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4, 2015

“바울의 진면목(眞面目)” (고린도후서 10:7-11)

         “바울의 진면목(眞面目)” (고린도후서 10:7-11)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1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흔히 그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함은 그 사람의 생김새뿐 아니라 그의 외적 조건--인물, 학벌, 집안, 배경, 연령, 성별, 인종 등--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외모가 괜찮으면 그의 속과는 상관없이 후한 점수를 주고, 외모가 미달되면 박한 점수를 줍니다. 여기에서 편견이 생기고 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국 제나라에 안자(晏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키가 매우 작고 인물도 매우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자의 슬기로움과 당당함을 잘 알고 있던 제나라 왕은 그에게 초나라의 사신으로 갈 것을 당부합니다. 이에 안자는 초나라로 떠납니다. 안자가 초나라의 왕궁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군졸들과 왕실 관리들은 그의 볼품없는 모습을 보고 조롱을 해댑니다. “제나라에 인물이 오죽이나 없으면 저렇게 작고 못난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단 말이냐?” 군졸들은 이에 지나쳐서 제나라의 사신인 안자에게 대궐 정문이 아닌 작은 쪽문으로 인도하고는 이곳을 통해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자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말합니다. “이 나라는 개나라인가? 아니면 초나라인가? 나는 초나라에 왔지 개나라에 오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에 여기가 개나라라면 나는 할 수 없이 이 개구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나 나는 초나라에 왔다.” 그의 당당함에 당황한 군졸들과 관리들은 황급히 그를 정문으로 정중하게 안내합니다. 안자는 굿굿하게 대궐 정문을 통하여 들어가 초나라 왕을 만나고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안자춘추(晏子春秋)》
공자(孔子)는 그 당시 안자(晏子)보다 삼십 세 가량 나이가 위였으나 그를 높이 평하면서 후생가외(後生可畏)--후생(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이)을 두려워할 만 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논어(論語)》「자한(子罕)편」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그의 군사(軍師)로 얻은 인물이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제갈량 공명이요 다른 한 사람은 방통이라고도 하는 봉추입니다. 이들을 얻기 전에 유비가 만났던 수경선생은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평안케 할 수 있으리라’고 두 사람의 출중한 인물됨을 평하였습니다. 유비는 그 뛰어난 인물 두 사람을 모두 얻었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면서까지 얻은 재갈공명은 과연 그 외모부터 준수하고 수려하여 그의 수고가 보람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대면(對面)한 방통의 외모는 일찍이 들은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매우 못생기고 꾀죄죄하게 보여서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는 수경선생의 인물평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방통을 홀대하여 뇌양현(耒陽縣)이라고 하는 작은 고을의 현령으로 삼습니다. 그것도 크게 호의를 베푼 것처럼 그렇게 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 부재중이던 재갈량의 강력한 추천으로 그를 부군사(副軍師)로 불러들입니다. 유비의 방통에 대한 편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고 그의 제안은 어쩐지 재갈량의 제안보다 못한 것 같고 미덥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에 봉추는 이러한 편견 속에 자기의 역량을 십분발휘하지 못하다가 그의 운명을 낙봉파라고 하는 한 고개에서 마감합니다. 그의 명이 거기에서 다할 것임을 그가 알았지만 오기(傲氣)로 낙봉파를 넘다가 죽는 신세가 됩니다.
유비가 덕이 많은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방통을 외모로 평가한 그의 오류가 재갈량과 방통을 양손에 얻고도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 요인이 됩니다. 방통의 실수는 자기를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호기를 부렸기에 종국에 그의 능력의 결실을 제대로 얻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불순종하는 사울에게서 떠났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불러서 사울을 이을 이스라엘의 한 왕을 예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보냅니다(삼상 16:1-13).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그곳 장로들과 함께 암송아지를 잡고 제사를 베풀고 그 자리에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청합니다. 그가 이새의 첫 번째 아들 아비나답을 보니 그 용모가 수려하여 속으로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기름 부으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짐작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 이새의 아들이 일곱 명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 왕을 택하지 않으시고, 양을 지키느라고 그 자리에 없었던 여덟째 아들 다윗을 불러오게 하시고 아직 소년이던 그에게 기름부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영화나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얼굴은 빼어난 용모를 갖고 계시나 그 또한 외모를 중시여기는 우리 인간들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고난당하실 예수님을 예표하는 이사야서 53장의 서술은 우리들의 예감에 반합니다.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3-5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외모가 변변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외경 바울행전(Acts of Paul, 3)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두 눈썹은 일자이고, 코는 갈고리 모양으로 휘었고, 두 다리는 안장다리입니다. 게다가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눈꼽이 자주 낍니다. 말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행전 17:18 참조) 그렇게 설득력이 강하다거나 힘이 있지는 못한 듯 합니다(고후 11:8 참조). 바울을 뒤이어 웅변가였던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얼마동안 사역하였던 터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 대조는 더욱 뚜렸합니다. 바울의 당시 나이가 예순을 전후한 때이라 육체적으로도 쇠약합니다. 그의 외적 조건은 반대자들이 선동하는 대로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삼으신 것은 외모를 보신 까닭이 아니라 그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열정과 순종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도의 권위는 반대자들의 부추김대로 외적인 모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도로 세우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되어진 힘입니다.

 
                                                                                          2
7절에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육체 안에서 육체의 모양을 보며 육체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중심을 보아 사람을 살피는 대신에 겉에 나타난 외모와 그 사람의 말을 갖고 사람을 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사는 큰 오류요 편견입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화려한 것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단은 우리 믿는 사람들도 그러한 외양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미혹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여전히 외모만 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는 그를 비방할 때 외모만 변변치 못한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사람들의 방법대로 교인들을 속이기까지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모금이 더디고 지체되는 이유들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반대자들이 ‘너희들이 모금하는 돈은 결국 바울과 그 일행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인데 바울이 너희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속이고 있다’고 그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바울을 외모로 평가한 반대자들은 바울이 크리스천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사욕이 많고 추잡한 협잡군처럼 매도(罵倒)되어졌습니다.

바울은 반대자들과 이에 현혹되어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강한 말로서 징책하는 대신에 그들의 이성에 호소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위한 열심이 있느냐?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인 줄로 믿어달라’는 당부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의 정상적인 판단이 됩니다.
 
8절에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면목입니다. 바울은 그를 비방하는 반대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무리로 인하여서 그 마음에 번민함이 참으로 컸습니다. 하기에 때로는 편지로서 때로는 대면함으로서 그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합니다(고전 4:21, 고후 13:2 참고). 그러나 이와 같은 강한 어조의 편지조차도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무너뜨려 내리려는 의도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을 잘못에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그저 빈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세우려는 나의 의도를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씀합니다. 나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고통과 번민 중에 있는 내 속을 들여다보시더라도 이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목회자의 심정이 때로는 분한 마음이 들고 때로는 야속하더라도 그 반대자를 무너뜨려 내리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이 아님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비방이 정도를 넘어가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무너뜨려 내리시는 예를 가끔 보지만, 목회자는 짐짓 분내며 짐짓 야단치나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맡기신 일은 하나님께서 의탁하신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커다란 교회에서 최근에 십여 명의 장로들을 무더기로 징계하여 교회에서 내어 몰았습니다. 출교(出校)당한 장로들이 커다란 잘못이 있었는지 속사정이야 밖에서 듣는 사람은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문지상에 밝혀진 장로들의 교회에 대한 요구는, 담임목사의 아들이 스포츠신문사를 운영하는 자금 중에 상당부분이 교회의 성도들이 헌금한 것 중에 일부인 것이 확실한 데 이를 해명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담임목사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신본주의를 앞세워 그들을 인본주의자로 몰아서 출교처분을 내린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전혀 헌금을 임의로 유용한 적이 없고, 그 장로님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징계는 극단의 것이 되지 말아야 했음을 바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9절에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그를 대면할 때 볼 수 있는 그의 약한 모습은--그리스도와 온유와 관용이 나타난--볼 수 없기에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우리를 매로 대하겠다고 했는데, 그냥 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더욱이 그의 편지들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옳고 그에 대한 반박을 제기할 수가 없는데 하고 두렵고 놀라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레 겁을 먹는 사람들을 위하여 바울은 그의 강하고 힘이 있는 편지가 그들을 놀라게 하고 위축 들게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썼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씀을 강하게 선포할 때 교인들을 겁주고 넘어뜨리는 설교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교도 사실은 성도를 넘어뜨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고자 함임을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알아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미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가들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의 설교의 중심 테마는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이었습니다.
그는 웅변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설교원고를 읽어내려갈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중하고 담대하기에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임박한 것같이 느껴져서 그 자리에서 생생한 두려움에 감싸이게 되어 눈물을 흘리거나 의자나 기둥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 교인들에게 불신임 결의를 받고(세례 받는 자들의 공개적 신앙고백 문제) 외할아버지(Solomon Stoddard)의 뒤를 이어서 23년 목회하였던(1727-1750년: 2년은 부목사로, 21년은 담임목사로) 노쓰햄톤(Northhampton) 교회를 떠나게 되고 스탁브리지(Stockbridge) 인디안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여러 편의 신학논문들을 발표합니다. 그의 논문들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는 뉴저지 칼리지(New Jersey College, 후에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로 학교명이 변경됨)의 총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비록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인해 단명한 총장이 되었지만).

교인들의 불신임을 받고 그가 사랑하던 교회를 떠나게 된 조나단 에드워즈였지만, 강하게 설교한 그가 바란 것은 교인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 이것이 바른 목회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10절에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1절에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바울”은 반대자들의 바울을 향한 비난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함께 10절이 그들의 비난입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반대자들의 비방이지 실제로는 ‘바울의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함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써 사도행전 14장 12절에 기록된 대로 루스드라 지방의 전도 때 그곳 사람들을 바울을 변론의 신인 허메(Hermes)라고 부른 것을 듭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을 조리있고 웅변적으로 잘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반대자들의 주장에 강하게 반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실제로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봐와 같이 그가 하찮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말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1절 후반부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기 때문에 바울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그의 모습이 약하고, 하찮고, 말이 시원치 않은 듯이 보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떠나 있을 때 강하고 담대한 글로써 그들을 나무라고 경고하는 것이 그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파하려고 그렇게 담대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바울이 사랑의 마음으로 쓴 것임을 알 때, 대면할 때에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도 바울이 우유부단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주장할 바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용납하고 세우기 위한 까닭임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모습으로 대한다고 해서 부모님이 모자라서, 아무 것도 모르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 아이를 향하여서 표정을 바꾸면서 야단친다고 해서, 매를 들고 심하게 때리기까지 한다고 해서 부모님에게 사랑과 긍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3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사도로써, 목회자로써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도로써 바울에게 그를 인간의 주장과 생각과 이론으로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징계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한은 그의 외모에서, 외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를 사도 삼으신 하나님의 능력과 위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사도로서의 권한을 성도들(반대자들을 포함하여)을 넘어뜨리는 데 사용하기를 원치 아니하며 하나님 앞에 바르고 순전한 자로 세우기를 원한다고 역설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목회자 또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되, 잘못되어 있는 교인에 대한 강한 어조조차도 자기의 감정을 쏟아 부어서 그를 넘어뜨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리스도의 긍휼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와 반목하거나 그의 강한 권고에 섭섭해하거나 등을 돌릴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심중을 헤아려서 더욱 믿고 의지하며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고린도후서 10:1-6)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고린도후서 10:1-6)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强力)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1
필립 얀시(Philip Yancey, 1949-)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The Jesus I Never Knew)」라는 책에서 그가 어릴 때 유년주일학교시절로부터, 혹은 그의 머리 속에 막연하게 떠올리던 그가 ‘알고 있던 예수님’은 어린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미스터 로저스(Mr. Rogers)처럼 늘 친절하고 위안이 되며 날카로운 면이라고는 전혀 없는, 항상 유순하고 어떠한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러한 분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반복하여 읽으면서 그는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던 예수님과는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어린아이들을 향하여서 팔을 내미시고 잔잔한 미소를 띄고 계신 예수님,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한없는 연민의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서 준엄하게 노를 발하시는 예수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시며 방금 전에 그의 믿음의 고백을 칭찬하신 베드로를 향하여 얼굴 표정을 바꾸시며 나무라시는 예수님;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그들에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심한 진노로 꾸짖으시는 예수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며 피땀을 흘리시고 번민하시며 세 번씩이나 기도하시는 예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상에서 울부짖으시는 예수님 등등--이러한 장면들은 우리가 이제까지 마음속에 그리던 부드럽고 자애하시며 잔잔한 미소를 띄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기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간과하고 지나가던 예수님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예수님의 모습들이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삶입니다. 어떤 것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늘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그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지 않기로 작정한’ 예수님의 모습들을 쉽게 담을 수 없음이 문제입니다. ‘나의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셔야 돼’라고 하며 자기의 생각에 합당한 예수님을 만들어 놓은 사람은 또한 ‘목회자는 이래야돼.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 자기의 생각과 이론대로 목회자상을 그려 놓고 목회자가 자기의 생각과 주장에 반할 때 서슴지 않고 그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장로님은 아들들의 진로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큰 애는 학교성적도 좋고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도 할 정도로 언변이 좋으니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법과대학원(Law School)에 진학시켜서 변호사(lawyer)가 되게 하여야겠다고 하고, 대학 2학년인 둘째 아들은 공부는 썩 잘하는데 내성적이니 의과대학원(Medical School)을 보내어 의사(medical doctor)가 되게 하여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셋째는 형들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특별한 재주가 없으니 신학교에나 보내서 목사나 시켜야겠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부아가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장로님, 예배나 보죠“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됨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림은 귀한 일이겠느냐는 풍자(諷刺)입니다.

어느 장로님에게 믿음이 좋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공부를 잘하여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에 진학하고 어느덧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아버지 장로님께 전화를 걸어 자기의 뜻을 말씀드립니다. 그랬더니, 칭찬해줄 줄 알았던 장로님은 칭찬은커녕 펄쩍 뛰며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아들은 그 즉시로 장로님을 만나러 집으로 향합니다. “아버지, 저는 신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리면 교회 장로님이신 아버지께서 제일 기뻐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반대하세요?” “아, 이 녀석아, 네가 그렇게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는데 신학교는 웬 신학교냐? 대학원에 진학하든지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해라.” 그러나, 아들이 끝까지 주장함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장로님의 반대함과 주저함은 육체를 따라 육체대로 행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린다 하면서도 막상 똑똑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림이 왠지 아깝고 아쉬운 마음이 든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목회자와 교인들 혹은 교인들간의 관계가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또한 관계가 좋지 않을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대인관계가 항상 좋으면 참으로 복된 일일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있음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연단이십니다. 관계가 좋을 때의 처신보다는 오히려 관계가 좋지 않을 때의 처신이 우리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 앞에 보이는 기회가 됩니다.
목회자들 중에 교인들과의 불화하는 관계로 인하여서 상처를 받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의 하는 일들이 사사건건 반대에 부딪칩니다. 전에는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던 집사님까지 반대자들과 힘을 합하여 강력한 목소리를 냅니다. 전에는 그의 사랑의 권면을 고마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목사라고 비난합니다. 전에는 목사님의 청빈한 삶이 좋다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목사가 주변머리가 없다고 비난합니다. 비난을 하려면 비난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에 좋게 여겼던 일들도 비난거리가 되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 간에--목회자와 교인들, 혹은 교인들 간에 틈이 생길 때 누가 신나 합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이때 사단은 양측을 이간질하기를 즐깁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혹은 어느 한 편을 자기의 진영에 끌어들여서 교회를 세상사람들의 육체대로 주장하고 싸우는 장소로 만들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간에, 목회자와 교인(들)간에 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에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반대편을 말로써 당을 지어 공격하는 대신에 말을 아끼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 욕을 퍼부으며 상대방의 약점을 침소봉대하여 공격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일인데, 만일 이미 쏟아 부었다면 화해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용서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믿음의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이요 하나님의 연단의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입니다.
가끔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내리고 나의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은가 그른가는 살펴보지도 않고 판단내린 마음대로 입술을 통하여 쏟아버립니다.
“목사란 사람이 뭐 저래? 목사가 어떻게 교회보다 자기 아이를 더 생각해?”
“장로란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 빠졌어? 아니 무슨 장로가 그 모양이야?”
“저 사람은 권사라고 하는데 물건값을 그렇게 비싸게 받을 수 있어?”
일의 앞뒤는 살펴보지도 않고, 성경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과 생각에 따라 판단하고 혀를 놀립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함으로 8-9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요청하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의 문제에서 떠나 자신에 대한 고린도 교회 내에 있던 반대자들의 비난으로 화두(話頭)를 바꿉니다.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이란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하는 말이었습니다.

10장 10절에서도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한 것같이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이 멀리서 편지로 말할 때에는 제법 담대하고 능력이 많은 척 위장하지만 마주 대하여 보면 유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우유부단하며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모양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반대자의 자기를 비난하는 말을 받아 그것이 반대자들에게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대면한 바울이 보잘 것 없고 연약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관용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기 원한 까닭이라고 상대방의 비난을 긍정적으로 변론하고 있습니다.

2절에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쉽게 쉽게 말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자신의 행동거지와 부족한 모습은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험담하고 매도해버립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 기를 쓰고 반박하고 다른 사람에게 결정적인 흠집을 내고자 합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할 때에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의 이익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란 비난입니다.
그런데, 실은 바울의 반대자들이 육체대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 교리를 폄하(貶下)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드러내고자 한 사람들이었으며, 바울이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헌금을 강조한 것을 두고 그 자신의 생활비를 취하고자 헌금하라고 한다고 육체를 따라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터무니없이 육체를 따라 그를 비난하는 반대자들을 대함에는 담대히 하고자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을 통한 복음의 진리를 좇고 가르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부족함과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할 것이지만, 교회를 무너뜨려내리는 비난과 반대를 일삼는 자들을 대함에는 그들이 (바울의 편지가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대로 실제로 대면함에도 그러한 담대함으로 대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즉, 꾸짖음과 징계함으로 대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 전체를 그렇게 대할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을 통한 교훈 받기를 원하며, 바울의 권면에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대자들을 대함과 같은)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중적 모습인 것 같지만, 이중인격이 아니요 위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실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진노를 발할 자에게 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위로와 사랑으로 대하시고 심령이 강퍅한 자에게는 엄위와 꾸짖음으로 대하셨습니다.

3절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고 육체의 제약성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헐벗으면 추위를 느끼고, 굶주리면 배고품을 느끼고, 매맞으면 고통을 느낍니다. 추위를 느끼고, 배고품을 느끼고, 아픔을 느낀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도 그 자신과 가족의 육신적인 생활을 위하여 세상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일을 한다고 해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생활의 모양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육체에 있어 행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바울을 비난할 때,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산다고 하지만 그도 “육체대로 행한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바울은 변론할 때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느 믿음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같이 육체에 있어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육체대로 싸운다”는 것은 육체의 일에 급급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 중심이 세상에서의 삶에 있습니다. 그의 자랑이 세상의 기준이요 판단입니다.
육체대로 싸우는 사람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소유하는 일에 욕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지만 그 믿음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자기의 집을 세우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육체 안에서 살되 힘써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고 세우는 일입니다.

4절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I use God's mighty weapons, not those made by men, to knock down the evil's stronghold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을 대적함에, 사단의 미혹 가운데 놓여있는 반대자를 대함에 사람의 주장과 감정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병기는 하나님 앞에서(=하나님으로 말미암는, τῷ θεῷ) 강력(δυνατὰ, divine power)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 바울은 대적을 공격하는 무기로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개인의 의견이나 감정이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할 병기입니다. 교회 안에서 의견의 대립이 있을 때 그 해결책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각자의 다른 주장과 생각이기에 대립이 점점더 첨예화하고 분열됨을 봅니다. 믿는 사람에게 병기가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견고한 진”이라고 함은 사단의 진(요새, 성채)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견고한 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뜻과 역사에 역행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사주하여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과 가르침을 반대한 사람들이 사단의 견고한 진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던 것과 같이 요즘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주장대로 서슴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견고한 진”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견고한 진을 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이론”(every proud argument against God, Living Bible)이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과 논리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every wall that can be built to keep men from finding him)은 인간의 자고한 마음으로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과 같이 스스로의 하나님을 형상화함으로써 참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겸손함에서 멀어집니다. 즉, 스스로 참하나님과의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가는 자입니다. 결국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아니라 사단을 기쁘게 하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사주하여 바울의 복음과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며 그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비난을 일삼는 거짓 교사들과 반대자들이 바로 사단의 견고한 진 안에 머무르는 자들이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강력--즉 말씀의 영적 병기를 사용하여서 그들의 모든 주장과 생각과 이론을 파할 것이며, 그들의 자고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벽을 허물어뜨려서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6절에 “너희의 복종(服從)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라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와 가르침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바울에게 교회를 치리하고 징계할 권한이 있지만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기를 원합니다.
아직 바울에 대한 비난과 반대가 누그러지지 않은 고린도 교회에 계획이 변경되어 가지 않음을 바울은 1장 23절에서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관용함으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여행계획을 변경시키시어 분노와 매를 갖고 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고전 4:21 참조). 그러나, 충분히 돌이킬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단의 견고한 성 안에 사단의 사주를 받는 자와 함께 머물러 있기를 고집한다면 이러한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과 구분하여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13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복종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할 것이지만, 끝까지 복종하지 않기로 작정하며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사업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고자 하는 자들은 사도의 권위와 위엄으로 벌하겠다는 바울의 담대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를 두 팔을 벌리고 받아주시며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에 인자를 베푸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가차없이 물리치시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징계를 아끼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입니다.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육체를 따라 육체대로 판단하고, 주장하고, 남을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교회 밖에서 때로는 교회 안에서까지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그 발아래 복종케 하기를 원합니다. 그의 견고하게 보이는 진영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그럴듯한 주장과 생각과 이론을 보임으로서 그리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러한 그럴싸하게 보이는 각종 이론들과 제법 견고하게 보이는 듯한 사단의 성으로 안일을 일삼아 들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오히려 이러한 모든 이론과 안일의 (사단의) 성채를 파하는 하나님 말씀의 검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에게 이러한 병기가 주어집니까?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겸손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강력의 병기(weapons of divine power)를 들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수확 법칙” (고린도후서 9:6-15)

“하나님의 수확 법칙” (고린도후서 9:6-15)
          

   9:6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
윌버 채프맨(Wilbur Chappman)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채프맨이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무디 선생님, 저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무디는 질문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채프맨이 대답합니다. “저는 믿기는 믿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무디는 그에게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을 읽어보라고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채프맨에게 믿느냐고 물어보니까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무디는 그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채프만은 “글쎄요?!”라고 자신없게 말합니다. 무디는 그에게 요한복음 5장 24절의 말씀을 한번 더 읽으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당신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채프만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제가 믿는다고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당신에게 영생이 있습니까?” “제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이때, 무디가 소리칩니다: “당신이 무엇인데 하나님을 무시합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그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며, 채프만이 반문합니다: “그러면, 제게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있다면 있는 것이지” 하는 무디의 말에 채프만은 자신이 여지껏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19세기 초 영국인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 중국선교를 위해 배를 탔을 때 미국인 선장이 그에게 질문합니다. “모리슨씨, 당신이 정말 중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리슨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리슨이 죽을 당시 그를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중국인 개신교 신자의 수는 12명에 불과했는데, 1세기가 지난 후에는 약 3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피와 땀으로 씨를 뿌릴 때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많고 적음은 우리의 드리는 절대 액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의 마음의 크기입니다.

아프리카 수단(Sudan)의 쉴룩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인색한 사람을 가리켜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고 너그러운 사람을 가리켜 “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대로 그 마음속에 잔뜩 쌓아둔다고 생각하기에 그 (욕심의) 마음이 크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너그러운 사람은 가진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나눠주려고 하니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적어서 마음이 작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2
6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유대 지방은 대부분 사막의 기후이요 토양이 척박하여 씨를 뿌려도 땅에 파묻히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따라서 씨를 적게 뿌리면 전혀 수확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넉넉히 넘치도록 뿌려야 흙에 파묻혀 싹을 못내는 씨를 감안하더라도 풍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나누어줌을 심는 일에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0절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신 말씀과 상통합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는 일은 하늘을 향해서 동전을 던짐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땅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돕는 일을 감당할 때 이루어집니다(마태 25:31-46 참조). 지상에서 풍성한 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것으로 하늘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나무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열매가 결정되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떤 씨를 뿌렸느냐에 따라서, 어떤 묘목을 심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나무가 정해집니다.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거두기를 원할 때 우리는 좋은 나무의 씨(혹은 묘목)를 심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마태 25:14-30)에서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었던 종은 그 주인을 평가하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는 불성실한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데서 거두시고, 헤친(=곡식과 겨를 따로 모은) 가운데서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와 봉사의 풍성한 것으로 씨를 뿌릴 때 우리에게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적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훼이도메노스”(φειδομένως)는 ‘인색하게’(sparingly)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열’이 부한 사람의 ‘하나’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적게”란 절대적인 액수가 아니라 마음의 인색함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기아이스”(εὐλογίαις)는 복되게(bountifully)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마음 중심의 풍요로운 것으로 즐겨 드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6절의 말씀을 풀이하면, “가난한 자에게 인색하게 나누어주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인색한 것으로 거두고, 가난한 자에게 복되게 나누어주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복된 것으로 거둔다”는 뜻입니다.

5절에서 “율로기아”(εὐλογία)--곧, 축복을 연보라고 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축복을 위해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기준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리의 연보 드리는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시간을 드리거나, 재물을 드리거나, 마음을 드림에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이 없어야 할 것은 그것들이 본래 우리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에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필요하다 하실 때 우리는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그것을 원래 주인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고, 이러한 사람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모든”(πάς, πάσα, πάν: all, every)이란 단어를 반복하여(한글성경: 4번, 헬라어 원어: 5번)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사람의 일상사 구석구석까지 풍성하게 미치며, 이로써 더욱더 하나님의 선한 일에 풍성한 것으로 드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9절에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112편 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며 이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는 자를 사랑하시는데 그들을 의로운 자로 세우시되 영원히 세우시고 그들을 영화롭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되 자원함으로, 마음에 정한 대로 풍성한 것으로 즐겨내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삶입니다. 이러한 자의 의를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계산대로, 방식대로, 주장대로, 옛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겠습니까?

10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구제할 것을 준비하는 자에게 구제의 물질을 마련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한 양식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되 씨와 양식을 풍성하게 하시며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또한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하게 나누어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을 것을--즉,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줄 것을 더욱 풍성히 주시며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이러한 일로 인하여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봉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12절에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이 넘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것이요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칭찬과 은혜가 또한 넘쳐날 것입니다.

나무는 손으로 만지고 쓰는 동안에는 조금씩 닳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아낀다고 그대로 두면 썩기 시작합니다. 소리가 잘나는 바이올린도 연주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벌레가 파먹고 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달란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게으르고 무익(無益)할 뿐입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거듭 반복합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우리가 이와 같이 가난과 헐벗음에 처한 동포를 돕는 일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증거가 된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말과 혀로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요, 우리에게 복된 말씀을 주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됩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은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러한 일을 감당한 우리를 향하여 사모함이 있게 되고 또 우리와 같은 선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하게 됩니다.

15절에서,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는 말씀으로 본장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을 주시고 마음을 주시고 기회를 주심에 감사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7-8절에서 바울은 섬기는 일과 구제하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주신 귀한 은사(恩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고 여력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열심으로, 성실함으로, 감사함으로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 무엇이든지 희귀한 것만을 갖고 싶어하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은 맛이 기막히게 좋은 요리를 먹은 후 감탄합니다. “내가 이제껏 먹어본 요리 중에 이것이 제일이다.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만든 사람은 세계 제일의 요리사임에 틀림없다. 많은 상을 주어야겠다.” 임금님은 요리사를 불러들였습니다. 요리사는 임금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겸손해 합니다. “임금님, 칭찬해 주시니 대단히 기쁩니다만 이 요리는 제 기술이 좋아서만이 아닙니다. 만약 좋은 야채를 파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칭찬해 주시려거든 좋은 야채를 많이 파는 채소장수를 칭찬해 주십시오.” 임금님은 그도 그렇다고 생각되어 채소장수를 불렀습니다. 임금님께로 불려간 채소장수는 많은 칭찬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임금님,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야채를 팔았을 뿐입니다. 정작 칭찬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야채를 키운 농사꾼이겠지요.” 이번에는 농사꾼이 불려갑니다. 농사꾼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임금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농사한 야채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얘기를 듣자 깜짝 놀랍니다. 그는 임금님의 칭찬에 대답합니다. “임금님, 저는 그저 손질만 했을 뿐이지요. 제가 땅을 갈아 씨를 심어도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는 분이 없으면 저는 잎사귀 하나, 열매 하나 만들지 못하지요. 단지 저는 대대로 농사꾼이기에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것뿐입니다. 감사의 인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요.”

3
하나님은 공짜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그의 자녀들에게도 심는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수확법칙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적게(=인색하게) 심는 자는 적게(=인색하게) 거두고 많이(=복되게) 심는 자는 많이(=복되게)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많은 것으로, 마음에 정한 대로, 즐거이 심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는 것은 우리 혼자만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나눔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수확하고 연보한 것을 교회 안과 주위에 흩어져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사역을 감당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풍성하신 은혜로 축복해 주십니다. 이로써 나눈 자도, 나눔을 받은 자도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마음 깊숙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을 받고 은혜의 하나님께 모든 일에 모든 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