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5:22)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5:22)


성경구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자녀를 키우다 보면,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습니다. 순종하는 아이가 단지 아버지가 무서워서 순종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리 기쁜 일이 아닐 것이지만,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대견하고 기쁜 일입니다. 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함에서 나온 순종이라면 하나님은 이를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십니다.

인류역사의 비극은 불순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해서 엄격하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기만 하였다면, 낙원에서 쫓겨나는 안타까움과 따라서 영원한 삶을 상실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심이 어떤 연유입니까?
이 사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하였을 때(삼상 8:4-7)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요청을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마음에는 신정정치 대신에 왕정정치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섭섭함을 갖고 계셨지만 말입니다. 어떠한 연유에서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시고 그를 왕으로 삼으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삼상 10:1). 그러나, 그가 기름 부으시고 왕으로 삼으신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1-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다윗을 세우시고 그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심은 다윗이 사울보다 더 윤리적이고 외적 조건이 뛰어난 까닭이 아닙니다. 다윗의 심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기뻐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입니다. 순종은 ‘믿음 이전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하란을 출발한 지도 십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그의 마음에 원망이 생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밤하늘의 뭇 별들을 가리키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실 때,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은 것이 사라 뿐이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생각만으로 본다면 이 말씀이 도무지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믿음이전의 믿음’--순종함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는데요.’ ‘우리 주위에 저처럼 나이 들어서 아이를 가진 사람이 없는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순종함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이 (후손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순종함으로) 믿었으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마침내 그의 나이 백 세 때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주저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이 일을 의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했다면, 사라의 성격상 그대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고뇌와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 줄 알았겠습니까? ‘나의 믿음이 어떤지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야.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흉내만 내면 되는거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인가 중지시키실꺼야.’ 이런 계획된 짜임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다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흘길을 행하여 모리아산에 이르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다른 것은 다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할 때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의 결정체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가르쳐주신 대답도 아닌데 그의 순종이 그로하여금 극한 감동을 주는 믿음의 대답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또한 부활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도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한 상충(conflict)인데 아브라함은 이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보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의 모순을 몰랐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증언합니다.
경수가 끊긴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구십세와 그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아들을 번제물로 취하신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약을 이루실 분이심을 순종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의 고백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감동시키셨겠습니까? 요즈음도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창세기 22장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극박한 목소리로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심과 만족하심이 이 말씀 가운데 가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순종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시는 순종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로 알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8-1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이름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6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에게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시며, 구원하시고, 그의 이름을 높이실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나는 이적을 행하기보다는 순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입니까?
우리에게 제사보다 나은 순종이 있어야 할 것이며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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