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 (요한 12:1-11)
1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위(魏)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이 준수하게 생겨서 임금인 위영공(衛靈公)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미자하를 찾아와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위나라 국법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임금의 허락 없이 사용한 사람은 발이 잘리우는 월형(刖刑)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자하는 다급한 나머지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갑니다.
뒤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은 미자하에 대하여, “효자로다. 어머니를 위해 다리가 잘리게 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니!” 하며 칭찬합니다.
하루는 임금을 모시고 과수원으로 갔습니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하나 집어서 먹는데, 하도 맛있어서 자기가 먹다가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셔보라고 올립니다.
그러자 임금은,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는구나. 제 입에 넣었던 것도 잊고 나에게 주니!” 하고 그의 임금 위하는 마음에 감탄합니다.
그 뒤 미자하의 얼굴이 거칠어지자 임금의 사랑이 식어지고 그가 죄를 얻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미자하를 보고 말하기를, “이놈은 일찍이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내 수레를 탄 일이 있었고, 또 지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내게 먹게 한 일까지 있었다.”고 욕합니다.
미자하의 행동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칭찬 받던 일이 죄를 얻게끔 된 것은 미묘한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미움의 변화 때문인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에 드는 동안은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아 더욱 친하게 되지만, 한번 임금에게 밉게 보이게 되자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게 되어 더욱 멀어진 것입니다(「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출전...회남자 인간훈편)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옹지마는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란 뜻입니다.
국경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이 기르던 말이 이웃 나라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별로 낙담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복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리요?” 몇 달이 지나자 노인의 말이 이웃 나라의 준마들을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노인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렇게 크게 기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재앙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리요?”
노인의 집에는 좋은 말들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어느 날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절름발이가 된 아들을 불쌍히 여긴 이웃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별로 좌절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리요?”
일년쯤 지나자 이웃나라가 국경을 침입해 들어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건장한 청년들을 병사로 징병하고 이들은 전장터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불구라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크게 좋아할 것도 없고 또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나에게 주어진 여건들은 다만 환경일 따름입니다.
나의 앞에 주어진 환경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환경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요 믿음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감사함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2
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예수님의 사역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신 것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기 전 이제까지 하시던 습관입니다.
11장에서 본 바대로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에 그를 죽이고자 음모하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동네로 가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의 때가 되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입니다.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 남매가 사는 곳입니다.
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장소에 관하여는 마태복음(26:6-13)과 마가복음(14:3-9)에는 베다니이긴 한데 문둥이인 시몬의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7:36-50)에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한 것으로 보아 마르다와 마리와 나사로의 집이라고 짐작케 합니다.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나드는 인도산 식물에서 짠 비싼 향유입니다.
재리(財利)에 밝은 가룟 유다의 계산으로는 300 데나리온입니다. 300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300일 품삯입니다. 요즘 가치로 따지자면, 2만 5천 불에서 3만 불 가량 되는 액수입니다.
나드향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옥합을 밀봉하는데 옥합은 부드러운 석고 종류로 만들었습니다. 이 나드향을 담은 옥합의 가치도 꽤나 비싼 것인데, 향기로운 나드를 가장 가치있게 한 번에 사용하기 위하여는 이를 깨뜨려야만 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라고 했습니다.
그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발은 사람의 신체 중에 가장 낮은 부분이요 머리와 머리털은 가장 고상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대야에 물을 떠놓고 손님이 씻게 하든지, 귀한 손님일 경우에는 노비를 시켜서 발을 씻기게 하였는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물이 아닌 나드 향으로, 자기의 손이 아닌 머리털로 씻김은 예수님을 얼마나 극진하게 대접하고 자신을 철저히 예수님의 발 앞에 낮추었다는 것입니다.
4-6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가장 똑똑하고 재리(財利)에 밝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마리아를 책망하여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의중이 다른 데 있으면서, 그의 주님인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이렇게 책망함은 저가 도적인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7-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의도도 아시고 가룟 유다의 의도도 아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극진하게 해드림은 그의 장사할 날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실 것을 알고 그렇게 준비한 것은 아닐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하는 일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의도를 아시지만,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서 가룟 유다의 의도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지적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너의 생각이라면 그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9-11절: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있는 유대인들--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베푸신 것도,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눈에 뵈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으로, 그가 살리신 나사로도 함께 죽여서, ‘나사렛 예수 이단’을 멸하겠다는 공명심만이 있습니다.
3
중국 공산치하에서 오랜동안 옥중세월을 경험한 중국의 위대한 성자 워치만-니(니토수엥)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우리 속사람이 온전히 활동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심과 아집덩어리인 겉사람--곧 자아(自我)가 깨어져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자아가 여전히 살아서 나를 지배하고 주장하고 인도하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역사할 공간을 잃고 우리 안에서 잠잠하십니다.
자아(自我)가 깨어짐은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는 작업입니다.
자아가 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아가 깨어질 때 겸손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소 나의 영의 귀를 통해서 내 심령에 들려집니다. 워치만-니는 이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는 것을 순전한 나드향이 든 옥합을 깨뜨리는 일에 비유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겉에 보이는 이 옥합이 귀한 것으로 여겨 이 옥합을 깨기를 주저하는데 이 옥합이 깨어져야만 그 안에 있는 나드향을 주님의 용도대로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옥합보다 더 귀한 나드 향을, 여자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머리털에 적셔서 예수님의 발을 씻긴 마리아의 사랑을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주님께 보일 수 있습니다.
질그릇같이 보잘것없는 우리 겉사람의 자아가 깨어질 때 비로소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항아리안에 감추어두었던 횃불과 같은 성령의 빛이 우리를 비추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고린도후서 4장 6-7절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추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성령의 빛)를 질그릇(=겉사람)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나드 향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긴 마리아의 낮아짐과 헌신이 우리 삶 가운데서도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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