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6, 2012

“차든지 더웁든지” (계시록 3:14-22)

                                              “차든지 더웁든지” (계시록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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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은 강공책이 아닙니다.
들어보면, 가장 우리를 위하는 길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너무 힘들게 교회봉사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 누가 알아준답니까? 오히려 목사님한테 지적이나 당하지 않나요?”
“쉬엄쉬엄 하세요. 신앙도 좋지만, 우선 몸이 건강해야 하잖아요?”
“남들보다 특별히 튈 필요 없어요. 남들 하는 만큼만 하세요. 그러면 족해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오늘은 쉬고 내일 하세요.”
사단은 무서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하고 우리 신앙의 뜨거움을 식게 하고 미적지근하게 만듭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64㎞에 위치한 도시로서, 골로새 및 히에라볼리와 함께 비옥한 루커스 계곡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 이 도시는 주전 3세기(BC 261-247년경)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2세가 건설한 도시로서,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백성의 정의)"로 명명했는데, 에베소 해안으로부터 아시아 내륙으로 뻗은 대로마 도로가 그 중앙을 지나가고 있어서 군사 및 무역과 통신의 요지인 동시에 검정 색 양모의 생산지로 당대 제일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일찍부터 은행제도가 생겨날 정도로 금융 자산이 대단하였고,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으며, 눈과 귀에 효험이 있다는 고약도 생산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가장 취약점은 물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인데, 약 10㎞ 떨어진 수원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얻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도 온천과 지하수에서 흘러나온 것이 뒤섞여서 항상 미지근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이단사교의 바람도 별로 없고, 핍박과 환난이 별로 없는 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터라 자연히 그 신앙도 나태해지고, 그 도시의 물의 미지근함만큼이나 미지근해지고, 잠자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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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열거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와 현대의 교회들을 향하여서 세 가지로 권고하시는데, 첫 번째로,                                                    

14-16절에서는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라고 하시고, 두 번째로 17-19절에서는 영적인 눈을 떠서 실상을 바라보라고 하시고, 세 번째로 20-22절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이심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님을 가르켜 "아멘이시요"하는 말은, 주님은 진실하시며, 참되시며,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아멘”은 또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9-2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②"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시는 일에,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시는 일에, 진리를 증거하시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요:44,요18:37,요1:18,요8:18)

요1:2-3에-"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인하여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 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다른 교회를 가만히 보면/ 처음에-적든 크든 다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만은 칭찬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책망입니다. 왜 책망만 들었을까?
우리 교회는 돈도 많다, 우리 교회는 부족함이 없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만해졌고, 그리고 그 교만 때문에 신앙생활을 등한히 했고, 그래서 결국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차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수크로스"라고 하는데, 얼음이 얼 정도의 냉기-즉,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않는, 성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웁다"는 말은 헬라어로 "제스토스"라고 하는 데, 이것은 물이 펄펄 끓어오르듯이, 열렬한 신앙, 적극적인 신앙, 영적으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신앙, 열심으로 가득찬 신앙, 성령 충만한 신앙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라오디게아교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지근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딱 부러지게 믿든가/ 아니면 아예 안믿든가 해야 하는 데-이건 도대체 믿는 건지, 안 믿는건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인이고, 어떻게 보면 교인 아니고-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예수를 믿으려면 딱 뿌려지게 믿든가/ 아니면 아예 신앙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되든가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더웁지 못할 바에야 차라고 하십니다. 차라는 말씀은 차라리 등을 돌려버리라는 뜻입니다. 아주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 상태가 차게 되는 것을 원해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상태에서 주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을 때에 하나님은 말라기서 1장 10절에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는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왜 더웁지, 아니하면 차갑기를 원하셨는지 아십니까?
아예 처음부터 예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전도하기가 더 쉽습니다. 힘이 덜 듭니다. 그런데 어정쩡한 사람들/ 교회 몇 번 나왔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 옛날 교회 열심히 나왔다가 시험 들어 안 나오는 사람들/- 정말 속 썩이고, 애 먹입니다.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는 지리적으로 찬 생수가 나오는 골로새와 뜨거운 온천수가 나오는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지역에서 흘러오는 물은 라오디게아에서 언제나 미지근한 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의 지리적인 위치를 비유로 들면서 그들에게 차든지 더웁든지 확실하게 크리스천의 자아를 가지고 살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상태에 계속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다 말씀하십니까?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여기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은 결국 구원에서 제하여 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이 결론적으로 주시는 말씀은 이왕 신앙생활 하는 것- 잘 하라는 말입니다.
이왕 예수 믿는 것-뜨겁게, 남이 보드래도 좀 믿는 것 같이 믿으라는 말입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는 로마시대에 소아시아 고대 국가였던 프리지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은행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안과(眼科)학과 직물 산업이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재정적인 성공'과 '의료의 발달'과 '환경의 부유함'은 참된 영적인 상태를 가리웠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당시 라오디게아교회가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①돈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별나시게 교회 다닐 필요가 없겠어요? 그래서 신앙생활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②너무 평안해서 그랬습니다- 다른 교회처럼 황제예배의 박해도 없었습니다./ 에배소 교회처럼 니골라 당의 위험도 없었습니다./ 서머나교회와 같은 박해도 없었습니다./ 버가모교회처럼 발람의 교훈도 없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처럼 자칭 거짓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유혹으로 인한 괴로움도 없었습니다.
도전 받을 것도, 고민할 것도 없었습니다. 영적인 싸움을 할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순교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옥에 갇힐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사데교회처럼 이 교회도 신앙생활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는 것은 돈, 부요함과 평안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게을려집니다. 나태해 집니다.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에 적극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배도 그저 되는 대로/ 기도도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교회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말고/ 헌금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 교회를 향하여 '네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지적하신 것은 바로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의 이면에 숨어있는 영적인 실체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물질 세계를 보는 육신의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만물을 바라봅니다. 산과 바다 등이 어떻게 생겼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닫힌 사람은 물질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도 이 세계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세계를 보려면 영적인 눈이,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열려집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영적인 눈이 닫혀진 사람은 신앙생활이 답답하고 힘듭니다. 긴가 민가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열러진 사람은 신앙 생활이 확신 있고 활력이 넘치고 담대합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적인 눈의 뜨임 받음이 필요하고 영적인 귀가 열림이 필요하고, 영적인 풍요로움이 나타나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신앙의 모습을 바꿔갈 것이 아니라 불 시험을 견딜 수 있는 금과 같이 단단한 신앙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거룩함의 옷을 입어 우리 옛 사람의 수치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이 모습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신다 (19절).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히 12:4-11).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회개하고 열심을 낼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결과를 약속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기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다는 것은 가장 흔한 일상 생활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의 회개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모습까지 하나님께 열어드리는 것이며, 그리할 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열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은 주님의 주되심을 100%인정하고 순종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이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주님은 문 밖에 서 있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강압적으로 우리를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문밖에서 마음 문을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우리가 스스로 마음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러한 크리스천의 열심 있는 삶은 이 땅에서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 가장 흔한 일까지 예수님과 나누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까지 함께 나누는 관계이다 (21절). 주님은 그 영광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을 위한 삶의 열심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계 22:5).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은 헛된 가치들로 꾸며댄 위선을 벗어버리고, 깨어 있어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귀가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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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믿음이 미지근한 우리들을 여전히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의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사랑하시며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들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 안에 영으로 거하시어 그들의 삶을 지켜보시며 변화되어지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 (민수기 21:4-9)

장대 위에 달린 놋뱀 (민수기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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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뱀은 악령 또는 사단과 교통하므로 교활과 저주의 상징으로 뿐 아니라 치병(治病)과 예언(豫言), 축사(逐邪), 그리고 액운(厄運)을 막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해로운 동물을 쫓는 데는 보다 치명적인 독을 지닌 동물이 이용되는데, 이집트에서는 뱀 부적을 부치면 뱀을 쫓는다고 여겼습니다. 실제 그리스, 로마, 아랍, 미국 인디언, 아비폰(Abipones), 통가 등지에서는 뱀에 물린 상처를 뱀살을 발라 치료한다고 합니다.
아테네(Athen)에서는 갓난아이 이마에 뱀 부적을 붙여서 뱀 악마의 농간을 막는다고 합니다.

뱀이 치병의 능력이 있다고 믿은 증거로 미국 인디언들과 난디(nandi)에서는 의사가 들고 다니는 주머니를 뱀가죽으로 만들고 치병의 권능을 뱀으로부터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멜라네시아의 만스르(Mansren) 족에서는 뱀 제의가 있는데 여기서 뱀은 만병통치의 능력을 지닙니다.
그리스 신화의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어스 역시 뱀이고 셈족, 마다가스카르의 의신 역시 뱀이어서 의사는 늘 뱀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요한계시록에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지방의 교회들에 편지하는데 그 중에 버가모 지방은 그리스 신화의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인 뱀 형상을 한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숭배하던 곳이었습니다.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있는 곳이라 버가모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폭이 20미터 길이가 800미터나 되는 웅장한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 길가로 대리석 기둥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병원과 의과대학과 사제들이 있어 당시에 유명한 병원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뱀이 껍질을 벗듯이 병자가 고통의 껍질을 벗고 치료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에는 언제나 한 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이 뱀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성한 하인이었고, 해마다 다시 소생하여 탈피함으로서 새로운 정력을 소생시킨다는 스태미너의 심벌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이에서 유래하여 지금도 군의관의 뺏지는 지팡이에 뱀 두 마리가 감긴 도안이고, 앰뷸런스 차에 표시된 그림, 유럽의 병원과 약국의 문장은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뱀은 원죄(原罪), 간교의 상징, 재탄생, 생명, 영생의 상징 등으로 분석된다고 합니다.
꿈에 뱀이 나타남을 태몽(胎夢)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뱀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관련하여 아기를 갖기를 원하는 불임 여성은 그의 신전을 찾아가고 거기서 꿈에 뱀을 보면 임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뱀은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성장할 때 허물을 벗습니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 매번 재생(再生)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불사(不死)재생(再生)영생(永生)의 상징으로 무덤의 수호신, 지신(地神), 죽은 이의 새로운 재생과 영생을 돕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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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애굽에서 나와 시내 산에서 일년 가까이 머물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들어갈 땅 가나안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었으나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보고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보고에 따르면, 가나안 거민들은 장대하여 그들이 감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을 발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정탐꾼들이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삶을 살게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에 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발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에 대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무리가 당을 지어 모세에게 대항할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갈라지게 하시어 그들을 삼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사르는 불로, 때로는 염병(染病)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은 어리석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때 에돔 땅을 지나 지름길로 가고자 에돔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그들은 가데스에서 호르산에 이르고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에돔 땅을 둘러 동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백성들의 불평이 드러나지기 시작합니다.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사람들은 흔히 현재의 조그마한 고통은 잘 견디지 못하면서 과거의 어려움은 별 것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던 애굽 땅은 그들에게 풍요와 자유의 땅이 아니라 빈곤과 억압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신음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까닭에 모세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길을 우회한다고 하여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그들은 참으로 우매한 백성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었더니 왜 물에 빠져죽게 놔두지 건져내었느냐?” “보따리 내놓으라고 항의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함은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생활할 때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싫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숨쉬는 공기에 대하여도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 광야의 행진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하기는커녕 왜 이런 고생을 하게 하셨느냐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으로 따진다면 골백번도 멸망당해 마땅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가벼운 징계로 끝나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의 불평이 하늘까지 치솟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십니다. 해서,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뱀들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 중에 무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러다간 살아남는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다급해진 백성 중에 얼마가 모세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한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물리지 않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기 위하여 뱀들을 그들에게서 떠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약간은 다혈질적인 사람으로 백성들의 불평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적도 있지만,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백성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백성들이 그들을 위하여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자 두 말 없이 하나님께 중보기도합니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그저 치료하여 주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신 징계의 저주를 저주의 상징인 뱀을 통하여 치료하심입니다. 저주를 저주로 제하는 치료방법입니다.
뱀에게 물린 상처를 뱀살을 발라 치료하는 민간요법도 있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가 악성종기의 죽을 병에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병이 낫겠다고 선포하셨지만, 그 당시의 민간요법에 따라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종처(腫處)에 놓게도 하십니다(왕하 20:7).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하여 놋으로 뱀을 만들고 장대 위에 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대 위에 달린 뱀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치의 틀림도 없습니다. 겧갭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궛 했습니다.
놋뱀을 쳐다봄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놋뱀을 바라봄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사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4)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14-15에서 모세의 놋뱀 사건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의 사건에서 장대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요,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사람들을 위하여 저주거리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죽음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들을 저주에서 풀어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주거리가 되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3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까?
우리를 죽음의 저주, 율법의 저주, 사단의 저주에서 살리시기 위함이심입니다.
어떻게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위에 놋뱀을 바라봄으로 죽음의 저주에서 구원받았던 것같이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믿음입니다.
생명이요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저주가 되시사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십니까?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해서 여전히 저주 아래 놓인 자의 삶이 아니라 축복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기쁜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February 19, 2012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3:13-22)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3:13-22)
       

                                                                                1
켄트 키스(Kent M. Keith, 1949-)라고 하는 시인의 “Paradoxical Commandments(역설적 명령)”라고 하는 시의 일부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루밤새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바르고 선한 삶을 살면 세상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수룩한 사람이라거나 단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은 성경 속에서 뿐 아니라 대부분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자와 부처의 가르침에도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道德經) 8장에서 가장 으뜸의 선(上善)을 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선(善) 가운데 가장 으뜸의 선(善)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하여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다투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불교의 가름침에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基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악한 일은 짓지 말고/선한 일은 받들어 실천하라/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뜻입니다.
「경덕전등록」이 전하는 이 일화는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와 도림선사(道林禪師)의 대화에서 유래한 칠불통계(七佛通戒)입니다. 칠불통계란 석가모니 이전 과거 칠불(비바시불■시기불■비사부불■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이 한결같이 당부한 훈계로, 곧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말합니다.
시인 백거이가 “어떤 것이 불법(佛法)입니까?”라고 묻자, 도림선사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라”고 대답했습니다. 백거이가 그것은 세 살 짜리 아이도 알겠다고 빈정대듯 말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짜리 아이도 말할 수 있으나, 팔십 된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1703-1791)는 선을 행하는 삶에 대하여,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순간까지“)라고 권고했습니다.
선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시편기자를 위시한 성경기자들이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찬양한 것같이 우리 믿는 사람의 선의 기준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善)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본래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마음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던 이 선한 양심이 그들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상실되어지고 다만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순자(芛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고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는데,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타락하기 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양선(良善)은 사람이 갖고 있는 본래 선한 마음은 배우지 않고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들을 지으실 때 그분의 형상을 따라 주신 모습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최초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21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선한 양심을 갖고 선을 행하기를 힘씀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이 선한 양심으로 선을 행할 때 그와 동행하시고 하늘로 들림 받게 하시고, 카인 대신에 선인(善人) 아벨을 택하시고, 악한 세대에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와 그의 가족을 물 가운데 구원하시고, 패역한 세대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와 그의 자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선한 양심을 가지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 시몬은 히브리어 샤마아(שׁמע)에서 유래된 단어로 “들었다” 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그에게 아람어로는 게바, 헬라어로는 베드로--“반석”이란 뜻의 이름을 주십니다. 즉, 이는 예언적 축복이신데 “반석과도 같이 든든한 그의 믿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신앙고백(信仰告白)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믿는 이들의 믿음 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이십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기는 하였지만 “의를 위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감당할만한 담대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으로 거듭나매, 주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난받고 순교 당할 당시의 로마 황제는 역사상 최악의 폭군 네로(Nero: 54-68)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 악독한 네로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더욱 더 믿음 위에 견고히 서게 하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고난은 믿는 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애매한 고난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끔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선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한다고 행하는데도 오해를 받고 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기억하고” 참고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오?” 합니다. 여기에서 선(善)이라 하면 인간의 윤리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을 행할 때,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육체에 고통을 가할 수는 있으나, 혹은 죽일 수도 있으나, 우리의 속사람--영(靈)은 해(害)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 이하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患難)이나 곤고(困苦)나 핍박(逼迫)이나 기근(饑饉)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確信)하노니 사망(死亡)이나 생명(生命)이나 천사(天使)들이나 권세자(權勢者)들이나 현재(現在) 일이나 장래(將來) 일이나 능력(能力)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14절에서 베드로는 “의(義)를 위하여 고난(苦難)을 받으면 복(福)있는 자니”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신 말씀과 상통(相通)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도, 두려워하거나 소동치 말고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나 주위 사람이 “너는 어찌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망하지않고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물어볼 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현재에 고난(苦難)을 받으시면서도 소망(所望)을 갖고 있는 이유(理由)를 무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대답할 때,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苦難)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榮光)과 족히 비교(比較)할 수 없기에 소망(所望)을 가지고 장차의 영광(榮光)을 기다리며 인내(忍耐)한다”고 합니다.
아주 바른 대답(對答)입니다.

그는 “우리가 고난 당할 때도 소망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삶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불의(不義)한 자들에 의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천사(天使)들과 권세(權勢)들과 능력(能力)들을 순복(順服)시키시는 승리(勝利)하는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서 고난당할 때에도 소망 중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까지 선행으로 대할 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목자장(牧者長)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榮光)의 면류관(冕旒冠)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삼일동안 음부에 머무셨었으나 그의 부활(復活)하심을 통하여서 살아있는 자나 죽어서 옥(獄)에 갇혀있는 모든 자의 영들에게 그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선포(宣布)하셨습니다. 그는 고난 당하신 것 같으나 부활하심으로, 참으로 승리하심을 모든 자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肉體)로는 고난 당하고 죽으나, 영(靈)으로 영원(永遠)히 사는 길은 세례(洗禮)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에게 구원방주(救援方舟)를 예비하셔서 물세례를 통하여서 살게 하시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물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시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하신 것처럼, 세례를 통하여 우리 영(靈)이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례(洗禮)를 통하여 우리는 죄(罪)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됩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 우리는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당하신 그 고난 당함을 두려워하거나 원망치 않고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고 선행으로 대할 때, 그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16절).
바울도 로마서 12장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합니다.

                                                                              3
현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종종 너무 근시안적(近視眼的)이고 피상적(皮相的)이며 얄팍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의를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주위 사람들의 시선(視線)을 더 의식(意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고 하셨는데, 나의 선행(善行)을 선전(宣傳)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의를 위하여 고난 당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세상의 이(利)를 위하여 고난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怨望)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늘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여러 가지 복을 누리기 원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피해가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한 식민지 총독(總督)이었던 플리니(Pliny)의 황제(皇帝)에게 드리는 보고서에 의하면, “초대교회 어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 잡혀 십자가 상에 순교(殉敎)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형틀에 내어주어 순교당할 것을 자청(自請)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생각할 때 “십자가에 순교 당함이 천국행 보증수표”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인내하고 소망을 갖고 선한 양심을 갖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부러 가난에 처하고, 세상에서 실패(失敗)하고, 일부러 고난을 자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할 때도, 세상에서 실패할 때도, 핍박받고 고난 당할 때도 소망을 갖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귀히 여기십니다.

예배드릴 때 심령이 새롭게 되어 영에 속한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의 모든 종류의 고난--특히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 가운데도 승리(勝利)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