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 2015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갈 2:15-21)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갈 2:15-21)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
이민교회를 오래 목회 해온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은 교인의 생활형편이나 삶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교인이 그를 찾아와서 “이건 목사님께만 말씀드리는 거니까 목사님만 알고 계세요”라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면 ‘하지 말라’고 말린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목사님에게만 말을 하지 않고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할 것인데, 나중에 얘기가 퍼져나가 곤란해지면 목회자를 탓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삶에 대해서 묻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목사님이 그 교인의 삶을 알고 있는데, 혹시도 감추고 싶은 그 교인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목사님은 입도 뻥끗 한 적이 없는데, 가장 먼저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는 대상이 목회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말이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와 교인이라는 신뢰의 관계가 무너져 내린 현상이기에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전에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은 교인 가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아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요즘은 이것이 자랑이나  덕이 아니라 흠이나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독일의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신앙적인 완전을 추구한 사람인데 선행과 고행을 통하여서도 마음에 평안은커녕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피가 흘러도 죄는 여전히 자신 안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내리던 그에게 문득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후에 “나는 다시 태어나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하였고, 이 말씀을 붙잡고 면죄부(免罪符)를 팔고 있던 타락한 카톨릭 세력에 맞서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저술한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를 발견하고 설교하였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기독교가 혼탁된 정치와 화합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설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 대신에 바울을 반대하던 초기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잘못된 복음인 ‘믿음 뿐 아니라 율법과 할례’의 교리를 약간 변형시킨 ‘믿음, 선행과 영세’라는 카톨릭의 구원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행이 부족하여 죽어서 아직 낙원에 이르지 못하고 연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그 자녀들이 면죄부를 살 때 연옥에서 옮겨 낙원에 이를 수 있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만,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을 회개할 기회 없이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윤리’에 근거를 두고 구원을 판단합니다. 따라서,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의 ‘봉사’를 구원의 근거로 착각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이 여겨지고 지금 당장 예수님이 재림하시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떤 시험꺼리로 교회 봉사를 뜸하게 하고 있을 때에는 구원의 확신이 없어집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는데도,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였는데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았습니까?
이러함에도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함이 믿음입니다.
아직은 그 약속이 믿어지지 않을 때에도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함으로써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고 우리의 바라는 것들이 우리의 ‘고백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reality)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proof)라”(히 11:1)고 말씀하는데, 나의 바라는 것이 구원일 때 믿음은 이를 실현되게 하는 힘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안디옥 사건의 연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냐 아니면 할례(또는 세례)나 정한 음식에 관한 규례(dietary law)를 포함하여 율법을 지켜 행함도 필요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베드로나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흔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구분하여 말하는 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면에서 ‘죄인'(sinners)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취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주장입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설령 유대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요 율법을 지킴으로 이방 죄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자칭(自稱)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의 율법 지킴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4편 3절143편 2절에서, 그리고 이를 인용한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한 대로 유대인들 중에도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한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이라고 번역한 구절의 헬라어 성경 원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υ Χριστου)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한글 성경과 같이 사람(=우리)이 믿음을 고백하는 주체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고백의 대상으로 보는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체가 됨이십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주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신실하심,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성경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이신 동시에 믿음의 대상이 된다고 해석함이 무난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 길로 들어서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믿음고백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함으로써 율법이 칭의와 구원의 길(=방법)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밝힌 대로, 율법은 다만 유대인들에게도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함으로써, 율법이 구원을 위한 부차적인 조건도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평생에 율법을 지키거나, 윤리적이거나, 선한 삶을 살거나,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3)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4)고 말씀하십니다. 그 강도는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면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 죄인과는 달리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여서 율법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판단하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그들로 죄 짓게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계속 지키거나 버리거나를 불문하고 그들 유대인들도 원래부터 (이방 죄인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죄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완전한 율법 지킴으로 의로와지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 까닭입니다.

18절: 만일 우리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는 복음으로, 할례나 식사 규례(dietary law)나 기타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있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선언한 사람입니다.
하기에, 야고보가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하여도 좋다고 권고할 때 이를 바른 것으로 여겼었고, 베드로가 유대인의 식사 규례를 버리고 이방인과 식사 자리에 같이 어울림을 옳게 여겼었습니다.
베드로가 버렸던 식사 규례를 야고보에게서부터 온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다시 세우고자 했을 때, 이를 외식하는 행위로 여겨서 그를 면책하였던 바울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가 헐었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와짐’을 다시 주장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의롭게 되는 한 방법으로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고 세운다면 이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역설(力說)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기 전에는 율법의 절대성과 온전성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후에는 율법은 그에게 칭의와 구원을 줄 수 없고 다만 그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수단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갈 2:16, 3:22; 롬 3:20).
바울이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씀함은 (칭의를 위한) 율법의 효력성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고 함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나의 죄와 죄인됨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이 깨닫게 하는 죄를 향하여 죽고자 함입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향하여 살기로 작정합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0절은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Χριστῷ συνεσταύρωμαι)에서 헬라어 ‘순에스타우로마이’(συνεσταύρωμαι)는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왔나니”입니다. 일회적(一回的)인 못 박힘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못 박혀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συνεσταυρώθη)의 헬라어 시제는 부정형(aorist) 수동태로 일회적(一回的) 사건을 가리킵니다. 죄의 종노릇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갈 5장 24절 참고).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역사하시기 위하여서는 매일 매순간 ‘나의 (죄에 노출되기 쉬운) 자아’를 못 박는 작업을 반복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16:24; 마가 8:34).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나의 자아도 매일 매순간 죽기에 나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주장도, 생각도, 고집도 모두 죽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 가장 좋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안에서 나를 도우시고 나를 위해서 간구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 때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의 삶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나의 육체의 소욕이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의 고백이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추가로) 주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의 공생애도 헛되고 죽음은 더 더욱이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할례(=세례)로 말미암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믿음은 우리의 수고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 믿음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 4-5절에서 바울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가 이전에는 우리의 정과 욕심대로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갔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우리를 주장하시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노라.”고 신앙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안디옥에서 생긴 일” (갈 2:11-14)

“안디옥에서 생긴 일” (갈 2:11-14)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面責)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라 하였노라.
 

1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배우고 음식에 익숙함이 지름길입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김치와 불고기 등 한국고유의 음식을 잘 먹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그 사람이 한국음식을 잘 먹으면, 그에게 웬지 친근감이 가게 마련입니다. 그위에 한국어까지 웬만큼 구사한다면 속마음까지 주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즐겨 먹는 햄버거(hamburger)와 프라이드 치킨(fried chicken), 핫도그(hot dog) 등을 잘 먹는 사람이 미국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와 영어에도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빨리 친숙하게 됨을 봅니다. 인도 선교사를 지망하는 사람이 그가 가기를 원하는 지방의 방언(dialect) 배우기를 원치 않거나 그 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는 카레 냄새만 맡아도 역겨움을 느낀다면 이 사람은 활발한 선교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 어떤 정치인이 가난한 서민들과 식사자리를 같이하였다는 기사를 봅니다. 무엇입니까? ‘나도 여러분과 같은 류의 사람이며 여러분의 삶을 이해한다’는 정치인의 몸짓일 것입니다. 그들과 식사자리를 같이하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음으로서 친근감과 동류의식을 심어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울릴려면 철저히 같이 어울리고, 동류의식을 느끼려면 속까지 그렇게 하여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제스처(gesture)는 하지만 한시적이며 속으로는 ‘내가 너와 한 자리에 앉아서 너와 같이 식사를 하지만 나는 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다’라고 하며 자기를 구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팔레스틴의 하층민들하고 식사자리를 자주 같이 하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아예 차별을 못 느끼게 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들 중에 한 부류인 목수의 아들의 모습으로 사람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으로 인한 권위가 그를 주변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었지만, 어부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실 때(마태 9:10-11; 마가 2:15-16; 누가 5:29-30) 그러한 구별마저 철저히 없이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과 식사는 같이하고 있지만, 너희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고 있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너희와는 다른 계층이야.’라고 속으로 생각지 아니하셨으며 대부분이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나 세리들이나 창기들이 그렇게 느끼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레위기 11장에서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여주신 이래, 아니 그 이전 노아에게 동물 먹는 것을 허락하시되 생명을 상징하는 피는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 이래, 식물과 고기의 조리법 등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지금도 식품시장(Grocery Market)에 가면 코셔(Kosher) 식품이 별도로 있는데 코셔식품이란 유대인의 율법의 정한 음식의 법규에 따라 요리된 것입니다.

2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방인 크리스천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있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리게 되자 일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머물고 있던 바울과 바나바도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우리 유대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율법을 이방인 크리스천들 앞에 두어 멍에를 그들의 목에 두려하느냐? 우리나 저희나 동일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행전 15:10-11)라고 이방인 신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말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증거하고, 결론적으로 야고보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제안을 합니다.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하는 사람에게 할례나 율법의 문제로 괴롭게하지 말 것이나, 다만 그들에게 우상의 제물, 짐승의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은 그들에게 멀리하게 하라.’(행전 15:19-20, 28-29)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야고보의 권고사항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권고가 안디옥의 이방 교인들 사이에 잘 시행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아니면, 잘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보고가 예루살렘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로는 사도행전 21장에서 보는 대로 후에 바울이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해주려 예루살렘을 세 번째 방문하였을 때 다시 한 번 바울에게 이 권고사항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행전 21:25).

   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고 있는 것인지 본문은 밝히고 있지 않으나, 두 가지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첫째는 바울과 ‘교제의 악수’(갈 2:9)를 한 예루살렘 사도들을 대표하여 우정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선교사역의 근거지를 방문한 것이며, 두 번째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공회의 권고안을 제대로 잘 안지킨다는 보고가 있는데 과연 어떤가 살펴보고자 함이었습니다.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의 음식문화를 보니 유대인들과 다른 것이 많음을 절감합니다. 그위에 바울도 이방 선교의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의 음식문화를 유대인들처럼 고치라고 하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 자신은, 거리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방인들의 다른 음식문화를 갖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보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들이 담겨져 있는 큰 보자기 환상을 세 번 보여주시고(행전 10:9-16)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식사 자리를 같이한 경험이 있기에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그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님을 압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탁교제를 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아직 공생애를 사실 때에 마가복음 7장 15-16절에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곧 먹고 마시는 일로 사람이 죄짓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 곧 시기하는 마음, 탐하는 마음, 부정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고 죄인으로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게바를)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면책하다’라고 함은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책망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아는 사람은 이러한 바울의 책망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장소인데,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덮어주어야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책망을 하나?’
그러나 성경에는 덮어주거나 사사로이 지적할 잘못이 있는가 하면 공개적으로 지적할 잘못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의 잘못은 공개적으로 책망하셨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한 베드로가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며 만류할 때,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의 인간적인 만류의 잘못이 무엇인지 책망하실 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또는 교회 밖에서 어떤 사람이 교회를 욕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옳게 정해진 교회의 결정을 비난할 때 이 사람에 대한 책망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또 다른 사람이 이 사람과 함께 혹은 따로 교회를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할 수 있었음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단 한번의 설교로 삼천 명의 결신자를 거둔 적이 있는(행전 2:41) 능력의 종이요 예루살렘의 수천 명 중앙교회의 유명한 목사입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는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물론이요 이방인 성도들도 동경하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원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 바울은 누구입니까? 바나바와 함께 수십명이 출석하는 변두리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는 무명의 선교사겸 목회자입니다.
베드로는 명분은 교제의 악수를 목적으로 안디옥을 방문한 것이지만 실제는 중앙교회의 사도로서 이방지방의 교회가 중앙교회의 권고사항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감독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감독을 받아야 하는 지방교회의 목사로서 바울이 책망하였다는 것은 그 내용은 어떠하든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면책을 하는 바울도 강심장이지만 면책을 감수하는 베드로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유명한 일화이지만, 주기철목사님(1897-1944)이 아직 사십이 안된 나이에 평양 산정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그곳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는 조만식장로님(1883-1950)이라는 민족지도자가 출석하는 교회로도 유명한데 조만식장로님으로 말하자면 주기철목사님의 오산학교 은사요 그를 산정현교회로 청빙한 청빙위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조만식장로님이 교회로 향하던 중에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바람에 예배시작 시간에 늦었습니다. 이유야 어쨋든 죄송한 마음으로 예배실 안으로 들어오는 조장로님을 향하여 강대상에 있던 주목사님이 엄한 목소리로 말씀합니다. “조만식장로님은 오늘 예배에 늦으셨으니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뒤에 서서 예배드리십시오.” 이러한 지적을 받은 장로님이 ‘아니 젊은 목사가 도대체 뭐라는 거냐?’고 고함치며 대들기라도 하면 낭패일 터인데 조장로님은 주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끝날 때까지 서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고 그곳에서 머문 날이 여러 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유대인들이 이르기 전에는 베드로가 여전히 마음의 제약이 있긴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조리법인 코셔(kosher) 식으로 요리되지 않고 이방인의 방식대로 요리된 음식을 그들과 같은 식탁에서 함께 먹고 즐겼습니다. 이방식으로 요리되었기에 피가 다 제하여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목매달아 잡은 짐승일 수도 있고, 유대인들이 금하였던 돼지고기가 놓여있을 수도 있고, 미꾸라지와 같이 비늘이 없는 물고기 요리가 식단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 교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과 친숙하여지기 위하여 그들의 음식 중에 유대인으로서는 부정하다고 멀리하는 요리에 손을 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만 그들과 식탁은 같이 하되 유대인으로서 먹을 수 있는 음식만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 지방의 이방인과 “함께 먹었다”라는 말을 헬라어의 미완료동사(συνήσθιεν)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어성경들은 “he used to eat with the Gentile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였는데, 유대인 할례자들이 그곳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마치 자기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함께 식사는 더더욱이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황급하게 물러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이 바울을 섭섭하게 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방인들도 할례와 모세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거론되었을 때 이방인들을 두둔하여 변론해준 베드로였는데, 그러므로 그를 향한 바울의 고마움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던 터였는데, 야고보에게 흠 잡힐까바 식사 자리에서 물러난 그가 참으로 서운합니다.
 
어느 토요일에 어떤 교회의 장로님과 집사님들 몇몇이 함께 골프를 즐기고 그중 한 집사님 댁에 모여서 식사를 나누고, 그대로 헤어지기가 뭔가 부족한 것같아서 식후에 간단히 맥주로 시작하여 위스키까지 마시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곁들여서 담배도 핍니다. 그들 중에는 대충 알려진 모습들이라 별 거리낌 없이 대화하며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전혀 예상치 않은 때에 근처의 교인 집을 심방하고 돌아가던 담임목사님이 그 집사님의 집도 생각이 나 잠깐 드려다 보고 가려고 들렀습니다. 문이 조금 열려 있길래 잠기지 않은 문을 통해 집안에 들어섰는데, 안의 광경을 보고는 그만 아연실색(啞然失色)합니다.
목사님보다 더욱더 당황한 것은 장로님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그래도 목사님에게는 믿음이 좋은 장로님이었는데... 장로님은 (목사님이 들어섰을 때 자신의 술잔을 보지 못했기를 바라며) 작은 술잔을 잽싸게 손 안쪽으로 감추고는 점잖게 한 마디 합니다. “제가 먼저 자리를 떠주었어야 했는데... 그냥 있다 보니까 젊은 집사님들이 벌인 술자리에까지 함께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려. 허허...”라고 하면서 겸연쩍은 웃음을 웃습니다.
이것이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었겠습니까? 장로님이 술잔을 재빨리 감추는 대신에, “목사님, 제가 오늘 젊은 집사님들과 기분 좋게 골프를 한 번 치고 저녁에 이어 술 한 잔 같이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함이 오히려 나았을 것입니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유명한 목사요 사도인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동의 기준이 되는 사람(role model)이었습니다. 야고보가 보낸 형제들이 안디옥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 당황한 사람은 베드로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그 자리에서 식사하고 있던 안디옥 지방에 사는 유대인 크리스천들도 상당히 당황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예의주시합니다. 그를 따라 행동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피하자 그들도 따라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바울로서는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의 행동도 참기 어려운데, 게다가 한술 더떠서 그와 소아시아 지방의 일차 전도여행을 함께 하며 온갖 고생과 죽음 근처에도 같이 가본 바나바마저 바울의 편에 서지 않고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미혹됨이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바나바의 마음 가운데 바울보다는 베드로의 행동을 따름이 더 안전하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14절: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 그리고 바나바가 모두 이방인 크리스천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그들이 옳은 행동을 한 것이 아님이 바울의 믿음의 눈에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외식(外飾)이요 적어도 그 행동만 갖고 따진다면 복음의 진리가 그들 가운데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베드로를 모든 자 앞에서 면책(面責)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좇고”라고 함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자리를 같이 한 것은 그들의 식사문화를 인정한 행위요 얼마동안이나마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었던 모습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이미 유대인다운 삶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 어울리는 식사자리를 떠난 것은 그가 일시적으로 포기했던 유대인다운 삶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나 그의 모습이 이미 온전히 유대인답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바라보고 존경해 마지않던 이방인들에게 잘못된 유대인다운(?) 모습을 보여줌은 불합당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을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선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0절에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그를 속박할 수 없으나 유대인들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율법을 지키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행전 21:21-26).
그러면 바울의 행동은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유대인들 앞에서는 유대인 같이 되고(고전 9:20), 이방인들 앞에선 이방인 같이 되고자 함(고전 9:21)에 있어서 바울의 행동도 이중적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혼합그룹 앞에서 바울은 초지일관 이방인의 사도답게 이방인들과의 식탁교제를 즐겼습니다. 차라리,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의 식사문화는 인정하면서 그들과는 별도로 식사를 하였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이나, 그렇지 않고 이방인들과의 동일한 식사자리에서 두 개의 다른 모습을 보여줌이 잘못입니다. 이방인과 어울려 식사함이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그 자리에 야고보가 오더라도 머물러 있어야 하며 복음의 진리로 자신을 변론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3
바울이 왜 안디옥에서 생긴 일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합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말을 듣고 혼동함이 안디옥 교회에 속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미혹당함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이방인들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도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하고, 그들의 이방 식사문화는 부정한 것이니까 유대인들의 정결한 식사문화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할 때, 이렇게 말하는 자들의 권위가 바울의 가르침보다 그들에게 더 우월하게 받아들여짐에 대한 경계입니다.
이방 크리스천들은 식사를 비롯한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굳이 포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자로서 자원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우리 믿는 사람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미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안디옥 사건을 통하여 주님께서 또한 현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여전히 체면치례로, 제약적인 종교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겉과 속이 다른 외식(外飾)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크리스천이라도 원치 않는 자리에 앉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원치 않는 자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마음에 거리낌을 준다면 그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 자리에 있음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나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나 떳떳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에 외식적인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福音)의 진리(眞理)를 따라 행하는 삶의 모습이요,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