음 10:28)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29절에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좇기 위하여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그의 삶의 전부인 ‘배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그들의 아비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는-덜 사랑하는-삶을 사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청년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간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근심케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 도전의 말씀을 주심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 위에 무엇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여전히 세상 속에 있는 것들은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무엇을 잡으려고 손을 움켜쥐기를 원합니까?
손을 펴고 우리의 마음 속에, 머리 속에, 삶 속에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 (마가 9:14-29)

                                              “기도의 능력” (마가 9:14-29)
                                                                            1
사업을 크게 하는 어느 부자 장로님이 병명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습니다. 장로님이 입원해 있으니까 목사님이 매일매일 병 문안을 옵니다. 그 날도 목사님이 병원에 심방와서 장로님의 병 낫기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때 주임의사가 들어와서 장로님의 검사기록카드를 읽어내려 가더니 갑자기 얼굴색이 심각하여지며 간호원에게 “장의사 어디 있어? 빨리 오라고 해요!”라고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누워있던 장로님은 자기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이 의사가 장례준비를 하라는 뜻에서 장의사를 부르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목사님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 장로로서 시무한지도 벌써 20년이 되어 가는데 교회를 위하여 변변히 한 일도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누워있으면서 교회를 도울 일을 생각하다가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많은데도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아 감사헌금을 하고자 합니다. 종이와 펜을 좀 갖다 주세요.”
그리고는 종이에다 감사헌금의 금액을 적습니다. 처음에 ‘2’자를 쓰더니 똥그라미를 그려나가는데 하나, 둘, 셋, ... 여덟 개를 그립니다. 그리고 그 밑에 ‘상기의 금액을 하나님께 헌금하겠습니다’라고 적습니다.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종이를 건네 주고 나자 젊은 의사 하나가 헐레벌떡 병실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장로님의 건강상태와 혈압이나 맥박 등을 정기적으로 검진하는 수련의(resident)였습니다.
주임의사는 그를 향해 소리칩니다: “닥터 장, 아니 자네는 이 병원에 근무한지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환자기록 하나 제대로 할 줄 몰라? 혈압 수치와 맥박 수치의 기록이 바뀌어 있잖아?! 이 환자는 별로 이상이 없고, 다만 그동안 피로가 겹쳐서 몸이 허약해져있던 것 같은데 내일쯤 퇴원 수속하도록 조치해.”
주임의사가 간호원에게 불러오라고 한 ‘장의사’는 ‘장’씨 성을 갖고 있는 레지던트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주임의사가 찾던 ‘장의사’가 그가 생각하던 ‘장의사(葬儀社)’가 아닌 것을 알고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는 않은 것을 안 장로님은 조용히 목사님을 부릅니다.
“목사님, 목사님. 제가 적어드린 종이를 다시 주십시오.”
그리고는 잠시 응시하더니 다시 말을 잇습니다.
“목사님, 아까는 눈이 가물거려 제가 숫자를 어떻게 적은지 잘 몰랐는데 이것이 약간 잘못되었군요. 제가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드리고자 했던 액수는 이것입니다.”
장로님은 숫자를 조정한 다음에 목사님에게 종이를 다시 건네줍니다.
목사님이 받아든 종이에는 숫자가 ‘약간’ 조정되어있었는데, 동그라미가 8개에서 2개가 없어져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그가 죽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감사헌금액을 2억원에서 2백만원으로 급조정했습니다.
사실 죽지 않고 더 살게 된 것은 장로님의 입장에서는 더욱 감사할 일인데 아까운 마음이 감사한 마음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즉각 응답해주시는 능력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하여 때로는 서원의 또 때로는 강청의 기도를 드립니다.
서원기도의 대표적 예로는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벧엘에서의 야곱의 기도와 사사기 10장에 나오는 사사 입다의 서원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야곱의 서원의 내용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의 모든 것을 들어주셨지만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잊어버렸다가 딸 디나가 세겜에게 욕을 당한 다음에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벧엘로 가게 됩니다(창 34-35장).

암몬의 군대와 싸우던 입다의 서원의 내용은 “주께서 암몬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삿 10:30-31)고 한 것입니다.
입다는 그의 기도대로 암몬자손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지만, 그를 영접하러 나온 사랑하는 딸을 그가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번제로 드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서원기도는 쉽게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강청기도의 예로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의 기도가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억울함을 당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고 있었지만, 과부가 매일 그에게 나와 강청할 때 결국에 과부의 원한을 풀어줍니다(눅 18:1-5). 과부의 억울함이 응답된 것은 그의 강청함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눅 18:6-7).

하나님께 응답되어지는 능력의 기도의 요건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강청기도가 응답되어진 예를 드시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밤낮 부르짖음에 응답해주신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서원의 기도를 드리든, 강청의 기도를 드리든, 어떠한 기도를 드리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어지기 위하여서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나의 기도를 들으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지 조차 확실하지 않은데 그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안 계신 것 같기도 하신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주심이 믿어지겠습니까?
                                                   
둘째는, 믿음으로 드린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나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들으신 기도에 대하여 즉각 또는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임할 것이므로 예수님은 이를 과거적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 응답되어진 줄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음이 필요합니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아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입니다.
간절히 기도를 하다보면 내가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막연한 확신이 구체적인 확신으로 바뀔 때까지 기도를 계속할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구하는 기도가 정욕이나 탐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약속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50,000가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죠지 뮐러 목사님은 어떤 제목을 놓고 기도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는지 성경을 찾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주실 때까지 기도하여 50,000번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육적 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2-3절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유부녀인 K집사를 매우 좋아하는데 K집사와 결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기도에 응답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잘못 구하고 있는 까닭에 그의 기도는 응답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기도의 사람이었지만,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취한 것은 그의 기도의 덕분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새바 사이에서 나은 아들을 취하여 가십니다.

넷째는, 믿음으로 드린 기도가 응답되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지만 한 두 번 기도하다가 마는 기도는 응답되어지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끈질김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되 끈질기게 기도할 것은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응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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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남은 제자들이 머물러 있던 곳에는 큰 무리들이 모여있고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이 있었습니다.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으로 인하여 서기관들과 변론하느냐?”고 물으십니다.
                                                   
17-18절: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러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무리 중에서 나와 대답합니다.
“내게 귀신들린 아이가 있는데, 그의 고통이 심하여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귀신을 내어쫓아달라고 했는데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군요.”

1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데리고 내게 오라” 하시매
아이의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시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기만 하였다면 능히 귀신을 그 아이에게서 내어쫓게 할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삼 년을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도 귀신을 내어쫓을 수 없음은 믿음을 구하여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동안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형식적인 기도 이외에는 믿음의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는 까닭에 어느 것 하나 변변히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증거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20절: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아이의 상태가 심히 좋지 않습니다. 그 아이 몸 안에 있는 귀신의 권세가 심히 큽니다.

21절: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상태를 보시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라고 물으시니,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어릴 때부터니이다.”라고 합니다.

22절: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님께 청하기를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선생님 제자들의 하는 것을 보니 선생님도 별 것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제자들보다는 나을테니 혹 무얼 하실 수 있거든 해 보시오’ 정도의 뜻입니다.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하여서는 이와 같은 미심쩍은 요청으로는 어림없습니다.
요즘 교인들의 상당수는 기도를 하긴 하는데 이와 같은 모양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세상의 방법에 더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언제 응답되어질지 확신이 서지 않거든요. 해서, 세상사람들과 같이 세상의 방법에 의지하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무언가 하실만한 것이 있으시면 나를 불쌍히 여기사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이 정도의 기도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오히려 믿음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도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이 못하는 것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해서,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사람들이 세상의 방법을 좇아 살아가느냐고 들이는 많은 비용을 절약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의 기도를 드렸는데도 하나님께서 ‘Yes'로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못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4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아이의 아버지는 그래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곧 그의 태도를 고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기도 하지만,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할 때 나를 도우사 믿음을 주시기도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25절: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님께서 아이의 몸에 있는 귀신을 꾸짖으시고 명하실 때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서 떠나고, 귀신이 아이에게서 떠나자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어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킬 때 아이가 정신이 들어 일어납니다.

28-29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물러가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바라는 사람들마다 열심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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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능력을 바랍니까?
믿음의 기도를 하십시오.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갖으십시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따라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기도 이외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일하심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의 삶 가운데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바라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달리다굼” (마가복음 5:35-43)

                                                  “달리다굼” (마가복음 5:35-43)
   
                                                                               1
인도(印度)에 ‘귀사코타미’라고 하는 젊은 과부 여인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으매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길거리로 나가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내 아들을 살려줄 사람은 없나요?”라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치면서 이 골목 저 골목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저 여인의 동정만 살피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하나가 이 광경을 보고는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지금 석가모니께서 기원정사라는 절에 계시니 죽은 아들을 데리고 가보시지요.”
여인은 마지막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서둘러서 석가모니가 있다는 ‘구시라’ 성 ‘시다림’이라고 하는 숲 속에 있는 절로 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 갔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그를 찾아온 여인을 보자 석가모니는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여인은 석가모니에게 매달려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석가모니는 여인이 진정할 때를 기다려 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여인이여, 울음을 멈추시오. 그리고 일어나 마을로 내려가시오. 그곳에 이르거든 아직 한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만 골라서 쌀을 조금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죽은 아들에게 먹이면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요.”
여인은 죽은 아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하여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둘러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여러 집을 돌아다녀 저녁이 되어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 톨의 쌀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힘없이 석가모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석가모니님, 하루 종일 자녀 보았지만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가정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톨의 쌀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어서 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습니다. 석가모니는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여인이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했거늘, 꽃은 피어도 곧 지고 사람도 나서 이윽고 죽는 법이오. 인연따라 일어나서 인연따라 사라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소.”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지라 그도 생자필멸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죽은 사람을 살린 이야기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고(왕상 17:22),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 4:34).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렸고(행 9:40), 바울도 죽었던 유두고를 살렸습니다(행 20:9-12).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여러 차례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지로 가는 도중에 살리셨고(눅 7:11-17), 죽은 지 나흘이나 되고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요 11장).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십니다.

                                                                               2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을 떠나서 다시 배를 타고 본래의 장소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주 활동장소였던 가버나움(Capernaum)일 것입니다. 전과 다름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야이로요 직업은 회당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사회에서 유지에 속합니다. 많은 장로들 가운데서 뽑힌 사람이요, 공중예배에 있어서 모든 질서를 책임지고 일반적으로 회당의 일을 지휘 감독하는 사람이 회당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성경을 낭독할 자를 임명하고 설교할 사람을 초청하고 회당의 건물을 깨끗이 보관하거나 보전하는 일을 책임지고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회장당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여러 번 간구하였습니다.

딸의 병 낫기를 위하여 야이로는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유대인 지도층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이단종파를 퍼뜨리는 사람으로 보였을 텐데 야이로는 유대인 지도자 중에 한 사람으로 그런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야이로는 체면을 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야이로이지만 목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겸손히 예수님께서 자기 딸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간청을 하되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간구하였다고 했습니다(마가 5:23). 기도와 간구의 응답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번만이 아니라 응답을 얻을 때까지 구할 것입니다.

35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아직 길을 가고 있는데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낙심천만한 일입니까?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다 버리고 사정사정하여 병 고치는 능력이 출중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데 딸이 죽었다니 이 얼마나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입니까?
이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일이 헛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이때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8장 50절에는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병은 고칠 수 있는 분이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어지는 상황입니다.
                                                  
병 고치는 능력이 출중하다고 소문난 예수님이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판단은 아직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기대(期待)였습니다. 자기의 기대가 사라진 후에 믿음이 시작됩니다.
현재의 상황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까?
예수님도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셨는데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니 무엇을 믿기만 하라는 얘기겠습니까?
그가 죽은 생명도 살리실 수 있음을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 되심을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들은 반드시 이뤄짐을 믿고 있습니까?

만일 야이로가 예수님의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께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에 예수님과 계속 동행하여 집에까지 갔습니다.

37-39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은 중요한 사건에 모든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대신에 주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십니다. 아마도 그들의 믿음이 다른 제자들의 믿음보다는 앞섰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을 큰 일에 데리고 갔다가 실망스런 표정을 짓거나 말을 하는 것이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들이 장차 크게 쓰임 받을 것이기에 그러셨을 수도 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크게 소리지르고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소망이 있는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닙니다.
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듯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심은 소녀가 육체적으로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이기에 “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해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죽은 자에게는 깰 소망이 없지만 잠자는 자에게는 깨어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40-41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러나 소망이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허탄한 것으로 들릴 뿐입니다. 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의 세 제자를 데리시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달리다”(Talitha)는 ‘소녀야’란 뜻입니다.
”(Koum)은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일어나라”는 육신이든 영혼이든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뜻이며, 활동이 정지된 상태에서 빠져나와 활동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 60장 1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잠자는 것 같은 성읍 예루살렘을 향하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읍으로서 활동을 재개하며 하나님의 빛과 영광을 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패역하고 악독한 도시 니느웨를 변화시키시기 위하여 요나에게 외치는 자의 사명을 맡기실 때, 요나를 향하여 “일어나라-가라-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요나서 1:2; 3:2).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고 말씀함으로 성도가 일어나서 빛 되신 예수님께로 나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관에 집어넣어져 장지로 향하고 있을 때,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어 멘 자들이 멈추어 서게 하신 다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하심은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시는 권능의 음성입니다.
달리다굼” 하심은 야이로가 예수님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십니다.
달리다굼” 하심은 영적으로 잠자는 자들을 일으키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달리다굼” 하심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입니다.

42-43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소녀에게 “달리다굼” 하실 때,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는 즉시 효력을 발생합니다.

                                                                              3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쿰(Koum)’--‘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일어나서 주님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Saturday, April 6, 2013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빌립보서 1:3-11)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빌립보서 1:3-11)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懇求)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懇求)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始作)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確信)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心腸)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思慕)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證人)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聰明)으로 점점 더 풍성(豊盛)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찬송(讚頌)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
성도들이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도 축복이지만, 목회자가 그를 돕는 좋은 성도들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목회자들에게 가장 소망하는 성도들과 목회지가 허락되고, 모든 성도들에게 그들이 가장 원하는 목회자가 허락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해서, 목회자로서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거나 좌절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교회를 위하여서는 하나님께 더욱 매어 달려 기도할 것이요, 감사가 많은 교회를 위하여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넘치고 선한 목회자를 만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욱 목회자와 교제하여 신앙적으로 성숙할 것이요 그를 도와서 주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좀 부족하고 은혜가 덜 된다고 생각되는 목회자를 만나면, 그를 비난하고 교회를 옮길 생각부터 할 것이 아니라 그 목회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드려야지 하는 발전적이고 건전한 생각을 할 때 그 사람의 신앙도 성장하고 교회도 부흥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문젯거리인 교회들도 많이 등장하지만, 또 모범적인 교회도 여럿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가 그렇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교회가 그렇고,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그리스 반도 마게도냐에서 개척한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빌립보를 위시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등의 마게도냐 교회들은 21세기를 향한 현대교회들이 연구하고 추구해야할 모범적인 교회들입니다. 그들은 긁어모으는 교회가 아니요 나누어주는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극한 가난 가운데 있던 교회였지만 주위의 그들보다 못한 교회들이나 성도들이나 이웃들을 돕기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한 바울에게 문젯거리의 교회가 있었는가 하면, 자랑거리의 교회도 있었습니다. 동일한 사람, 바울이 목회를 하였는데도 이와 같이 다른 교회들의 모습을 보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비롯하여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바울의 자랑거리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통하여 증거되는 하나님 말씀의 씨의 좋은 밭이었습니다. 그 좋은 밭에 말씀의 씨가 떨어지매 뿌리를 내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뻗고, 잎이 나오고,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자 했을 때, 비교적 여유가 있는 고린도 교인들은 발뺌을 하거나 늑장을 부리는데, 가난으로 여유가 없는 마게도냐 지방의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이 모금운동에 동참합니다. 사실, 바울은 그들의 형편이 안 좋은 줄 알았기에 그들에게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자기들도 이 일에 참여케 해달라고 당부했으며, 그들보다 1년 먼저 이 일을 추진해온 고린도 교회보다 일찍 마칩니다.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서 바울은 이들의 자선을 칭찬할 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自願)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는 바울에게는 참으로 각별한 곳입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에 "밤에 환상(幻像)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기록한 대로, 일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을 다니면서 더욱 견고케 하기를 원했던 바울은 성령의 계시로 유럽의 관문인 그리-스 중부 마게도냐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마게도냐 첫 번째 사역지가 바로 빌립보이고 이후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빌립보 지방에서의 복음사역은 바울이 자주(紫紬)장사 루디아를 만남으로 그의 집에서부터 시작됩니다(행전 16:14-15).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한 돈을 전달해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그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붙잡히고 몇 년을 예루살렘의 감옥에 유하다가 황제에게 재판 받기 위해 로마로 옮겨져서 현재 가택연금 혹은 옥에 갇히는 상태에 있음을 이 빌립보교회가 듣고 그를 기도로서 돕고 또한 물질적으로 돕고자 에바브로디도 편에 작은 정성을 담아 바울에게 보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얼마간 바울과 함께 머물다가 돌아갈 기한이 되었을 때, 바울은 그의 편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한 그의 기도를 알게 합니다.

2
   3-5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나와) 교제함을 인함이라.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감사와 기쁨의 간구
바울에게 이 빌립보 교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하면,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드리는 대상입니다. 곧, 바울의 감사와 기쁨의 원인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에 바울이 그렇게 길지 않은 날 동안 머물렀지만 그들은 바울을 열심으로 도운 사람들이요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또 실천하는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의 보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1년 6개월이나 머물렀고 또 바울에 뒤이어 아볼로라고 하는 훌륭한 설교자를 사역자로 가졌지만 변화가 없었던 반면에 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떠난 다음에 변변한 사역자도 없었는데 그들의 믿음을 잘 유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진보를 보인 교회입니다. 이 어찌 바울의 감사와 기쁨과 자랑이 아니겠습니까?
목회자로서 어떤 성도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목회자에게 향응(饗應)을 잘 베풀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삶일 때 그렇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여럿이지만 특별히 빌립보 교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은 그런 까닭이라고 할 것입니다.

복음에서 교제함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이라" 했는데, "복음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원어 "에이스 토 유앙겔리온(ε?? τ? ε?αγγλ?λιον)"은 직역하면 "복음 속으로(into the Gospel)"입니다. 성도들끼리 교제--서로 돌아보고 구제하고 교통하는 삶--하고 또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과 교제하는 삶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삶'이란 뜻입니다. 곧, 복음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삶이란 의미입니다.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믿음의 착한 일들을 위한 간구
여기서 "착한 일"이란 성도가 서로 돌아보고 불쌍한 자를 구제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후에 지금까지 살아오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빌립보 교인들을 축복하셔서 이들이 현재 하고있는 이 믿음의 착한 일들을 계속해가게 해달라는 기원입니다.

   7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된 빌립보 교인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서 각별히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들의 선한 일이 끝까지 계속될 것을 기원함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늘 바울과 기도 가운데 영으로 교통하고, 바울의 선교사업을 때로는 기도로 때로는 물질로 도와 바울의 선교에 동참해온 것을 바울 자신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가 개척한 교회에 때로는 편지로 때로는 사람을 보내어 호소한 일에 가장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 교회인 까닭입니다.

   8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로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ν σπλ?γχνοι? Χριστο? ?ησο?)라 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 가장 깊숙함에서 아무런 가식 없이 우러나오는 진실된 애정으로'란 뜻입니다. 단지 형식적인 표현으로서 '내가 너희를 진실로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애정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마음 속을 뒤집어 보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마음을 아시지'라 함으로 극한적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9-11 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세 가지 기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세 가지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간구(懇求)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이만하면 됐지!' 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온전으로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보는 바대로 '얻은 자도 아니요 이룬 자도 아니요 잡은 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라고 자신을 평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인들이 앞으로도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게 행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허물없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선한 행위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방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선하고 허물없는 삶'은 우리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 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반복하여 강조하듯이 사랑의 실천은 우리가 믿음이 있는 자요 주님 안에 거하는 자라는 증거입니다.

셋째는 빌립보 교인들이 의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의 삶에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도,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되어 허물없는 삶을 사는 것도 궁극적(窮極的)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고자 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르고 진실된 삶은 자기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자 함임을 빌립보 교인들과 이 편지를 대하는 우리로 깨달아 알기를 원함이 있습니다.

3
성도의 결단
제가 40세의 나이로 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이래 인생의 가장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40대 전부(9년 5개월)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21년여 전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되고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2년여 뉴욕주립대학교(Binghamton)에서, 6년 간 버지니아대학교(Charlottesville)에서 학원선교(Campus Ministry)를 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학생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그들 중에 얼마간은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지내는지 알고 있으며, 또 얼마간과는 직접, 간접으로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현재와 장차(將次)에 있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목회자로서 저의 관심이며 또한 저의 기도의 대상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믿음의 진보가 없었던 성도들도 앞으로의 신앙의 삶에서 커다란 믿음의 진보를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세 가지의 것--그리스도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며,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하트포드 한인장로교회에서의 고별설교)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누가복음 18:9-14)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누가복음 18:9-14)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
살아있는 기도
「제자입니까」, 「진정, 신자입니까」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uan Carlos Ortiz) 목사님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한다"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산 기도가 아니라 죽은 기도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의 올바른 영성은 기도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합니다. 기도를 드리되 살아있는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오르테즈 목사님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이 우리를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기도할 때마다 '~을 주시옵소서'라며 죽은 제사를 드리곤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받으옵소서'라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배에 관하여 오르티즈 목사님은, "예배를 드리고 난 뒤의 삶이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드린 예배에는 다짐과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만 설교를 듣고 찬송하는 것을 즐기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 혼자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발생할지도 모를 사고에 대비한 보험 또는 보험회사의 직원 정도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그가 어느 목적지를 향하여서, 몇 마일의 속도로, 어디를 경유하여 갈 것을 보험회사의 직원과 의논하지 않듯이, 하나님을 보험회사 직원 정도로 여기는  사람은 그의 목적지에 대해서, 그의 경유지에 대해서, 그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상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고가 났을 때 분주하게 보험회사 직원을 찾듯이, 많은 사람들이 삶에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다급한 기도를 드립니다. 사고가 나도 작은 사고일 때는, 보험료가 올라갈 것을 염려하여 적당히 자기 자신이 주머니 돈으로 해결하듯이, 삶의 작은 문제들은 하나님께 보고함 없이 자신이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매일 매일 삶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나약하고 잘못된 곳으로 고백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매일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한 적이 없지만 내 삶이 크게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맞는 말 같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적이 없었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십 년을 교회생활을 하고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삶'은 사람의 편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크게 잘못된 삶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바른 기도생활과 신앙생활의 시작은 하나님이 왜 나의 일상생활에서 필요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하고 고백함에서 비롯됩니다.

2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의 강청기도(18:1-8) 다음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에 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가 어떠하여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9절 이하의 비유는 자기는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사람이 없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평가와 용서에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인색함을 보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요즘의 교회와는 달라서, 성전 안에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제물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들어갔습니다.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전 뜰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요즘도 그 당시의 성전 뜰에 해당하는 '통곡의 벽'(Wailing Wall, Western Wall) 앞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입니다. 하기에, 그들의 열심이 참으로 특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삶의 행위 이상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외형적인 삶은 자타가 의롭다고 공인할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믿는 사람의 의의 척도로 바리새인의 의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셨는데 이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십일조의 대상이외의 것으로도 십일조를 드린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인의 외형적 삶 그 자체는 분명히 평균 유대인들보다는 율법을 더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시고 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바리새인이 그러하듯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시고, 2절에서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시고, 5절에서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로마의 정부에 빌붙어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세금명목으로 돈을 거두어 간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세리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정기적 세금 징수자인 '카바이'(Cabai)인데 이들은 수확곡식의 1/10, 포도, 과실, 기름의 1/5, 개인수입의 1/100의 소득세를 거두어 갔습니다. 또한 14-65세의 모든 남자와 12-65세의 모든 여자로부터 1인당 1년에 한 데나리온을 인두세로 거두어 갔다고 합니다.
둘째는 세관 세리인 '목헤스'(Mokhes)인데, 이들은 정부 주요 세원 징수자였습니다. 이들은 수출과 수입의 2.5-12.5%를 매매세와 향용세로 거두었고, 통행세, 항구입항세, 시장세, 도시출입세 등등 수많은 세금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덕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자기 스스로 드러낸 것이며, 드러내되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드러낸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따로' 기도한 것은 '죄 많은 세리'와 동류가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감사 기도'로 여기지 아니 하셨습니다.
첫째는,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둘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 그리고 세리'와 비교함으로써 그 자신은 그들과 같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토색, 불의, 간음, 부정의 죄'를 범한 자는 아닐지라도 그에게는 '위선과 자기 기만과 교만'의 죄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것은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 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는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어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비교하는 교만한 심령의 감사는 감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의의 열거입니다.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한 분만 그의 의를 알아주시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함 받기를 원하는 까닭입니다(마태 6:5).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성전 뜰 중에서도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에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리보다 더 의로운' 바리새인의 '감사 기도'를 들으시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는 이 세리의 기도는 들으십니다. 시편 51편 1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께 다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간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들으심은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알았기 때문이며, 그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필요한 것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죄를 지어 죄책감이 생기게 해야 되겠네요??'
그러나, 일부러 더 많은 (추가적인) 죄를 범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도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더 많은 죄지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함'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닮아 가는 삶을 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하였는데, 우리 입술에 이러한 죄인 됨의 고백이 없다면 이는 문제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성경은 역설(paradox)입니다. 자기를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불의한 자가 되고, '불의하다고 여기는 자'는 의로운 자가 됩니다. 이는 의·불의의 판단과 결정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이시며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에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를 낮추려고 '짐짓'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하고, 죄와 허물이 많은지 절실히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우리 각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성도의 결단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기도로 끊임없이 대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특별히 필요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께 알리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과 죄 많음을 고백하며, 이 거친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예비하여주심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대형 사고가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이번 신호등에서 직진할 것인지, 아니면 우회전할 것인지, 또는 좌회전할 것인지, 이곳에서는 몇 마일로 달리는 것이 적당한지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 매 순간 기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과부의 강청기도" (누가복음 18:1-8)


"과부의 강청기도" (누가복음 18:1-8)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리라.


1
마음을 움직이는 간구
오래된 얘기지만, 한국의 한 지방 청년이 프랑스의 미인대회 출신의 미녀에게 마음이 푹 빠졌습니다. 그는 그 아름다운 프랑스 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해서, 어찌 어찌하여 그의 연락처를 알게되고, 하루가 멀다하고 연애편지를 그에게 보냅니다. 그 프랑스 미녀는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의 청년이 보내는 편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미녀의 귀찮음은 호기심으로 변하게 되고 심심풀이 답장을 하다가 결국에는 사랑의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한국의 재벌이나 준재벌의 아들이 아니요,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지방청년인데 그가 그렇게 원하던 대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을 구하는 마음이 특심한 까닭입니다. 이 청년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신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간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고 그에게 간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을 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과 요셉 등에게 하나님의 같이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실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들에게 나타내셨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목이 마르다'고 모세에게 떼를 쓰며 원망할 때에도 그들을 벌하시는 대신에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심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채워주셨습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사들을 두어 치리하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원한을 풀어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고 청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고 그 섭섭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되고 신정정치에서 왕정정치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삶을 감찰하시고 간섭하기를 원하십니다. "간섭하기를 원하신다"고 해서 '사사건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하시고 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가 요청할 때 도움을 주고 갈 길을 알려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그 행동의 판단과 결정을 사람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주셨기에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이며 싫어하심이 무엇인지 웬만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임금이 사단이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가 많고, 그들의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이것으로 낙망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께 매어 달려야 합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심을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과부의 강청함에는 못 이기어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의 원함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1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함
예 수님은 '어떤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그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닌가'로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 오는 것 같을 때에도,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감사의 삶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오래 낙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낙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사단이 믿음의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사용하기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이 항상 기도할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2절: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불의한 재판관
어떤 도시에 믿음이 전혀 없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권세를 누리면 되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억울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절: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과부의 강청
그런데 그 불의한 재판관의 도시에 억울한 사정이 있는 과부가 살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그 도시 권력의 정점이라고 한다면, 이 과부는 그 도시의 권력이 없고 소외 받는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이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는 달리 호소할 길이 없기에 자주 불의한 재판관 앞에 나아가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강청(强請)합니다.

   4-5 절: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강청을 들어준 까닭
과부의 억울함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재판관은 귀찮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철저히 무시하였습니다. '이 과부가 나의 쾌적한 삶을 방해하는구나. 내게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있는데, 이걸 죽여? 살려?!'라고 속으로 자신에게
묻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다가, '그냥 하루 이틀 내버려두자. 제 풀에 꺾이겠지. 뭐, 죽이고 송장 치를 일 있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과부는 지칠 줄 모르고 그의 집무실로 찾아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졸라댑니다. 때로는 욕설을 퍼붓고, 때로는 모욕을 주는데도 한결같이 찾아와 그에게 떼를 씁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처음에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귀 막고 있었지만, 얼마쯤 지나니까 도저히 이대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그 과부의 사정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원한을 풀어주기로 결정합니다.
이 재판관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불의한 판관이지만, 강청하는 사람 앞에서는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6절: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관의 말의 의미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고 권고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 자체를 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을 건다고 하더라도 최대한의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서 합니다. 그리고 항상 물러날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께 접근합니다. "하나님, 혹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바쁘시면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안 들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것은 제 문제인걸요." 지극히 공손하고 예의를 갖춘 듯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이런 기도에는 응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시며 그의 "아빠 아버지(Abba Father)"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밤낮 부르짖는 자들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제게 여러 아이가 있어서 제게 무엇을 들어달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떤 아이는 제가 'No'라고 하면, 그냥 물러나는데, 어떤 아이는 'No'라고 두 세 번 대답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졸라댑니다.
이 때 이익을 보는 아이는 결국 계속 졸라댄 아이이며, 아버지로서 그 아이의 떼씀이 그렇게 나쁘게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그렇게 졸라대는 아이가 사랑스럽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떼쓸 때 아빠가 결국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아빠와 아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도 많은 자녀들이 있는데, 어떤 자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남이라고 생각하여서 아예 접근하지도 않고, 어떤 자녀는 하나님께 요청은 하는데 혹시 뭐라고 나무라지나 않으실까 하는 마음에서 항상 물러날 자세를 취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요청하되 체면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매어 달려 간구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요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체면 불구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어 달리는 자녀를 사랑하시며 그의 요청을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물론, 그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할 것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요청도 (그것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가운데 "Yes"로 응답되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불의한 판관이라도 떼를 쓰며 매어 달리는 과부의 강청을 물리치지 못하는데, 의로우시며 인정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의 간구를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때로 강청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그의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왜 그에게 그가 바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는지 알게 하십니다.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속히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강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들어주시되 "속히"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낙망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이 앞의 기도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라는 예상이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할 것인데, 교회들과 교인들은 많아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적기에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만 '들어주셔도 그만 안 들어 주셔도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뜻은 그러나, 그와 같이 믿음이 있는 사람을 보기가 드문 그 때에도 '내게 속하기를 원하는 너희는 항상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함으로써 믿는 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어떤 장로님의 아들이 심한 교통사고로 뇌사(腦死) 상태에 빠졌습니다. 식물인간의 판정을 받고 그러한 환자들만 전문적으로 수용하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여기는 뇌사에서 깨어나게 하는 곳이 아니라 다만 신체의 다른 기관들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니 그저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하여 다른 기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곳입니다. 병원의 의사들이나 간호원들은 이 식물인간들이 깨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식물인간들 중에 하나가 된 아들을 둔 아버지 장로님과 어머니 권사님은 아들의 침상을 떠나지 않고 밤낮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을 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해주십시오. 이 아이가 하나님을 위해서 귀히 쓰임 받기를 원하는데 그냥 이렇게 누워있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교회 담임목사님의 기도를 받기 위하여 "매일 매일 와 주십사"라고 강청합니다. 해서, 부모님이 밤낮을 기도하고, 담임목사님이 거의 매일 들러서 그 아들의 의식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7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한 어느 날 그 장로님의 아들은 놀랍게도 긴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는 구하지 않은 까닭이요, 구하여도 그저 형식적으로 건성 구한 까닭이요, 또는 세상의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한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매어 달려 강청하여 기도하는 사랑하는 자녀의 간구를 물리치지 아니 하십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되, 한 번뿐 아니라 여러분의 삶 전체를 통하여서 매일 매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