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25, 2014

“누가 나의 경쟁상대인가?” (고전 9:24-27)

“누가 나의 경쟁상대인가?” (고전 9:24-27)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류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冕旒冠)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向方)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1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 가운데 흥행에 크게 성공한 로키(Rocky)란 영화가 있습니다. 실베스타 스텔론(Silvester Stellone)이 주연한 것으로서 실존인물인 권투선수 로키 마르시아노(Rocky Marciano)를 영화한 것으로서 흥행에 대성공하자 시리즈로 계속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링에서 싸우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실전(實戰)을 준비하기 위해 한 복서(boxer)가 어떻게 훈련을 쌓아가나 보는 것도 상당한 흥미꺼리입니다. 실전(實戰)에서의 승패가 이 훈련과정에서 이미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표면의 화려한 각광(脚光)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숨은 피와 땀은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적인 선수가 되지만 그들이 잠시라도 연습을 게을리하면 그들의 영광(榮光)은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쌓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데 조금 쌓아놓은 믿음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어떻게 쌓아갑니까? ‘상급을 얻을만한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들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입을 여는 증거들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랑의 삶들입니다.

하루 아침에 마음만 먹으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impossible)입니다.
자기를 이기는 극기(克己)의 훈련이 없어도 요행히 한두 번은 (조그마한)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행일뿐이며 횟수가 거듭될수록 훈련의 진가(眞價)가 발휘됩니다.

믿음의 훈련이 없어도 사람들 앞에 ‘믿음의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그렇게 보일뿐입니다. 설령 일주일에 한번 볼까 말까 하는 사람들 앞에는 ‘믿음의 사람’으로 비춰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과정’을 누누히 운동경기와 이를 위한 훈련에 비유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8절에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연습하다’(exercise, train)란 말은 스포츠 용어입니다(굼나조, γυμνάζω→gymnasium).
크리스천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피와 땀을 흘리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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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에서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고린도 지방에서는 올림픽(Olympic) 경기에 버금가게 큰 이스미안(Isthmian) 경기가 매 2년마다 열렸다고 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이밖에도 투사들(gladiators)의 싸움 등 여러 운동경기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울은 운동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승리를 위한 훈련과 상 얻기를 위하여 경주하는 모습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합니다.

올림픽 경기의 정신이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패자(敗者)를 위로하는 말일뿐입니다. 특별히, 훈련을 많이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역부족(力不足)이라 메달권에 들지 못한 선수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메달(medal)에 대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여져서 한국에서는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연금을 지급한다,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선수에게는 금일봉을 하사한다고 난리들이며, 미국과 같이 메달을 독식(獨食)하다시피 하는 나라에서도 프로농구스타들을 내보내기도 합니다.
어떤 경기에 참가하기 위하여 극한의 훈련을 감수하는 선수는, 할 수만 있으면, 실전(實戰)에서, 입상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경기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동양선수가 우승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의 경주에서는 역부족이라 메달을 못타는 경우는 없습니다.

24절에서 바울이 비교한 세상의 경기와 크리스천의 경기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양쪽 경기 모두 경주하는 선수들은 상얻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훈련을 쌓아오고 경기에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 경쟁하기를 원하는 선수들이라면 처음부터 ‘참가하는데 의의’를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점은, 세상의 경기에서는 상을 얻기 위한 경쟁상대가 다른 선수들이지만, 크리스천의 경기에서는 경쟁상대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입니다. 정과 욕으로 가득 채워진 자신의 겉사람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얻습니다.

몇 년 신앙생활을 한 후에도, ‘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滿足)하지 상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며 바른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한 탓입니다.
그것은 마치 현재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자체로 만족하지 내가 아무리 멸시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가운데 영원히 살아도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상 얻기를 위하여 극기하고 열심히 겸손과 순종의 믿음 훈련을 하였는데 상을 못 얻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달란트와 그 경영(經營)에 따라서 우리를 판단하시고 상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한 매일 매일의 훈련을 쌓아가서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권투경기를 며칠 앞둔 권투선수는 그가 결혼한 사람이라면 아내와 분방(分房)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즐기던 술도 일체 하지 않고 충분한 연습과 최상의 컨디션(condition)을 유지하는데만 전념(專念)합니다. 이는 그의 모든 힘을 축적(蓄積)하여 시합날 혼신(渾身)을 30-40분에 다 쏟아붓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합을 며칠 앞두고 모든 일에 자기를 절제(節制)하는 것은 이제까지 피땀 흘려 준비해온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고 결실을 맺어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자 함입니다. 만일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절제(節制)하지 못한다면 몇 달의 그의 수고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경주(競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도 이와같이 모든 일에 ‘항상’ 절제하는 삶을 살 것은 그가 사모하는 면류관--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자 하는 바울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신앙고백했습니다.

25절에서 세상경기에 참가하는 사람과 크리스천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세상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이나 크리스천의 경주에 참가하는 사람이나 이기기를 다투어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점은, 세상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은 곧 시들어버리고 그 영광도 잊혀질 것이지만, 선한 경주에서 이긴 크리스천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이며 그 영광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영히 계속될 것입니다.

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向方)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虛空)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선한 경주를 위하여 훈련하고 실전에 임하되 나의 하는 일이 무엇이며 나아가는 방향(方向)이 어디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임의(任意)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형편없는 권투선수가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듯 허공을 칠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했습니다.
크리스천의 경기를 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경기할 것입니다.
자신의 흥에 겨워 자신을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위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경기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규정대로 신앙생활을 하여 주위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여 주시기에 감사와 기쁨이 샘솟는 크리스천의 경주를 하여야 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26절을 번역할 때, “그러므로 나는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목적(目的)을 갖고 목표(目標)를 향해 ‘똑바로’ 달려갑니다. 나는 승리하기 위해 싸웁니다. 나는 다만 동작으로만 싸우거나 주위만 맴돌지 않습니다. (So I run straight to the goal with purpose in every step. I fight to win. I'm not just shadow-boxing or playing around.)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훈련과 삶 하나 하나가 의미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ὑπωπιάζω μου τὸ σώμα καὶ δουλαγωγώ)--원문을 직역(直譯)하면, “내가 나의 몸을 심하게 다루어서 종으로 삼음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은 변화를 받고 상을 얻게 되었는데 바울 자신은 정과 욕심에 빠져 상을 잃어버릴 경우가 있을까 두려워함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서 그도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상을 얻는 자가 될 것이며 썩지 않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자가 되고자 함입니다.

3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상을 받을지 모르며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을지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지식이 없습니까?
지식은 있습니다.
갓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어떻게 상과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지 압니다.

믿는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의 선한 경주에 참가한 사람이며 이를 위한 훈련을 쌓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과 면류관을 바라보는 마음이며, 이를 위한 실천입니다.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한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모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데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요행 수로 경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경주는 요행으로도 한두 번 승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심판관(審判官)이신 경주에서는 요행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뜻을 세우고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은 남을 이기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기를 이기기가 어려워서인 까닭입니다. 노자(老子)도 “자기를 이기는 것을 (가장) 강한 것으로 한다.”고 했는데, 크리스천의 경주에서 우리의 경쟁상대는 바로 우리 자신이며 태만(怠慢)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집고 사단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우리를 방해(妨害)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나라의 상급과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철저한 믿음의 훈련을 쌓아나가며 선한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여, 얻기를 사모하는 것들을 마침내 얻는 자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 증거자로서 바울의 상과 자세” (고전 9:15-23)

“복음 증거자로서 바울의 상과 자세” (고전 9:15-23)
           
 
  9: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1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많은 축복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때’(time to die)를 알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 것임을 안다면, 그렇지 않아도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더해져서, 그렇지 않아도 현재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예 손을 놓고 지낼 것입니다.

중한 병에 걸려 자신이 ‘언제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알게 된 사람은 아무리 세상을 열심히 살았다고 할지라도 조금쯤은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後悔)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할 일을 늘 미루고 산 사람들은 더 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껄껄껄...’ 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진작 이것을 했을껄...’
‘좀더 자식들을 사랑했을껄....’
‘교회생활을 좀 더 열심히 잘했을껄....’
많은 후회들 가운데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상당히 클 것입니다.

류시화씨는 그의 인도기행문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그가 어떻게 인도여행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나 적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인도여행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생 시절 그와 같은 연극부에 있던 한 학생의 제안으로 시작됩니다. 그 이후 인도여행에 관심은 있었는데 계속 미루어오다가 한 영화를 보고는 곧 인도여행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 이후 그는 십년간 열 차례에 걸쳐서 인도 등지를 여행합니다.

그가 본 영화의 내용입니다:
폴란드의 한 유태인 마을에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자식을 키우고, 가축을 돌봅니다.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된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죽기 전에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올해는 꼭 성지순례를 다녀와야지. 더 나이먹기 전에 다녀와야겠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번에 우리 집 소가 새끼를 낳으면 가야지. 소가 배가 잔뜩 불러있으니 떠날 수가 있어야지.” “난 신고 갈 마땅한 구두가 없어. 구두만 사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곧 떠날거야.” “난 노래를 부르면서 성지순례를 가고 싶은데 기타 줄이 끊어졌단 말이야. 기타 줄만 고치면 떠날거야.”
그러한 이유들을 대면서 사람들은 성지순례를 떠나지 않습니다.
얼마 후 마을에 독일군이 쳐들어왔고, 마을의 유태인들은 모두 집단 수용소로 강제로 끌려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침내 발가벗기운 채 가스실로 향하게 되고 마지막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 집 소가 계속 새끼를 낳았는데도 난 성지 순례를 떠나지 않았어. 그때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도 난 가지 않았어.”
“난 구두가 없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어. 고무신을 신고서도 갈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난 기타 핑계를 댔지. 기타줄이 없으면 성지 순례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지. 그냥 노래만 부르면서도 갈 수 있었는데...”
그들은 입을 모읍니다: “그때 갔어야 하는 건데! 이미 때는 늦었어!”
그들의 말처럼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이른 곳은 성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스실인 것입니다.

‘미룸의 병’이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미룸의 병’이 우리로 하나님의 복음 증거자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나의 배우자가, 나의 부모가, 나의 자녀가, 나의 형제·자매가, 나의 이웃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지 않았는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은 내게 있는데 미룹니다.
‘시기가 적당치 않아. 다음에 하지.’
‘아니야. 지금도 아니야.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때 하지’ 하며 자꾸만 미루어 갑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끝내 ‘껄껄껄...’ 하면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미룸’을 심어놓아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미루다가 할 수 없게 만들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골로새 교회, 그리고 요한의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들--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 모두 현재의 터-키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리만 남아있을뿐 교회는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이어 그토록 축복해주신 그리스도의 교회의 땅 터-키는 모슬렘 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사수(死守)하는 데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장 4-5절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이를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들이 그리스도로 향한 뜨거운 처음 사랑을 버리고도, 회개치 아니하며,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게을리 하며 미루어 나갈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맡기셨던 복음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거두어 가실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를 없이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의지가 있기는 한데 미루거나 주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이것도 불신앙의 마음입니다만, 현재 하고있는 다른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같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수업을 들으며, 자격시험(qualifying exams)을 준비하며, 논문을 쓰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 감당함은 조금 뒤로 미루어 놓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을 따로 주십니다.
이것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얻을 것이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얻지 못합니다.
바울의 위대성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미루지 않았을 뿐아니라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2
15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로부터 생활보장을 받을 권한이 있으나 이를 요구하지 않았고 또 지금 이 글을 씀도 그것을 해달라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라도 고린도 교회에 이를 요구하지 않음으로 그의 자랑거리가 헛된 오해를 받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고전 2:2; 갈 6:14)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생활비를 보장해줄 의사가 없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의 생활비를 요구할 때, 그들은 아마도 ‘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팔아서 밥벌이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구나’고 하는 헛된 말을 할 것이기에,  바울은 굶어죽을지언정 그리 하지 않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말씀한 것은 전도자나 목회자가 복음 증거를 밥벌이 수단으로 사용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생활보장 방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不得不)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밥벌이를 위한 수단도 아니요,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함도 아니요, 바울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감당하여야 할 임무(duty 혹은 mission)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이는 ‘복음 전함’이 바울을 비롯한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감당하여야 할 지상(至上)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그의 제자들과 우리에게 한 가지 예언적 명령을 하셨는데 곧,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의 일이 아닙니다.
만일 이 일을 게을리 할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하나님의 나무라심이 그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17절에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 말씀합니다.
설교를 맡은 목사님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 자신도 설교 준비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지만, 목사님이 교인들과 불화하여서 설교를 하고싶은 의욕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설교의 일은 그 목사님의 직임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이 복음 전함을 자원함으로 감당할 때, 이는 그에게 기쁨이 되고 복음 증거의 열매를 통하여 커다란 상이 그에게 임할 것이지만, 복음을 전할 의욕이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복음 증거는 바울 뿐아니라 (복음 증거의 직분을 맡은) 모든 믿는 사람의 임무입니다.

18절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복음 증거자로서 바울의 상이 무엇입니까?
이 지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대가(代價)를 바라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 증거자에게 마련해놓으신 하나님의 생활보장의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한 이것이 상(賞)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되 지상에서 대가가 지불되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은 후에 더욱 더 커다란 상급으로 칭찬하실 것입니다.

제가 평신도로서 감당한 학원사역(Campus Ministry)의 일과 교회에서의 봉사가 목사로서 현재 감당하고 있는 일의 양만큼 되었습니다. 현재의 일은 목사로서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목회자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부담이 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고 또 그 수고의 대가가 지불되는 것이기에 하늘의 상이 덜한 일이지만, 평신도로서의 학원사역은 수고의 대가가 지불된 것이 아니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원함으로 한 일이기에 기쁨이 더 컸고 보람이 더 하였습니다.
나는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수고의 대가를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덜 감당해도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복음 증거의 일과 다른 하나님의 일을 찾아서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19절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그리스도 안의 자유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그의 자유함까지도 포기하고자 합니다.

20-22절에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들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증거자로서 바울의 유연성(柔軟性: flexibility)입니다.
그가 복음증거를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이 ‘목숨을 내걸어야 할 사안’이 아닐 때, 바울은 이 비본질적인 것인 위한 그의 자유를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육체 가운데 자랑할 것이 많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요 원칙론자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6절에서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자신을 피력합니다. 따라서, 그의 사역의 초기에는 그의 원리원칙과 열심에 부합되지 못하는 바나바의 조카 마가의 부족함을 용납할 수 없어서, 2차 전도여행 때에도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돌아섰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더욱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바울은 그의 모든 생각과 주장과 원칙과 비본질적인 자유까지도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해서 버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 21절이하에 나오는 유대인의 결례(潔禮)를 행하는 일이 바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그 일을 행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지만 율법의 말씀대로 살고자 함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그들의 모습대로 받아줍니다. 이는, 바울의 생의 긍국적인 목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로 말미암아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함에 있는 까닭입니다.

23절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이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만 있다면 바울은 무엇이든지 감당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것이 그의 자유와 지식을 포기하고 사랑을 따라 행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이들과 함께 복음에 참예하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는 축복과 영원한 생명에 참예하기를 원합니다.

3
교회를 다닌지 오래된 사람들로서 우리는 지나고 나서 ‘껄껄껄...’하는 후회함이 많은 삶을 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식만을 따른 삶을 살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기회가 많은 것같지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 때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의 원칙과 자유를 조금 포기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일일 때 사랑을 따라 행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