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4, 2013

“요셉의 관용” (창세기 50:15-21)

                                                        “요셉의 관용” (창세기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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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어떤 왕이 저녁 만찬을 베풀고 신하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왕후도 같이 참석하여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연회석 안에 있던 촛불이 다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 틈을 이용하여 평소에 왕후를 연모(戀慕)하던 신하 하나가 왕후의 손목을 덥석 잡았습니다.
왕후는 놀라서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지르고 그 사람의 갓끈을 쥐어뜯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 손목을 잡은 고약한 놈의 갓끈을 잡아뜯었으니 갓끈 떨어진 자가 내 손목을 잡은 놈이오.”
이 때 왕은 말하기를, “불은 조금 있다가 켜라.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갓끈을 떼라.”
왕의 말에 모든 신하들은 다 갓끈을 떼었습니다.
왕후의 손목을 잡았던 신하는 왕의 관대한 마음에 감동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처라는 사실은 자주 인용되는 예입니다. 어느 날 그가 소크라테스를 향하여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아내가 뭐라고 해도 상대하지 않고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점점 화가 나서 물통에 물을 담아 와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천둥이 친 다음에는 반드시 소나기가 오게 마련이지.”
한번은 친구가 소크라테스에게 묻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저렇게 잔소리가 심하고 수다스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살고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사나운 말을 타고 연습하면 나중에 어떤 말을 타도 곤란해지지 않지. 아내 같은 사람을 다룰 수 있다면 어떤 사람도 다룰 수 있지 않겠나?”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한 괴한이 나타나서 곤봉으로 소크라테스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동행했던 친구가 격분하여 꼭 복수를 해야겠다고 나섭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당나귀에게 채였다고 당나귀한테 복수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일리노이 주에서 변호사로 일하였습니다. 그가 아직 풋내기 변호사 시절에 어떤 한 사건을 맡게 되었는데, 그 사건을 당시 일리노이에서 매우 유명한 변호사로 이름을 얻고 있던 스텐턴(E. M. Stanton, 1814-1869)이라고 하는 변호사와 함께 맡게 되었습니다. 스텐턴은 그와 함께 사건을 담당할 변호사가 링컨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법정에서 “저 따위 시골 변호사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한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소.”라고 소리지른 후 나가버렸습니다. 링컨은 그저 자리에 앉아서 웃을 뿐이었습니다.                                          
후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남북전쟁을 이끄는 동안 매우 혼란스럽고 긴박한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 국방장관이 물러나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습니다. 후임으로 누가 적당한지 많은 사람들이 설왕설래하였습니다.
이때 링컨은 “스텐톤씨를 임명할 것이오.”라고 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자 링컨의 각료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섭니다.
    “대통령 각하, 지난 날 스텐톤이 한 행동을 잊으셨습니까? 그 건방지고 모욕적인 일을 말입니다.”
링컨이 대답합니다:
    “나를 백 번 무시하면 어떻소? 그게 무슨 상관이오? 그 사람이 장관이 되어 훌륭히 자기 일을 해주기만 한다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소?”
스텐톤이 장관이 된 다음에도 그는 링컨을 반대하고 무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링컨 대통령이 스텐톤 장관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다 읽고 난 다음에 스텐톤은 “링컨은 참으로 바보같은 사람이야!”라고 매우 격렬하고 노골적인 욕을 하면서 편지를 찢어버립니다.
장관의 이런 행동과 말을 전해들은 링컨은 화를 내기는커녕 잠시 생각하더니 “아마도 스텐톤 장관의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고 하면서 웃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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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를 다른 형제들보다 사랑하므로 형들이 그를 미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많은 꿈을 주셨는데 그 꿈들을 형들에게 말할 때 또 형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인 즉,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등입니다.

형들이 들에서 아비 야곱의 양 떼를 치고 있을 때,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갑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오매 형제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큰형 르우벤이 죽이지는 말라고 권고함으로 구덩이에 던짐이 됩니다.
형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마침 이스마엘 자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매 넷째 형 유다가 요셉을 살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하고 그의 제안대로 은 이십 개에 그를 상인들에게 팔고 그 상인들은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과 함께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던 애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십칠 년 동안 산 후 147세로(창 47:28) 세상을 떠났을 때, 요셉의 형들은 불안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에는 요셉이 아버지 때문에 우리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는데, 이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가 행한 모든 악에 대하여 복수하지 않으려나 불안합니다.

    16-17절: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이라고 요셉에게 말을 전합니다. 야곱이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요셉의 복수가 두려워서 형들이 지어낸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7절에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고 말합니다.
애굽의 국무총리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한을 갖고 있는 요셉 앞에 그들의 고양이 앞에 쥐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요셉의 한 마디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인생들입니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관용의 마음으로 형들의 잘못을 이미 용서하였는데 그 앞에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형들이 보기가 안 되어서 울었을 것입니다.

    18절: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형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요셉의 앞에 엎드려 그들의 목숨을 보존하고자 동생인 요셉에게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19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 마소서” 말합니다.
내가 이미 형들을 용서하였는데, 그리고 만일 벌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인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Vengeance is mine, 신 32:35; 롬 12:18; 히 10: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1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형들은 요셉의 목숨을 헤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갈 때 애굽에서 종으로 살다가 죽든지 그저 종으로 목숨을 보존하면 족한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국무총리로 높이시며 야곱과 그의 가족 70명을 기근에서 구원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시키셨습니다. 요셉은 그가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에게 평안한 삶을 줄 것을 말합니다.

구약의 요셉의 일생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그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흠 없고 티 없는 삶을 산 것같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으시는 독생자(獨生子)로서 흠 없고 티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핍박받음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핍박받음을 예표합니다.
형들 가운데 유다가 요셉을 다른 형제들이 죽이고자 함에서 살리고자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전 20냥에 넘겨준 것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다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대제사장들과 관속들에게 은전 30냥에 넘겨줍니다.
그를 죽이고자 하며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넘겨준 형들을 요셉이 관용으로 용서한 것 같이, 예수님은 그를 죽이고자 빌라도와 로마관원들에게 넘겨준 그의 동족 유대인들을 관용으로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저희를”이란 대명사 안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그의 형들을 용서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과거 죄와 현재 죄와 미래 죄를 용서하여주신 것 같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 형제와 자매들의 잘못들을 관용의 마음으로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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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흔히 관용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자기를 짜려본다고 시비를 걸어 노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한국 젊은 부부들의 이혼율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고 합니다. 세 쌍의 한 쌍 정도가 이혼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참을성이 없음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목회자가 자기에게 말한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하여 자기의 직분을 버리며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교회에서 되가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교회를 떠나는 결정도 쉽게 내립니다.

우리에게 요셉이 가졌던 관용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용서하고, 그를 육체적으로 미혹했던 보디발의 아내를 용서하고, 옥에서 만난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하여주었지만 그가 옥에서 풀려나자 요셉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하지 아니하며, 흠 없고 티 없는 삶을 살았지만 십여 년 동안 어려운 형편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발하지 아니한 요셉의 관용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이 많고, 인색하고, 남을 용납하기를 잘 못하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3절에서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고하는데, 바울의 권고대로 보다 넓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느긋하고 관용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을 바라보며 붙잡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1-14)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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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다보면 나이에 따라 주 관심사가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20대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일이 30대에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고, 30대에는 그렇게 중요하던 일이 60대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해리스(Harris)는 “인간이 평생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는가?” 알아보았는데, 그의 연구에 의하면, 10대에는 공부, 20대에는 이성(異性), 30대에는 일, 40대에는 자유(自由), 50대에는 여가(餘暇), 60대에는 건강(健康), 그리고 70대 이후에는 시간(時間)이 사람들의 주 관심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의 고하에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주요 관심사는 재물(財物)과 자녀(子女) 혹 어떤 사람에게는 배우자(配偶者) 또는 부모입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자녀인 경우가 많습니다. 몇 년의 이민생활 끝에 본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더라도 자녀의 교육을 생각해서 돌아갈 것을 포기하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젊은 부부들은 자녀를 하나만 두는 사람들이 많은데, 해서 그 자녀 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주일에 자녀가 무슨 콘서트(concert)를 한다거나, 타운(town)이 주최하는 무슨 운동시합이라도 있을라치면 교회의 장로나 집사인데도, 자녀의 일로는 교회를 빠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녀를 사랑함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고, 자녀의 콘서트에 부모가 당연히 참석하여야 할 것이지만, 이러한 일로 인하여 번번이 주일을 지키지 못할 때, 자녀가 하나님보다 우선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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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실 때 민족과 땅과 복의 세 가지 약속을 주시는데, 그가 갈대아-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칠십 오 세였고(창세기 12:4) 이삭을 얻은 나이는 백세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적어도 25년이 경과된 후에 얻은 약속의 자녀이므로 참으로 귀하고 사랑스럽고 자기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입니다.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도 그에게는 사랑스러웠지만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닌 육의 자녀요, 그나마 그는 사라의 등살에 못이겨 얼마 전에(창세기 21장) 내보내어 지금은 오직 이삭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현대의 젊은 부부에게 그들의 하나뿐인 자녀가 귀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귀한 것에는 비교할 바가 못됩니다. 25년의 기다림 끝에 그를 얻었을 뿐 아니라 사라의 경수가 끊긴지 오래이기에 만일 이삭에게 사고라도 나면, 젊은 부부와는 달리, 또 다른 아들을 얻기란 불가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분명히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셨고 약속의 자녀는 사라의 몸을 통해서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삭의 나이가 십여 세쯤 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자녀를 내가 네게 지시한 곳에서 번제로 내게 바치라”고 명하시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의 번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아니할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사랑하시고 공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의심할 것입니다. 설령 그분이 하나님인 것이 틀림없다고 하더라도 제 정신으로 그런 명령을 하시는 것인지 반문할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틀림없고 또 제 정신으로 명하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하나님을 안믿으면 안믿었지 자식을 절대로 번제물로 줄 수 없다고 다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자식을 번제로 바치기를 거부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시대에는 다른 생각이 적용되는 때였습니까?
그때에는 부모로서 자식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림이 아무렇지 않던 시대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도 자녀를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리는 일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자녀를 태워서 바치는 일이 후에 행해졌지만,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서 11장 17절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믿음의 테스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인 줄 알았겠습니까?
만약 알았다면, 그의 마음에는 고통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번민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 삼아 독자 이삭과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까지 동행하였을 것이며, 길을 가는 도중에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의 시험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모리아 산 중턱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있는 넓은 바위 위에 너를 붙잡아 매더라도 놀라지 마라.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짐짓 너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시는 거란다. 내가 너를 죽일 듯 칼을 쳐들더라도 놀라지 마라. 하나님이 곧 멈추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인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자 우리를 시험하실 때에 ‘자아, 이것은 내가 너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짐짓 주는 고통이란다. 고통스러워하거나 놀라지 마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때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나 상실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참기 어려운 고통이나 상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는데, 어떤 영어성경은 이 소망을 "God's Approva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환난 중에 인내하고, 인내함으로 믿음이 연단되어질 때,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게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오직 이삭 한 아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아들이 그에게 얼마나 귀중하였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요, 이를 통하여서 아브라함으로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할 아들입니다.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제까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왔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삭이 점점 하나님의 자리를 대치하는 아브라함의 우상이 되는 듯 하였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생을 살펴보면 그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성정을 가진 사람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갈대아우르 땅에서 부르시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란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 데라가 죽기까지 그곳에 머뭅니다. 하란이 살기에 편한 땅이기에 거기에 안주하고자 함이 있었습니다. 머뭇거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나안은 너무 먼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데라를 취하여 가신 후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명하시어 그의 여정을 재촉하십니다.
죽음이 두려워 두 번씩이나 사라를 자기의 아내라고 말하는 대신에 누이동생이라고 하여 외간남자의 품에 안기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보통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믿음 이전의 믿음’--곧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결정할 때 그 스스로 판단하여 이것은 해야겠고 저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반드시 순종함이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아니할 때도 순종함이 있었고, 잘못을 범하고 있는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그 말씀을 따르는 순종함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순종을 매우 기뻐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한 순종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필수요소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그의 동무들과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4절).”고 명하실 때,
시몬은 예수님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5절).”라고 대답합니다.
베테랑 어부인 시몬이 목수 출신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고기가 많이 잡히리라고 기대하거나 믿은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이기에 의지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시몬이 성질이 급하고 과격하지만 그의 최대의 장점도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라고 함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분명히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의논하였다면 사라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요. 이 아이가 우리에게 어떤 아이인 줄 알기나 해요. 그건 아무리 하나님이 하신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어요.”
욥이 그의 열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고 했습니다.

4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머물던 곳인 브엘세바를 떠나 모리아 산에 도착할 때까지 사흘이 걸렸습니다.
그 사흘 길을 행하던 동안 아브라함 마음에 번민함이 없었겠습니까?
그의 마음에 번민함이 심히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삭을 주시고는 지금 와서 거두어 가시려고 하실까?’ 하나님의 심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아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궁리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있는 그곳에서 당장 이삭을 내게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왜 사흘 길을 행하게 하셨습니까?
이는 하나님께 이삭을 드림이 경황이 없는 중에 시간의 촉급함으로 잘못 결정되어진 일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그의 중심에서 나온 결정임을 보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해서,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결정은 모든 것 위에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그의 독자 이삭을 포함하여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아브라함의 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5-7절: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사환 둘을 산 밑에 놔두고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산 중턱을 억장이 무너지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오르는데, 사정을 모르는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질문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냐고? 바로 너란다. 아 글쎄 하나님이 너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고 하면서 원망섞인 대답을 하는 대신에, 가히 믿음의 진수(眞髓)라고 할 수 있는 대답을 합니다.

8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준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ראה)는 “보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지금 현재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보시고 그를 준비하여주실 분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야 하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로 향한 전적인 신뢰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faith of hope against hope)”입니다.
이 아들 이삭을 얻은 것도 사라의 태가 닫힌 상태에서 바랄 수 없는 중에 얻었는데, 이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하신 지엄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이 이삭을 죽이시더라도 다시 살리셔서 그 약속하신 바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분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8-19절에서 이를 표현할 때,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에 따르면,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오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노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상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고 할지라도 죽은 이삭을 도로 살려내시어 그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이 번성케 하실 수 있는 ‘부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8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감동시키시고 이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하는지 아셨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중지시키십니다.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3
모리아산이 어디쯤 위치해 있습니까?
역대하 3장 1절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위치했던 솔로몬의 성전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단을 쌓았던 바위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후에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성전이 차례로 이 터 위에 다시 세워졌고, 헤롯 성전이 무너진 다음 현재는 이슬람 사원인 황금빛 돔을 갖고 있는 오마르 모스크(Omar Mosque)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오마르 모스크는 “Dome of Rock”이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큰 바위가 그 안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슬픔의 길이라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가 있고 그 길의 끝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갈보리 언덕이 있고, 또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예수님의 돌무덤(Holy Sepulchre)이 위치해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그 모리아산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희생제물로 드린 장소란 것입니다.
모리아의 한 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필요를 미리 보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수풀에 걸린 수양은 그로부터 2,000년 뒤 우리 인간의 필요를 미리 보시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번제의 수양으로 준비하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바치면서까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로서 이삭을 죽게 하지 않으셨지만, 그 스스로는 우리 인간 사랑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리아의 한 산, 갈보리 언덕 위에서 죽이십니다.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의 찢기심이 아브라함보다 적지 않으시지만,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미련하고 불쌍한 인생에 대한 그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죽게 하십니다. 우매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아직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는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혹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되어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보시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려고 우리 자신을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일상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 (창세기 1:24-31)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 (창세기 1:24-31)


                                                                                1
윌튼(Issac Wilton)은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위얼스비(Warren Wearsbe)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마음은 온갖 죄악이 자라는 온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우리의 믿음도 자랍니다. 그러나, 감사함 대신에 불평함의 마음일 때 사단은 이를 기뻐하고 거기에 죄와 허물의 씨를 심어놓습니다. 해서, 더욱 원망이 싹트고 불평이 넘칩니다.

                                                                               2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심을 화가가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화가는 그림을 엿새에 걸쳐 그리되 그 배경으로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가장 중요한 사람을 그리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첫째 날에는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칭하십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고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십니다.
셋째 날에는 궁창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는데, 드러난 뭍을 땅이라 하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칭하십니다.
또 같은 날에 땅위에 풀과 채소와 각양 종류의 열매맺는 과목을 창조하십니다.
넷째 날에는 하늘 궁창에 광명을 두시는데 큰 광명-곧, 해로는 낮을 주관케 하시고, 작은 광명-달로는 밤을 주관케 하시고 또 별들을 만드사 하늘 궁창에 두사 땅을 비취게 하십니다.
다섯째 날에는 물에 큰 물고기와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땅위 하늘 궁창에는 각양 새들을 창조하십니다.
여섯째 날에는 땅위에 각양 생물을 만드시되 육축(六畜)과 기는 것과 짐승을 그 종류대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여섯째 날의 창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24-25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십니다.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만드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형상(image)은 구체적인 형태이고, 모양(likeness)은 추상적인 닮음을 뜻한다고 하는데 궂이 형상과 모양을 따로 분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라고 함은 하나님의 외모를 따라 인간이 지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따라 사람이 지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만들어지되 지정의(知情意)를 갖고 만들어졌습니다. 해서, 사람은 이성적이고, 감정이 있고, 의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인격(personality)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의식이 있고 도덕과 윤리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할 때 가책을 느낍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선하심, 신실하심, 의로우심이 원래 사람에게도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말씀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짐승에게 혼(soul)이 있다 없다로 다투지만, 사람에게는 혼 위에 영(spirit)이란 것이 있습니다.
해서, 이 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란 복수를 뜻합니다.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성경학자는 이 우리에 하나님께서 미리 지으신 천사들을 포함시키신다고 해석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창조주께서 창조주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지으시는데 다른 피조물과 상의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인간을 지으셨다는 구절(句節)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오면 이 우리가 누구를 가리킴인지 명백하여집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임을 증거하고, 바울은 아버지의 영과 아들-그리스도의 영과 성려이 동일한 분임을 증거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라고 함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세례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기록되어있습니다.
26절에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했는데, 바로 다음의 절인 27절에서는 “자기 형상을 따라” (according to His image)라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독립한 두분 혹은 세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해서, ‘하나’님이십니다.
세 신격(three persons)을 가진 한 분(one nature) 하나님이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이란 한 형태의 존재가운데, 성자께서 말씀으로, 성령은 지혜로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福)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生育)하고 번성(繁盛)하여 땅에 충만(充滿)하라, 땅을 정복(征服)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복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심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아담은 땀흘리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번영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브는 해산의 고통 없이도 자손을 생육하고 번성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인간을 지으실 때 원하신 것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중과 땅과 물에 사는 새들과 짐승들과 고기와 각양의 생물들과 풀과 채소와 과목들은 인간의 번성을 위해서 곁들여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한없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에덴동산에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이 에덴동산은 한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곳입니다. 그래서 몇 만년, 몇 백 만년, 몇 억 년을 두고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더라도 만원(滿員)이 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의 동산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공간은 제한되고 그들이 쫓겨난 후 에덴동산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수명은 영원하였을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물론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이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에덴동산을 잃음보다 더 큰 손실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을 잃음으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명은 900여 년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잃었지만 900여 년이란 그래도 짧지 않은 삶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후에도 인간의 죄악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장자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고, 라멕이라고 하는 악인 은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담과 이브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죄악이 땅에 편만케 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인간에게서 거두어 가시고 인간에게 죽음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진 인간을,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멸절시키기로 작정하십니다.
해서, 노아로 방주를 만들게 하시고, 노아의 가족 여덟 명과 각양 짐승을 그 종류대로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하늘 궁창의 창들을 여시고(창 7:11) 40주야 동안 쉬지 않고 비를 내리십니다.

노아의 홍수이전에는 대기권밖에 오존층과 함께 물층(water zone)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물층이 자외선을 알맞게 흡수하고 태양의 열을 조절함으로서 땅에는 상춘(常春) 기온만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기는 하셨지만 여전히 좋은 환경과 기후 가운데 29절에 있는 바대로 그들의 양식은 채소와 과실들이었습니다. 땅에는 여름과 겨울의 더위와 추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늙음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건강한 가운데 1,000년에 가까운 수명(壽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은 이 물층을 파괴시키셨습니다. 해서, 더 이상 땅 전체가 상춘기후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8장 22절에서 말씀하실 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창세기 1장 29절에서는 인간의 식물--먹을 것이 채소와 과실이었는데, 홍수로 인하여 식물이 죽고 종자가 변하여서 맛이 덜하게 되고 또한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해서 9:3에 하나님께서는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지니라”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1,000년 가까웠는데, 땅에 패역이 가득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의 물층에 고인 물을 쏟아 부으시고, 더위와 추위를 주시고, 그 위에 인간의 수명을 점차적으로 120세로 제한시키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인 노아의 년수는 홍수뒤에 350년을 더 살게 하시므로 그전 사람과 다름없이 950년을 살도록 축복하셨지만 그 이후에 점점 년수를 줄여가셔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때에는 205년을, 아브라함 때에는 175년을 그 이후에는 120년 이상을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를 내리시기에 앞서 창세기 6장 3절에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심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니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세가 되리라” 하셨는데 여기 그들이란 인간의 딸들과 결혼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간 파숫천사들인데 이들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함과 함께 인간의 수명도 120년으로 제한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상실케 하시고, 인간의 수명을 제한하시고, 인간에게 허락하셨던 좋은 환경을 거둬 가시고, 그 위에 인간에게서 성신을 떠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물로 이 땅 지면을 온통 쓸어버리시고 황폐케 하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축복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3
창세기 9장 1절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최초의 사람들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을 회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9장 7절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고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인간은 그 이후에도 불순종하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떠나지만, 그 후에 그들이 조금만 뉘우치고 돌아오는 기색이 보이면 하나님은 넓으신 팔을 벌리시며 돌아온 탕자를 맞아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육체와 영혼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자신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생까지 회복시켜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어찜입니까?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연고요,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에게 그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의 성령을 다시 부어주시기를 원하심이요, 그가 영원히 사시는 것같이 우리도 그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날이 이르기 전, 이 세상을 살 때, 여름과 겨울을 맞으며 더위와 추위를 경험하며 씨뿌리며 거두어드리는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섭리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회복시켜주는 영원한 낙원에 이를 때까지 이 땅의 생을 살아갈 동안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는 우리에게 충만한 복을 주시며, 성령으로 인치시고,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야 할 것입니다.

Sunday, February 3, 2013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6:4-11)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6:4-11)


                                                                            1
신학교에 다닐 때 아담과 이브 이후 세상이 더욱 더 악해지고 있나 아니면 선해지고 있나에 대해서 다른 신학생들과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점점 악해진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점점 선해진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윤리관의 변화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더욱 악해지고 어떤 부분은 선해진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면에서 볼 때, 한 사회(社會)가, 한 인간(人間)이 선하다-악하다 하는 판정의 기준은 그 사회와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나로 알 수 있습니다.
이로서 보건대, 세상은 선과 악 사이를 진폭(振幅)하고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으로 접근(接近)해가고 있는가 하면 하향하여 악으로 치닫곤 합니다.
악으로 치닫다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참으시는 한계(限界)의 악(惡)을 벗어날라 치면, 하나님께서 간섭(干涉)하셔서 바로잡아 놓으십니다. 노아의 홍수(洪水), 바벨탑 사건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滅亡)은 바로 하나님의 간섭(干涉)하심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방향은 개선(改善) 쪽보다는 개악(改惡)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傾向)이 있습니다. AIDS로 인하여 동성연애가 줄어드는가 했더니, AIDS를 예방하여 동성연애를 즐기는 방법을 모색(摸索)하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한번 더 세상을 바로 잡으실 것인데, 그것이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재림(再臨)하실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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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는 요나, 아모스와 함께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호세아서의 첫째 부분은 1-3장으로 신실한 호세아와 부정하고 음란(淫亂)한 고멜의 결혼이야기이고, 두 번째 부분은 4-14장으로 신실하신 하나님과 부정하고 음란한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은 호세아의 결혼비유를 통하여 호세아-고멜의 관계가 하나님-이스라엘의 관계와 유사함을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합니다. 말씀하실 때, 음란하고 부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란 축복의 이름인 반면,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시다’란 저주의 이름입니다.
두 번째로 딸을 낳는데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곧,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멜과도 같이 음란하고 부정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데리고 오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면서도 두고온 옛 연인인 바알--곧 세상에서의 우상--을 마음 속에 섬기고 있으매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흩으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내 백성이라 부르지 않으시겠다고 주신 이름들입니다.
고멜은 결국 음란(淫亂)이란 옛 연인을 잊지 못하여 호세아를 떠납니다. 그의 생활은 더욱 부정하고 음란하여 세상에서 버려지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다시 임하실 때,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淫婦)된 그 여인--고멜--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고멜이 다른 남자들의 사랑이 그리워 호세아를 버리고 간 것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헛된 신을 좇아 섬기려 갔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돌이키려 하십니다.
호세아는 은 열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곧, 총 30 세겔에 해당하는 돈으로 타인의 품에 안긴 바된 고멜의 몸값을 지불하고 데리고 옵니다. 은 30에 해당하는 30 세겔은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몸값인데 예수님도 인류의 구원 사역을 위해서 은 30에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리심을 당함을 봅니다. 아라비아 상인에게 형들에 의해서 은 20에 팔린 요셉의 경우는(창 37:28) 소년의 몸값으로 넘겨진 경우라고 할 것입니다.

고멜을 데리고 올 때 호세아는 그에게 말합니다: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고 다른 남자도 좇지 말라. 나도 그리하리라” 합니다(3:3).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신을 따라 갔었지만, 그들을 데려오매 ‘행음치 않고 다른 신들을 좇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다른 신은 없으며, 그들은 단지 인간의 상상(想像) 속에만 있고 인간을 혼미(昏迷)하게 만들 뿐입니다. 4-14장에서 호세아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4-8장), 의로우시며(9-10장), 긍휼하신 분(11-14장)임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하나님게서는 아직도 세상의 죄 가운데 방황(彷徨)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물으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셔서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에브라임--곧 이스라엘이, 유다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4절과 6절에 나오는 “인애(仁愛)”는 히브리어 '헷세드'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지속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고있는 사랑은 일시적(一時的)이고 변덕(變德)스러우며 쉬없어지는, 모양(模樣)만이 있는 아침구름이나 이슬과도 같이 쉬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한결같은 것인데,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침과 저녁 때가 다른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생활에서, 혹은 남녀의 연애에서 한편이 이와 같을 때, 그 결혼생활이나 연애(戀愛)는 곧 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입으로 반복하나,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이는 모양(模樣)만 있는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 작은 자를 긍휼(矜恤)로 대함으로서 확증(確證)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함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제사는 인애와 긍휼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의미는 잊어버린 채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열납치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첫 소산(所産)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이 드렸기에 이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와 번제의 제사를 그리지만, 그 안에 그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회개가 없고, 하나님과 화목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獻身)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그 자신이 물질이 궁하셔서 그것으로 생계(生計)를 유지하셔야 하기에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사에 앞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형제를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실 때(삼상 15:22),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24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머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전부를--인격과 자랑까지도 다 바치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禮拜)니라” 합니다.
“몸을 산 제사(祭祀)로 드리라” 함은 어떤 사교(邪敎) 집단에서와 같이 사람의 몸을 산 채로 불에 던져 제사지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몸이라 함은 우리의 인격과 품성을 포함한 우리의 전부(全部)입니다. 곧, 우리의 인격과 자랑과 마음과 모두를 다 주님께 내어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예와 같이 낮아져서 우리의 사는 삶을 통하여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로마서 12:2에 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은 목사에게만 요구되어지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 모두에게 요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6절 후반에서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그분에게 번제를 드리느 것은 누구의 결혼식인지도 몰고 참석하여 덩달아 기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며, 누구의 초상(初喪)인지도 모르면서 참석하여 밤새도록 우는 우리의 모양이며,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부처님을 찾고 잇는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며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을 체험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않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실상을 보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 그려놓은 하나님의 허상을 바라봄이며 이를 위하여 제사드림입니다.

(8-9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부지중에 어쩔 수 없이 살인한 자들을 위해서 도피성읍을 마련하여두시고 살인자들이 이곳으로 피할 때 그들을 보호하게 하셨는데 후에 사람들은 이를 악용합니다: “고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하고, 도피성을 관할하고있는 제사장들이 이를 구실로 세상의 이를 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까지도 보호하시어 가인을 해하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더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후에 라멕은 살인을 자행(恣行)하면서 터무니없게도 가인의 까닭으로 하나님의 보호(保護)를 요구합니다. 중세 카톨릭교회에서 발부하던 면죄부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恩惠)를 인간의 이로 바꾼 경우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예로는 우리 자신들의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고 도피성되시는 주님께 피하여 생활하고 있는데, 근신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는 대신에 주님의 용서를 악용(惡用)하여 매일매일 생활 가운데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죄를 반복(反復)하면서 주님의 죄사함을 당연시(當然視)하며 이를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10절) 아론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섬긴 것같이 우리도 세상의 명예를, 부를 여호와라 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북방왕국인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민심(民心)이 그에게서 떠날까봐 하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해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난씩 두고, 벧엘에서 보통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산당을 짓고 제사를 드립니다. 이로 인해, 여로보암은 그 자신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하는 죄를 범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오도(誤導)하여 행음(行淫)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금송아지에게 절함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하는 사람들을 그릇된 곳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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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淫亂)하고 부정(不貞)한 이스라엘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변챦고 한결같은 신실한 인애-긍휼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드려지는 제사만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제사는 우리 속에 거짓된 마음이 없이 겸허하고 낮아지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상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