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31, 2012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 (골로새서 4:10-18)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 (골로새서 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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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이기는 사람들
성경 외의 인물로서 제가 좋아하는 차오추우(Chao-chou, 778-897)라고 하는 선교(禪敎, Zen)의 대가가 있습니다. 그가 선교에 처음 입문한 것은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은 이제 인생의 거의 끝 부분이라고 생각하던 60세이었습니다. 그가 추구하던 것은 선교의 마스터(Master)가 되는 것인데 100명이 선교에 입문하면 20-30년의 수련기간 뒤에 한 명이 마스터가 될까말까 한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이 힘들 일인데, 청년이 아닌 60세 고령의 차오추우는 이에 감히 도전한 것입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20년 뒤인 80세에 선(禪)의 이치를 깨달아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80세까지 산다는 것은 지금도 장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 당시에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마스터에 도달한 것으로 끝난다 해도 별로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80세에서 40년을 더 살면서 선교의 체계를 완성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냅니다. 그가 미리 120세까지 살 수 있음을 알고 60세에 선교에 입문하였겠습니까? 그가 120세까지 장수하면서 선교의 대가(大家)가 된 것은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교에 많은 마스터들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있었지만 그의 선의 깊이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은 자기 앞에 놓인 환경을 이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환경을 탓하고, 자기의 부족한 신체 조건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신감은 자신을 의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신앙고백한 대로 믿는 사람은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의 환경극복과 열심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이름은 유명하여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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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골로새서를 마치는 문안인사에서 두기고와 오네시모 (7-9절) 이외에 8명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와 데마, 눔바, 그리고 아킵보)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아리스다고(Aristarchus)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행전 20:4, 27:2)의 유대인으로서 에베소 지방에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행전 19:29). 그가 그 후에 바울을 따라 아시아까지 동행하고,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할 때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행전 27:2).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 감당하기를 좋아하기에 그를 따라 감옥(가택연금)에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갇히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함께 갇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가(Mark)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육신의 피곤 또는 다른 이유를 들어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전 13:13). 1차 전도여행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나, 바울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탐탁치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밤빌리아에서 먼저 돌아간 것을 들어 데려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합니다. 결국 마가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고 각각 다른 전도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가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이 덜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마가는 깊은 회개를 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새사람으로 거듭 납니다. 그는 그의 실패를 바탕으로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되고, 베드로는 그를 (믿음 안에서)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마가가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곳에 커다란 집을 소유한 부유하고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초석이 된 120명이 모여 기도한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그의 집이었습니다(행전 1:13-15, 2:1). 또한 그의 집은 그 이후에도 사도들과 제자들의 모임의 장소로 제공되어졌습니다(행전 12:12).
                                                   
이와 같은 경건하고 주님과 그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드리기를 즐겨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마가는 신앙에서 실패한 때도 있었으나 아주 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에 바울도 마가의 변모된 모습을 보고 그를 기쁨으로 다시 영접하고 그를 동역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몬 1:24). 한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두 번째의 동역은 마가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었으며 다시는 넘어지거나 거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에는 하나님의 일에 무익한 자였는데, 이제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유스도(Justus)
유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사도행전 1장 23절과 18장 7절, 두 번 나오는데 동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스도가 어떤 일로 바울을 도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도 바울의 여러 동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맡은 일이 사소한 것이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심정으로 감당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유스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할례당--즉, 유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믿음보다는 율법을 고집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못마땅히 여기고 반대하였는데, 이들은 바울의 사역을 귀히 여기고 그 사역에 기꺼이, 희생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상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29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여전히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기에 이것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심령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와 같이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는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기에 바울은 이들로 인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바라기는 더욱 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길임을 깨닫고 동참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2-13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간에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에바브라(Epaphras)
에바브라는 본래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요 사역자인데, 그 교회 안에 거짓 선생이 다른 교리와 주장을 갖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으매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와서 그의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해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라는 “항상 너희(=골로새 성도들)를 위하여 애써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바브라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골로새 교회를 사역해왔기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은 함께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줌이 필요합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이 나타납니다.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율법주의와 천사숭배와 세상의 철학을 좇는 이단이 들어온 관계로 에바브라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뜨겁습니다. 그가 지금 몸으로는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더욱 완전하고 믿음에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4절: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누가(Luke)
누가는 의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직업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을 만나매 그의 3차 전도여행부터 자청하여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되는 바울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자원함으로 바울의 고생 길에 동행하였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현재에도 바울 곁에서 그의 건강을 돌보며 바울과 함께 더욱 넓은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누가는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서 놓임을 받았다가 그의 왕성한 전도활동으로 다시 체포되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때에도 누가는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데마(Demas)
데마는 이 당시만 하더라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바울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갑니다. 디도데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이 데마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For Demas, in love with this present world, has deserted me and gone to Thessalonic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육신--겉사람은 사단의 유혹에 매우 약합니다(롬 7:18-24).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죽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die every day).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활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갈 2:20). 해서, 데마와 같이 곁길로 빠지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5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라오디게아의 형제들과 눔바(Nympha)
바울이 지금 쓰는 편지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이 편지가 후에 라오디게아인에게도 읽힐 것이기에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하여 아울러 라오디게아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집 주인 눔바와 그 가정교회에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교회가 공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고 때로는 당국의 눈을 피해 모여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변변한 건물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성도들 중에 자신의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제공하는 가정교회의 형태였습니다(행전 12:12, 16:40; 롬 16:5; 고전 16:19; 몬 1:2). 눔바도 자신의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제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역의 크기와 성도들의 수에 따라서, 한 도시에 가정교회가 하나 있을 수도 있고, 그 이상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가정교회의 예배는 요즘 교회들의 구역예배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6절: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바울 서신의 회람(回覽)
바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바울 사후에 이루어졌고, 신약성경이란 말의 사용은 바울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위대한 사도의 서신은 참으로 귀하고 아직 신약성경이 편집되기 전부터 하나님 말씀에 버금 가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바울의 사도권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그 때에도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보내는 편지는 한 교회에만 머물지 않고 전 성도가 다 읽은 다음에는 그 편지를 인접한 지방의 교회에 보내어 그 교회에서도 회람하였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편지의 원본은 보관하고 복사본을 만들어 이웃교회에 보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골로새 서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해서, 골로새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성도들간에 왕래가 있었기에, 바울은 그가 지금 쓰고 있는 골로새서를 그들과 함께 나눠 읽고,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그의 서신을 골로새 성도들이 나눠 읽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아킵보(Archippus)
아킵보(몬 1:2)는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던 빌레몬의 아들로서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사역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빌레몬서 1장 2절에서는 아킵보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군사 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 머물고 있는 형편에서 바울은 더욱 그의 믿음을 공고히 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See that you fulfill the ministry which you have received in the Lord)”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성도들, 또 직분을 맡은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부르시고 직분을 맡기시고 일꾼을 삼으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더욱 충성으로 맡기신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직분을 맡은 사람이 기분이 내키면 열심히 감당하고 수틀리면 직분을 팽개쳐 버린다면 이는 그가 맡은 직분이 “주 안에서 받은 직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 자신의 문안과 축도
바울의 서신들은 대부분 사람들에 의하여 대신 쓰여졌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빛 가운데 임하셨던 그리스도를 만났던 이래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다시 볼 수 있게 되긴 하였지만 그 이후에 계속 안질로 고생하게 되었던 같습니다. 이 심한 안질이 그의 선교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하나님께 치료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하시며 바울의 눈병이 그대로 있게 하십니다. 즉, 이 눈병도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임하신 증거이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그에게 눈병(=육체의 가시)을 머물게 하심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장해요인 가운데 여러 교회들에게 대필로 편지를 보냈고 현재 13 서신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한 안질로 긴 편지들의 본문은 쓸 수 없었지만, 성도들을 권면하고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더하여 주기 위하여 편지 끝마침의 문안인사는 친필로 합니다. 그 편지가 분명히 그들의 친구요, 동역자요, 위대한 사도인 바울로부터 온 것임을 그들로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당부하는 바울이 형편이 얼마나 힘들고 제한적인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악한 형편 가운데 바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그리스도에게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행전 28:31). 그를 지키는 시위대 병사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빌 1:13). 이러한 바울의 행적에 관한 소식이 바울을 아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우리보다도 못한 처지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여전히 잘 감당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나은 환경에 있는 우리가 더욱 힘을 내야지’라는 생각이 그들 가운데 들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4절에서 바울은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축도로서 마칩니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로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교인이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임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가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낙담치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부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전파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태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온 빛입니다. 빛을 받은 우리가 그 은혜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것이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나누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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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두기고와 오네시모, 그리고 오늘 바울이 소개한 아리스다고와 마가, 유스도, 그리고 에바브라, 누가, 데마, 눔바와 아킵보 등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던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동역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열심히 잘 감당하였습니다. (마가와 같이) 과거에 실패한 자도 있고, (데마와 같이) 장차 세상으로 떠나가는 자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현재는 신실한 듯 하지만 믿음의 교만에 빠지거나 자고하여지는 사람은 나약해지고 허물 가운데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 그 자체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은 그 바라봄과 의지함으로 인하여 완전하여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가운데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환경을 이기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노라’고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들” (골로새서 4:7-9)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들” (골로새서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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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감독 히딩크의 선수 선발 기준
2002년 한·일 월드컵(Korea-Japan FIFA World Cup)을 앞두고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기용된 히딩크(Hiddink)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감독으로서 그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그는 축구 잘하는 사람을 대표선수로 뽑아요.” 대표팀을 맡은 감독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과거로부터 얼마나 방해받아왔는지 모릅니다. 한국국민들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한국선수들과 히딩크에게 열광한 것은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음이 첫 번째 이유이겠지만 그들의 선발에 정실이 없고 그들이 불굴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여 매 경기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어떤 인터넷 신문기사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히딩크의 지도자로서의 위대성은 ‘축구 잘 하는 선수를 선발하여 축구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선의의 경쟁심을 고취시킨다’는 것입니다.

한국 정치와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재가 적어서 문제입니까? 나라의 크기에 비하여 한국처럼 교육을 강조하고 인재가 많은 나라가 어디 또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인재에도 불구하고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따라서 나눠먹기 식의 인재등용을 함이 문제이요, 대통령이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서 전혀 엉뚱한 선발기준에 따라서 인재가 아닌 사람을 중요한 보직에 앉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축구를 응원하는 사람이 인터뷰에서 ‘만일 한국의 정부가 국민을 위하여, 히딩크 감독처럼 그렇게 현재 실력 있는 사람을 중용하는 사심 없는 정치를 한다면 모든 국민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정부를 성원할 것’이라고 의미 있는 말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 선발 기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의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선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인 제직을 선출할 때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일하기를 즐기며 열정이 있는 사람이 제직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의 사회적 신분과 재산 정도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웬만큼 큰 교회들에서는 믿음은 출중하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재산이 넉넉하지 않으면, 장로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에서 요구하는 장로기준에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의 기준에는 미달이지만, 재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은 장로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성경과 믿음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자 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는 멀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교회의 총체적인 감독이신 하나님의 기준과 명령에 따라서 일꾼들이 선발되어져야 할 것이고, 또한 선발되어진 일꾼들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사랑 받는 종으로서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까지 기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들을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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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의 편지와 소식과 위로를 전달할 두 사람--두기고와 오네시모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을 칭함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요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각각 소개하고 있습니다.
                                                   

    7절: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사랑을 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인 두기고
바울은 로마의 감옥 혹은 가택연금의 상태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와 골로새 교회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편지할 때 그의 세 통의 편지들을 두기고 편에 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울의 사역은 굶주림과 매맞음과 갇힘과 죽음의 위협의 연속이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바울에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힘을 얻을 수 있음은 그 주위에 그를 돕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기고도 바울 주위에서 말없이 수고함으로 바울을 도운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 4절에 “아시아 사람 두기고”라 표현되어 있는데, 그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거의 마무리짓고 고난이 기다리고있음이 예상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로 향할 때 바울을 동행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이외에 디도서와 디모데후서에도 그의 이름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주로 바울의 말이나 편지 심부름을 맡아 했던 사람인 듯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2절에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했고, 디도서 3장 12절에는 그레데 섬에서 목회를 하고있는 디도를 권면하기 위하여 편지를 보낼 때에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고 했습니다. 편지 한 통이나 두 통을 전하기 위하여 먼 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함이 그리 즐겁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 같지 않습니다.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인데 나를 시킴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기고는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이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전달된 바울의 서신들이 정경(正經) 속에 포함되고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읽히게되는 귀중한 일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수고와 봉사를 기뻐하십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서신을 전달하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우편배달부의 일을 잘 감당함으로 바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칭찬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작은 것처럼 보이는 일에 충성하고 열심을 보일 때 우리가 감당한 그 작은 일은 더 이상 작은 일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우리의 충성과 열심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귀한 일로 여겨집니다.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서 소개할 때 “사랑을 받은 형제”라고 시작합니다. 두기고는 생색이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을 잘 감당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주위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음은 당연하고 합당한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때 그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됩니다. 교회에 이러한 성도들의 수가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입니다. 사소한 일을 감당할 때 기쁨으로 했을 뿐 아니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끝까지 한결같음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 길을 여행함과 같이 장기간이 요구되는 일--해서, 때로는 마음이 변하여서 중도에 포기할 수 있는 일은 늘상 그의 몫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교인에게 교회 일을 부탁할 때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항상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처리하여 안심하고 맡길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한다고 맡았다가도 중간에 마음을 변경하여 일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안 놓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함에 자신의 일보다도 더 귀히 여기시고 성실함으로 감당하시는 성도님 되시기 바랍니다.

두기고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fellow servant in the Lord)”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종”은 부정적인 개념과 긍정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개념은 주인에게 강압적으로 매여 있으므로 주인의 일을 하되 두려움으로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에게 복종은 하지만, 그 마음은 주인에게서 멀리 떠나 있고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자로 여기시며, 우리를 사랑스런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개념으로서의 “종”은 하나님의 일을 하되 자기를 종처럼 여겨서 충성을 다하여 한다는 뜻입니다 (고전 4:1-2).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종과 같이 충성으로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분명히 자유자요 사랑스런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랍시고 거드름을 피우거나 게으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상전을 두려워하여 맡은 일에는 철저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상 종 된 자가 일은 철저히 잘하였지만 그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종의 자세로서 일을 감당하기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여김으로 책임감 있게 그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두기고가 하는 일과 사역은 달랐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충성과 열심으로 한다는 면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종 된 자들입니다.

    8절: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두기고를 보내는 이유
두기고를 보내는 첫 번째 이유는 바울과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편과 여러 가지 장해요인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고 있는가를 골로새 성도들에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비록 지금 몸은 로마의 한 곳에 부자유스런 상태에 있지만 영으로 골로새 성도들과 교통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그의 현재 사정과 형편을 그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필요함은 골로새 교인들이 바울과 그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더욱 크신 능력으로 바울을 도우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두기고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로(慰勞)하게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6-8절에 나열한 성령의 은사 가운데 권위(勸慰)하는 은사가 있는데, 두기고는 이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던 것같습니다. 권위하는 은사란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인데, 그와 대화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또 기쁨과 소망을 아울러 줍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은사를 받는 교우님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
두기고와 함께 보내는 오네시모에 관하여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란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원래 골로새 교회의 지도적 인물인 빌레몬에게 속하여 있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물 중에 일부를 훔친 후에 그 집을 도망쳐서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오네시모는 그의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오네시모를 향하여 바울은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세상 신분은 여전히 노예이요, 그의 옛 상전인 빌레몬이 그를 당국에 고소하면 죽을 수도 있는 처지이지만, 복음 안에서 바울에게는 그는 노예도 아니요 범죄자도 아니요 다만 같은 주님을 섬기는 형제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주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으로 우리가 과연 주님의 일에 신실한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을 만한가, 하나님께서 내게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알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고 함은 오네시모가 골로새 교회에 속하였던 사람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의 상전이었던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고,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 성도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이 상전과 종이 한 교회에서 같은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상전이 크리스천이기에 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전이 속한 교회에 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후에도 여전히 육신 뿐 아니라 영혼으로도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생활을 하지만 복음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따라서 그들의 심령과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도 골로새 교회를 출석할 때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바울을 만나고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주님으로 영접하매 그의 삶이 변한 것입니다.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7절과 8절에 이어 다시 한 번 쓰고 있습니다. “저희”는 두기고와 오네시모입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통하여 바울의 근황과 필요와 사역을 전하고자 함을 반복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골로새 성도들에게 기도를 당부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바울의 현재의 형편을 자세히 알림으로써 그들로 바울과 그의 전도사역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 알게 하고, 그러므로 더욱 더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는 기도를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와 교통, 그리고 위로와 권면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연약하여지기 쉽고 또 때로는 좌절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역사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는데, 많은 경우에 성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그의 뜻을 드러내시고 그의 계획과 사역을 완성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따라서 하나님의 세심하신 역사에 민감하고, 성도간에 교통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의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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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도 아니요 특별한 사역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일의 많은 부분은 그렇게 특별한 달란트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특별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하게 젊음이나 힘을 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못함은 그 일이 시시해 보이고, 자신은 적어도 그 일보다는 보다 근사한 일을 감당할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사소한 일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생각하는 근사한 일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일들로 그 일 하기를 거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은 일은 사소하게 보이고 생색이 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하고, 큰 일은 너무 부담스럽고 시간과 노력을 너무 많이 빼앗길 것 같아 거부함은 아직도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사랑함에서 멀리 있다는 반증입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 같이 주님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맡기시는 어떠한 일도 신실하고 사랑 받는 일꾼으로서 잘 감당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온전함과 신실함으로 감당하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태 25:21, 23)라고 칭찬하시며 축복하실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골로새서 4:2-6)

                                                   “성도의 신앙생활” (골로새서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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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과 성도의 한 마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축구의 위상이 많이 높아지고 외국 팀과 경기를 가질 때마다 국민들도 한국이 어느 나라의 팀을 상대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경기를 봅니다. 그런가 하면, 야구도 변방에서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 쿠바 팀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축구아 야구뿐만 아니라 교회 일을 포함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일을 잘 감당하거나 성사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일에 맞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해보기도 전에 ‘우리는 할 수 없어’, ‘이 일은 도무지 이룰 수 없어’라고 지레 짐작하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감당함에 성도들이 무능하고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능력이 많으시고, 강하시고, 성도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못 이룰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감(confidence, 빌 4:13)으로 일을 감당한다면,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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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2절에서 성도 자신의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3-4절에서는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5-6절에서는 신앙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행함이나 말에서 어떻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절: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를 항상 힘쓰라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2절을 "Don't be weary in prayer; keep at it; watch for God's answers and remember to be thankful when they come. (기도하는 일에 지치지 말고 계속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을 주시하고, 응답이 임했을 때 감사하십시오.)"라고 풀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기도를 안 하거나 중단하는 것은 믿는 사람됨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가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지만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는 원동력이요 시작입니다. 기도를 잘하고 못함은 얼마나 유창한 기도를 하느냐에 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믿음의 마음이 실린 진실한 기도를 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되고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열심히 오랫동안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이 오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기도하기에 지쳐서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는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 밖에서 하는 기도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No"라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첫째는, 아직 하나님의 응답의 때가 이르지 아니한 까닭이거나,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응답하셨는데 내가 깨어 있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셋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내가 기대하던 기도의 응답이 아니기에 아직 응답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기대감 없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는 하지만, 내가 기도하는 것이 뭐 응답되겠어요?’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응답을 기대함이 없기 때문에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기도에 깨어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도 이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일이 어쩌다가 그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겠지요?!’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지치거나 상심하지 않고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이 필요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응답하심에도 깨어서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 응답을 주시매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항상 “Yes"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아닌데,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No"로 응답하실 때에도 그것이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임을 알기에 감사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응답될 때까지) 간구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No"로 응답하셨습니다. 즉, 그의 육체의 질병을 낫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바울은 기도에 깨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No"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로써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깨어 있는 바울에게 왜 “No"의 응답을 주셨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너의)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의 약함을 감사거리로 삼을 수 있었으며 ‘그가 약할 때 강하심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이 "No"로 임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뜻을 알게 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3절: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선교사 바울은 각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그들에게 그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기도의 능력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나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더욱 더 큰 일이 이루어짐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도고(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Yes"로 응답해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욕심 없이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5장 16후-18절에서 “의인(=믿음의 사람)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위한 기도 뿐 아니라 목회자와, 교우들과 이웃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교회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것은 그저 하는 부탁이 아니라 기도의 능력을 믿기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또한 선교사님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은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감동시켜서 선교사님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심
골로새 성도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할 때, 그 앞에 더 많은 전도의 문이 열릴 것을 바울은 믿고 있었습니다. 전도를 하기는 원하는 성도님은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인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많은) 전도의 기회를 허락하실 것이고,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준비시켜 두실 것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리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함
바울이 꿈에도 사모하는 것은 그에게 더 많은 전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요, 전도의 기회가 주어질 때 그리스도으 비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3-4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를 쓸 당시에 바울의 처지가 어떠했습니까? 자유롭게 전도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매 그는 그의 열정으로 전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고, 전도의 여건이 무르익은 상태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전도의 여건과 형편이 요원할 때에도 바울은 전도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모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고한 바울의 권면은 바로 이와 같은 바울의 전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인 것입니다.
왜 전도 또는 전도를 위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고 열심이어야 합니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맡기신 가장 큰 명령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8:18-20; 행전 1:8).

바울이 현재 로마의 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의 비밀--곧 복음을 증거한 때문이지만, 복음을 말함을 포기하지 않고 성도들의 기도로 더 많은 복음 증거의 기회를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사람의 가장 큰 소망이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4절: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하면 이 비밀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리라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할 때, 더 많은 전도의 기회가 주어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비밀-곧 복음의 내용을 더욱 더 분명히 증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더 많은 전도의 문을 열게 할 뿐 아니라, 선교사님들의 복음증거가 더욱 분명하게 전도대상자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이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은 그들을 재정적으로 도울 기회를 얻기 위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기도에 힘입어 그들의 영혼구원사업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5절: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외인이란 믿음의 신앙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outsiders)입니다. 불신자(unbelievers)입니다. 이들을 대할 때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5-16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함으로 지혜 있는 자는 그 행할 것을 돌아보고 주님 안에서 바른 행함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바른 행함의 방편으로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아끼다”를 영어성경 킹제임스역(KJV)은 “redeem"(구속하다)이라 번역했고, 다른 영어성경들(RSV, NRSV, NIV)은 ”make the most of the time"(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하라)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엑사고라조(ἐξαΥοράζω)의 뜻은 “...으로부터 사다, 무르다, 놓아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사단의 종노릇하던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시간 모두가 사단에게 속하여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는데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사신 주님은 우리의 생명만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까지 사신 바 되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악한 때와 세상 가운데 여전히 사단의 기뻐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시간을 최대한으로 선용하여(making the most of the time),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권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성도의 마땅히 할 일입니다.

    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말하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할 때 그 말도 항상 은혜와 정결함과 순전함으로 할 것입니다.
전도서 10장 12-13절에서 “지혜자의 말은 은혜(恩惠)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愚昧)요 끝은 광패(狂悖)니라”고 했습니다.

소금으로 고루게 함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는데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음식에 소금을 칠 때 소금이 한 곳으로 몰리면 그곳은 너무 짠 반면에 다른 곳은 싱거워서 음식 맛이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금을 고루게 전체 음식물에 뿌려주면 정갈한 맛을 냅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말은 이와 같이 은혜롭고 정갈한 맛을 내는 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50절에서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소금을 고루게 친 것 같은 믿는 사람의 말이 믿지 않는 사람과도 주님 안에서 화목을 이루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이러한 태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지혜롭게 대답할 것인가도 알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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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성도들에게 기도함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인 호흡이요 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기의 약함에 대한 고백이며, 전능하신 창조자와 구원자 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없는 신앙의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만, 때로 응답되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지치고 중단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Yes"로 응답될 것이 분명한데 아직 응답되지 않고 있으면 포기할 것이 아니라 응답될 때까지 깨어서 경성하는 가운데 계속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드린 것인지 확신이 없는 기도에 관해서는 더욱 더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지 알고자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No”라고 응답하시매,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또한 복음 증거자들--선교사님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데, 이는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전도와 선교의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며,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이 더욱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인을 대함에도 지혜와 은혜와 정갈함으로 할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최대한으로 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모든 일을 시작함에 기도로 하시되 항상 깨어서 감사함으로 기도하시고, 목회자와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므로 더욱 넓은 전도의 문이 열리고 복음을 전하는 능력과 지혜가 그들에게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여러분 자신들을 돌아보아 믿는 자들 사이에서 뿐 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의 본을 보이는 말과 삶을 사심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 안에서 종과 상전” (골로새서 3:22-4:1)

                                           “주 안에서 종과 상전” (골로새서 3: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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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로님의 이야기
얼마 전에 뉴욕에서 봉제공장을 경영하시는 큰 교회 장로님과 저녁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목사님들이 참으로 존경스럽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분 교회의 목사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임금(賃金)을 지급하면서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닌데, 자기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면,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을 비롯하여 성도님들이 열심히 맡겨진 일을 잘 수행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그 장로님은 봉제공장을 하면서, 시간당 임금도 그렇게 인색하지 않게 책정하여 지급하는데도 주로 히스패닉(Hispanic)인 직원들이 성심껏 일을 하기는커녕,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고 주인인 장로님의 눈을 속이고자 하여 사람을 고용하고 일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고충을 말씀합니다.
한 가게의 점원으로, 혹은 큰 회사의 직원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열심과 성실로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곧 주인이나 사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인 또는 사장도 그 사람을 각별하게 대할 것입니다. 회사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내게 당장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잘 감당하다 보면, 종국에는 내게 유익이 돌아옵니다. 그 가게의 주인 또는 회사의 사장은 끝내 그의 성실함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심 가운데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하늘의 상급을 그에게 허락하십니다.

종 된 요셉을 축복하심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사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냥에 팔리는 신세가 되고 해서 애굽에까지 가게 되고,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억울한 경우를 당하여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요셉이었지만 형들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함으로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영면함으로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고 주의 소유의 모든 일을 관장하게 됩니다(창 39:4). 그런데,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는 일이 생기고, 그는 그 유혹을 온전히 뿌리쳤는데, 그 여주인은 오히려 요셉을 모함하여 그는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옥에서 만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잘 해석하고, 그는 요셉의 해석대로 전직이 회복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아직 옥에 있을 때 요셉은 그의 전직이 회복되거든 나를 기억하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지만, 그의 전직이 회복될 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2년 뒤에 애굽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매, 하나님께서 그 술 맡은 관원장으로 요셉의 일을 생각나게 하시고 요셉이 바로의 꿈을 잘 해석하게 하시고 이 일을 통하여 그를 높이시어 애굽의 국무총리를 삼게 하십니다. 사람은 종종 그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의 일을 잊어버리고 살지라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속사정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시는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실함과 성심으로 대하는데 때로는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고 해를 당할 때도 있지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의와 공평으로 우리에게 보응(報應)하십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 종과 상전의 예를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와의 세 번째 관계를 설명합니다. 바울의 이 글은 상전과 종의 관계를 당연시 한 것이라기보다는, 현 세상에서 주종(主從) 또는 다른 상하(上下)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관계를 통하여서 우리의 하늘상전이신 하나님을 순종함이 참으로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22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종들아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
종들을 권면하되 “모든 일에”(in everything)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모든 일에”였는데, 종들의 상전에 대한 순종도 “모든 일에” 그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과 마찬가지로, “순종하다”란 말은 헬라어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입니다. 훞(ὺπ)은 “아래”란 뜻이고, 아쿠오(ἀκούω)는 “듣다”란 뜻이므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순종하다”는 “아래에서 듣다,”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다”란 의미입니다. 종의 신분이 아래이기 때문에 상전의 말을 아래에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들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라
에베소서 5장 6절에서도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상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함은 겉과 속이 같게 하여야 합니다. 체면치례(體面致禮)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일 예배에 빠지면 목사님이 뭐라고 할 테지’라고 생각해서 주일예배에 참예함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기에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쁨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함에도 주인이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하는 척하고 주인의 부재(不在) 시에는 딴청을 피울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있든 없든, 지켜보든지 안 보든지, 기쁜 마음으로 주인의 일이 내 일인 것처럼 그렇게 잘 감당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의 한 달란트를 받아서 열심으로 경영하지 않고 땅 속에 파묻은 그 “악하고 게으른 종”도 자기의 일을 함에는 그렇게 게으른 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문제는 주인의 일을 경시(輕視) 여기며 눈가림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상전에게 순종하되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다”(φοβέομαι)는 말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어떤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또 어떤 때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무서워하다(fear)’ ‘겁내다(be afraid)’ ‘놀래다 (be frightened)’라는 뜻이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존경하다, 경외하다(respect)' ’경배하다(worship)‘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주관자의 권력이나 사단의 권세 앞에 두려움(무서워함, 겁냄)은 믿는 사람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요한도 계시록 21장 8절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세들과 환경으로 인하여 겁내고 무서워하는 마음은 불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며 싫어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세상을 향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경배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주님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두려워하다”라고 함은 극한적인 경외함인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경배를 드리게 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ἐν ἁπλότητι καρδίας)는 원어적 의미로는 “단순한 마음으로 (with simplicity)”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with single-hearted devotion)"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순종하되 이거 저것 재고 얻어질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님 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단심(丹心)으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함에도 마음으로 하지 않고 입술로만 하는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29장 13절에서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78편 36-37절에서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하나님)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은 물론 입술로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사람은 마음에 정함과 성실함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진대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할 것입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세상 관계에서도 동일한 성실함으로 상사를 대하고 주인을 대할 것입니다.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ἐκ ψυχής)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6장 5절(마태 22:37)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면하되,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라고 함은 ‘모든 마음으로(with all your heart, heartily, wholeheartedly)’ ‘(모든) 영혼으로(with all your soul),’ 곧 ‘전심(全心)으로’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대함에도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속일 수 없기에 거짓과 궤휼(詭譎)로 대하지 못합니다. 흔히, 육신의 상전은 나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기회만 있으면 거짓과 속임수로 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하여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잘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결코 잘 대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속이고자 할 것이며,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거짓말하고자 할 것이며, 사람을 두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두 마음으로 대하고자 할 것이며, 사람에게 변명을 잘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변명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인성의 문제요 믿음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인 한에 있어서는 이러한 것이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직 신성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이 세상에서도 살아가게 됩니다.                                                   

    24절: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음
육신의 상전을 대함에 주를 두려워하듯이 성실한 마음으로 하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유업의 상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유업의 상”(the inheritance as your reward)이란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받게 될 하나님의 칭찬이요 상급의 기업입니다.

사람을 잘 대한 사람에게 이러한 유업의 상을 주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잘 대한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잘 섬기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 그리스도를 잘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마태복음 18장 5절에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허물의 용서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6:14). 바울은 사람과 화목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엡 2:15-16).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요일 4:20).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소자를 잘 대접하는 것이 주님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신실함과 단 마음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함과 단 마음으로 할 수 없습니다. 입술로는 그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입술만의 고백(lip service)일 뿐입니다.

    25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음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불의의 보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함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는 것이요 따라서 불의의 보응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18장 41-46절에서 예수님은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하시리니 저희(=불의를 행하는 자들)는 영벌(永罰)에 의인들은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랫사람(소자)을 대하거나 윗사람(상전)을 대하거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를 대하듯이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심
주는 외모로 사람을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9-11절에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고 징벌을 내리심은 그 사람의 외모를 따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마음의 중심을 따라 어떻게 행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시고 그의 믿음의 행함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4장 1절: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믿는 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입장에 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윽박지르거나, 협박하거나, 공갈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엡 6:9), 아랫사람을 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함이 장차 하늘의 상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심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하늘의 상전이시요, 아버지시요, 남편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어떻게 대함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요 무조건적인 의무요 도리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도리와 의무에 어긋나게 하였다고 해서 나도 상대방에 대하여 도리와 의무에 어긋나게 대할 것이 아니라 나는 나에게 주어진 도리와 의무를 다하여 신실함과 마음을 다하여 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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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인심(人心)이 천심(天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하늘의 마음을 얻는 것’이란 뜻일 것입니다. 동양사상에서 ‘하늘’은 우주만물의 운행의 원리입니다(“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논어》「위정(爲政)」편]라고 한 공자의 ‘하늘’도 비인격적인 우주만물의 운행원리임). 그러나 성경에서의 천심은 비인격적(非人格的)인 우주만물의 운행원리(principle, matter)가 아니라 천지만물을 운행하시는 인격체(personal: 정확히는, 신격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심이 천심“이란 말의 성경적 해석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본문(또한 엡 5:21-6:9)에서 바울이 사람과의 관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 말씀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기쁨과 자원함으로 남편에게 복종하여 남편의 마음을 얻은 아내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여 아내의 마음을 얻은 남편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공경함과 삶에서의 순복함을 통하여 부모님의 마음을 얻은 자녀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자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격노케 하지 않고 낙심치 않게 하며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함으로써 자녀의 마음을 얻은 아비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실함과 마음을 다하여 상전을 대하고 모든 일에 복종한 종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며, 아랫사람을 대하되 하나님의 공평과 의로서 대하는 윗사람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소망하고 바라볼 것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을 경히 여기거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살아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 사람을 어떻게 대함이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믿음의 표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칭찬과 유업의 상을 얻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December 30, 2012

“주 안에서 자녀와 부모” (골로새서 3:20-21)

                                             “주 안에서 자녀와 부모” (골로새서 3:20-21)
       
                                                                             1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예찬
자녀들이 훌륭하게 자란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와 그들의 기도와 정성이 있는 반면에, 어머니가 훌륭하지 않아서 자녀가 잘못되는 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신에,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녀가 잘못되는 예는 성경 안에서와 밖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부정적인 영향은 그의 인격이나 인간 자질이 떨어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 대한 무관심이나 대화의 결여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한 삶을 산 사람들의 어머니 예찬은 끝이 없을 지경입니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오 주님, 만약 제가 당신의 자녀라면, 그것은 먼저 당신의 자녀다운 어머니를 제게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했고, 미국의 화가 벤저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는 “어머니의 입맞춤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고 했고, 미국의 6대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 1767-1848)는 “어머니가 현재의 나를 만드셨다”고 했고,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현재의 나와 앞으로 희망하는 것 모두가 천사 같은 어머니 덕분이다”라고 했고,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 1847-1931)은 “나를 만든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나를 대할 때 언제나 진실하게 대하셨으며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항상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썼고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행하려고 했다”고 했고,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모르와(Andre Maurois, 1885-1967)는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랑을 배워야 한다. 특히 아동은 모성애로 사랑을 배운다. ... 어머니와 자녀를 결속하는 감정은 완전히 순수하고 아름답다. 거기에는 어떤 형태의 알력도 없다. 자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모든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있어서 자녀는 하나의 신이다.”라고 했고,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나의 성격 형성에 있어서 어머니의 영향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매일 성경을 여러 장씩 외우도록 시키셨다. 어머니의 신중하고도 안목 있는 배려에서 나온 그러한 훈련 덕분에 나는 땀흘려 일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문학적인 감각도 갖게 되었다”고 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영국의 정치가 세실(E. A. R. Cecil, 1864-1958)은 “내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경건한 어머니의 삶이 자녀에게 끼치는 강한 영향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에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古事)를 만들어낸 맹자의 어머니, 정몽주의 어머니, 한석봉의 어머니, 이율곡의 어머니 등 훌륭한 어머니들로 말미암아 훌륭한 자녀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에게 찬사를 돌리는 자녀들의 예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찬사보다는 잘못되면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유명 정치인들의 자녀라든가, 큰 교회 목사님들의 자녀들이 잘못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아버지가 너무 바쁘거나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서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의 사랑을 표시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큽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도 아들들의 성장과정 중에 성격 형성이나 비리에 연루되게 된 동기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정치경력과 옥중생활 탓이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큰 교회 목회자들도 자녀들에게 신경 쓰기보다는 시간의 거의 전부를 교회에 쏟아 부은 탓에 자녀들이 방황하거나 불신앙에 빠지는 예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사춘기와 청년기에 이해하지 못하였던 아버지의 소명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그것에 감동을 받아서 자신이 개척하여 성장시킨 현재 담임하고 있는 대형교회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것이 오히려 무리를 빗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존재는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 아니고, 자녀들이 그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 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 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 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 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 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 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 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 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 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助言)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아버지에 대하여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자녀의 평가에 대한 또 다른 글을 소개하면,

    4세 때에는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7세 때에는 "아버지는 이것도 모를 거야."라고 생각하고,
    14세 때에는 "아버지는 가망이 없을 만큼 케케묵었다."고 생각하고,
    21세 때에는 "아버지와 같은 구세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25세 때에는 "아버지는 조금은 안다."고 생각하고,
    30세 때에는 "이 일을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알고 싶다."고 생각하고,
    35세 때에는 "우리 부부가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고 생각하고,
    50세 때에는 "아버지는 내 나이 때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을까?"고 생각하며,
    60세 때에는 "내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 일만은 꼭 의논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어릴 때에는 아빠를 ‘최고’로 여기던 아이가 나이가 듦에 따라 아버지를 별로 대단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하다가 그가 장가가거나 시집가서 자식을 낳고 살다보면 ‘아버지의 존재’가 다시 크게 느껴지고 그리워집니다.

부모로써 하나님의 사랑
부모 된 사람들은--특히 아비 된 사람들은 바쁜 중에도 자녀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사랑을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와 음녀 고멜과의 결혼과 사랑을 통하여 바람직한 남편상을 보여주신 (성도들의 영적인 남편 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말씀과 비유를 통하여 부모상의 전형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신명기 32장 11-12절에서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이스라엘)을 인도하셨고”라고 모성애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누가 13:34)에서 예수님도 성도들을 향하신 부모의 사랑으로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에게 분배해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절망과 불안감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하여, 아직 거리가 먼데 그 아들인 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누가 15:20) 아버지에게서 부성애(父性愛)가 어떠해야 할 것을 발견합니다. 이 아버지는 탕자인 아들을 야단치는 대신에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입니다. 작은 잘못들은 깨닫고 고치게 야단을 칠 필요가 있지만, 큰 잘못은 야단을 치지 않아도 자녀가 알 것이기에 오히려 위로하고 감싸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방탕하고 미운 짓을 골라서 하는, 그러나 지금이라도 ‘아버지’ 부르면서 돌아오면 품어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로마서 12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순종치 아니하고 제 갈 길로 가고 있던 자녀들을 위해서 사랑을 보여주심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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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에 대한 효도--순종과 공경은 유교사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공자보다 훨씬 이전에 이를 천륜-인륜의 일로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에서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출 20:12)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영생과 축복의 비결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자녀가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부모에게 순종하되, 학문적 지식을 가지고 분별해가면서 순종할 것은 순종하고 부모의 무식의 소치에서 나온 것은 순종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in everything)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되”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명확히 한 것같이 “주 안에서” 그리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란 “주님의 뜻 안에서”란 말로 혹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도적질하라’ ‘우상숭배 하라’ 명할 때 이는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것은 부모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배치되므로 “주 밖에” 있는 것입니다. 곧 “주 안에서”는 세상을 살 때 우리에게 주어진 부모에 대한 순종의 한계를 설정하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 안에서”란 말도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피하거나 순종하지 못함을 변명하기 위한 구실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3-6절(또한 마가 7:10-13)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자녀된 자들이 유전(遺傳)을 악용하여 부모공경의 의무를 벗어나고자 하는 약삭빠른 마음을 나무라십니다.
부모를 공양할 의무가 있는 자녀가 아비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제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재물을 드림으로 효도할 마음이 충분히 있는데, 하나님께 드리기로 이미 약속하여서 고르반(=하나님께 드릴 선물로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바친 것)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므로 부모 부양을 거부하는 것은 “주 안에서”란 말을 악용하는 행위입니다.

“순종하다”란 말은 헬라어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입니다. 훞(ὺπ)은 “아래”란 뜻이고, 아쿠오(ἀκούω)는 “듣다”란 뜻이므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순종하다”는 “아래에서 듣다,”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다”란 말입니다.
순종(順從)이 실천적(實踐的)인 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에베소서 6장 2절에 나오는 “공경하다”(τιμάω)는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하다”란 의미로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자녀로서 부모를 대하되,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부모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할 때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쁘게 함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는데, 한글성경은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everything, for this pleases the Lord."(RSV)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도 공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치 않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21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비들아 자녀를 격노케 말라
자녀의 반대편에 있는 부모를 향한 권면에서 “부모들아”라고 하지 않고 “아비들아”라고 한 것은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자녀를 사랑함에서 거의 절대적임을 인정할 때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머니 때문에 잘되는 자녀들은 많지만, 잘못되는 자녀들은 적습니다. 반면에, 아버지 때문에 잘되는 자녀는 그리 많지 않지만, 잘못되는 자녀들은 많습니다. 자녀의 성공에 아버지의 역할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이 더 크고, 자녀의 실패에 어머니의 탓보다는 아버지의 탓이 더 큰 것이 현실임을 인정할 때, 바울의 권면은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아비 된 성도들은 자신의 역할을 증대시켜야 할 것입니다. 해서, 잘 안 되는 경우에만 책임이 있는 아버지가 되지 말고, 자녀의 잘됨에 기여(寄與)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사회적인 성공도 중요할 것이지만,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바른 성장과 성공에도 일조(一助)하는 아버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를 격노(激怒)케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회초리와 훈계로 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모의 성냄이 그 원인입니다. 부모들이 종종 자녀들을 소유물 취급한다든가 가볍게 대하며, 자기 화풀이 대상으로 삼을 때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며 그들에게 낙심(落心)을 줄 수 있으며 마음에 응어리를 남길 수 있습니다. 형제간에 비교하는 것도 금물(禁物)인 것은 이로써 마음에 상처(傷處)를 받을 자녀도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서는 이에 더하여, “오직 주의 교양(敎養)과 훈계(訓戒)로 양육하라”고 권고합니다.
‘주 안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는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훈계함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를 한 인격으로 대하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일입니다. 부모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자녀를 격노케 하고, 낙심케 하며, 그의 소망과 자질을 헛된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네가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냐?’ ‘너는 아무리 해도 안 돼’ ‘너는 밥이나 축내는 놈이야’ 등등 자녀들의 인격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은 부모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순종과 무조건적인 사랑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의 바울의 권면에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권면하는 말에서는 “부모(父母)”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것도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잘해주기에 어머니에게는 순종하지만, 아버지는 별로 잘해주는 것도 없고 무관심하고 밖으로만 돌아다니시기에 아버지께는 순종과 공경을 보이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함은 자식된 자의 절대적인 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어느 한 쪽이 없이는 그 자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그 자식의 성장에 아무 것도 도움이 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순종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물론 부모의 의무는 부모의 몫입니다).

                                                                        3
성도의 결단
부모로서 성도들은--특별히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인 사랑을 본받아 자녀들을 대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를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훈계와 교양으로서 양육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필요로 할 때 항상 거기 있어주고, 위로와 권면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그들에게 심어주는 부모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로서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고 그 징계를 잘 받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시고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예에서 육신의 부모와 영의 부모에 대한 순종(順從)과 공경(恭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모친 마리아의 말씀을 들으심과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받는 가운데도 모친 마리아를 한 제자에게 부탁하는 것과, 영의 아버지인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자녀로서 모든 일에서 부모에 대한 순종은 불순종과 불효로 점철되어 있는 현대 사회를 가정에서부터 정화(淨化)하려는 우리의 노력이며 출발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의 올바른 질서확립이 이웃에게 주님 안에서의 질서와 사랑을 증거하고 사회 전체를 밝게 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또는 자녀로서 주어진 환경과 주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사랑과 순종의 의무를 다하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 안에서 아내와 남편” (골로새서 3:18-19)

                                         “주 안에서 아내와 남편” (골로새서 3:18-19)
       
                                                                               1
상사(相思)의 사랑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때 송나라 강왕(康王)은 지독한 폭군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시종 한빙(韓憑)의 아내 하씨가 보기 드문 미인임을 알고 그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습니다. 한빙이 왕을 원망하자 강왕은 억지로 죄목을 정하여 그에게 성단형(城旦刑)이라는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성단형이란 낮에는 변경수비를 보고 밤에는 변경 방비를 위한 장성을 쌓는 노역을 감당하게 하는 것으로서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날마다 남편 한빙을 생각하던 하씨가 혹 일이 잘못되어 강왕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남편만이 알 수 있는 표현의 편지를 써서 인편에 보냈습니다. 그 내용인즉, “비가 그칠 줄 모르고 강이 크고 물은 깊으니 해가 나오면 마음이 닿겠네. (其雨淫淫, 河大水深, 日出當心)”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그 편지가 어떻게 해서 강왕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강왕은 측근들에게 편지를 보였으나 아무도 뜻을 풀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던 차에 마침내 소하라는 자가 그 뜻을 풀어냅니다. “비가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은 당신을 잊을 수 없어서 언제나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고, 강이 크고 물은 깊다는 것은 당신 곁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이고, 해가 나오면 마음이 닿겠다는 것은 죽으면 만날 수 있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때 변경에서 노역하던 한빙이 자살했다는 보고가 전해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씨도 사랑하는 남편의 뒤를 이어 투신자살했습니다. 한 장의 유서를 남겼는데, “임금님은 사는 것을 유익으로 여기지만 저는 죽는 것을 유익으로 여깁니다. 바라건대 저의 시신을 한빙과 합장해 주십시오. (王利其生, 妾利其死, 願以屍骨賜憑合葬)“라고 쓰여있었습니다.
화가 난 강왕은 하씨의 마지막 소원도 무시한 채 죽어서도 서로 안타까워하라고 일부러 한빙의 무덤과 마주 보이는 곳에 그의 시신을 매장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쪽 무덤 끝 쪽에 가래나무 한 그루씩이 생겨나더니 십일이 넘어서는 크게 자라나 서로 줄기가 휘어져 기대게 되고 뿌리들이 뒤엉키고 가지들이 얽혀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 쌍의 원앙새가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서 밤낮 없이 교대로 아주 구슬프게 울어댔습니다. 그것을 본 송나라 사람들이 그 부부를 더욱 불쌍히 여기며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상사수는 그들 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의 사연에서 ‘상사병(相思病)’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대 이혼의 급증
미국사회에서 이혼율이 높은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결혼한 부부 100커플 중에 43커플(43%) 꼴로 이혼한다고 합니다. 결혼한 지 10년 내에 이혼하는 비율이 30%가 넘어 이혼자의 대부분은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혼 사유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가장 큰 이유인데 즉 재정적인 어려움이 부부간에 갈등과 다툼을 초래하고 그로 말미암아 갈라서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높은 이유는 대화의 단절이라고 합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결핍되거나 단절되고 이것이 쌓이므로 인해서 불만과 오해가 누적되어 결국 이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혼의 예에서 크리스천 부부들은 자유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고 그들도 비슷한 이유와 비율로 갈라서고 있다고 합니다.
                                                 
한동안 순종의 전형처럼 여겨졌던 일본 여성들 중에 상당수(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가 근자에는 남편이 은퇴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퇴하면 퇴직금의 반을 요구하여 그것을 갖고 자신의 남은 삶을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즐기고자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뭐 좋은 표본이라고 따라가고자 하는 한국 여성들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신실하고 거룩해야 할 혼인서약을 무시한 처사라고 할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시작
남자와 여자의 혼인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에 이어서 바로 시작된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웅동체(雌雄同體: androgyny)인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셨습니다. 반쪽 인간이 되기 전에 온전한 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아담이었지만, 혼자 지내는 것이 하나님 눈에 안 좋게 보였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에게는, 아무리 완전한 사람이라도, 같이 지내면서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보다는 둘이 있을 때가 하나님 앞에 좋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해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 곁에 두십니다(창 2:21-22). 남자와 여자는 각각 다른 육체로 거하지만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창세기 2장 24절(또한 엡 5:31)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에서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창세기 2:24)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과 아내-주님과 성도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되어지는 제도나 관계는 때로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상전과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전형적인 모형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와 음녀 고멜의 결혼을 통하여 남편 되신 하나님과 아내 된 이스라엘의 관계를 가르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고멜은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어서 호세아의 곁을 떠나지만 호세아는 사랑으로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입니다. 패역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세상 신을 사랑하여 하나님 곁을 떠난 이스라엘이 신실하고 영원한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호세아서 12장 6절에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은 주님과의 연합을 알기 위해 우리에게 이 세상 살 동안에 허락되어진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하나님이 한 남자에게 아내를 허락하시고 한 여자에게 남편을 허락하시어 그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를 이루게 하심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됨의 비밀을 가르쳐주시고자 함이며, 주님과의 연합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인가를 가르쳐주시고자 함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아름답고 거룩한 연합에서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는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음란으로 정욕을 따라 연합할 수도 있습니다. 곧, 세상과 짝하여 사는 사람의 삶은 연합은 연합이로되 음란과 정욕으로 인한 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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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3장 18-19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 20-21절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 3장 22절-4장 1절에서 상전과 종의 관계를 통하여 주님과 성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서 아내와 남편의 예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복종하다”(ὑποτάσσω)란 말은 ‘...의 권위(authority) 혹은 명령(command) 아래 자신을 두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뜻은 남편의 권위아래 들어가 남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했는데, 이는 철저히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은 노예가 그 주인에게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의 대상이므로 하는 복종은 아니며, 사랑하기에 남편의 말을 청종하고 행하는 자발적이고 기쁜 복종입니다.
이어서, 에베소서 5장 23-24절에서,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설명했는데, 즉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으로 성도의 연합으로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을 몸된 성도의 연합인 교회가 준행하듯이, 몸 된 아내도 범사에서--모든 일에서--가정의 머리된 남편의 뜻과 명령을 잘 받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남편은 머리요 아내는 그 몸이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2장 4-5절에서 바울은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심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아내 된 자들이 이렇게 살지 아니 할 때, 이는 이렇게 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르치는 것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말씀을 무시하고 훼방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도,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순복함은 믿는 남편에게 뿐 아니라 믿지 않는 남편에게도 효력이 있습니다. 아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남편과 항상 불화하고 가정과 자녀를 돌보지 않고 교회나 기도원에만 매달려 있다고 한다면, 이를 통하여서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 그리스도를 전도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 남편이 예수님 믿는 사람되기를 원한다면, 남편에게 말로는 믿음을 가지라고 하면서 바가지를 긁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할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아내의 정결하고 믿음이 있는 행위가 남편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순종은 주님 안에서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주 안에서 마땅함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주님 안에서 마땅한--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마땅하다”는 것은 이것이 남편과 아내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순리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질서와 순리에 관하여 여러 군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해산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서 바울은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서 하나님, 그리스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관하여 말씀할 때,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질서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한 것같이(빌 2:8),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순종하고, 여자는 남자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순종할 것입니다.
                                                   

잠언 12장 4절에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했고, 21장 9절과 25장 24절에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고, 21장 19절에 또한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국속담에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내가 집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다투거나 지나치게 바가지를 긁는 것은 하나님의 순리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격언이나 속담은 아무 근거도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일들이 주변에서 때때로 발생하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한다면 한번 마음에 새겨볼 만합니다.
“남편이 잘되고 못됨은 아내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순복할 때, 남편은 매사에 자신감을 얻어 자기 능력이상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아가파테(ἀγαπάτε; 원형 ἀγαπάω)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러하듯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조건을 내걸기가 쉽습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함을 보이지 않는데,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순종해요?” 남편은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순종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이렇게 다투기 쉬운 우리를 향하여 바울은 “조건을 내세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아내 된 자는 ‘남편이 나를 사랑함을 보이지 않을 때도 먼저 순종할 것’이며, 남편 된 자는 ‘아내가 온전히 순종하지 하지 않을 때도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말도 있듯이 부부관계에서도 ‘지는 쪽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먼저 순종할 때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남편이 아내를 먼저 사랑하고자 할 때 아내의 순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의 질이 어떠할 것을 알게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사랑으로 하듯이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함 역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주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되 교회가 흠과 티가 없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신 것같이 남편도 아내 사랑할 때 이와 같이 할 것인데 이렇게 하여 아내가 아름답고 거룩하게 되게 하는 것은 남편이 그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아내를 사랑함의 결과이므로 결국은 자기 몸--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함께 동거하여야 할 것은 여자는 연약한 그   
릇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아내는 영원한 나라의 기업에 함께 참예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아내와 불화할 때, 기도의 문이 막히며, 기도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우리의 삶 속에서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괴롭게 하지 말라
“괴롭게 하지 말라(μὴ πικραίνεσθε)”고 권면합니다. ‘모질고 거칠게 대하거나 쓴 마음을 갖게 하지 말라’(do not make bitter, do not become bitter, do not be harsh or embitter)는 뜻입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 것은 이 세상에서 아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오직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여기서는 아내)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그 형제(여기서는 아내)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이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헤아려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배우자와 부모, 형제와 자매, 성도들과의 관계를 잘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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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결혼하여 부부의 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할 것이며 아내는 남편을 복종과 경외의 사랑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자나 여자 모두 우리의 영원한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의 비밀을 깨달아 알고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되 우리를 위하여 희생적(犧牲的) 사랑으로 죽으신 주님께 복종(服從)과 경외(敬畏)의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도 가하고 하지 않는 것도 가한데, 이왕에 결혼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과 복종함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나 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믿는 사람의 집단인 교회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비밀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제도입니다. 그 이후에 천국에는 결혼하는 것도 없고,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없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분도 없고, 종이나 자주자의 구분도 없이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연합한 거룩한 성도만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결혼관계에 있습니까?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하심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비밀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혼자 지내시는 분이나 아직 미혼이신 교우님들도 영적인 남편이신 주님과 연합함의 크고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15-17)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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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하나님의 축복
부정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고, 그 결과 그의 삶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일들이 발생합니다. ‘나는 도무지 안 되’라는 마음을 품고, 입술로 되풀이하는 사람에게 ‘도무지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축복하지 않으실 꺼야’라고 믿음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믿음의 마음과 생각으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축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작은 일에 큰 감사를 발하는 사람에게 더욱 더 많은 감사거리를 주시며 축복하십니다.
우리 주변의 삶에서 불평의 말을 하는 사람이 감사의 말을 하는 사람보다 항상 부족하거나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평의 마음으로 불평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많은 불평거리가 발견될 것이며, 감사의 마음으로 감사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많은 감사거리가 발견될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어떤 사람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자 힘썼습니다. 그는 가까운 친구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왜 그 사업의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했을까?”
친구는 잠시 생각한 후에 지혜롭게 말해 줍니다. “아마 그것은 자네가 깊이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일 걸세.”
“감사라구? 도대체 자넨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합니다.
“나는 자네가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인생의 법칙에 관해 말하는 것일세. 지금 자네가 처한 역경에 온 관심을 집중해 보게나. 그러면 점점 그 역경에 매력을 느끼게 될 걸세. 생명의 특권에 감사하게. 그러면 자네의 삶은 점점 밝아질 걸세. 더 적게 불평하고 더 많이 감사하란 말이네.”
현재의 처지가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그의 형편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지만, 현재의 고통 중에도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입술과 삶에서 감사가 적절하게 잘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지 족 사람들은 감사를 표현할 때 “내 머리가 흙 속에 있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상대방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머리를 거의 땅에 닿기까지 숙이는데 이는 남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예의입니다.
그들은 또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주둥아리를 닦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병아리들이 작은 껍질과 부스러기까지도 게걸스럽게 쪼아먹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듯이 그 주둥이를 닦아내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더 큰 은혜와 축복만을 달라고 때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의 “감사합니다”란 말의 속뜻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과 입술과 삶에 감사가 넘침은 구원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평안한 가운데도 감사하고 고난 가운데도 감사함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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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평강
한글성경에서 ‘평강’, ‘평화’, ‘화평’ 또는 ‘평안’으로 번역한 모든 것을 영어성경은 "peace"라는 한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역시 ‘에이레네(εἰρήνη)'로 동일한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평안’은 "Pax Romana"라는 말에서와 같이 힘으로 평정한 다음의 잠잠함이요, 정복자의 평안이요, 가진 자의 평안이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가진 자의 평안으로서 이는 정복당한 자도, 못 가진 자도, 약한 자도,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사람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 번째 말씀 역시 평강(=평안)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 21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장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라뷰오(βραβεύω)는 재판관이나 심판자로서 행하다(act as judge or umpire) 또는 다스리다(rule)는 뜻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다스리고 주관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고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근심, 재리에 대한 유혹입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지만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평강(=평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18절에서 평강(peace)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는 우리의 화평(peace)이신지라. 둘(=이방인과 유대인, 무할례당과 할례당)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making peace)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peace)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peace)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평강의 왕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만이 우리에게 평안을 끼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안을 먼저 맛 본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평안의 사도의 직무를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사랑(14절)이 성도의 (믿음의) 행동의 표현이요,  평강(15절상)이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감사(15절하)는 주로 입술의 고백이요 때로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에 주신 평강이 감사의 말과 생활을 하게 하고, 감사의 말과 생활이 마음 속의 평강을 지속되게 합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염려와 근심이 우리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입술의 감사를 거둬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또한 축복을 많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참으로 많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들을 주심을 감사할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부모님과 자녀들, 형제들과 자매들, 교우들과 이웃들을 주심을 감사할 것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여 주심을 감사할 것입니다. 시편기자들의 수많은 시들이 감사의 찬송 시입니다. 시편 136편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끝없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4-9절)이시며, 구원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10-22절), 성도들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23-26절).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도 안에 풍성히 거함
믿음이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씀은 다만 지식일 뿐이지만,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는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의 삶에 등불이요 능력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인하여서 그의 믿음은 성장하며 그의 삶은 풍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119편 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성도에게 주님의 말씀은 생의 안내자가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더욱 강성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왔으나 나의 믿음이 자라지 않고 나의 삶의 기준은 말씀과는 전혀 무관(無關)한데요.”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되, 들을 귀 없이 건성으로 흘려들었기 때문이요, 말씀을 사모함이 마음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8-19절에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시편 19:4)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신명기 32:21) 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피차 가르치고 권면함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와 가정과 성도 각 사람 삶의 기준과 지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나의 말과 생각과 삶을 바로 잡게 하고, 교회 안에 사랑하는 성도의 말과 행동 역시 이로써 판단되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의 말이나 행동이 말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혜로 그에게 조언하거나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를 책잡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므로 가르치고 권면합니다. 나 또한 그로부터 나의 부지부식간에 행하는 잘못된 언사와 행동에 관하여 권면 받기를 즐겨합니다. 이리 할 때, 그 신앙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바로 서있게 됩니다. 교회에서 회의를 하거나 기도를 할 때에도 세상의 방법이나 상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노래,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함
시(psalms)와 찬미(hymns),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 그리고 마음에 감사함(thankfulness in your hearts)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길이가 길고 짧음에 따른 구분이라고 하고(시>찬미>신령한 노래), 또 어떤 사람은 멜로디(melody)나 악기의 반주가 있고 없음에 따른 구분이라고 하지만, 이 세 가지는 별도로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요 노래입니다.
“마음에 감사함”은 찬양의 별도의 장르(genre)가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마음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함이 곁들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멜로디와도 같은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147편 7절에서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라고 했고, 또한 150편 6절에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찬양할 것은, 그가 우리의 창조주 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그는 긍휼과 자비와 인자가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주시고 또 장차 임할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기에 마음에 감사함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곤고하고, 가진 것이 없으며, 억눌린 삶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소망되시기에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9-20절에서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비교: 골 3:16-17)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말에나 일에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
믿는 사람은 주일(主日)에만 성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매일매일, 일주일, 한 달 내내, 일년 내내, 평생의 삶을 통하여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래도 경건의 모양이 있는데, 교회 파킹장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믿음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바뀌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장에서, 직장을 다니는 직장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과 행동을 하라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말이나 일은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위선이나 과장적인 행동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기업을 허락하시되 그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죄 사함의 은총을 맛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골 1:13-14).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through Christ)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나타내시고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길이요 문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13장 15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함으로 영원한 도성을 마련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 찬미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3
성도의 결단
감사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기에 우리는 이로써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15절).
감사하는 마음이 입술로 전달되어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멜로디가 되어서 우리는 입을 벌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할 것입니다(16절).
감사는 마음(15절)과 입술의 찬양(16절)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말과 일을 통하여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집니다(17절). 우리의 말과 일을 통하여 감사함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됨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환경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마음과 입술과 말과 일의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이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죄 사함을 베푸시고, 구원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종일 주를 향하여 감사의 찬미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의 모든 것, 삶의 전부로써 하나님께 차고 넘치는 감사를 드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새 사람의 옷과 띠” (골로새서 3:12-14)

                                       “새 사람의 옷과 띠” (골로새서 3:12-14)

       
                                                                         1
화룡점정(畵龍點睛)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남조(南朝)인 양(梁) 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료로서도 상당한 지위에 올랐지만,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신의 경지에 이른 그의 그림솜씨였다고 합니다. 장승요(張僧繇)는 온갖 것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렸다는 중국의 전설적인 화가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금릉(金陵: 남경)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龍)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는 사방의 벽면에 용 한 쌍을 그렸습니다. 뭉개 치는 먹구름을 박차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은 그 비늘 하나에도, 날카롭게 펼친 발톱에도 강한 생명력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용의 벽화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상한 것은 용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날이면 용이 벽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고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고 졸라댑니다. 장승요(張僧繇)는 마침내 눈동자를 그리려고 먹물이 흥건한 붓을 한 마리의 용의 눈에 내려놓았습니다. 순간 벽 속에서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용이 벽을 박차고 튀어나와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벽을 보았습니다. 아직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용만이 그냥 벽에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수형기(水衡記)에서》
여기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화룡점정이란 “용 그림에 눈동자를 찍는다”란 뜻으로서 ‘사물의 가장 핵심적인 곳’을 나타낼 때 또는 어떤 일의 가장 중요한 끝마무리를 할 때 쓰는 말입니다.
“화룡점정을 결했다”라고 하는 말은 전체적인 꼴은 갖추었지만 가장 요긴한 것을 빠뜨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새 사람이 된 사람의 옷을 이 안락사(安樂寺)의 용 그림에 비유한다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는 장승요가 눈동자를 제외하고 그린 용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은 외견상으로는 용에 틀림없지만 꿈틀거리거나 비상하지 않는 그림 속의 용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천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모든 성품들은 있는데 사랑이 그 가운데 없다면, 이는 “화룡점정이 결하여 있는 상태”입니다. 사랑이 결하여 있는 성령의 은사나 열매들, 구제, 자비와 긍휼은 자칫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용의 눈동자와도 같은 사랑을 가미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서 활동하는 온전한 새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형제와 자매, 성도들과 이웃에 대한 사랑인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청년의 고민
신앙생활을 잘 하기를 원하는 어떤 청년이 목사님께 상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삶을 살아가기로 작정하였으나 그의 친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대화를 하면 계속 꼬이고 얽히고 설켜서 짜증만 늘어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이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훼방하는 사단의 간계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미움과 다툼이 사람들 마음 속에 없었는데, 타락한 이후에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이간질하며, 다투며, 때로는 죽이게까지 하였습니다.
가장 서로를 위해야 할 형제들끼리, 형제와 자매가 싸우며, 때로는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원수 맺는 일까지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가인으로 아벨을 죽이게 하고, 라멕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하고, 사람들의 총체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초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과 에서가 장자권을 다투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하고, 압살롬이 아비 다윗과 다투는 인간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종종 말하는 ‘인간성’의 상실은 사실은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상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오심은 우리가 상실했던 (본래의) 인간성--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화룡점정인 “사랑”의 마음의 회복입니다. 이 사랑의 숨결, 기운을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 되게 하십니다.
미운 형제, 짜증나는 교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이웃을 사랑함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실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형제, 교우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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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인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으로 되어지는 일인 것 같지만 기실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 22:14)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만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총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단에게 속하여 하나님 밖에 있던 경박하고 천한 자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복하여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 45, 19:2, 20:26, 21:8; 벧전 1:15, 16; 또한 레 20:7, 21:6; 민 15:40 참고)고 말씀하시므로, 그의 자녀들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친히 천한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오실 뿐만 아니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마음에 늘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 각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제들과 자매들을 더욱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새 사람의 옷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거룩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임금인 사단에게 속하였을 때 입고 있던 옛 사람의 옷은 벗어 던져야 합니다. 옛 사람의 옷 또는 성품은 5절과 8절에 열거된 대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 (5절), 분, 악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 (8절)입니다.
대신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옷,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이 새 사람의 옷이란 곧, 긍휼(compassion)과 자비(kindness)와 겸손(lowliness, humility)과 온유(meekness, gentleness)와 오래 참음(patience)입니다. 이 새 사람의 옷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긍휼’(σπλάΥχνον οἰκτιρμού: compassion)은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장 77-78절에서 누가는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χρηστότης; kindness)는 친절한 행동을 의미하며 실천적인 선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be kind to one another)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 lowliness)은 낮은 곳에 처하기를 자청하는 마음으로서, 하나님 안에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강조되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생이 이 겸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온유‘(πραῢτης; gentleness, humility, meekness)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적으로 있어야 할 겸손하고 부드러운 자세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온유할 자가 기업으로 얻을 땅은 곧 천국입니다.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patience)이 있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중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쾌락에도 빠져보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음이 이러한 유혹을 견디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2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또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서 바울은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13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의 옷
“혐의”로 번역된 헬라어 ‘몸훼-’(μομφή)는 ‘불평 또는 불평의 원인’(complaint or cause for complaint)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그 마음에 불평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이를 잘 참고(=“용납하여”: ἀνέχομαι, forbear, endure), 참을 뿐만 아니라 “용서하라”(χαρίζομαι)고 권면합니다.
“용납하다 또는 참다”는 말은 마음에 여전히 불평이 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인데, “용서하다”는 말은 밖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긍휼히 여겨 불평의 마음을 지우고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단이 주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좋은 감정은 쉽게 잊게 하고 나쁜 감정은 오래 오래 기억나게 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영이 주신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쉽게 잊어버리게 하고 좋은 감정은 오래오래 기억나게 하고 그로 인하여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다름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쉽게 잊어버리므로 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할 것은 그리할 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 받기를 원하는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용서하여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허물을 우리의 기억에서 지어 낼 때 하나님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주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그리하지 못함을 아시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용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를 죽음에 내놓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간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옷을 우리도 입어야 할 것입니다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의 띠를 더함
바울이 12-13절에서 열거한 새 사람의 옷--긍휼, 자비, 겸손,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또 20-21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바라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녹이며,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채, 잠시 잠깐동안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옷을 입은 것같이 남에게 보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다만 모양일 뿐 내용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새 사람의 외형만 있을 뿐 심장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첨가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속과 겉이 온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새 사람의 옷에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위아래가 함께 붙은 통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속옷을 입고 겉옷을 입었지만 허리에 띠를 매어야만 옷이 안전하고 모양새가 납니다. 띠를 매지 않으면 속옷이 흘러내릴 수도 있고 바람이 불 때 겉옷이 겉잡을 수 없이 흩날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사랑을 옷 차림새의 마무리를 짓고 맵시를 내는 띠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의 비유를 사용하면, 마른 뼈 위에 덧입혀진 힘줄과 살과 가죽이 그 뼈들을 사람의 모양을 갖추게 한 것과 같이, 마른 뼈와 같았던 우리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새 사람의 외모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마른 뼈가 힘줄과 살과 가죽을 덧입었지만 그 안에 생기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직 생명력을 갖춘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새 사람의 힘줄과 살과 가죽을 갖추었지만 사랑--생명의 기운, 생기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온전한 새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역사함으로써 온전한 새 사람의 옷과 띠를 갖춘 새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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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복음성가 작사자 오티스 스킬링스(Otis Skillings)는 “사랑의 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하나되고 사랑의 띠로 묶였네.
    2.  모두 다 함께 찬양해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하세.


 온전한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써 하게 됩니다. 새 사람인 우리는 사랑으로써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덕목들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띠는 우리의 입은 새 사람의 옷을 온전하고, 아름답고, 맵시 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한 서로 모양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교우들을 하나되게 묶는 띠입니다. 따라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칫하면 일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고 온전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새 사람의 옷을 입되, 하나님의 성품인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의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사랑의 띠를 더하여서 온전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그러므로 우리 교회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사랑하신 성도의 연합으로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몸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