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9, 2012

“내가 참포도나무요” (요한 15:1-17)

                                                “내가 참포도나무요” (요한 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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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국선교의 비전을 갖고 중국대륙의 문을 두드린 영국인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헌신하기 위해 중국에 왔고 자기를 바쳐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태양 빛이 비취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주는 나무이신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스스로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을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환경과 형편을 이기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인 한에 있어서 성도들은 모든 환경과 여건을 이길 수 있으며 좋은 과실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을 포도나무로, 나라(또는 민족) 전체는 포도원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 7절에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사람이라.”고 했고, 예레미야서 2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해 “내가 너를 순전한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라고 말씀하시고, 호세아서 10장 1절에서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에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포도원을 마련하시고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심으시며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안에 속하여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수분과 양분을 섭취하기보다는 다른 이방우상의 진액을 받고자 하였기에 뽑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포도나무로서 이스라엘이 농부인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참포도나무로 이 땅에 심으시고 성도들을 이 참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 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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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성도의 연합으로서 교회는 그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는 남편이요 성도의 연합으로서 교회는 그의 아내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요, 성도의 연합인 교회는 그 몸이며, 성도 각 사람은 몸을 구성하는 지체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성도들은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와 성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1절: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내가 참포도나무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라고 칭하신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이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그들에게 임하였기에, 그리스도께서 참이스라엘로, 참포도나무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이 어떤 것인 줄 보여주고자 하심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독립된 나무로서는 풍성한 열매를 맺기가 힘듭니다. 이는 그 나무가 심기어 있는 토양과 위치한 환경에 지배를 많이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열악한 토양과 거친 환경을 변화시키시는 힘을 그 안에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독립된 나무로 심으시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게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였는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포도나무가 되시며 신약 성도는 가지일 뿐입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農夫)라
하나님 아버지를 농부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성도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이 잘 성장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풍성하고 싱싱한 과실을 얻기 위하여 병들어 마른 가지들은 잘라 냅니다.

2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와 과실을 맺는 가지
모든 가지들이 다 잘 자라고 과실을 맺으면 좋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농부는 벌레 먹거나 병든 가지들을 잘라주어 다른 건강한 가지들에게 더 많은 수분과 양분이 가게 합니다.
농부는 과실을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다듬어주어 더욱 싱그럽고 풍성한 과실을 맺게 하고자 합니다.
                                                  
3절: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이미 깨끗함
제자들은 지난 삼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씀의 자양분을 먹고 양육되었기에 깨끗하고 기본이 갖춰진 가지들입니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건강하고 깨끗한 가지들입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리스도 안에 거함
사실 포도나무의 가지는 그에게 선택의 권한이 없습니다. 그 가지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스스로 떨어져 나갈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로서의 가지인 성도들은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자유의지로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인지 떨어져나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좋은 권고사항이 아니라 강권적인 명령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를 출석하는 한에 있어서 교인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즉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심은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에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참포도나무의 가지가 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있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옴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영역(domain) 안으로 들어감입니다.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심은 포도나무가 가지에게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듯이 말씀의 수분과 양분을 가지인 성도에 공급하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제자들 안에 들어오시고 성장시키심입니다.

실제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에서는 가지들이 어떤 특정한 포도나무에 붙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지만, 사람들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잠시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 있다가 스스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가 아닙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나갔기에 수분과 양분을 받지 못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가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라고 1절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1절에서는 그 이전의 열매맺지 못한 이스라엘과 구분하여 “참”포도나무라고 하시고 농부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셨는데, 5절에서는 가지들인 제자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스스로 포도나무가 되어서 열악한 토양과 거친 환경을 극복하고 풍성한 열매를 내는 힘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풍성한 열매를 내게 하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이라고 함은 4절의 명령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맺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결코 맺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4절, 5절, 6절과 7절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이요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이기에 열매는커녕 말라비틀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가지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서 불에 던져 살라질 뿐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제하는 사람은 장차도 하나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할 것이지만, 현재 그리스도와 교제가 단절된 삶을 사는 사람은 장차에도 단절만 있을 뿐입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와 성도간에 연합이 견고하고 말씀을 통한 교제가 건강할 때, 포도나무의 가지인 성도는 농부인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시고, 15장 16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4장 14절에서는 “내(=그리스도)게 구하면”이라고 하시고 15장 16절에서는 “아버지께 구하든지”라고 하심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아버지와 본체이심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나무에 관한 말씀은 주로 과실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3절에서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1장 18-22절과 마가복음 11장 12-14절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과실이 없음으로 인하여 저주거리가 되어 말라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비유하신 두 번째 이유는(첫 번째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구약의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의 대체) 포도나무의 존재목적이 오직 과실을 맺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꽃을 피우는 나무가 아니요, 관상(觀賞)용의 나무가 아니요, 땔감으로 필요한 나무가 아니라 오직 열매를 위한 나무입니다. 포도 열매는 탐스럽고 풍성합니다. 포도송이들이 탐스럽고 풍성한 것 같이 성도들의 풍성한 결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통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들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과실을 많이 맺으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스승에게 제자는 그 스승의 사상과 학문을 계속 이어나가 꽃을 피우고 결실이 있게 하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듣는 학생에게 아무런 진보나 결실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학생일지언정 제자는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disciple)라는 용어를 사용하심에 “과실을 맺음”을 전제조건으로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과실 또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적 열매인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갈 5:22-23)--와 외적 열매인 전도를 가리킵니다.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심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10절에서 설명하십니다.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실 때 하나님의 계명을 즐겨 지키시고 죽기까지 지키셨습니다.
성도가 그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즐거움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를 사랑치 않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지키기를 원하시는 그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율법의 재해석도, 바울의 이방인들을 향한 권고도, 요한의 새 계명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이 한 마디 사랑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또는 형제) 사랑”인데, “(눈에 보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사랑에 관한 성경전체의 요지입니다. 이 “사랑”은 믿음의 가장 확실한 외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11절: 내가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기쁨을 충만하게 함
한 대상을 사랑하는 그 자체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 남편 또는 아내를 사랑하기에 그를 위한 헌신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그 안에 간직하고 공생애를 사실동안 사람들을 위한 나눔과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으로 표현하셨기에 그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그의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나눠주기를 원하십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기쁨을 제자들 안에 있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2-15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장 34절에서 이미 하신 말씀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3장 35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본문 14절에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우리를 그의 친구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로 여기심은 아버지께 들으신 것을 알게 하심입니다.
17절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하셔서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심이 결국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6-17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과실을 맺게 하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신 것은 과실을 맺게 하고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 알게 하십니다.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포도나무 되신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요, 서로 사랑함으로 풍성한 과실을 맺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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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4, 5, 6, 7절).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여 있음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 수분과 양분인 말씀으로 성도들 안에 들어오시고 머무르시며 성도들을 성장하게 하심입니다. 그로 인해 내적인 과실과 외적인 과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쁨을 그 안에 충만히 경험케 되며 그들도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있는 가지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모함이 여러분 안에 있으며 그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여러분 삶 가운데 있습니까?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며 그의 말씀을 듣고자 하며 그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심으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과실을 맺으며 그리스도의 기쁨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게 임하는 놀랍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요한 14:16-3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요한 14: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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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나라들(ANE)의 신화들 가운데 등장하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들 중에는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메소포타미아의 마르둑(Marduk) 신도 있고,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다스린다는 에레쉬키갈이라고 하는 여신도 있고, 풍요를 공급하는 바알(Baal) 신이나 땅의 여신이라고 하는 아세라(Aserah) 등이 있지만, 이 신들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것도 명령하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참으로 존재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신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상상(imagination) 가운데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그들의 기원과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허구이지 실재로 존재하는 신들이 아니므로 그들을 만든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사람들을 향하여 그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명령하시며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자녀로 삼으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약속을 바라보며 나오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평안을 공급하여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통하여 그들을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교회를 출석할 때,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외형적인 삶이 갑자기 좋아져서, 순탄하여져서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극히 드문 예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의 형편은 여전한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달음으로 인하여 오는 평안입니다.
세상의 삶은 여전히 힘든데,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내가 느끼기에 오는 평안함입니다. 나는 여전히 육신의 고통을 느끼는데 주님께서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알기에 찾아오는 행복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된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평안케 합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오라 부르심이 나를 평안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아는 것이 나를 평안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아는 것이 나를 평안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림을 알고 고백함이 내게 평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임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께서 영으로 여러분 안에 함께 하심을 날마다 발견하고 고백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죄와 허물의 짐, 염려와 근심의 짐을 내어 맡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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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떠나심을 염려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그들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 번역하면, ‘돕는 자’(Helper), ‘상담자’(Counselor), 또는 ‘위로자’(Comforter)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 안에 거하고,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는 영이십니다.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떠난 삶을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그의 가르치심을 받은 제자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의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고 하신 약속은 오순절 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일차적으로 이뤄지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기에 때로 더딘 것 같을지라도 꼭 이뤄질 약속입니다.

19-20절: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조금 있으면”이라고 함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되실 때를 가리킵니다.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라고 하심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이라고 말씀하심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강림하실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영으로서 제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요,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예수님도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시겠다고 약속 주셨습니다.

22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2절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그리하므로 그들의 임금이 되시지 그러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직접 대답하시는 대신에 제자들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3절은 21절 말씀의 반복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은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리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를 사랑하는 자요,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내가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행함을 통하여 아내가 남편이 자기를 사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이 자기를 공경하고 사랑함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모님의 원하고 명하는 바를 자식이 듣고 될 수 있는 대로 행하고자 노력함을 보며 알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아무리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하더라도 남편의, 아내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더라도, 그분의 원하고 명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치 아니하고 지켜 행하기는 더더군다나 원치 아니할 때 이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의 판단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나의 삶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5-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구약시대가 성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역사하신 시기라고 한다면, 구약과 신약을 잇는 중간지점에는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뒤를 이어 성령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시기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심은 그들로 하나님의 뜻과 명하심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더욱 더 주님의 뜻을 밝히 깨달아 알아 지키고자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함께 다니고, 먹고 자고, 말씀의 가르치심을 받았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게 크게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이 세상에서 보다 나은, 출세한 자의 삶을 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자 함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요,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마음에 번민함과 고통 중에 지내시고 피와 땀방울을 흘리시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로,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실 때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고자 인사청탁을 하는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의 문제로 분이나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제 바뀝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매 이제 예수님께서 사신 공생애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분이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치시고 당부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를 사는 모든 성도들도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 전까지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요 세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삶 가운데서만 이해되지 그 이상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까?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에게 임하실 때 비로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 생각나고 알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를 사는 성도들은 그들에게 성령의 임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들어도 깨달아 알 수 없고, 온전히 지켜 행할 수가 없습니다.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들도 여전히 이 세상임금인 사단이 주장하는 “이 세상”(this world)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 때, 고통이 없거나 어려움이 없거나, 폭풍이나 풍랑이 없거나, 가시밭길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세상의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 앞에도 이러한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른 것인데 우리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도 때로는 광야 길을 헤매고, 때로는 사막길을 다니고, 때로는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때로는 큰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 위를 항해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그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십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황무지에도 장미꽃이 필 수 있으며 사막에도 물이 나며, 고통과 괴로움 중에도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마음이 평안하여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여객선의 밑창으로 내려가면 자이로스코프(gyroscope 또는 gyrostabilizer)란 것이 있는데(비행기에도 있음), 이것은 파도가 심할 때 배가 평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장치입니다.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배가 안정되고 평형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도 우리 인생의 항해에서 자이로스코프와 같은 역할을 하여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의 시련에 있을 때에도, 비바람과 폭풍의 중심에 있을 때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게 하시며 평안을 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일시적인 근심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근심이나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습니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시고 또 얼마 후에 다시 오심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4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성도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시는” 사역을 그들이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들에게 기쁨이 클 것입니다.

29절: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언의 위대성은 그 예언의 성취에 있습니다. 구약에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그의 공생애, 고난,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언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성도들로 하여금 보고, 알고,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하나님께로 가심)과 다시 오심을 미리 말씀하심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에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참됨을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30-31절: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상관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주장하는 대로 일이 되가는 것처럼 보일 터인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서의 사역이 이 사단의 사역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이 역사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 같지만 기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되어짐입니다.
                                                   
                                                                              3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인데, 이로서 그는 힘을 얻고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평안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매 어떤 시험이 오나 곤고가 오나 담대할 수 있으며 어려운 처지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들판 한 가운데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고, 보혜사 성령의 위로와 가르치심을 받으며, 주님의 평안으로 말미암아 항상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 14:1-1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 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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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누엔(Henry J. Nouwen)이라고 하는 Harvard 대학교 신학과 교수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사츄세츠 주에 있는 정신지체자를 위한 L'Arche Daybreak 학원에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정신지체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그의 교수로서의 장래가 탄탄대로인데 그 영예와 보수를 포기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질문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책 한 권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In the Name of Jesus』(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정말 아는 길이 무엇일까?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 후에 그는 답변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길은 내리막길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작은 인기, 작은 권력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지체자 청년 아담군 곁에 있을 때 이런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르막길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리막길에서만이 복음서의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길”은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학문의 길은 학자나 학생을 학문의 완성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철학의 길은 철학자를 지식사랑의 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종교에서 길은 종교의 종점으로 종교인을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종점이기도 하지만 우리 믿음의 길이기도 하시다고 선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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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자신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를 측정하는 한 기준은 ‘세상 일로 지나치게 염려하고 근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본래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라 세상일에 근심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주위의 형편으로 조바심 내고 근심하던 사람들도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세상근심을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제자들을 떠나서 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요한 13:36).

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 근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국에 같은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는다’라는 말에는 ‘바라보다’ ‘의지하다’ ‘순복하다, 따르다’ 그리고 ‘사랑하다’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성도는 주위의 돌아가는 형편과 환경이 다소 기대와 다르게 그에게 임한다 하더라도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하신 계획의 장 중에서 그에게 좋은 것으로 복 주실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설명하심에 성(castle)이나 맨션(mansion)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방이 많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의 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은 무한대로 광활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자녀들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에서 열 사람의 찬송과 경배보다는, 백 사람의 찬송과 경배를, 백 사람보다는 만 사람, 만 사람보다는 백만 사람의 찬송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시되, 심령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하고 기쁜 찬송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할 방들이 많음”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심은 아버지의 집에 많은 방들을 장식하기 위하여 가신다는 뜻입니다. 방들이 많은데 현재는 주인 없는 방들이라 내부장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나라로 가심은 가서 방 주인이 될 사람의 개성과 취미에 맞게 각 사람의 방을 꾸미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성품과 믿음과 그들의 봉사를 아시기에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따라서 방의 크기와 장식을 달리 하십니다.
“하나님나라에도 차별이 있네요?”
“예,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별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의 능력과 수고와는 다른 불공평한 차별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봉사와 중심을 아시는 주님에 의하여 마련된 공평한 차별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중심을 드린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상급이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주어집니다.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도신경을 통한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맞이하실 준비를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산 자들은 장차 나타날 그들의 공력에 따라서 그가 예비하신 처소에 들이실 것이며, 죽은 자(믿지 않은 자)는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을 영접하여 주님 계시는 곳에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4절: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the way where I am going)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은 하나님나라인데, 하나님나라로 난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시며 먼저 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길이 되시고, 그 길을 가기를 원하는 성도들과 영으로 동행하여 주십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나라로 향한 그 길을 향하여 갔습니다.
성도들이 아는,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하늘 길」은 허무와 절망의 길이 아닙니다. 소망과 복락의 길인데 이 길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원열차를 타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 구원열차에는 믿음이라고 하는 표를 갖은 사람이 올라탈 수 있습니다.

5절: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삼 년여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 없이 들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늘 세상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임박한 이 순간까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바로 깨달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천국비유를 통하여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설명하셨는데도 제자들은 천국보다는 땅의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땅에 것에 골몰한 사람이 하늘의 것에 관하여 반복하여 듣는다고 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고 있지만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이 많지 않음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이 땅에 있음도 잘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사람들은 의심이 많고 믿음이 적기에 하나님의 땅에서의 축복과 약속을 증거하여도 믿지 않는데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은 더더군다나 믿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일 증거하는 것을 중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장차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그들이 지금은 깨닫지 못하나 그 때에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도마가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을 때 그는 멀리 인도에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하셨습니다.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나라로 향해 난 길이요, 예수님만이 참 진리이시요, 예수님 안에만 참 생명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는 삶은 때로 험해 보이고 고독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께서 그 길을 가는 성도와 동행하시기에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 길이 또 때로는 ‘좁은 길’이지만, 그 ‘좁은 길’로만 달려나가는 사람에게 기쁨이 충만합니다.

7-8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의 몸으로 사람들에게 오신 분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본체를 그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apart from Christ)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빌립의 질문은 자신이 무엇을 질문하는지도 모르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알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알았더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빌립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9-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해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신 것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 줄 알려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자신의 안에 계심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2-1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적인 삶을 사셨지만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람에게 내려오신 성령님은 모든 사람들 속에 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기에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여러분의 소망이 하늘에 있습니까? 땅에 것에 지나친 욕심과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다가 땅에 묻히게 될 것이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그의 눈이 하늘을 바라보고 사모함으로 하나님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제한적이 아닙니다. 옆 사람이 들어가면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져버리는 경쟁적이거나 비좁은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 형제-자매들, 친지들과 이웃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기쁨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요한 13:31-38)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요한 13:31-38)
       
                                                                           1
성경말씀 가운데 사랑을 빼면 별로 설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중요한 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의 또 다른 책인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초지일관하게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합니다.
진리를 순종하는 사람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허다한 죄가 덮음을 받았습니다.

                                                                                2
31-32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함은 그의 죽으심의 때가 이미 정하여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인간구원계획을 완성하시는 일인 까닭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라고 함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인간구원이 완성될 것이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승천케 하셔서 그리스도에게 영광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3절: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신 밤이 목요일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금요일 아침이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날 밤을 위한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제자들이 따라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요 인간구원을 위한 죽음은 예수님만이 가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리고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5장 12절에서도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새 계명이 아니라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새 계명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이미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생활 가운데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서로 사랑함”은 예수님의 그런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모르든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36-38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6-38절은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을 당하실 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실 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실 ‘대속적인 죽음’-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는 죽음--은 오직 그만이 담당하실 것이지만, 후에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할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감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그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예언적으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실 때 그곳에까지 먼발치로 따라가지만, 사람들이 그를 한패로 붙잡고자 할 때,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69-75절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그저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합니다.
부인(否認)의 강도가 점점 높아가며 목숨에 대한 애착이 커 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그를 장차 부인할 베드로도 사랑하시며, 그를 팔 가룟 유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군중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우리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심은 그의 죽음이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확증이요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로 알게 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우리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목숨을 버리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 같지만 예수님의 지고(至高)하신 사랑의 방향으로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요한 13:1-30)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요한 13:1-30)       

                                                                         1
오늘날 교인들의 어리석음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어리석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예수님은 3년의 갈릴리지방과 유대지방의 사역을 마치시고 고난받고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크냐 다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자기들을 좌우에 앉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의 목회자는 흠도 티도 없으시고 지혜가 충만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리석었으니, 흠과 티가 많으며 지혜도 부족한 요즘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듣는 현대 교인들의 어리석음은 그나마 나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에도 문제가 많아 한때 10,000명 이상 모이던 들판교회가 12명으로 줄어드는 일도 있었는데, 현대의 교회들에 문제가 많음은 오히려 매우 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당연시 여겨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또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가 더욱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적인 삶을 사셨는데, 성령은 각 사람 속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통하여 더 큰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 사건은 유월절(Passover, πασχα)이 시작하는 바로 전날 저녁에 있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애굽에 머무를 때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시되 문설주(side posts)와 인방(upper posts)에 바르라고 하십니다(출애굽 12장).
해서, 문기둥에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이스라엘의 집은 그대로 지나치고, 피가 묻혀져 있지 않은 애굽사람들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죽게 합니다(출 12:29-30).
유월절은 '죽음의 천사가 지나쳤다(pass over)'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기간 중에 죽으심은 ‘유월절 어린양’(Paschal lamb) 되신 자신의 피로 우리를 인 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 피로 발린 사람들은 죽음의 천사가 지나쳐 구원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에 그 초점을 맞추고 이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해서, 2장 4절, 7장 6절과 30절, 그리고 8장 20절에는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표현했고, 12장 23절, 13장 1절, 17장 1절에는 “때가 이르렀다”고 기술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사랑 받을 만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다가 그들에게 실망하셔서 사랑치 아니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2-5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는 방문한 손님의 발을 주인의 종이 씻어주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자신이 친히 낮아지셔서 종의 모양으로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십니다. 한 명의 발만을 씻기지 아니하시고 열두 명의 제자의 발을 모두 씻기십니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6-11절: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시몬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 하시매, 베드로는 어찌 할 바를 몰라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다시 말합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섬기는 자의 본을 넘어선 영적인 의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 예수님과 베드로를 어떻게 상관 있게 만듭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또 말합니다.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베드로다운 말입니다. 발을 씻기심이 나와 예수님을 상관 있게 하는 일이라면, 나의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심으로 더욱 주님과 상관 있는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는 그의 소망입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미 목욕한 자”라고 함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는 ‘온 몸이 깨끗한 자’입니다.
‘온 몸이 깨끗함’의 판정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 몸이 더러운 것 같지만, 주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면 깨끗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속의 더러운 생각으로 죄인인 것 같지만, 주님이 “의롭다”고 하시면 ‘죄 사함 받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이 우리 몸을 씻는 세례에 대하여,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들을 보자기에 얹어 내려 보이시며 “잡아 먹으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속되고 더러운 것을 내가 먹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샌들(sandal)을 신고 먼지가 많이 나는 길을 돌아다닐 때 그 발이 더러워짐 같이, 우리가 생활할 때 더러운 잘못 허물을 범함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자백하며 죄사함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들을 씻어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12-17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시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의 상전이시요 선생이시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으매 우리도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목이 곧다면 그리스도의 참 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먼지 묻은 발들을 다 씻기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으매 우리 또한 형제의 먼지들을 씻어줌으로 용서하여야 할 것입니다.

18-20절: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0절에서 예수님은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그들이 앞으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실 때 권능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하여 수고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들의 복음증거의 발을 축복하여 주심입니다.
이사야서 52장 7절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표하며,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표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했고,
바울은 로마서 10장 15절에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을 통하여 그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이셨고,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으며, 그들의 허물을 씻기셨고, 그들에게 서로 섬기고 용납하라고 하시며, 복음을 증거할 그들의 발을 미리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21-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 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시니 밤이러라.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의 언제부터 가룟 유다가 그를 팔 자인 것을 아셨는지 성경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역의 초기부터 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돈궤를 맡는 일을 시키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 중에 들어있는 가룟 유다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저는 목회자로서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을 팔 가룟 유다지만 그도 사랑하셨을까?
그를 바라보실 때마다 연민의 정을 느끼셨을지도 모릅니다.
마가복음 14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한 이 사람까지 예수님은 사랑하시며 그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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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때로는 성급한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우편에 또는 좌편에 앉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며 영광에 동참하기 위하여 고난에도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오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섬기고, 사랑하고, 용납하는 생활을 통하여 주님의 온전하심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요한 12:37-50)

                                                      “내가 온 것은” (요한 12: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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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1999년)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안내를 맡았던 이스라엘 여행안내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크리스천은 그들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하고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구 예루살렘 성벽의 황금문(Golden Gate)을 통하여 권세로 임하실 것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그 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장차 임하실 때 그는 영광 중에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으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육신을 입고 세상에 처음 내려오시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실 때 그의 사역은 심판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구원자로서의 사역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몸을 그를 정죄하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사람들을 위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그들이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까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2
37-38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을 때 표적을 보지 아니하고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표적을 보아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현실은 복음을 전해듣고 표적을 보고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출애굽을 한 60만 명의 20세 이상의 장정들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옷과 신발이 닳지 않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끼마다 내려주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까?
그들이 출애굽하여 한 달만에 시내산에 도착하고, 시내산에서 일 년을 머문 후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보고가 어떠했습니까?
또한 그 보고를 들은 60만 명의 이스라엘 장정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나머지 이스라엘 전부는 하나님께서 그 동안 보여주신 표적과 인도하심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애굽을 떠난 20세 이상의 장정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그들의 불신앙 가운데 죽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그들의 불신앙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때가 주전 1406년이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언케 하신 시기가 주전 700년경이었으니 700년 동안 그들은 여전히 불신앙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광야 40년 유리생활 가운데 태어난 이스라엘 2세들과 그들의 후손들도 광야에서 죽어간 그들의 조상과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38절에 인용된 예언은 이사야서 53장 1절의 예언으로 메시야에 관한 예언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선지자들에 의하여 선포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이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39-41절: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頑固)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40절에 나오는 인용은 이사야서 6장 10절의 예언의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시고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이는 다만 그들의 눈먼 것과 마음이 닫혀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때로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꽉 막힐 수가 있을까?’라고 안타까움이 들 때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의 표현은 바로 장차 이 땅에 오시고 사역하실 메시야의 영광을 보고 그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42-43절: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黜會)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법을 집행하는 관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랬다가 혹시 해라도 당할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44-45절: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자 함이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를 포함한 하나님이시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오신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통로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한에서 우리 믿음의 대상이라고 할 것이지만,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우리로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46-47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빛의 역할은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나게 하며 어두움의 권세를 깨뜨리고자 함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진리를 드러내시며 어두움에 있었던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심은 아직도 어두움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18절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에 그저 머물러 있음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음이 심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도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을 믿고 바라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8-50절: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사망에서 구원으로 옮기지 못하였으니 이미 심판되어진 것이며 그 심판의 결과가 마지막에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에스겔서 33장 11절에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 주실 때,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심판 받기를 원하셨다면 흠과 티가 없으신 그가 십자가에 죽지 않으셔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몸을 죽이시더라도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자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친히 아버지의 명령대로 이루는 것뿐이니 그 명령 자체가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이는 그들의 눈이 멀어있고 그들의 목이 뻣뻣하며, 마음이 완고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그들을 멸하거나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까지도 사랑하시고 말씀으로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얻으며 우리의 삶이 주님으로 인하여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 (요한 12:1-11)

                                             “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 (요한 12:1-11)
       
                                                                            1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위(魏)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이 준수하게 생겨서 임금인 위영공(衛靈公)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미자하를 찾아와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위나라 국법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임금의 허락 없이 사용한 사람은 발이 잘리우는 월형(刖刑)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자하는 다급한 나머지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갑니다.
뒤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은 미자하에 대하여, “효자로다. 어머니를 위해 다리가 잘리게 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니!” 하며 칭찬합니다.
하루는 임금을 모시고 과수원으로 갔습니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하나 집어서 먹는데, 하도 맛있어서 자기가 먹다가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셔보라고 올립니다.
그러자 임금은,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는구나. 제 입에 넣었던 것도 잊고 나에게 주니!” 하고 그의 임금 위하는 마음에 감탄합니다.
그 뒤 미자하의 얼굴이 거칠어지자 임금의 사랑이 식어지고 그가 죄를 얻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미자하를 보고 말하기를, “이놈은 일찍이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내 수레를 탄 일이 있었고, 또 지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내게 먹게 한 일까지 있었다.”고 욕합니다.
미자하의 행동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칭찬 받던 일이 죄를 얻게끔 된 것은 미묘한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미움의 변화 때문인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에 드는 동안은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아 더욱 친하게 되지만, 한번 임금에게 밉게 보이게 되자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게 되어 더욱 멀어진 것입니다(「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출전...회남자 인간훈편)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옹지마는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란 뜻입니다.
국경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이 기르던 말이 이웃 나라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별로 낙담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복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리요?”                    몇 달이 지나자 노인의 말이 이웃 나라의 준마들을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노인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렇게 크게 기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재앙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리요?”
노인의 집에는 좋은 말들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어느 날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절름발이가 된 아들을 불쌍히 여긴 이웃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별로 좌절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리요?”
일년쯤 지나자 이웃나라가 국경을 침입해 들어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건장한 청년들을 병사로 징병하고 이들은 전장터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불구라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크게 좋아할 것도 없고 또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나에게 주어진 여건들은 다만 환경일 따름입니다.
나의 앞에 주어진 환경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환경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요 믿음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감사함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2
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예수님의 사역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신 것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기 전 이제까지 하시던 습관입니다.
11장에서 본 바대로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에 그를 죽이고자 음모하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동네로 가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의 때가 되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입니다.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 남매가 사는 곳입니다.

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장소에 관하여는 마태복음(26:6-13)과 마가복음(14:3-9)에는 베다니이긴 한데 문둥이인 시몬의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7:36-50)에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한 것으로 보아 마르다와 마리와 나사로의 집이라고 짐작케 합니다.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나드는 인도산 식물에서 짠 비싼 향유입니다.
재리(財利)에 밝은 가룟 유다의 계산으로는 300 데나리온입니다. 300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300일 품삯입니다. 요즘 가치로 따지자면, 2만 5천 불에서 3만 불 가량 되는 액수입니다.
나드향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옥합을 밀봉하는데 옥합은 부드러운 석고 종류로 만들었습니다. 이 나드향을 담은 옥합의 가치도 꽤나 비싼 것인데, 향기로운 나드를 가장 가치있게 한 번에 사용하기 위하여는 이를 깨뜨려야만 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라고 했습니다.

그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발은 사람의 신체 중에 가장 낮은 부분이요 머리와 머리털은 가장 고상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대야에 물을 떠놓고 손님이 씻게 하든지, 귀한 손님일 경우에는 노비를 시켜서 발을 씻기게 하였는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물이 아닌 나드 향으로, 자기의 손이 아닌 머리털로 씻김은 예수님을 얼마나 극진하게 대접하고 자신을 철저히 예수님의 발 앞에 낮추었다는 것입니다.

4-6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가장 똑똑하고 재리(財利)에 밝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마리아를 책망하여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의중이 다른 데 있으면서, 그의 주님인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이렇게 책망함은 저가 도적인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7-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의도도 아시고 가룟 유다의 의도도 아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극진하게 해드림은 그의 장사할 날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실 것을 알고 그렇게 준비한 것은 아닐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하는 일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의도를 아시지만,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서 가룟 유다의  의도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지적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너의 생각이라면 그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9-11절: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있는 유대인들--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베푸신 것도,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눈에 뵈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으로, 그가 살리신 나사로도 함께 죽여서, ‘나사렛 예수 이단’을 멸하겠다는 공명심만이 있습니다.
                                                   
                                                                         3
중국 공산치하에서 오랜동안 옥중세월을 경험한 중국의 위대한 성자 워치만-니(니토수엥)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우리 속사람이 온전히 활동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심과 아집덩어리인 겉사람--곧 자아(自我)가 깨어져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자아가 여전히 살아서 나를 지배하고 주장하고 인도하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역사할 공간을 잃고 우리 안에서 잠잠하십니다.

자아(自我)가 깨어짐은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는 작업입니다.
자아가 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아가 깨어질 때 겸손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소 나의 영의 귀를 통해서 내 심령에 들려집니다. 워치만-니는 이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는 것을 순전한 나드향이 든 옥합을 깨뜨리는 일에 비유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겉에 보이는 이 옥합이 귀한 것으로 여겨 이 옥합을 깨기를 주저하는데 이 옥합이 깨어져야만 그 안에 있는 나드향을 주님의 용도대로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옥합보다 더 귀한 나드 향을, 여자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머리털에 적셔서 예수님의 발을 씻긴 마리아의 사랑을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주님께 보일 수 있습니다.
질그릇같이 보잘것없는 우리 겉사람의 자아가 깨어질 때 비로소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항아리안에 감추어두었던 횃불과 같은 성령의 빛이 우리를 비추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고린도후서 4장 6-7절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추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성령의 빛)를 질그릇(=겉사람)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나드 향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긴 마리아의 낮아짐과 헌신이 우리 삶 가운데서도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요한 11:38-57)

                                               “나사로야 나오라” (요한 11:38-57)
     
                                                                            1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지식으로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것에 대하여 기도함으로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고 함은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갖는 것이 사람의 입술로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응답받는 기도의 ABC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Ask(구하라)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 7:7-8).

두 번째는, Believe(믿어라)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고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2-23).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믿습니다)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세 번째는, Contend 또는 Claim(주장하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주장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4).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주장하느니라)”(요한일서 5:15)
또한 오늘 본문 11장 41절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온전히 응답되어지기 위하여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미리 주장하고 간증함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 중에 터널의 고통과 동굴의 고통이 있습니다.
터널의 고통은 아무리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끝이 있는 고통이요 동굴의 고통은 끝이 없이 절망 속에 머물러 있는 고통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동굴의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지만, 나사로를 죽음의 권세에서 불러내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우리는 죽음을 방불케 하는 동굴의 고통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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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신앙 없음에 분한 마음까지 드십니다.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음이란 고통을 맛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안됐다고 여겨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울 것인데 주위 사람들에 전혀 그런 기대가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향하실 때 사람들은 그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여서 곡하기 위하여 가시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영광을 얻기 위하여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시는 것입니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니,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의 명령에 반발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그의 누이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며 따른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음식으로 잘 대접하기도 하며 예수님의 권능과 메시아 되심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그의 믿음은 많은 경우에 피상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혹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착하게 살면 혹 천국에 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은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죽은 자기의 오라비 나사로를 당장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 그들이 사는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 제일 먼저 예수님께 달려온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고백 자체로만 판단한다면 그의 믿음은 긍정적인 것이고 대단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오라비가 죽었지만,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대답하십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다. 해서 내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네 오라비 나사로를 살게 하는 것이다.‘
“(그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분명히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신앙고백하였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의 믿음의 고백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믿음이 없는 고백입니다. 입술로는,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구하시면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막상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실 때 그것이 현재 이루어질 줄은 도무지 믿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하였지만, 아마 마음 속으로는 ‘그것도 그 때 가봐야 알겠지요’라고 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을 오래 안 마르다였지만, 기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그에게 어떤 능력과 신성이 있으신 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믿음이 피상적이며 확신이 없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약속들과 확신들을 주시고 계시지만, 그것을 바라본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이 이뤄질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약속들을 믿으십니까?’라고 질문하면, 얼마가 ‘아멘’으로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글쎄요...’라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선포에 대한 마르다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지만, 그의 고백은 여전히 입술뿐인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실 때, 예수님께서 그의 오라비 나사로를 일으키실 것을 기대함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신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토를 다는 것입니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그가 앞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과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부활과 영생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피상적으로, 머리 속으로만 ‘내가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철저하게 붙잡는 것이어야 합니다.

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았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응답에 먼저 감사하십니다.
아직 나사로가 일어난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제자들에게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4)고 약속주신 대로 하나님께 대하여도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람의 눈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간구할 때에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이요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셨을 때 이미 이 사건이 그의 영광을 얻게 하실 사건인 줄 아셨습니다.
11장 4절에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42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기도와 간구에 항상 응답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영광을 받게 하실 것은 이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은 사람의 마술이나 술수로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인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증거하고 사람들로 믿게 하심에 또한 감사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님께서 열린 무덤을 향하여 소리쳐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며, 또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었을 때 그 집을 방문하셔서 “달리다쿰(=소녀여 일어나라)”(마가 5:41) 하시므로 소녀를 일으켜 세우셨고, 또한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 관에다 넣어 무덤으로 향할 때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실 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Young man, I say to you, arise!)"(누가 7:14)라고 하시므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야이로의 딸을 일으켜 세우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머물러 있던 나사로에게 명령하시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도 무덤에서 나오는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생과 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되심을 모든 사람들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으면 맞게 될 자신의 죽음 가운데서도 죽은 자들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일어나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실 것을 예견하시는 사건입니다.

45-46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불러내심으로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 앞에서도 예수님을 걸고넘어지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47-53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는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그를 따르는 대신에 그를 잡아죽이고자 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는 결국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죽게 한 자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예수님께서 어떤 죽음을 당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민족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54-5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저희가 예수를 찾으러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예수님의 때가 아직 더 남아있었으므로 예수님은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유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삼 년이 지나고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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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을 바라봅니까?
바라보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일이 현재 이루어질 줄 믿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시며 분명히 이루어지는 약속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습니까?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주님께서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으며, 빛으로는 나왔지만 여전히 활동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두움에서 나오며, 영적으로 깨어나며, 활동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 11:1-3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 1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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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가는 길입니다. 우리들의 날마다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활과 생명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천국으로 난 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210장 1절에서 찬송가 기자는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 길이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나가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우리가 주님과 함께 걷는 이 길이 ‘천국으로 향한 길’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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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과 마르다, 마리아와 나사로와의 관계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이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는지 복음서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으실 때마다 그들의 집에 유하시든지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여긴 여인이요,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위해 봉사하며 희생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을 때 죄인인 한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씻은 것으로 되어있고(누가 7:36-39), 마태복음 26장 6절 이하와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에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해서,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발 또는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일곱 귀신 들리고 죄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다른 복음서의 증언과 다르게 마르다의 동생이요 예수님의 친구인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를 설명하실 때 그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거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이르는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 하신 것으로 미루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는 선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요 조용하고 선한 사람인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예수님께 전하여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별로 동요를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심은 “아주 죽을 병이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가 죽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육신의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죽음에서 불러 내심으로 그에게 그러한 능력을 부여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능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시려 나사로가 병들었으며 잠깐동안 ‘육신의 죽음의 잠’을 자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10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다 함을 들으셨지만 이틀동안 그 계시던 곳에 더 머무르심은 인간의 능력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유대 땅으로 가는 것이 겁이 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는데 다시 가자고 하시니 제자들은 혹시 죽을까 두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에 다닌다’는 말씀으로 아직 그의 죽음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11-16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서 반복적으로 나오지만 믿는 성도들의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요 소망 없는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잠자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 5:39).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8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잔다”고 표현하였으며,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죽은 성도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시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 되실 것을 보이실 것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7-20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오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으며 돌무덤에 이미 장사지낸 상태에 있었습니다. 17절에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한 것은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39절에 기록된 대로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의 미신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서 사흘 안에는 혹 죽음의 경계를 넘지 않아서 살아 돌아올 수가 있지만, 사흘이 지나면 죽음의 경계를 확실히 건넜기에 살아 돌아올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다음에야 베다니에 이르신 것은 그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시는 일이 사람의 능력이나 그들의 미신을 뛰어넘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21-27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맏으러 나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의 첫 번째 부분,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는 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었던 것일 것입니다. 해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청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많은 치유의 사역을 목격하고 들은 터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분,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한 고백은 그저 막연한 고백이지 확신이 있어서 한 고백은 아닙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신 줄 알았다면, “저의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은 “네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마르다는 “네 오라비가 마지막 때에는 다시 살리라”고 들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의 말씀은 ‘상식 밖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지 사흘도 아니고 나흘이 지난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나 미신으로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현재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먼 훗날 마지막 때의 일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믿음의 고백이라고 하는 것들도 현재의 고백이 아니라 때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적인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 베푸시는 분임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대한 고백도 사실은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고 선포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포하심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대답은 여전히 예수님의 기대와는 거리가 멉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는 예수님을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그의 고백은 그저 입술의 고백일 뿐 삶의 고백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갑니다. 입술로는 마르다와 비슷한 고백을 하지만,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서 그의 삶을 주관하시는 삶은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28-37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마르다가 마리아에게로 가서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다고 전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예수님께 아룁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의 한 말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처음 맞이하여서 한 말 중에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가 믿고 있던 고백만을 한 것으로 미루어 마리아는 마르다보다는 신중한 성격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같이 마리아도 예수님을 오라비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도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되심은 아직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시고, 마리아와 그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사” 우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잠시후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인데 왜 우십니까?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퍼하는 것을 보시며 그들의 잠시 잠간의 슬픔에 동참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고통 당할 때 무관심한 분이 아니시요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며,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3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을 믿으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이미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섰으며,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믿을진대, 바라볼진대, 우리의 삶에 더욱 확신과 생명력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 10:1-21)

                                                      “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 10:1-21)

       
                                                                              1
양은 온순하고 흰털을 가진 깨끗한 짐승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양은 미련하고 재주가 없고 깨끗하지 않은 짐승입니다. 양은 많은 부족함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곧잘 집으로 돌아오지만, 양은 쉽게 바른 길(right paths)을 잃고 다른 길로 갑니다. 양은 바른 길에서 떠나면 그 스스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합니다. 양이 바른 길에서 떠남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목자는 양을 바른 길-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둘째로, 양은 자기방어의 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밤송이처럼 생긴 가시로 자기를 보호하고, 카멜레온은 몸을 주변색갈과 동일하게 변화시켜 위장하고, 스컹크는 독가스를 분출합니다.
그러나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방어할 수 있는 기술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독을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서 안전합니다.
목자에게 지팡이(rod)와 막대기(staff)가 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rod)는 한 끝이 굽어져있는 것인데, 이로서 수풀을 헤치거나, 양이 가시덤불에 걸렸을 때 굽어진 끝으로 빼냅니다.
약 2 feet 가량 되는 목자의 막대기(staff)는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무기입니다. 막대기 끝에 날카로운 금속을 달아 사자나 곰, 기타 맹수의 공격 때 이들을 쫓습니다. 목자가 맹수로부터, 거친 자연조건으로부터 양들을 지킬 것이기에 양들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자의 함께 함으로 안위를 얻습니다.
                                                   
셋째로,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집단행동의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양이 무리를 지어 다닌다고 해서 무리로 방어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룩말이나 소들은 떼를 지어서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지만, 양은 겁이 많아 무리를 지어도 방어의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위험이 찾아오면 흩어집니다.
목자가 없는 상태에서 한 마리의 늑대나 이리가 무리가 들어오면 각각 흩어져서 제 갈 길로 갑니다. 이사야서 53장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떠나실 때,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질까 염려하셨습니다.
한 양이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그 뒤를 따르던 양들도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죽는 줄 모르고 줄줄이 따라 떨어집니다.
한 양이 독초를 뜯어먹고 죽으면 다른 양들도 독초를 뜯어먹고 죽는다고 합니다.

넷째로,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양은 생존을 위한 풀도 물도 스스로는 찾을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기에 그는 배고프지 아니하며 목마르지 아니 합니다.
해서 다윗은 시편 23편 2절에서 “그(=목자 되신 하나님)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섯째로, 양은 보기보다 깨끗하지 않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양과 같은 우리 인생은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씻겨 주실 때 우리는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부족한 양을 목자 되시는 주님이 사랑하신다고 증거합니다. 양이 미련하고 부족하고 생존능력이 없는 짐승이지만, 목자를 따라나갈 때 오히려 그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양과 비슷한 짐승으로 염소가 있습니다. 염소는 뿔이 있어 생존능력은 양에 비하여 낫지만 아무나 뿔로 들이받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들과 사람들을 좌편과 우편으로 나누시는데, 미련하고 힘이 없고 방향감각이 없지만 목자의 인도를 잘 따른 양은 우편 구원의 반열에 서게 하시며, 그의 힘을 믿고 때로 덤비고 자기의 길로 가는 염소는 좌편 멸망의 반열에 서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2
1-3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목축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마을마다 공동 소유로 양의 우리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이리와 짐승 떼와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약 3m 정도의 높이로 울타리가 처졌고 밤이 되면 목자들은 그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었고, 문지기는 그 앞에서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들을 노리고 몰래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는데 절도요 강도였습니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양들을 훔쳐 팔아먹고자 아무도 모르게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날이 밝으면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찾으러 우리로 갑니다. 문지기는 당연히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4-5절: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이 냄새를 맡지 못하고 방향감각이 없으며 싸울 능력도 없지만, 한 가지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이 있지만, 양들의 생존방법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가며 그가 인도하는 초장으로 가 꼴을 먹는 것입니다.
그의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를 때에는 그 목소리가 낯설므로 오히려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6-8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비유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의 문이라고 함은 양 우리로 양들이 들어가고 양 우리에서 나가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양 무리인 이스라엘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요 사두개인들이요 제사장들인데 그들은 목자가 아니고 절도요 강도인 까닭에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아니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9-10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말미암아’로 번역된 헬라어 ‘δια’는 ‘통하여’(through)라고 번역함이 더 좋은데,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문이 되시며 목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들어가게 하며 나가게 하며 그들을 인도하실 때 그들이 꼴을 얻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도적이 온 것은 그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십니다.

11-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1절과 14절에서 반복하여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선한 목자 되심’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고 양의 주인도 아닌 까닭에 위험이 닥치면 도망갑니다. 삯군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의지가 없습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그의 양들도 그를 압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이름으로 압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성격으로 압니다.
선한 목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는 것같이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양들을 압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왜 목자를 필요로 합니까?
양들은 목자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방향감각이 없어서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양들은 어떤 풀이 먹기에 좋은 풀이요 어떤 풀이 독초인 줄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해서, 양들은 목자가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때에 비로소 마음껏 풀을 뜯을 수 있습니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란 이스라엘 밖 이방인들 가운데 목자 되신 예수님께 인도함을 받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로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님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버릴 때 그는 목숨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목숨을 버리심은 그의 목숨을 빼앗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버리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실 권세와 다시 얻으실 권세가 있다고 하십니다.

19-21절: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귀신들려 미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을 아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결코 미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3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의의 길로,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양이 미련한 것 같이 우리는 미련한 자일 뿐입니다. 주님께 우리를 주님의 지혜로 인도하여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양식을 먹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꼴만 먹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미련하고 힘이 없고 공격과 방어의 능력이 없는 자이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늘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Friday, April 20, 2012

"약할 때 강함이라" (고후 12:10)

"약할 때 강함이라" (고후 12:10)


성경구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노자(老子)는 그의 제자들에게 “연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게 얌체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습니다. 한 제자가 질문합니다. “사람들은 연약한 것보다 강한 것이 낫다고 하는데요?” 노자가 대답합니다. “강하면 쉽게 부러지나 연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세찬 바람이 불면 큰 나무는 뿌리째 뽑히지만, 연약한 갈대는 휘어질 뿐 부러지지 않는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쁘다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노자가 다시 대답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남의 미움을 받기 쉬우나, 어리석은 듯이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모두 좋아하느니라.” 그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합니다. “그렇군요.”

공자(孔子) 일행이 위(衛)나라에 들렸을 때, 위영공(衛靈公)이 공자에게 진법(陣法)--전쟁을 잘 하는 법--에 대하여 묻습니다. 공자는 자신은 인의 도덕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전쟁하는 법은 배운 것이 없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영공의 푸대접이 시작되고 그의 무도(無道)함에 실망하여 급히 위나라를 떠나 진(陣)나라로 갔는데, 그곳에서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는 자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곤경을 당합니다.
그 당시의 제후(諸侯)들은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과 정보를 얻는 댓가로 이들의 여비를 보조했고, 다른 유지들도 평소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여비를 보조하는 것으로 예(禮)를 표시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는데, 공자의 일행은 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공자의 제자 중 자로(子路)는 누구보다도 최고의 학문과 인품을 지닌 군자임을 자부하는 스승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토록 곤경에 빠지게 한 세태에 분개하여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군자 역시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합니다.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 그러나 소인은 곤궁하면 그릇된 일을 범하느니라.” 군자는 늘 곤궁하기 마련이지만, 소인과 다른 것은, 곤궁함에 처해서도 의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편)

위대한 문학가나 예술가의 삶을 보더라도, 그들의 생전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고통의 약함 속에 살다가 간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바울도 신약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주위에는 늘 많은 반대자가 있었고, 그의 복음은 동족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주님을 위한 삶은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과 핍박과 가난과 약함의 연속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세계 복음화의 큰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자고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혹은 더욱 연단시키시기 위하여 사단을 통하여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험을 주십니다. 사단의 시험으로(욥 1:6-12) 욥이 당한 고난이 그러하고, 다윗이 사단의 격동으로 인구조사함(대상 21:1)과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그의 낮아짐이 그러하고,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과정 중에,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의 사단의 시험이 또한 그렇습니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한 이 “육체의 가시”는 분명히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 떤 사람들은 이를 바울이 갖고 있던 육체의 병이라고 말합니다. 안질, 말라리아, 언어의 장애, 간질 등 다양하게 추정합니다. 또 다른 성경학자들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함, 그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방인의 사도가 된 후에도 계속 유대인 형제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로마인들에게 넘겨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바울의 가시가 무엇이냐?’ ‘그로써 그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나?’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바울이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는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육신이 약하고, 받은 바 은사와 능력이 적은 반면, 어떤 크리스천들은 부하고, 건강하고, 받은 은사와 능력이 많습니다.
또 믿 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데, 정작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은 일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이고 궁핍하게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로써 그의 고통을 참을 수 있으며 그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2-4절에서, “또한 그(=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음은,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가 벼리어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 온전하여집니다. 우기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는 때는, 내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이기보다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어부와 세리, 그밖에 세상의 눈으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12제자를 선택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미련함과 약함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보다 지혜롭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에 "No"로 응답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케 하시는데 이는 바로 우리가 연약할 때에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강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온전하다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그렇게 절실하게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을 바라보기보다는 자기의 온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머물고 나타납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 모든 일이 잘 되어나갈 때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 것 같은데, 성경 속의 예들에서와 실제 주변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더라도 그렇지 않음을 봅니다.
어려운 환경과 고통과 궁핍과 약함 가운데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기도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형편이 좋아지면 쉽게 간구함과 감사의 생활에서 떠남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간교함이요 약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강하심이 우리의 약함 가운데 나타나시니까 우리가 일부러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자청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과 형편과 위치에 놓여 있더라도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강하심을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