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5, 2016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 (마태 2:1-12)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 (마태 2:1-12)

       
1
유대땅 갈릴리 나사렛이라고 하는 마을에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요셉이라고 하는 목수 청년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왔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 1:30).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구원을 주실 것임을 미리 알려주심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누가 1:34)라고 반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누가 1:35)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백성 유대인들에게 하신 약속 (미가 5:2; 이사야 7:14)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메시야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높은 곳에서 정치적 왕으로 임하실 메시야를 기다려왔지만, 예수님은 낮은 곳에서 백성 가운데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시고 눈물을 씻겨주시는 영적 왕으로 임하셨습니다.
로마황제 아구스도의 명에 따라, 요셉도 그의 정혼자인 마리아와 같이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하어 올라갔습니다. 유대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로마황제의 명으로 고향으로 가고 있으므로 길들과 여관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인 베들레헴에 다다랐을 때에는 여관은 이미 먼저온 다른 사람들로 만원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고향을 떠나 나사렛으로 이사한 지도 오랜세월이 흘렀으므로 베들레헴에 그들이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아무 곳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어두워지기 시작한 날을 쉬기 위하여 마굿간에 머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바로 이날 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분만하였습니다. 마굿간에 예수님을 누일 곳이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들들은 말구유에 짚을 깔고 그곳에 예수님을 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이야말로 그분이 우리의 가까이에 계신 분이 되시게 하고 우리의 주님이 되시게 한 것입니다.

2
1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했습니다.
헤롯 왕은 헤롯 대왕을 가리키는데 그가 죽은 해가 주전 4년이므로 예수님은 적어도 주전 4년 이전에 태어나셨습니다.
주전과 주후의 기산(起算)이 되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인데, 이와 같이 예수님의 탄생이 주전이 되어버린 것은 6세기 중반(526년) 흑해 북부 스키디아 지방의 수도승 디오니시우스 엑시귀스(Dionysius Exiguus)의 계산 실수에 의한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의 실질적인 탄생년은 학자에 따라서 주전 7년에서부터 주전 4년에 이르기까지 다르게 주장됩니다.

그가 태어나신 곳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남쪽 “스블론 지파의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 남쪽 6마일 지경의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입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동방으로 온 박사들은 헬라어 원어에는 마고이(μαγοι)라고 하는데, 페르시아의 마기족(Magi) 사람들로서 마술(magic)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마기족에 속한 사람들이 산에 올랐을 때, 마침내 그들은 이상한 현상(現象)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큰 별이 있고 그 별의 빛이 하나의 기둥을 형성하였습니다. 별이 땅으로 떨어져 굴속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그 별과 별빛  기둥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낙타를 타고 별빛 기둥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 조상 대대로 믿어온 구세주의 탄생임을 확신하면서 팔레스틴 땅을 향하여 별빛 기둥을 좇아갑니다. 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유대 땅 예루살렘입니다.

4세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로마정부는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하고 이어서 1월 6일을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한 현현일(Epiphany)로 기념했습니다.
성경에는 동방박사들의 수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 3세기의 교부신학자인 오리겐(Origen)은 동방박사(μαγοι)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마태 2:11), 이들의 숫자를 셋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8세기에는 이들 동방박사들에게 이름까지 붙여서 발타사르(Balthasar), 멜키오르(Melchior), 가스팔(Gaspar)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의 전승에 의하면, 처음에 페르시아를 출발한 동방박사들은 이 세 사람들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알타반(Altarban)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불쌍한 병든사람을 만나서 치료하고 구제하느라고 다른 동방박사들보다 뒤쳐져서 팔레스틴 땅에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2-3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묻는 이유는 밤에는 별 기둥을 따라왔는데, 날이 밝아옴에 별빛 기둥을 노친 까닭입니다.
이방 페르시아의 마기족 사람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기대하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유대 땅에 왔다는 소문이 헤롯의 귀에 들리고, 이에 메시야의 탄생이 하나님의 예정이심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까 불안한 마음입니다.

4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헤롯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모으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묻습니다.
이미 주전 700년 경에 미가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5-6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알기에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인용을 약간 변형하여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원래 작은 고을인데, “작지 아니하도다”고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메시야가 이곳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까닭입니다.
이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목자” 곧 양들과도 같은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하실 분입니다.

7-8절: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은 이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그가 친히 아이 태어난 곳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으므로 점성술과 마술에 밝은 그들로 먼저 찾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아이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줄 때 이 아이를 처치하기 위함입니다.                                                   

9-10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과 헤어져서 베들레헴으로 향할 때 동방 페르시아에서 보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인도합니다. 그들은 별빛 기둥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향하고 별빛 기둥이 멈춰서는 곳까지 갑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한” 것은 그들이 잠깐동안 놓쳤던 별을 다시 찾은 까닭이요, 이제 그 별을 따라가면 그들이 오랜 동안 고대해왔던 구세주를 만날 수 있다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집에 들어가”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예수님의 탄생에서 얼마간 시간이 흐른 것을 짐작케 합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신 곳은 마구간의 구유인데, 후에 집안으로 옮겨지신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베들레헴 지경에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방박사들은 이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서 마리아와 함께 있던 아기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16절에 보는바 대로, 헤롯이 나중에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실제로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상당 기간--길게는 2년 가까이 지난 다음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준비해온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립니다.
황금(gold)은 예수님의 인성과 왕권을, 유향(frankincense)은 예수님의 신성과 제사장권을, 몰약(myrrh)은 시체에 바르거나 마취제로 사용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장차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12절: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들은 꿈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시대로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에게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그들의 고국으로 귀환하였다고 했습니다.
만일 헤롯에게로 가면, 헤롯은 그들을 추궁하여 예수님의 탄생장소를 알아낼 것이고, 그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의 왕권을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는 아기 예수님을 헤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경륜의 계획을 온 세상에 알리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나심은 그의 오심이 특권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낮고 가난하고 멸시받고 고통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하여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방의 마기족 사람들이 예물을 갖고 그들이 고대하던 구세주를 찾아옴은 예수님은 유대나라의 구세주일 뿐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메시야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7세기에 살았던 안겔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는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천 번을 태어나셨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서 나신 바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잃은 자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모든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인류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천 번을 태어나셨어도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내가 없거나 내가 그의 탄생의 의미를 부인한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내게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이 내게 의미 있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나”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이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지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주님의 구원(救援)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삶에 감격으로 다가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Sunday, October 23, 2016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한 바울의 감사” (살전 1:1-10)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한 바울의 감사” (살전 1:1-10)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말입니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고
     밭이랑에 물을 주지 않았다면
     풍성한 알곡들을 거두기란
     바랄 없으리라.

     우리의 이렇듯 신비로운 세계를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는 없나니,
     삶의 밭은 가시밭이든 혹은 꽃밭이든
     우리가 뿌리는 대로 거둘 것이니라.“

우리의 세상에서의 생활이든, 믿음의 생활이든 우리가 수고한 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또 풍성한 것을 거두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인내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친 시간과 열정, 그리고 헌신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성과가 크기를 바라고 조급히 성과를 보려고 때가 많습니다.

무디(D. L. Moody, 1837-1899) 목사님이 번은 자기의 사업성과가 너무도 미미한 것에 낙심하여 서재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의 친구가 찾아와서 낙심한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자기가 일한 성과가 너무 작아 낙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친구는자네, 노아의 생애에 대하여 공부한 적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무디가아니, 그의 생애에 대하여 특별히 공부한 일은 없는걸하고 대답하자, 친구는 무디에게 노아에 대하여 공부하라고 권합니다. 무디는 친구가 뒤에 구약을 펴들고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백년가까이 온갖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받았으나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견딘 것을 읽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었을 세상에 홍수가 내리고 그의 믿음의 역사로 지은 방주 안에는 오직 육축과 노아의 여덟 가족만이 들어갈 있었습니다. 무디는 나의 조급함이 이리도 어리석은 것임을...” 하며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새로운 용기를 주십사 기도하였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중에 조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화를 내고 돌아섭니다. 그런가 하면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람 말만 듣고 있다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운데는 그가 입으로 말하는 일이 가지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것을 말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게도냐 전도는 이차 전도여행 그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을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되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전 16:9)고 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에서 처음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한 곳이 빌립보 지방이었는데, 그곳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 회당에서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심 증거하였습니다. 이때 경건한 헬라인의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이로써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소요가 일어나자 베뢰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이르는데,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그곳으로부터 내려오매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듣고 편지하는 것입니다.

2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이 편지를 쓰게된 계기는 그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 소요가 일어나 부득이 이곳을 떠나게 되고 이후에 가고자 하나 없어(살전 2:17-18), 디모데를 보내어 형편을 알게 하는데(살전 3:1-5),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그곳의 소식을 가져오므로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살전 3:6-13). 

데살로니가전서 3 10절에서 바울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편지를 통하여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을 독려(督勵)하고(3:6,10), 그들 가운데 있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음란[4:3], 게으름[4: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고(4:13-17), 새로 믿기 시작한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격려하고(4:1-12), 바울에 대한 중상(中傷) 대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증거한다[2:3,9-10]; 아첨한다[2:4-6], 겁쟁이다[2:17-20]).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와 같이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빎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개척한 교회가 많은데 어느 교회 하나 그의 마음과 기도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교회들 가운데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바울을 가장 기쁘게 하고 그를 열심히 도운 교회들입니다.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바울은 믿음의 초기에 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과 그의 전도에 반대하는 데살로니가 지방의 유대인들의 소요(騷擾)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음이 대견하였습니다. 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work of faith) 선한 일의 열매를 맺는 능동적이며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후에는 믿음을 속에 구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역사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믿음의 역사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생각나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라면 역사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 5-6절에서도 역사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가 성령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말씀합니다.

둘째는,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바울은 사랑의 수고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생각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 책의 저자 토마스 켐피스(Thomas à Kempis)고통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고 없습니다. 참된 사랑이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20:35). 이것이 참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본문에서 말하는 아가페사랑입니다.

셋째는, “소망의 인내”(steadfastness of hope) 하나님 나라와 상급을 바라보는 사람은 인내할 소망하는 바를 얻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기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망은 헛된 것이며( 1:23)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 참된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21 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 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있는 인내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쉬지 않고 기억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기억이 매우 자주 떠올랐기 때문에 '쉬지 않고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각나는 사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이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던 과거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구속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고 미래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삶의 초점은 확실히 예수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로 인하여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쉬지 않고 기억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유대인의 박해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의 생활에 힘쓰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힘쓰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심을 알게 합니다.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하여진 복음은 그저 말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해서 그저 환난이나 소요가 나면 그대로 시들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담대하게 지킬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의 능력이 안에 역사하기 때문이며, 이를 위하여 성령이 도우시고,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확신 가운데 전달되어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복음을 전한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먼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와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기에,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함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동일한 능력과 성령의 역사와 복음으로 말미암은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의 연조가 짧고 그들 앞에 환난이 있음에도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생활을 기뻐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바울과 또한 복음의 내용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를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바울에게 기쁨입니다.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에 위치한 교회로서 같은 지역에 있던 빌립보 교회와 함께 초대교회 당시 좋은 본을 보인 교회입니다. 

바울이 3 여행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개척한 곳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인데, 이들 중에 마게도냐에 있던 교회들--특히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이후의 기록이지만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을 얼마나 대견하게 여기는지는 고린도후서 8 1-5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1-2절에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증거했습니다.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믿음과 그들에게 전달되어진 복음의 소식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뿐만 아니라 입에 입을 통하여 널리 널리 전파되기에 바울이 굳이 그들의 좋은 믿음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9-10: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저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관하여 좋은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함 받았으며, 그들이 복음을 들었을 그들 가운데 있던 우상을 어떻게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어떠한 열심으로 섬기며,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심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좋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니까 주위의 사람들--아직 신앙에 열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들의 좋은 삶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주위에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3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까?

사랑의 수고가 있습니까?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주위에 아름다운 소문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갖고 가까운 지역뿐아니라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 믿음의 좋은 소문을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