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6, 2014

“평균의 경제원리” (고후 8:7-15)

“평균의 경제원리” (고후 8:7-15)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1
마르크스(Karl Marx, 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95)가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믿었던 공산주의적 사회주의가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통일, 소비에트연방(USSR)의 붕괴 등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원하고 개인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아마도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두 살 전후부터 내 것, 네 것을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내 것’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자기 것을 주장하고 움켜쥐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두세 살에서 시작되는 이 사유욕(私有慾)은 나이가 들어도 줄어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나 능력이 적은 사람이나 능력껏 일하되 동일한 것으로 분배하고 사유를 인정하는 대신에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공산주의는 각 개인에게 그 이상(理想)만큼이나 매력적인 것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도, 능력이 많아도 동일한 분배를 받는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 많은 수확을 거두고자 열심히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이상적인 제도이긴 했지만 실패한 것은 인간의 본능을 과소평가한 까닭입니다. 국가가 강압적으로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등장한 모든 경제체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임이 사실이지만 이 역시 완전하지 않아서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경제체제를 제시합니다. 이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단점들을 보충하여 줍니다. 적어도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간에서는 교회를 통한 (빈부에 대한) 평균화 노력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를 줄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공생주의(Commonism)가 바로 그것입니다(행전 2:44-47, 4:32-35). 이것이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각 개인의 능력과 재능에 따른 경영과 소유를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능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경영하여 더 많은 것을 이윤으로 남길 수 있고, “자발적으로(voluntarily)", "기쁜 마음으로(joyfully)" 자기의 유여한 것을 적게 남긴 자에게 나누어줍니다.
21세기 현재의 지역교회들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자발적 공유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는 그대로 유지하되 자신의 유여한 바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헌금이나 기타의 형태로 교회를 통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기를 원하셨던 나눔의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빚진 자”(롬 8:12; 13:8)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빚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빚은 하나님께 진 것인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의 빚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빚은 곧 주위의 가난한 자들에게 진 빚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유대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나 영적으로 부요한 자는 영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영적인 빚을 진 자요, 영적으로 가난하나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물질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나눠줄 것이 없어’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1-10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새 미문이라 하는 성전 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씀할 때,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2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바울에게 전하여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적인 헌신에 관하여 언급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모금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7절에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작정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대신에, 그들의 선한 것에 호소(呼訴)합니다.
“믿음”(고전 13:2)과 “말”과 “지식”(고전 12:8) 등은 고린도 교인들이 갖고 있던 장점들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그 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지나치리만큼) 은사들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고 바울을 향한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랜) 사랑함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성령의 은사와 사모함과 사랑함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즉,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은혜”가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였던 것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위해서 하는 “이 은혜”에 인색함이 아니라 풍성한 것으로 하라는 당부입니다.

8절에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의 표현이 의무감이나 명령으로 되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는 율법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하는 일에 자원함이 없다든지, 헌금하는 일에 인색하더라도 구원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힘에 지나도록 넘치는 자원함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한 마음에 호소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기쁨과 칭찬의 대상인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사랑이 진실한 것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시요, 이를 소유하신 부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되, 부유한 왕궁의 왕자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오실 때, 베들레헴의 한 여관 마굿간의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으로 점철(點綴)된 것이었는데, 그는 공생애기간중 마땅히 누울 아늑한 방 한 칸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이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어떻게 우리로 부요케 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난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함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예수님의 가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부요해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난케 되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함을 받고 영생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요한 자가 아닙니까? 현재의 우리 모습이 고통스럽고, 헐벗고, 갇히고, 병든 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부요한 자입니다.

10-11절에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 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대부분 교회를 찾는 주된 목적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인데 성경말씀이 종종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으로 쌓여갑니다(deposit).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져버릴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중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으로부터 일년 전에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늦게 시작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벌써 모금을 완료하였는데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모금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는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간곡하게 청합니다.
바울은 답답한 심정이지만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의 자발적 의지에 호소할 뿐입니다.

12절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물과 기뻐하시지 않는 헌물의 원형이 아벨과 가인의 제사입니다. 두 제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벨의 제사는 구분됨과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구분됨이 없었고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더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습니까? 이는 그 과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삶의 전부를 드렸기 떄문입니다. 부자에게는 두 렙돈이 하찮은 것이지만, 이 과부에게는 그의 생활비 전부인데 이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연보의 본이 된 것입니다.

13-15절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설명합니다. 평균의 원리는 우리의 풍요로운 것--유여(裕餘)한 것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입니다. 이리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부요(富饒)한 것으로 우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믿는 사람들간에 균등화되어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평균의 경제원리의 근거를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실 때, 한 사람 몫으로 한 오멜씩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는데(출 16:15-18),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그들이 먹을 때에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에게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아무도 아침까지 거둔 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욕심이 발동하여 혹은 하나님이 그 다음날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신의 마음으로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거둔 만나를 남겨둔 자는 거기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남을 경험하게 되며 모세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출 16:19-20).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John Calvin, 1509-64)도 바울의 평균의 경제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칼뱅은 “물질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의 물질의 풍요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영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로서 그의 영의 풍요를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리할 때, 믿는 자의 공동체가운데 영적으로·물질적으로 궁핍함이 없게 됩니다..

3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계획(엡 1:9)은 “인간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구원계획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한 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평균의 경제원리”에 따라서 살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물질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유여(裕餘)하신 것을 가지고 주위의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한 자를 돌아보고 나눠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부요한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Sunday, November 2, 2014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 (2) (고후 8:1-6)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 (고후 8:1-6)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도다.

1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의 부인이며 저술가요 개혁자요 외교관이기도 하였던 엘레노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의 명언입니다:
   Great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small minds discuss people.”
   (커다란 마음의 소유자들은 사상을 논의하고, 평균의 마음의 소유자들은 행사를 논의하고, 작은 마음의 소유자들은 사람을 논의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사람들은 가장 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무슨 행사를 마련할까 무슨 껀수를 올릴 것인가 얘기하는 사람들은 평균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우리가 왜 사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대감각으로 의역하면, “작거나 평균적인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여서 다른 사람의 얘기나 하고, 오늘은 어떤 레스토랑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마실 것인가, 어떤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을 것인가, 어디에 위치한 얼마짜리 집에서 살 것인가, 차는 무슨 형의 차를 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얘기하는 사람들인데,
너희 커다란 마음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여라--즉,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교회를 섬길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의 지체로서 나는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을 생각하고 의논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다 해결하여 주시느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나누는 교회”(distributing church)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현대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하면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구제를 통하여 나눌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구제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방법입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적 사랑과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제를 통하여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물질적 사랑과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구원계획(救援計劃)을 에베소서 1장 9절에서는 “경륜”(영어성경에서는 plan 또는 purpose 또는 good pleasure)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미아--즉 경제 또는 경제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 또는 경제계획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째는 물질적 구원계획이요 둘째는 영혼의 구원계획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물질적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한 교회와 성도들의 노력이 구제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영적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한 교회와 성도들의 노력이 전도와 선교입니다.
우리 교회가 구제와 전도와 선교에서 열매를 맺을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건전한 교회요 칭찬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인데 어떻게 전도와 선교와 구제에 재정을 할당할 수 있습니까?” 하여 이를 등한시 여기고 이 사명을 위해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 그 교회는 설령 큰 교회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교회는 나누어주는 교회(distributing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보이신 5병2어의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나눔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 좀더 시간이 많으면,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이웃을 돌볼텐데”; “나에게 좀더 재물이 많으면 교회에 십일조도 하고 이웃을 구제할텐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재 다소 부족한 듯한 시간과 재물로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물하지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재물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2
바울이 선교사역을 감당할 당시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팔레스틴 지방에 가뭄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사막성 기후인데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이 가뭄으로 고생하는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종종 있던 일이고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야곱과 요셉의 시대에도 가뭄이 7년동안 계속될 때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고 거기에서 그들이 아랍상인에게 은전 20냥에 노예로 팔았던 동생 요셉을 만나고 결국에 팔레스틴 지방의 가뭄으로 야곱의 식솔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 자신의 생계유지(生計維持)를 위해서는 스스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구차(苟且)하게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가난에 허덕이며 고통(苦痛)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 편지하고, 사람들을 보내며 모금(募金)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의 그의 동포들은 그를 배척하고 그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었지만 로마서 9-1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형제·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기간 중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는데, 그의 세 번째 전도여행(사도행전 18:23-21:17)의 목적은 바로 그가 각 교회에 편지하고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하라고 하여 마련된 돈을 거두어 예루살렘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3년여의 기간을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두루 돌면서 돈을 모아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그 스스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는 남은 생애동안 비천(卑賤)과 환난(患難)에 처하는 삶을 살았지만 “부요한 삶”을 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후에 그가 가난과 역경과 핍박의 삶을 살았지만 부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부요한 자이었으나 가난하게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풍부(豊富)에 처하여도 비천(卑賤)에 처하여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가르쳐주신 까닭입니다. 해서,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간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여 모금을 권면함에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구제에 적극 참여하고 풍성하게 드렸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적인 구제의 참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삶의 본이 표현되어 있는데, 1-5절의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은 바로 이 본을 그대로 따른 예입니다.

1절에서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서 되어진 것 같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루살렘성도들을 구제함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란 말의 헬라어 카리스(χάρις)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해의 빛’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함은 해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할 수 있는 ‘달의 빛’의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면서 이 은혜로서 반사되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반증입니다.

2절에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시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셨는데,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도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9절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지만물, 온 우주를 소유하시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창조된 것이 없는 부요하신 분이셨는데 그 안에서 우리를 부요한 자로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는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부요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극한 가난에서 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3절에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그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마게도냐 교회들도 예루살렘의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들의 가진 것을 주었습니다.

4절에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란 은혜로 표현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하십시오 하십시오. 합시다 합시다.” 외쳐도 묵묵부답, 아무 반응이 없는데,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등의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은 스스로 나서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동참시켜 달라고 하니 이 얼마나 흐뭇하고 가슴 벅찬 일입니까? 바울의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자랑과 사랑,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5절에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고 함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금에의 동참은 바울이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솔선하여 자원하여 그들을 동참케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하나님의 뜻을 좇아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마게도냐 교회들의 구제 또한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 믿는 사람의 이웃 사랑함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6절에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견할 때, 예루살렘 성도들의 극심한 가난의 처지를 설명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모금을 할 것을 설득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에 동의하고 모금하는 일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말씀함은 모금하는 일을 빨리 매듭지으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연보함을 “돈”(ἀργύριον, ἄργυρος)이란 단어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은혜”(χάρις), “자비를 베품” 혹은 “봉사”(διακονία), “친교” 혹은 “교제”(κοινωνία), “풍성한 선물”(εὐλογία), “구제를 위한 선물 혹은 은택”(λειτουργία) 등의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구제 혹은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3
마게도냐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에 참여함이 예수님의 삶의 본을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소유한 부요하신 분이셨는데 우리에게 부요한 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지상으로 내려오셔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우리는 이전까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심령이 매마르고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부요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축복과 부를 소유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부요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같이 쉬 없어지고 썩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 걱정하던 세상 것으로 더 이상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부요한 백성이 되는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함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그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눈에 보이는 헐벗고, 갇히고, 병든 우리 중에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봄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와 자매 중에 작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 보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모든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돌봄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부요한 삶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6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나 자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요한 삶은 우리의 가진 것에 여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함께 나눌 때에 가능합니다. “나 먹을 것도 없는데 무엇을 나눕니까?”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현재의 형편에서 나아질 수 없고, 천만금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극한 시련과 가난 가운데서 그들의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내어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서 5,000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거두신 예수님의 기적(마태 14:13-21)도 적은 것이지만 함께 떼어서 나눌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우리의 가진 바 적은 것이 나 먹기에도 부족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를 더 궁핍한 형제·자매들과 나눌 때에 우리는 풍성한 것으로 예비하시고 공급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전 20:3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부족한 가운데 우리의 가진 것을 떼어서 나누는 마음일 때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혼자만 잘 살겠다고, 혼자만 구원받으면 족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자요 여전히 불쌍한 자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본을 보인 것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진 바 유여(裕餘)하거나 부족(不足)한 것 중에 일부를 떼어서 나누어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부요한 자요 주님의 축복 안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의 모범이 된 것 같이, 우리가 하는 하나님을 위한 사역들이 모든 지역의 교회들의 모범이 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부요한 삶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