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8, 2012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행전 2:22-36)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행전 2: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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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한국에 신비주의에 몰입한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자기의 육신도 부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기분은 확신으로 바뀌고, 해서 그는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죽은지 사흘만에 반드시 다시 살아날 터이니까 내가 죽거든 나의 시신을 관에 담아 본당 앞에다 안치하고 관뚜껑을 열어놓으시오. 그리하면, 사흘만에 내가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이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을 신적 존재로 여기고 있던 터라, 목사님의 당부에 따라 목사님이 숨을 거둔 후 사흘동안 관 뚜껑을 열어놓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목사님이 부활할지도 모른다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때가 초여름인데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목사님이 소생하기는커녕 심한 냄새가 나기까지 합니다.
죽었다가 잠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혹 듣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회생입니다. 이는 그가 다시 살아났지만, 반드시 육신으로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생은 부활의 모형(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느 모슬렘 교도가 한 그리스도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갖지 못한 것 한 가지를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것이 뭐냐고 묻자, 그 모슬렘 교도는 의기양양하게 “메디나(Medina)에 가면 마호메트(Mahomet=Muhammad: 이슬람교 창시자, 570-632)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 밖에는 볼 수 없죠?!” 그 그리스도인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대답합니다. “잘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는 없는 것이랍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신약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그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일 뿐 믿음은 없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는 헬라어 원어성경의 마태복음 28장 1절로부터 그리스도 부활 사건을 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절에 와서 눈길이 멎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οὐκ ἔστιν ὧδε ἠγέρθη γὰρ καθὼς εἶπεν).
“그가 살아나셨다”(ἠγέρθη)란 단어에 신학자의 눈길이 고정되더니, 이 말씀이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으로 그 교수의 심령을 뒤흔들었고 큰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가 이제까지 수도 없이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의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역사적 실체성을 믿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그 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뒤흔들 때 그는 이로 말미암아 깨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앉았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뛰쳐나오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날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그의 심령도 부활한 것입니다.

기독교(그리스도인이 속한 것은 삶 그 자체이지만, 굳이 종교로 분류한다면)는 ‘빈 무덤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제외한다면, 이는 마치 찐빵에서 그 속알맹이인 ‘앙꼬(=단팥)’를 제하여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곧, 앙꼬 없는 찐빵이 됩니다. 아무 맛도 없을 뿐 아니라 입맛을 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반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는 성도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믿다가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15:14-18). 우리의 바라보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생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15:19).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되지 않고, 우리가 불쌍한 자들이 아니라 축복된 자들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고,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는 모든 인생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에 동참하게 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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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요즘은 전도를 할 때,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리하면, 세상에서 복 받습니다. 하는 일들이 잘 됩니다. 자녀가 축복을 받습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전도의 내용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목격자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가 오늘 외치는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2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순절의 절기를 맞이하여서 각 나라 각 지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하셨는데, 그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던 소리가 하도 크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이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일어나서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경륜의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예수님의 무고하신 죽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삼 년여의 공생애 삶을 살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법 없는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아주 머물러 두지 아니하시고 그를 사망의 고통과 어둠에서 풀어내어 살리셨습니다.

25-28절에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라고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다윗의 시(시편 16:8-11)에 음부(=무덤, grave)에 머물러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장차 (영적) 이스라엘에 임하실 그리스도인줄 모르고, 예언적 고백을 시로 옮겼지만 이는 부활하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임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들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고,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을 예언합니다.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시가 일인칭으로 쓰여졌지만 그것이 다윗 본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적 시인 것은, 다윗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체는 무덤에 묻히고, 썩었으며, 그 묘가 여전히 이스라엘 가운데 있음으로 분명하다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30-31절에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지자로 사용하시고, 그 가정을 축복하사 다윗의 혈통에서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나오게 하시고 그를 다윗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구속자로서)으로 삼으실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인하여 미리 보게 하시사(다윗 그 자신이 실제로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미리 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가 이를 미리 예언 기록한 것을 가리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관하여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시지만, 음부(=무덤, grave)에 그 육신이 버린 바 되지도 아니하며 썩지도 아니하여 부활될 것임을 미리 기록케 하셨습니다.

32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이미 예언해 놓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을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그밖에 제자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느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손을 드셔서 예수를 높이시고 그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0-22절에서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시매 그가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증거를 통하여 그 성령의 역사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요한 14:16, 26, 16:7, 13),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행전 1:4-5)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은 오순절이 이미 이르매 그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그들로 성령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은, 그들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삶을 살도록 하게 하심입니다.

34-35절에 “다윗은 하늘에 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라고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다윗의 예언을 빌어 또 증거합니다. 다윗의 시 110편 1절에 나오는 “내 주”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모든 원수, 사단의 권세를 주님의 발 아래 복종시키실 계획을 실현하실 때까지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그의 우편에 앉히신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까?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결탁하여 죽인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사실을 밝히 천명(喘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요 다윗의 시(16:8-11, 110:1)에 이미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예수님을 저주 받은 자 처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만주의 주님(Lord) 되게 하시고 그뿐아니라 그리스도--메시아(Savior)되게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Lord)과 메시아(Savior)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실뿐 아니라 우리가 이 일에 증인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시어 만주의 주와 구세주 되신 예수님에 관한 베드로의 증거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전 2:37)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전 2:38)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에게 담대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매, 이날에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된 사람의 숫자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전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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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외경 베드로행전 35장, Acts of Peter 35)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네로의 박해가 하도 심하여 이를 피하여 로마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가 로마를 빠져나오는 길에 로마로 향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이에 베드로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그가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될 때, 베드로는 집행관에게 부탁합니다. “나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는데, 내가 그분과 똑같은 죽음을 당할 수 없다. 나는 거꾸로 매어달려 죽게 해달라.”
바로 매어 달려 죽는 것도 고통의 극인데, 거꾸로 매어달려 죽는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베드로는 그가 육신으로 죽어도 부활될 것을 믿었기에 그러한 죽음을 자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시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속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입을 열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항상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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