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6, 2013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 5:21-24)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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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덕대일(Richard Dugdale)이라고 하는 사람이 1877년에 18세기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의 5대에 걸친 가계를 조사하여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라고 하는 유명한 목회자요 신학자의 가계와 맥스 쥬크스(Max Jukes)라고 하는 무신론자의 가계를 비교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신실한 믿음의 가정의 여인과 결혼하여 많은 자손들을 두었는데, 5대에 걸친 그의 1,394명의 자손들 가운데 13명은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고, 65명은 교수, 3명은 상원의원, 30명은 판사, 100명은 변호사, 60명은 의사, 75명은 육군과 해군의 장성들, 100명은 목회자와 선교사, 60명은 유명한 저자, 1명은 미국의 부통령이 되는 등 대부분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의 자손들은 주 정부에 단 한푼의 신세도 진 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맥스 쥬크스(Max Jukes)는 불신의 여인과 결혼하여 그도 5대에 걸쳐서 1,292명의 자손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 310명은 빈민으로 죽었고, 150명은 범죄자였으며, 7명은 살인자였으며, 100명은 술주정뱅이요, 여인들의 절반 가량은 매춘부였습니다. 그의 자손 중 540명이 주 정부에 125만불 가량의 신세를 끼쳤습니다.

창세기 4장 16절로부터 24절에까지 아담에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가인의 자손들이 기록되어있고, 이어서 4장 25-26절과 5장에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셋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요 아벨을 대신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셋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에게 가인을 통하여 이어지는 7대 손의 이름은 라멕이요 셋을 통하여 이어지는 7대 손의 이름은 에녹인데 그들의 삶은 극과 극입니다.
라멕은 그의 조상 가인보다 더 악랄한 살인자였는데 그뿐 아니라 그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악인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 24절을 보면, “가인을 위하여서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즉, 가인이 한 사람을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만일 가인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그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으니 가인보다 더 살인을 많이 한 나를 죽이는 자는 칠십칠 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입니다.
반면에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7대 손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 뿐만 아니라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4장 26절에 보면, 셋이 자녀들을 낳았고 그를 통하여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예배하였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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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에녹에 관한 기사의 시작은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로 시작합니다.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는 그도 다른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것이 그의 인생에 한 전환기를 가져다 준 것으로 보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죽음’(무트, death)과 ‘보내다’(샬라크, send)란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가인의 족보에 있는 라멕이 아님)을 낳았고(창 5:25) 라멕이 182세에 노아를 낳았고(창 5:28)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에 홍수가 시작되었는데(창 7:11), 그 때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969세가 되는 해로 그의 수명이 다한 때입니다.
즉, 하나님은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세상에 홍수를 보내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아마도 에녹에게 이 사실을 ‘므두셀라’란 이름을 짓게 하심으로 알려주셨던 것 같습니다.
유다서 1장 14절에 그 흔적이 있는데,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위경서인 에녹1서 1장 9절을 인용한 말씀이라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에녹을 통하여 그의 세대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 증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예로는 또한 노아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의 때나 노아의 때나 평안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어서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세대는 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고자 했으며,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매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노아와는 달리, 또 다른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의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히 한 일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기록에 의하면, 아들들과 딸들을 낳으며 산 것 외에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특별하고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 줄 압니다.
해서, 교회에서 가만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은 시시하게 생각하고 분주하게 이것저것 벌리면 굉장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녹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평범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 일 저 일로 바쁘지 아니하면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해서, 목회자의 일이 아닌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습니다. 목회자는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일로 분주해 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도 세상 일로 또는 교회 일로 너무 분주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에서 점심식사 준비로 너무 분주하여 예배시간에도 들어오지 못하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바쁜 일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예배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말씀을 묵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3절: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이 지상에서 삼백육십오 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흔히 900세 이상을 산 것에 비하면 에녹의 지상의 삶은 매우 짧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 300년의 삶은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보다 축복된 삶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 가장 축복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은 우리가 믿고 체험할진 데 우리의 삶은 40년이어도, 50년이어도 축복인 것입니다.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년수는 300년입니다. 그저 1년을 하나님께 잘 보임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기까지 300년을 한결같이 동행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5-6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입술의 믿음이 아닙니다.
내게 믿음이 있을 때, 내게 있는 그 믿음이 나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또는 형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한결같으심과 선하심과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믿음, 우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믿음,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변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믿음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는 천국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천국에서 제게 주시는 상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이 세상 살 동안에 마음에 평안이 있으면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어떤 종교나 도를 열심히 닦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이 세상 살 동안에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믿음은 이 세상 살 동안에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자, 이 세상 살 동안에 부한 자의 삶을 살고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장차 하나님께서 내게 상 주실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과에 대한 동기가 없는 삶에는 의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4-26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은 ‘나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저 세상 살 동안 평안하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 살 동안에는 비록 외적 평안이 아니라 핍박이 내게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겠습니다’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믿음은 또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이 변할 때 그것이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의 삶은 므두셀라를 낳는 계기로 바뀌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얻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30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과 한결같으심을 따라 변화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순종함인데 에녹은 하나님께 순종하되 300년 동안 한결같이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언기자는 21장 19절에서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사람이라면 하나님도 동행하기를 원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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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과 같이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까?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약속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와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것입니다.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올 때 믿음으로 나아오므로, 삶의 변화가 있으므로, 또한 매일 매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행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빌레몬 1:23-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빌레몬 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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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사람들
찬송가들이 다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불려지는 찬송가들 중에 하나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일 것입니다. 이 찬송은 아프리카 노예상선 선장으로서 타락한 삶을 살아가다가 15세기 독일의 수도사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의 저서,『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를 읽고 감동을 받고 회심하였다는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의 자전적(自傳的) 고백입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중증 뇌성마비로 깊은 절망과 고독, 그리고 번뇌와 고통 속을 끊임없이 헤맨 경험이 있는 송명희 시인의「아니!」라는 시(詩)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사람 되셨네
            이런 일 누가 할 수 있나

            아니
            말씀이 육신 되셨네
            이런 비밀 누가 알 수 있나

            아니
            그가 십자가 지시려
            그가 죽으시려고 오셨네
            이런 은혜 누가 감당할 수 있나

            찬양하세
            오
            찬양하세
            예수
            그 놀라운
            은혜 받은 우리여
            찬양하세

            (「아니!」, 『그때가 오리라』중에서)
                                                   
하나님을 태양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양의 따사로움과 밝음의 은혜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오신 태양의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되, 1장 9-14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하여 영광의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 그분이십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빛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며(행전 9:3-9), 바울의 동역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격하였기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은혜를 받음으로 돌 같은 마음이 녹아 내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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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빌레몬서를 마치는 문안인사에서 그의 동역자들, 즉, 에바브라(23절)와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그리고 누가(24절)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2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Epaphras)
바울은 본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에바브라디도에게도 이 자랑스런 수식어를 붙여주고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본래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요 사역자인데, 그 교회 안에 거짓 선생이 다른 교리와 주장을 갖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매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와서 그의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해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골로새 교회를 사역해왔기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애써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뜨겁습니다. 그가 지금 몸으로는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더욱 완전하고 믿음에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뿐 아니라 바울의 사역과 고통에도 동참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현재 로마에서 가택연금의 상태(행전 28:30) 혹은 감옥에 갇힌 상태(빌 1:7, 13-14)에 있을 때 바울의 매임 가운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함께 하고 나누는 삶입니다.

    24절: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의 동역자들
에바브라 이외에 바울은 마가와 아리스다고, 데마와 누가의 이름을 들어 그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환난과 곤고 가운데도 바울의 사역을 귀히 여기고 그 사역에 기꺼이, 희생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인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으며, 옥에 갇힘과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마가(Mark)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육신의 피곤 또는 다른 이유를 들어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전 13:13). 1차 전도여행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나, 바울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탐탁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밤빌리아에서 먼저 돌아간 것을 들어 데려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합니다. 결국 마가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고 각각 다른 전도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가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이 덜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마가는 깊은 회개를 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새사람으로 거듭 납니다. 그는 그의 실패를 바탕으로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되고, 베드로는 그를 (믿음 안에서)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마가가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결국에 바울도 마가의 변모된 모습을 보고 그를 기쁨으로 다시 영접하고 그를 동역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몬 1:24). 한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두 번째의 동역은 마가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었으며 다시는 넘어지거나 거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네가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에는 하나님의 일에 무익한 자였는데, 이제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다고(Aristarchus)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행전 20:4, 27:2)의 유대인으로서 에베소 지방에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행전 19:29). 그가 그 후에 바울을 따라 아시아까지 동행하고,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할 때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행전 27:2).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 감당하기를 좋아하기에 그를 따라 감옥(가택연금)에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갇히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함께 갇히는 자가 되었습니다(골 4:10).

데마(Demas)
데마와 마가는 그들의 행적에서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가의 처음은 실패였으나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안 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마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열심을 내었고 따라서 바울의 인정함을 받았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끝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데마는 바울이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바울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갑니다. 디도데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이 데마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를 향한 바울의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이 한 구절에 온통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육신은 사단의 유혹에 매우 약합니다(롬 7:18-24).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삶 가운데 죽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활동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갈 2:20). 이로써, 데마와 같이 곁길로 빠지는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히 3:14)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Luke)
누가는 의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직업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을 만나매 그의 3차 전도여행부터 자청하여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되는 바울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자원함으로 바울의 고생 길에 동행하였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현재에도 바울 곁에서 그의 건강을 돌보며 바울과 함께 더욱 넓은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누가는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서 놓임을 받았다가 그의 왕성한 전도활동으로 다시 체포되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누가는 바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은혜”(χάρις)와 관련하여 바울의 서신들은 한 특징이 있습니다. 서신의 첫머리에는 예외 없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문안인사를 적고(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서신의 끝에는 또한 예외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롬 16:20; 고전 16:23; 고후 13:13; 갈 6:18; 엡 6:24; 빌 4:23; 골 4:18; 살전 5:28; 살후 3:18; 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몬 1:25)라고 맺고 있습니다(에베소서, 골로새,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가 생략됨).

은혜는 본래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여 있는 것인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또한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의 삶 속에 전달되어지고 나타납니다. 해서,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달되어지고 나타나는 은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태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온 빛입니다. 빛을 받은 우리가 그 은혜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것이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나누는 삶입니다.

너희 심령에”(cf. 갈 6:18)는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 영과 함께”(μετὰ τού πνεύματος ὑμών: with your spirit)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늘 생각하고 사모할 때 그의 은혜의 깊고 넓음을 맛볼 수 있고 또한 증거하고 나누어주는,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온전히 빌레몬의 심령(the spirit of Philemon)에 전달되고 느껴질 때, 빌레몬은 비로소 바울이 왜 한갓 종에 불과한 오네시모를 위하여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바울의 그러한 부탁이 없었더라도 그를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용서로 그를 용서하고, 영접하고, 진정 한 형제로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며, 어려움 중에도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전령(messengers)들이 될 수 있습니다.

                                                                      3
성도의 결단
여러분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함께 함을 느낍니까? 우리의 심령은 원래(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완악(頑惡)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실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요청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빌레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들은 것보다 더 행하는 성도” (빌레몬 1:21-22)

                                    “들은 것보다 더 행하는 성도” (빌레몬 1:21-22)


                                                                          1
하나를 듣고 열을 행하는 사람들
공자님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라고 말씀했습니다. ‘배운 것을 반복하여 복습하면 기쁘지 아니하냐?’라는 뜻입니다. 배운 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복하여)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배운 것은 한갓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나의 삶에 원동력이 됩니다.
맹자님은 군자에게 세 가지 기쁨이 있는데 첫째는,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시며(父母俱存), 형제들에게 별 탈이 없는 것이요(兄弟無故),” 둘째는, “하늘을 우러러 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며(仰不愧於天), 아래로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요(俯不怍於人),” 그리고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得天下英才) 그를 가르쳐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而敎育之)”고 말씀했습니다. 천하의 영재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은 실천할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가 하나를 듣고 열을 알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고자 할 때 그는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하여 있는 사회 속에서 참으로 유익을 주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선생이 제자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가르친 것 이상의 것을 제자들이 깨달아 알아서 더욱 그의 가르침을 발전시켜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선생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보람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곧,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성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말씀에 따라 행하고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서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친구’로 여기시겠다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7장 24-27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라야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씨가 싹을 내고 잘 자라서 곡물이나 과실을 생산하게 될 때 평균적으로 예상되는 결실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깨달음(깨닫다: συνίημι)”은 ‘행함을 동반하는 깨달음’입니다. 듣고 행하지 않음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되 들은 것보다 더 행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가 들은 것보다 더 행합니까? 하나님을 마음 속으로부터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내가 있어 남편이 ‘이것 좀 해줘요’라고 말해야 겨우 하는 척하거나 그 부탁한 것도 들은 척하지 않는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남편입니다. 연애할 때야 ‘만나자’고 할 때 ‘시간이 없다’고 빼고, ‘이것 하자’ 할 때, 나는 ‘이것은 안하고 저것 한다’라고 조금 퉁기는 상대방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또는 아내가) 제안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상대방이 사랑스러울 리가 없습니다. 부부관계가 피곤하며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는, 아내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남편은 남편이, 아내가 부탁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해주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 힘씁니다. 그리할 때 그러한 아내를, 그러한 남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바울은 빌레몬이 그가 오네시모를 위하여 요청한 것을 들어줄 것을 기대하되, 요청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말씀함으로써,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을 꼭 들어줘야 하게끔 만듭니다. 어찌 보면, 빌레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빌레몬에게 대한 바울의 기대가 그만큼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요청을 자의(自意)로 받아들이되 기쁨으로 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1절: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의 순종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Confident of your obedience)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요청하고 제안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을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부탁하고 제안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하되 나 바울을 영접하듯 하라’(17절)는 것이며,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16절)이며, 또 가능하다면, ‘오네시모로 나 바울을 돕게 하라’(13절)는 것이며, ‘만일 오네시모에게 금전적, 법적인 계산에서 엄청난 빚의 변제가 남아 있으면, 그 빚을 바울의 계정으로 돌리라’(18절)는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바울의 부탁을 빌레몬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들은 것보다 더 행하는 빌레몬
바울이 요청한 것보다 더 행하는 빌레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빌레몬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있을 때(4절), 그는 오네시모를 진정으로 용서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하였지만, 오네시모가 그에게 끼친 해(害)를 항상 마음에 담아두는 ‘용서 아닌 용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회개한)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되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것 같이 그렇게 온전한 용서를 베풀 것입니다. 하기에, 이제 오네시모를 향한 미움과 불편한 마음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를 향하여 긍휼이 마음이 샘솟아서 그에게 돌아오는 오네시모를 보는 순간,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맨발로 달려나가 그를 얼싸안고 뺨을 비비며 그의 돌아옴을 기뻐하며 영접할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16절)고 했는데, 빌레몬은 바울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외견상으로는 그를 형제처럼 대하지만 실제는 거리를 두는 그런 외식(外飾)을 행하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를 종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빌레몬은 이제는 오네시모를 결코 종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뜻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같이 의논하고 협력하는 형제요 친구로 여길 것입니다. 아마 또한 그의 법률적인 종(노예) 신분도 풀어주어서 실질상으로나 법률상으로나 온전한 자유인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바울이 은근하게 요청한 것은 “오네시모로 나를 섬기게 해주면 좋겠다”(13절)는 것이었는데, 빌레몬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알게 한 바울을 위해서라면, 오네시모를 기꺼이 돌려보내어 그의 복음증거에 도움을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함에 부득이함으로 하지 않고, 첫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둘째는 바울을 위하여 기쁨과 감사함으로 할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의 빚이 있거나 금전적인 빚이 있으면 내게 청구하라”(18절)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항상 복음의 빚진 자로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온 빌레몬은 바울에게 오네시모의 빚을 청구하는 대신에 바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 것이며 그에서 나아가 바울의 필요와 원함을 미리 알고 공급해주기를 힘 쓸 것입니다.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렇게 부모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려거든 차라리 나가서 네 멋대로 살아.”라고 홧김에 책망하였더니, 아들은 아무 말도 않고 제 방으로 올라가서 꾸역꾸역 짐을 꾸리더니 가방 둘을 들고 내려오더니 현관문을 나섭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소리치십니다. “너 지금 뭐하는거냐?”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셨잖아요?!” 아버지는 아들로 인하여 속이 터집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신 말에 강조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집을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모 말 좀 잘 들으라”는 것입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교인들은 닫혀진 마음으로 그 말씀의 뜻을 오해하며, 말씀의 진의(眞意)와는 전혀 반대의 일을 행하면서 그 말씀대로 행하고 있다고 우기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의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라”(갈 3:10-14)고 권고함을 듣고, ‘나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철저히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될래’라고 마음 속으로 작정한 사람은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부득이함으로 행함은 행하지 아니한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서요.’라고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행할 수 없으니 차라리 내 나름대로 살래요’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말씀의 참뜻’을 오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로마서 3장 31절에서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씀할 때, 혼동을 느낄 것입니다. ‘어디에서는(갈라디아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그러더니, 이건 또 뭐야?’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부득이함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법적(法的) 구속적(拘束的) 조항으로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들은 것을 잘 깨달아 지키되, 각 성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기에 들은 것 이상으로 지켜 행하는 삶입니다.

    22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2년 간의 옥중생활을 하였는데, 석방의 때가 거의 다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면 그에게 할 일이 많습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그 당시에 땅끝으로 여기던 서바나(Spain)에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여행하는 것(롬 15:28)이 그 하나요, 그가 개척하고 사역했던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다시 둘러보는 것이요(빌 2:24), 그 일 중에 하나로서 빌레몬이 지도자로 있는 골로새 교회를 방문하는 것입니다(22절). 그 때 그곳에 바울이 머물 처소를 예비하라고 빌레몬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또한 빌레몬이 과연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영접하고 형제로 대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 기도로 너희에게 나아가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그의 서신들 여러 곳에서 성도들에게 그를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렇게 함은 석방을 위한 그 자신의 기도가 약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한 가지 목적을 두고 많은 성도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때, 기도 응답의 힘이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금 천천히 응답을 주고자 하셨는데, 성도들이 큰 기도의 소리로 강청하매, 응답의 시기를 앞당기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는 기도의 놀라운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을 주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성도들을 위한 도고의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할 것인데,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는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Yes"로 응답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3
성도의 결단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을 들으실 때에, 여러분의 낮추고 비운 마음 속이 말씀으로 풍성히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아니 들은 말씀보다 더 행함으로써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놀라운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논리와 한계를 초월하기에 믿음이 없이는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말씀을 듣지만 교회를 떠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는, 말씀하고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일으키심이, 죽은 소녀를 향해 ‘달리다쿰’ 하시면서 일으키심이 성경 속에는 가능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음이 아닌 세상의 판단으로 제한하기에, ‘나의 종교행위’에서 그런 기적들은 결코 나타나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세상의 판단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너무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오합지졸 60만과 잘 훈련된 군사 몇 백만이 싸우면 오합지졸이 패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합리적인 것을 불합리하게 만드시며 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적인 판단으로 볼 때는 참으로 무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제대로 싸울 무기도 없는데,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이 몇 백만의 가나안 군대를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현실 속의 자신들을 바라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무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들은 말씀보다 더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고사하고, 들은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도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10년 했다, 20년 했다는 결코 자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십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의 교인이다,’ ‘삼만 명 모이는 교회의 교인이다,’ ‘이천 명 모이는 교회의 교인이다’라고 하는 것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지금도 능력 주시는 분인 것을 믿는다’라고 담대히 외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있음으로써 들은 것보다 더 행하기를 즐겨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갚으리라” (빌레몬 1:18-20)

                                                   “내가 갚으리라” (빌레몬 1:18-20)

       
                                                                         1
빚의 청산
신용카드의 엄청난 빚으로 인하여 신용불량자가 되고 급기야는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하는 경우가 한국과 미국 등 많은 신용카드의 편리를 누리는 나라들에서 발생합니다. 얼마 뒤에는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급한 대로 우선 카드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해서, 요즘은 빚 청산(‘Debt disappears')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의 에이전트(agent)까지 등장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지고 있는 신용기관과 빚 협상을 하여 얼마정도 할인해주거나 변제기일을 연장해주고 일정의 수수료를 챙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빚 청산이 되지 못하고 그 채무자를 찜찜하게 하고 결국은 신용불량자의 불명예를 항상 지니고 다니게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채권자가 모든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주거나, 다른 사람이 빚 전체를 아무런 요구조건 없이 대신 갚아준다면, 이는 참으로 그 채무자로 하여금 홀가분한 마음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19세기 러시아의 로마노프조의 황제 니콜라이(Nikolai I, 1796-1855)는 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긴 황제입니다. 그는 친히 군대를 지휘하였는데, 종종 평복으로 갈아입고 진영을 살펴 직분을 태만히 하고 자리를 비운 자는 엄히 징계하고 직분을 충실히 수행한 자에게는 크게 포상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군대의 어떤 장교가 처소에 앉아 자기의 빚진 것을 종이에 적어 계산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 빚이 너무 많아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안 그 장교는 탄식하며 빚의 명세를 적은 종이 밑에 “이 산 같은 빚을 갚아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라는 말을 적어 그대로 책상에 놔두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가 자는 사이에 황제가 장교의 처소를 순찰하다가 들어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고는 “이 산 같은 빚을 갚아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라는 말 밑에 “니콜라이”라고 적어놓고 나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장교가 종이 위에 쓰여있는 황제의 필체를 보고서는 놀라 이상히 여깁니다. 그날 밤 황제는 또 평복으로 순찰하면서 장교의 처소에 들어와 봉투에 돈을 넣어 장교의 책상에 놓고는 조용히 나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돈이 든 봉투를 발견한 장교는 너무 감격하였고, 그의 모든 빚을 다 갚은 다음에 사력을 다해 황제와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8장(23-35절)에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는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평균 노동자 1인의 하루 일당이 50-60 달러라고 할 때) 30억 달러(3조  원)에 해당합니다. 연봉이 10만 달러인 사람의 30,000년 봉급에 해당하며, 연봉이 1,000만 달러인 일류 프로스포츠 선수의 경우는 300년 동안 뛰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여 이런 큰 빚을 지었는지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은 죽었다 몇 백 번을 다시 깨어난다고 해도 결코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입으로는 임금에게 ‘다 갚겠다’고 말하지만, 그가 결코 갚을 수 없음은 그 자신과 임금 모두 잘 압니다.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10,000 달란트(30억 달러)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줍니다.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몇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전을 물러 나와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그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자기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빨리 갚으라고 쥐고 흔듭니다. 100 데나리온은 평균 노동자의 100일치의 품삯으로 5,000 달러(50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물론, 평균 생활인에게 적잖은 금액이지만, 그가 탕감 받은 30억 달러에 비하면 60만 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금액입니다. 임금이 그의 빚 30억 달러를 탕감해주었는데, 그는 5,000 달러를 갚지 못하는 그 사람을 옥에 가둡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다시 그에게 빚졌던 사람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태 18:32-33)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비유는 무슨 의미인가 하면, 임금이신 하나님께서는 갚을 길 없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의 빚 (“죄의 삯은 사망”: 롬 6:23)을 다 사하여 주셨는데, 형제의 작은 잘못, 적은 빚을 용서하여 주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끝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 18:34)고 말씀하십니다.

주기도문(마태 6:9-13)을 외울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지나갑니다. 영어성경(RSV, NIV 등)에서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our debtors'(우리에게 빚진 자)라고 번역하고, ’우리 죄‘를 ’our debts'(우리의 빚)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느 한 사람도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 6:14-1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사하여주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진 빚을 사함 받는 것이 서로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에 특별히 용서에 관하여 다시 한번 말씀하심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지만 어려운 일인지 알게 하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또한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는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 빚이 금전적인 빚, 죄와 허물의 빚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복음의 빚과 사랑의 빚이 있음을 지적함입니다.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은 복음을 전해준 사람에게 복음의 빚이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빚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줌으로 탕감되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맛본 사람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이 사랑의 빚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눠줌으로 탕감되어집니다. 복음을 전하되 끝없이 전하여야 하며, 사랑을 나눠주되 끝없이 나눠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의 은혜가 한없이 크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어떤 금전적인 빚이 있거나 불의를 저지른 허물의 빚이 있을 때 그것을 그 자신이 갚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오네시모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빌레몬에게 그도 ‘빚진 자’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또한 하나님께 빚진 자이듯이, 그에게 빚진 자인 오네시모의 빚도 온전히 탕감하여 용서의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8절: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의 불의와 빚에 대한 바울의 회계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이었던 자인데, 주인의 물건을 훔친 것도 큰 죄인데, 훔친 후 도망친 것은 참으로 큰 죄라고 할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후에 훔친 것을 변제한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상전의 권한은 종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절도와 ‘불의의 빚’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압니다. 오네시모가 아무리 빌레몬에게 사죄를 한다고 하더라도 빌레몬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그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잘 압니다. 하기에, 바울은 오네시모 자신이 갚을 수 없는 빚을 그 자신이 회계(계산)하겠다고 나섭니다. 종에 지나지 않는 오네시모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서, 오네시모의 빚이 온전하게 탕감받을 때, 오네시모는 바울을 위하여 그의 동역자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19절: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갚으리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심한 안질로 글을 쓸 수 없는 처지라 통상적으로 대필하는데, ‘오네시모의 빚을 갚겠다’는 약속은 친필로 쓴다고 했습니다. 곧,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 청산을 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갚으리라(I will pay it back)“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금전적인 빚이 크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되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위에 오네시모가 행한 불의--훔쳐서 도망한 행위--를 금전으로 환산할 때 그 금액이 얼마가 될지도 바울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자신있게 “내가 갚으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갚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 큰돈이 있었을까요? 그가 로마에서 옥중생활을 한지 2년이 가까워옵니다.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삼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큰 돈을 모금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돈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단돈 한푼도 남겨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가 옥중(혹은 로마에 셋집, 행전 28:30)에 있으면서 연명했던 것은 빌립보 교회를 위시한 몇몇 교회가 그를 도운 까닭입니다. 바울에게 모아둔 돈이 없습니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제와 선교에 사용하지 (자신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빚 갚는 일에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내가 갚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바울의 허세(虛勢)입니까? 여기에 바울의 지혜가 있습니다.

빌레몬의 빚
바울은 “(오네시모의 빚을) 내가 갚으리라”고 말한 다음에 ‘(바울에 대한) 빌레몬의 빚’을 상기시켜 줍니다. 빌레몬에 대한 오네시모의 빚이 엄청난 것 이상으로 바울에 대한 빌레몬의 빚은 더 크다는 것을 빌레몬으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보듯이, 바울은 신령한 빚이 육신의 빚, 금전적인 빚보다 더 큼을 강조합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이 무엇입니까?
빌레몬이 그의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자인데, 바울이 전하여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이 복음의 빚은 얼마나 큰지 모든 금전적인 빚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이 별로 없다고 여긴다면, 그가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진 빚이 얼마나 큰지 상기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이를 말하지 않음은 빌레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그가 바울에게 진 빚이 무엇이며 그 크기가 어떠한지 알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그가 바울에게 진 (복음의) 빚이 있음을 상기시킴은 그것을 갚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레몬의 빚을 주장하지 않듯이, 빌레몬도 오네시모의 빚을 주장하지 아니하였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20절: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기쁨을 얻고 마음이 평안함
바울이 빌레몬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과 사랑에 빚진 자로서 그에게 돌아가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되 두 손을 벌려 그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의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여 온전히 잊어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빌레몬으로 인하여 바울은 큰 기쁨을 얻을 것이며, 조금은 불안한 가운데 오네시모를 떠나보내는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복음 전했음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라고 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임은 바울을 위함이라기보다는, 또 오네시모를 위함이라기보다는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함과 같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빌레몬을 용서하고 영접하실 것이며, 바울 이상으로 빌레몬을 인하여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어떤 교회를 방문하였더니, 그 교회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갈등이 심하였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 나름대로 교인들을 괘씸하게 여기고, 교인들은 목회자의 부도덕성과 비윤리성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주위의 다른 교인들과 불화하지는 않으십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나 이웃이나 목회자로 인하여 상처받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상처가 하도 커서 도무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진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무지 갚을 길 없는, 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빚을 다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두 팔을 벌려서 받아들이시기를 원하는데, 형제의 나에 대한 빚은 얼마요 그것이 큰 것같이 느껴진들 용서 못할 빚은 아니란 걸 깨닫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을 내가 갚으리라고 했는데, 바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형제와 자매와 교우들과 이웃에 대해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을 향하여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형제와 자매와 이웃의 빚을 주장하는 여러분을 향하여 “네가 내게 진 빚을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시며, 여러분도 형제가, 자매가, 교우가, 이웃이 내게 진 빚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그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영접하신 것같이 내게 빚진 자까지 두 손을 벌려서 영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과 용서와 영접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귀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네 형제와 자매와 교우들과 이웃들의 빚을)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를 늘 생각하시는 아름다운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빌레몬 1:15-17)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빌레몬 1:15-17)

     
                                                                       1
“영접”의 미학
어떤 분이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한 5가지 제안”을 해놓았습니다.
첫째, 영접(환영)하라. 영접(환영)의 말을 하는 것만큼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것은 없다.
둘째, 웃음으로 대하라. 찡그리는데는 74개의 근육이 필요하지만 웃는데는 14개의 근육만 있으면 된다.
셋째,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 하려고만 하면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
넷째, 다른 이들의 감정을 고려하라. 그리하면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견해에 신중하라. 논쟁에는 나의 것, 다른 사람의 것, 올바른 것이 있음을 기억하라.

어떤 사람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 집 주인이 보는 둥 마는 둥 하면 기분이 별로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별 것 없다고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내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저러나’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집 주인이 두 팔을 벌려서 나를 영접하면, 그에게 나의 마음이 열려짐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 속에서는 누구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대접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 초대되어 처음 그 교회를 방문하고 설교를 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교인들이 목사님을 본척만척하거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여도 건성 손을 내밀면 목사님은 마음 속으로 실망을 느낍니다. ‘내 설교가 부족해서 그런가?’, ‘이 교회 성도님들은 냉랭하구나’. 그러나, 예배 후에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교인들이 목사님께 반가이 웃으면서 인사하고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은혜스런 말씀 감사합니다’ 등등 약간 아부성 발언을 하면, 목사님은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그 교회 성도들에게 호감을 갖게 됩니다. 그 목사님을 초청한 분은 그 교회의 목사님 혹은 장로님이지만, 교인들 전체는 ‘우리’가 그 목사님을 ‘우리 교회’에 초청했다는 기분으로 그분을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교회에 처음 출석하거나 방문하는 분이 있는데, 기존 교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함이 참으로 그 교회의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중요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분을 멋쩍게 서있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거나 요구를 하는 것은 그분에게 부담을 주고 실례가 되는 일이지만, 적당한 관심을 보이고 열린 마음으로 그를 (예수님을 영접하듯) 영접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그 교회에 호감을 갖게 하고 다음 주일에도 그의 발걸음을 그 교회로 향하게 만들게 합니다.

                                                                          2
바울은 본문(15-1절)에서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한동안 떠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둘로 더욱 신실하고 새로운 관계 (종과 상전으로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서)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오네시모가 잠시 빌레몬을 떠나게 됐던 이유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 한 동안 방황하다가 이제 다시 그에게 돌아감을 하나님의 (예정적) 섭리로 보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 있었던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이제 바울을 떠나 빌레몬에게 가는 것을 말하는지 불분명한데, 헬라어 원문을 더 정확하게 번역한 영어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Perhaps this is why he was parted from you for a while, that you might have him back for ever" (그[=오네시모]가 너[=빌레몬]를 잠깐동안 떠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갖게 하기 위함일 것이리라, RSV).

누가복음 15장(11-32절)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겉보기에 효자였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긴 하지만 부자관계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아버지가 있는 이유를 그는 몰랐습니다. 그는 다만 아버지의 재산을 얻어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의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순순히 그의 요구대로 그의 몫을 떼어줍니다. 현금도 있었고 밭과 가축 등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다 처분하여 현금을 모아 먼 타향으로 떠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얻을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였기에 아버지의 존재가치는 더 이상 그에게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면서 그의 몫의 재산을 다 허비해버립니다. 그 후에 그는 타인의 일꾼으로서 돼지 치우는 일까지 하게 되었는데 기근이 심하여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를 맺고 생활합니다. 고향에서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 아래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안 하고 평안하게 살 때에는 아버지의 고마움과 존재의 의미를 모르고 살았었는데 이제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과 존재의 의미가 어떠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품꾼의 하나로 여김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가까이에 있음으로 인하여서 그는 안전함을 느끼고 보호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과는 달리 ‘항상’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금방 아들인 줄 알아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더욱 새로워지고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이 잠깐동안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은 아버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그로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이 비유에서는 아버지 자신)의 섭리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네시모(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 역)가 빌레몬(아버지 역)의 재물을 훔쳐서 일정기간 떨어져 있었던 것은 그들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탕자의 비유에서와는 달리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관계로) 더욱 상대의 필요와 의미를 발견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여기서는 빌레몬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섭리였습니다. 즉,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새롭고 더욱 견실하게 하기 위한 떨어짐이었습니다. 빌레몬이 이제 오네시모를 얻되 과거에서처럼 노예로서가 아니라 동료 크리스천으로서 그리고 사랑받는 형제로 영원히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네시모로 어떤 모양(재산을 훔쳐서 도망하는 모양)으로라도 떠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15절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16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개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종과 같이 아니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갈 때 형식적인 신분관계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오네시모를 맞이하여 그 밑에 두면 그들은 예전의 상전과 종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관계를 변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관계를 새롭고 견실하게 하라는 당부입니다. 빌레몬, 네가 전에는 오네시모를 다만 종들 중에 하나로 대하였지만, 이제는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고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대하여주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의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종일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은 자유자요 빌레몬과 다름없이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이므로 그를 형제로 대하여 줌이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사랑받는 형제 (ἀδελφός ἀγαπητός: beloved brother)”라는 표현을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골 4:7, 9; 몬 1:16). 빌레몬의 집 교회에 속한 골로새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에도 바울은 골로새서 4잘 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로 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사람이요,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형제와 자매”인 것입니다.

불가(佛家)에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因)과 연(緣),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 원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인 힘이 되는 연줄’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에서 보듯이, 모든 인간관계와 사물의 관계가 이 인연에 의하여 형성되고 이어져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이 불가의 ‘인연(因緣)’과도 같은 ‘관계(關係)’의 특별함을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섭리(攝理)와 계획(計劃)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엡 5:22-33; 골 3:18-19), 부모와 자녀의 관계(엡 6:1-4; 골 3:20-21), 상전과 종의 관계(엡 6:5-9; 골 3:22-4:1), 성도와 성도의 관계,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 등 이 모두 다 특별한 관계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형성되어진 관계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오네시모가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형제요 협력자가 된 것이 특별한 관계라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처음부터 상전과 종으로 만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더욱 특별하고 깊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네시모가 바울의 사랑을 받은 것 이상으로, “육신과 주 안에서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상관(相關)된” 빌레몬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바울에게 협력자가 된 것 이상으로 빌레몬의 협력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7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요 사랑을 받을 자요, 유익한 사람입니다. 이 오네시모를 바울은 그 자신과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위하여 지금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라고 했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음의 사람이 된 빌레몬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동무로 여긴다면 바울의 당부를 들어줄 것입니다. 여기, “동무”로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는 ‘협력자, 동역자 (partner, sharer)'란 뜻입니다. 바울을 협력자요 동역자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영접하되 바울을 영접하듯이 그리하라는 당부를 빌레몬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역시 ‘영접’의 아름다움과 달란트를 발휘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영접하되, 그리스도를 대함같이, 바울을 대함같이 그렇게 따뜻한 마음과 환한 얼굴로 영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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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향하여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열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였어도, 혹은 귀한 것을 상실하는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향하여 긍정적이요 열린 마음일 때 우리는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축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앎이 필요함은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당한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며, 참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일꾼으로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여러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에 감사하되 이 관계들을 최대로 선용할 것이며, 이 관계성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힘쓰시되,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 주위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열린 마음으로 영접할 것이며,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심복 오네시모” (빌레몬 1:8-14)

                                                   “내 심복 오네시모” (빌레몬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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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와 조교
제가 경험한 미국대학의 교수들은 개인적으로 책이나 저널(journal)에 게재하기 위한 논문을 쓰는 일로 대학원생들인 조교(RA나 TA)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응분의 감사를 표시하거나 대우를 해줍니다. 그 도움의 정도 여하에 따라서 머리말에 감사를 언급하거나 도움이 감사 정도의 것 이상일 때는 책의 공동저자(co-author)로 이름을 올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이것이 웬만한 미국대학의 상식 있는 교수들의 경향입니다.
요즘 한국대학의 교수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인터넷 상에 보도되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 보이지만), 10년-20년 전의 교수들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수가 자기 밑에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들은 공적인 일 뿐 아니라 사적인 일을 시켜도 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조교에게 담배나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몰상식한 교수도 있었습니다. 조교의 입장에서 별로 심부름 해주고 싶지 않지만, 교수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손해를 볼까봐 마지못해 억지로 시키는 일을 감당합니다. 책을 쓸 때 그의 조교인 대학원생으로부터 상당부분 도움을 받거나 책의 한 두 장(chapters)은 실질적으로 조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사실인데도 그 조교의 이름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교에게 그의 연구논문이나 저서를 위해서 일을 의뢰할 때도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만일 조교가 교수의 연구나 저작에 비협조적일 때는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오래된 얘기입니다만, 한국 경제학계의 어느 유명교수가 유명원서를 번역하는데, 자신이 번역한 부분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상당부분은 조교들에게 명령하여 공짜 아니면 거의 헐값으로 번역된 것이고 또한 일부분은 경제연구소의 연구원들에게 번역비를 제공하면서 의뢰를 하여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번역서(飜譯書)는 전적으로 타인에 의하여 번역된 500여 페이지 원서의 번역원고를 대충 훑어보고 출판사에 넘긴 그 유명교수의 이름으로(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번역한 것처럼) 출간됩니다. 번역에 실질적인 공이 있는 조교는 교수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 (논문통과가 수월하리라는 기대감에서) 감지덕지(感之德之)해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타입의 교수인가 하면, 다른 사람의 공로를 가로채어 자기의 것인 냥 하는 경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서신에 대필자의 이름(소스데네, 더디오 등), 서신 첫 머리에 동역자 혹은 공동저자의 이름들(소스데네, 디모데, 실루아노)을 언급함으로써 그가 누구의 도움을 받고 누구와 함께 편지들을 쓰고 있음을 명백히 밝혀 놓고 있습니다. 해서, 바울의 조교들과 협력자들의 이름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바울은 그의 조교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감당함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자원함이나 기쁨이 없는 사람에게 마지못함에서 일을 수행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전능자시요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강요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명하심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즉각적인 징계나 불이익을 주리라고 위협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징계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하여 마지못하여 그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부터 보시기를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기쁜 마음으로 충성하고,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성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3장 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헌신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의 일로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주고 사시고 세우신 교회의 일이지만) 교인들에게 강요하거나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달할 때, 교인들이 자원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처럼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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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4-7절)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믿음의 교제를 칭찬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집 교회를 찾는 성도들이 평안함을 누리고 신앙의 선배인 바울은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8-14절)에서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 바울의 목적과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8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마땅한 일로 빌레몬에게 명할 수 있는 바울(Paul)
빌레몬에게 사랑과 믿음이 있다는 소문이 바울의 귀에까지 들어오기에, 그로써 많은 성도들이 평안함을 얻었다고 하기에, 만일 이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오네시모의 일로 그에게 명하는 일도 그가 들어줌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즉 소문만큼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과 믿음의 교제가 대단한 것은 아니며 성도들이 그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은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빌레몬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만큼 신앙의 부모요 선배인 바울이 명하는 것은 그가 들어야 할 것입니다. 빌레몬이 신앙의 선배인 바울의 명령을 듣지 않을 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리스천에게 용서는 당연한 것이기에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명령하는 일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라고 함은 노예는 그 상전의 소유물이요 그 노예를 어떻게 처리하든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일임에도 바울이 이 일로 노예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말하는 일이 지나친 간섭이요 자칫하면 의를 상하게 하는 일이기에 이 일에 관하여 말함이 바울에게는 담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므로”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빌레몬이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베풂이 마땅한 도리이기에, 그에게 신앙의 부모요 선배로서 명령할 권한이 바울에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강요에 의하여 마지못함에서 나오는 행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할 때 이와 같이 마지못함이나 억지로 그 일을 감당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마땅한 크리스천의 도리라고 하더라도 빌레몬에게 자원함과 기쁨과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그의 오네시모에 대한 감정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9-10절: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랑을 인하여 간구함
지금 바울이 오네시모의 일로서 빌레몬에게 말함은 고압적인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사랑에 호소하는 간청입니다. 우리의 상전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종인 우리들을 대하시되 우리의 죄와 허물로 원수되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으셨음을 빌레몬이 알 것입니다. 무익하고 보잘 것 없던 종이었던 우리에 대한 상전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큰 데, 너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받아줌이 좋겠다는 바울의 바람의 표시입니다.

나이 많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라고 간청하는 것이 자기는 그런 일을 전혀 감당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부탁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현재의 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현재(62년경) 그의 나이가 60세를 전후한 때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나이가 60세가 되도록 20-30 년의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데 모든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또한 바울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된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목숨까지 드리기로 작정한 까닭입니다.
빌레몬에게 이를 말함은 바울의 현주소를 그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간청이 신앙선배의 고압적인 지시가 아닌 한 영혼을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부탁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한 간구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노예로 있었을 때에도 그는 먼저 믿은 상전 빌레몬을 따라서 종교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여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었기에 오네시모에게 그것은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행위였을 분입니다.
그러한 오네시모가 골로새에서 주인 빌레몬의 재물 중에 일부를 훔쳐서 달아났습니다. 그 재물을 다 탕진한 후에는 또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그는 로마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과 그가 범한 지난 잘못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한 때는 교회도 다니던 사람인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서도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바울이 현재 갇혀 있는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거나, 아니면 바울의 소문을 듣고 그를 한 번 만나기 위해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을 방문하여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오네시모가 자유의 몸으로 골로새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을 보면 2년의 옥중생활을 한 바울보다 죄의 중량이 가벼웠던지 아니면 바울을 단순히 옥으로 방문한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전에 빌레몬과 함께 있었을 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복음의 기쁨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바울로 말미암아 그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전도와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를 본 바울의 기쁨도 참으로 컸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빌레몬에 대한 빚진 자의 부담에서 벗어나 (여전히 종이나) 그리스도의 참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였고, 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2절: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전에는 무익하였던 오네시모
오네시모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무익했던 자입니다. 그가 빌레몬의 집에서 종교행위를 하였더라도 그것 역시 무익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유익한가 무익한가는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의 여부로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지위가 높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닐 때 그의 뛰어난 학문과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전혀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하고 다만 무익할 뿐입니다.

오네시모가 “이제는 나(=바울)와 네(=빌레몬)게 유익한 것”은 그가 참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인하여 바울과 빌레몬의 주님을 위한 사역에 동역자요 협력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상전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크리스천 오네시모’가 ‘크리스천 빌레몬’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고 또 그의 사랑을 동반하는 믿음의 교제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평안함을 얻은 것이 사실이지만, 오네시모에 대하여 불쾌한 감정이 여전히 있을 것 같아 바울은 적지 아니 염려가 됩니다. 사실, 바울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가 중간에 육체의 피곤함을 못 이기기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었습니다(행전 13:13). 그 일로 바울은 마가에 대하여 심히 실망하고 그를 다시는 상종 못 할 사람으로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카를 두둔하는 바나바와도 심히 다투고 (주를 위한 전도의 여행이긴 하지만)각각 다른 길로 떠났던 씁쓸한 기억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안 했어도 좋았을 것을, 바나바의 말대로 마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듭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바나바와도 다시 좋은 관계가 되고, 마가는 그가 가까이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목회자의 동역자요 협력자가 되었지만, 그에 대한 한동안의 불쾌하고 괘씸한 감정은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빌레몬이 자기의 과거의 적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음을 본받아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여쭈워볼 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느데, 믿는 사람들의 삶에 용서가 너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다툼 한 번 하고, 섭섭한 일을 한 번 당하고 서로 안 보고 지내는 교인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저(=오네시모)는 내 심복(=my very heart or bowels)이라”고 했습니다. 깡패들의 용어(用語)에 “심복 부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복 부하”란 자기의 비밀과 소유까지 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부하를 의미합니다. 곧 자기의 대리인이요 분신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심복”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프랑크나”(σπλάγχνα)는 ‘사람의 가장 속에 있는 내장 혹은 심장 혹은 감정’을 의미하는데, 영어성경은 ‘heart(심장: RSV/NIV)’ 또는 'bowels(창자: KJV)'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아담이 그의 속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는데, 바울이 “내 심복”이라고 말한 것은 오네시모를 대할 때 나를 대하듯 대해 달라는 당부입니다.

    13절: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빌레몬 대신 오네시모로 주의 일을 감당케 하기를 원하는 바울
바울은 옥에 갇혀 있는 몸이지만 끊임없이 주님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기를 원합니다.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되 “(더 넓게) 전도할 문을 열어 주십시오”(골 4:2)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유한 몸이거나 매인 몸이거나 전도의 기회를 얻기 위해 힘썼기에 그는 유언적인 서신인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강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현재 갇혀 있는 상태이기에 비교적 자유로 활동할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곁에 현재 디모데가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는 더욱 더 많은 일꾼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복음 증거 사역을 거들어줄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빌레몬은 현재 골로새 교회의 사역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 복음을 깨닫고 전도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오네시모가 그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도망친 종인 것을 아는 입장에서 이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요 크리스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바울은 먼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도리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바울의 뜻과 바램을 헤아려 오네시모를 다시 그에게 보내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14절: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自意)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억지(抑止)가 아닌 자의(自意)를 원하는 바울
바울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오네시모는 바울의 곁에 머물면서 바울의 복음증거 사역을 돕고 싶은 원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상전인 빌레몬의 (그의 죄에 대한) 용서와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이기에 찜찜하고 무거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돌아가서 용서를 구하자니 그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해서 오네시모의 마음을 헤아린 바울이 그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되 이와 같이 간절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도 바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항상 그에게 감사하고 있음을 알기에,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대신에 인편에 그가 오네시모를 원하기에 돌려보내지 않고 가까이에 두고 그를 섬기게 하고자 한다고 하면, 빌레몬이 굳이 ‘절대로 안 된다’고, ‘당장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라’고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은 억지처럼 될 것이기에 오네시모에 관한 모든 처분을 빌레몬에게 맡기되, 다만 빌레몬과 오네시모 둘 모두를 사랑하는 바울의 간절한 마음과 그가 현재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그의 다른 서신들과 빌레몬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함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억지(抑止)나 마지못하여 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삶이거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나의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데 억지로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내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되, 기쁨과 감사와 자원함으로 그리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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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바울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의(自意)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무엇을 드렸습니까? 무엇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의 마음은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시니 할 수 없이 드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기에 마지못해 주일출석하고, 마지못해 헌물하고, 마지못해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복음적 삶의 모습이 아니요, 율법의 구속(拘束) 하에 있는 것이요, 여전히 가인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가 어떠한지 먼저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명령에 가까운 강청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이기에 주님께 헌신하고 헌물하고 생명까지 드리기를 원하고, 나가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Saturday, January 5, 2013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빌레몬 1:4-7)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빌레몬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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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두 발 자전거 타기
성도의 신앙생활은 ‘두 발 자전거(Two-Wheel Bike)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두 발 자전거를 탈 때 페달(pedal) 밟는 일을 멈추면 자전거가 쓰러지듯이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도들 가운데 믿음과 사랑의 교제하는 일’을 멈추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정지하여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두 발 자전거 타는 사람은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서 페달을 밟으면 다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지만, ‘기도와 믿음과 사랑의 교제’라고 하는 페달 밟는 일을 중단하여서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나서 그의 신앙의 두 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니, 매우 어렵게 생각됩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한 주일, 두 주일 거르다가 혹은 아예 몇 달, 일 년 이상을 쉬었던 사람이 다시 교회를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경험해본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교회를 매주일 다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도 가운데 믿음과 사랑의 교제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것을 처음 시작하는 일도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이를 중단했다가 다시 재개함이 처음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것은 본인에게 왠지 쑥스럽고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두발 자전거의 페달 밟는 것을 노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함이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의 믿음의 정진은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자세에서 가능합니다. ‘나는 이만하면 됐지’ 하는 목회자나 성도에게는 신앙에 발전이 없습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에서나 짐승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해서, 예수님은 뱀의 (간교함은 빼고)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함을 배우라(마태 10:16)고 말씀하시고,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함이 아닌) 지혜롭게 셈하는 방법을 배우라(누가 16:8)고 말씀하십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에게 신앙의 삶에 전진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끊임없이 읽고 정기적으로 설교를 듣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며 보다 성숙한 목회자나 성도가 되기 위하여 내게 필요한 것을 더하기 위함입니다.

칭찬하는 크리스천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참으로 인색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일’입니다. 저도 옆 사람이 ‘아부성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괜히 부아가 나고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 사실인데, 이러한 것이 때로는 필요함을 속으로 느낍니다. 그런 ‘아부성 발언’으로 부정부패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분수에 넘치는 칭찬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80점을 맞았으면, 흔히 부모의 입장에서 ‘야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 온 거냐?’ 하고 윽박지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문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80점이나 맞았어. 참 잘했구나. 그런데,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면 아이로 더욱 분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사나 부모나 주위사람들의 평범한 것 같은 칭찬이 그들로 하여금 큰 일을 해내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성도들을 칭찬하는데 특별한 은사가 있던 목회자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이 별 것 없고 문제 투성이였는데도 그들 가운데 조그만 칭찬거리를 찾아서 칭찬을 합니다(고전 1:5-7). 바울의 각 서신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칭찬하고자 하는데 이렇게 함은 그가 정작 말하고자 함이 그들의 열린 마음 가운데 전달되기를 원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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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칭찬함은 그로 말미암아 그가 열린 마음으로 바울이 의도하는 말을 듣게 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빌레몬이 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쳤던 오네시모를 (바울이 칭찬하는) 그 믿음과 사랑의 교제로 받아들여달라는 것입니다.

    4절: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바울의 감사와 기도
바울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는데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성도들의 삶에 항상 넘치게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감사할 것이 있어야지 감사하지요’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것이지만, 바울의 감사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가운데서 나오는 감사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감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이 감사하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심이 감사하고,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 당하고 상심할 때에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소망을 주시니 감사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을 주시니 감사하고...

바울은 흩어져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함께 교회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많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잘 들어주십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그 성도의 결점보다는 장점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미운 감정이 줄어들고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는데, 그러나 이는 목회자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5절: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감사한 것은 빌레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은 까닭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1장 15-16절에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고 했고, 또한 골로새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도 1장 3-5절에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라고 했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도 데살로니가전서 1장 2-3절 (또한 살후 1:3)에서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과 골로새 성도들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그들을 말한다고 했는데, 빌레몬서에서도 동일한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쁨, 기도와 감사가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의 신앙의 표현방법이라고 한다면, 성도의 사랑과 믿음(또는 믿음 과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는데 성도들을 사랑함이 내게 없다면 나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자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성도들에게도 표현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즉, 믿음은 성도의 내적 상태요 사랑은 외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인데, 그 믿음은 그저 아무 의미나 열매 없이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나타내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항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또한 그 믿음의 표현인 하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바울이 들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 중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6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믿음의 교제
“네 믿음의 교제”(ἡ κοινωνία τής πίστεώς: the sharing or communication of your faith)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의 교제’란, 첫 번째는 빌레몬이 하나님과 믿음으로 교통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의 믿음을 다른 성도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게 함입니다. 세 번째는 빌레몬이 그가 갖고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으로 향한 믿음으로 성도들과 교제함입니다. 빌레몬이 믿음으로 그의 집을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것이 믿음의 교제이며, 또한 모인 성도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고, 그의 '집 교회(house church)'를 찾아온 방문자에게 숙박의 장소를 제공함이 믿음의 교제 또는 나눔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교제를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것이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따라 인자와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하나님과 믿음으로 교통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을 성도들에게 증거하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성도들에게 교회장소를 제공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고, 방문객을 친절하게 대접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그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집니다. 그리할 때, 빌레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을 얻고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처럼 예수 믿을 바에야 차라리 나는 안 믿어’ ‘저런 사람도 예수 믿고 천당 간다면 나는 차라리 그곳에 안 갈꺼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온갖 나쁜 짓을 도맡아 하네’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이 사람을 통하여서는 아무런 선한 것이 그리스도께 미쳐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이 비난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교제가 있는 삶이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그로 인하여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고 찬송을 받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절: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음
“Make yourself at h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집을 방문하면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긴장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주인이 손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집에 있는 것처럼 평안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그의 집을 방문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환영하였습니다. 빌레몬이 ‘믿음의 교제’를 따라 사랑을 성도들에게 나누어줄 때 그의 집 교회를 찾는 성도들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기쁨과 위로를 얻음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의 교제에 관하여 로마의 옥으로 그를 방문한 에바브라를 통하여 들었을 것입니다(골 1:7-8). 빌레몬은 바울이 에베소 전도를 하고 있었을 때 그에게서 복음을 들음으로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온갖 고생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어떤 물질적 보상을 바라기보다는 그 자녀의 잘됨이 부모에게 커다란 기쁨과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믿음의 자녀인데, 그가 이제 믿음이 성장하여 그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을 얻고 있음을 듣는 목회자 바울의 마음은 커다란 기쁨과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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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사랑과 믿음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형제와 자매를 사랑함이 나타나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성도들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삶의 증거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교제’가 여러분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나타나지기를 바랍니다. 그러하므로, 우리 교회를 처음 찾는 사람이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과 사랑을 동반하는 믿음의 교제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고, 해서 우리 교회가 인근 주위에 주님 안에서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고 소문나기를 소망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분은 목회자를 신명나게 하고 위로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에게 영광돌리는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빌레몬 1:1-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빌레몬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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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수단(手段)이 아니라 목적(目的)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야 할 터인데, 좀 더 편한 세상 삶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감각의 믿음을 갖고 그들의 생각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해석합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 감각을 가진 교인에게 한글번역 “그리하면”이 참으로 매력적인 접속사(conjunction)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하는 문제에서 축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믿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현실 축복의 삶”에 한 조건이 됩니다. 즉,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자 함은 더 큰 매력인 현실에서의 만사형통의 삶의 비결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현실 축복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우선이요 목적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이러한 약속의 말씀 자체를 믿지 않아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자체를 살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오해의 소질을 유발한다는 면에서 한글성경의 “그리하면”(앞의 구절을 조건절처럼 해석하게 한)이란 말은 부적절한 번역입니다. 영어성경의 번역이 헬라어 원문에 더 충실한 번역인데,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KJV). 이것을  번역하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원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부차적인 축복으로“ 이 세상의 삶의 방편도 마련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 현실의 삶--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의 접속사는 ”그리고“(καὶ: and)이지 ”그리하면"(then)이 아닙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를 잘못 해석하면, 신앙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을 현실축복 삶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재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의 한계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삶의 한 방편이요 수단이지 목적이 절대로 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확연한 구분이 있습니다. 그 구분은 때가 찬 경륜을 인하여(엡 1:9) 그리스도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비밀이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남으로 말미암은 구분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같이 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심이 필요하고, 이 세상에서 그들을 축복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부요한 삶을 허락하셨고, 야곱을 축복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많은 가축의 떼를 더하셨습니다. 요셉을 축복하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로 애굽의 국무총리를 삼으셨습니다. 다윗을 축복하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고, 솔로몬을 축복하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에게 부와 명예와 장수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현 세상에 존재하는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인물들에게 현실에 속하는 조건들로 하나님의 축복들을 확인시키셨습니까?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실의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업의 축복이 약속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의 보증으로 각 성도 안에 성령의 역사를 체험케 하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약시대의 성도들과 교회들이 온통 현실의 축복이 축복의 전부인양 이것들로 인하여 기뻐하거나 근심한다면,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가 유대주의보다 나음이 무엇인줄 모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인류역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성도들의 삶이 아직 하나님 나라가 계시되지 않은 유대주의 입장에서 해석된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현실에서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까? 환난과 핍박은 그들의 몫이고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이 세상에서의 평안한 삶입니까?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과연 무엇입니까?
부한 삶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삶입니까?
상류층의 삶입니까? 아니면 하류층의 삶입니까?
지배자의 삶입니까? 아니면 피지배자의 삶입니까?
환경이 하나님의 축복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하는가 아닌가?’ ‘내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나의 입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향한 감사와 찬송이 있는가 없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음은 우리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시대의 믿음의 선진들의 감사와 찬송을 좀더 진지하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자랑과 간증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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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두기고 편에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골로새서와 함께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한 장으로 된 짧은 편지를 통하여서 우리는 바울의 자랑이 무엇이며 그가 보여준 그리스도인의 형제애(φιλαδελφία: 필라델피아)가 어떠한 것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1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Paul)
요즘 간증집회를 인도하는 분들의 자랑과 간증거리는 주로 세상 삶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더니 사업이 번창하는 축복을 받았다’, ‘자녀들이 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유수한 기업의 중역들이 됐다’ 등등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할 일이지만, 세상에서 받는 축복 정도가 믿음의 분량을 측량하는 기준인 것처럼 여기는 간증은 성경의 메시지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랑과 간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a prisoner of Jesus Christ)라고 자신을 칭했습니다 (또한 몬 1:9).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절에서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라고 했고, 또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또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당하고 있는 약한 처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고후 11장 30절). 세상 삶에 집착하는 현대 교인들의 자랑과는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바울의 세상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겠습니까? 바울은 그런 것보다는 그의 약한 것들을 (아니 약하게 보이는 것들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강하고 부하게 보이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약하게 보이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방나라에 증거하였는데 나는 오히려 갇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전도했는데, 나는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난한 삶 가운데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나는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나의 사업은 실패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패 속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되니 나는 행복한 실패자입니다.’ 이렇게 간증하시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성숙해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고난에 처하거나 실패를 자청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성공 중에 있거나 실패 중에 있거나 한결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함이 믿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 디모데(Timothy)
디모데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만난 사람입니다(행전 16:1). 어머니 유니게(Eunice)와 할머니 로이스(Lois)는 믿음이 좋은 유대인이었으며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본시  성품이 착하고 인근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던 사람(행전 16:2)이었습니다. 바울을 만난 이래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사역에 협력하였습니다. 후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곳 교회를 사역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절에서와 여기서는 형제(brother)라고 부르고 있지만,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는 “믿음 안에서 참아들 된 디모데”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1장 2절에서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를 때로는 ‘형제’라, 때로는 ‘사랑하는, 믿음 안에서 참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가 바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된 사람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믿음의 형제와 자매, 친구가 필요한 것은 이들로 말미암아 믿음이 더욱 굳어질 수 있으며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Philemon)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서 전도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 그곳을 방문하여 복음을 들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가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후 골로새로 돌아와서 에바브라 등과 가정교회를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7절과 9절에서 두기고와 오네시모에게 “사랑을 받는 형제”란 수식어를 사용하였는데, 빌레몬에게도 동일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들과 하나님께 우리 믿음의 신실함과 삶의 한결같음으로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일을 목회자와 다른 성도들과 함께 감당하는 “동역자”(fellow worker)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절: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자매 압비아(Apphia)
“자매(sister) 압비아”라고 했는데, 빌레몬의 아내로 짐작됩니다. 바울이 그를 “자매”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바울과 일면식(一面識)이 있든지 이름을 전해 들어 알든지 하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 압비아와 그 아들 아킵보의 이름을 열거한 것을 주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 속한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협력과 성장은 최소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한 교회에 속한 남편과 아내가 불화하는데, 부모와 자식이 갈등하는데, 성도들이 속한 가정들의 연합인 교회가 조화하고 평안하며 성장하겠습니까?
교회생활을 하는 부부들 중에 의외로 많은 가정들이 불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와 남편의 믿음의 정도가 달라서 불화하고, 믿음의 색깔이 달라서 다투는가 하면, 기존의 갈등이 그들의 신앙생활을 원만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에 오는 차안에서 한바탕 다퉈서 얼굴이 벌건데, 예배 중에 찬송을 부른들 은혜가 있겠으며, 설교를 들은들 그 말씀으로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는 신앙의 색깔과 의견의 차이로 아예 서로 다른 교파의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화목과 주님의 일을 위한 협력과 동역을 생각한다면, 부부는 오랜 애정생활의 결과로 생김새와 성격이 닮아가듯 신앙의 모양과 정도도 “발전적으로” 닮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남편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할 때 아내도 함께 기도하며, 아내가 교회를 위해서 봉사와 희생하기를 원할 때 남편도 봉사와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는 믿음의 가정과 교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바울 주위에 있는 부부 중에 대표적으로 신앙의 본을 보인 부부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그들은 누가 더 먼저요 나중이랄 것도 없이 바울의 사역에 전적으로 동참한 부부요 바울과 그 사역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 3-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압비아와 빌레몬 부부도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함께 협력하고 봉사한 부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협력과 동역이 있었기에 아들 아킵보가 골로새 교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군사 된 아킵보(Archippus)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서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사역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아킵보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군사 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3-4절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목회자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하기를 원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 군사 된 자”입니다. 군사 된 사람의 할 일은 대장이신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맡겨진 복음증거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House Church)
초대교회는 가정교회들 중심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가정교회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행전 12:12)에 있었고, 빌립보 가정교회의 처음 시작은 자주(紫紬) 장사 루디아의 집(행전 16:40)에 있었고, 로마에서의 가정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롬 16:5; 고전 16:19)에 있었고, 라오디게아에서의 가정교회는 눔바의 집(골 4:15)에 있었고, 골로새에서의 가정교회는 빌레몬의 집(몬 1:2)에 있었습니다. 지역이 비교적 넓은 갈라디아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데(갈 1:2) 이들 또한 여러 명의 성도들이 자신의 집들을 예배의 장소--가정교회--로 제공한 것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들도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와 동일한 것으로서 이들은 살벌한 문화혁명(文化革命) 기간에도 모이기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모여 문화혁명이 끝난 다음에 교회가 말살되지 않고 오히려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혁명 전보다 몇 십 배 증가하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거처를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집과 사역을 축복하셔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놀랍게 증가시키셨습니다. 바울 당시의 이런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성장과 복음이 땅 끝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까?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누구나 다 꺼려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구역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인데,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그 위에 수시로 모이는 모임의 장소로 집을 제공하는 것이 보통 믿음으로 되겠습니까? 장소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 또 때로는 먼데서 찾아온 방문객을 위하여 잠자리까지 제공해야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현대를 사는 많은 교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나 감당하는 것들이지 오늘날 교회생활을 하는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의 이야기가 하나님 말씀인 것은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함
바울서신들의 서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문안인사의 정형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그런데, 한 군데도 예외 없이 “은혜와 평강”의 순이지 “평강과 은혜”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 다음에 평강이지, 은혜가 없는 평강은 없습니다. 성경적인 은혜, 카리스(χάρις)는 태양처럼 크고 뜨거운 하나님이라고 하는 본체에서 발산되어 우리에게 미치는 그의 ‘다함 없는 사랑과 긍휼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감(體感)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사랑을 갈망하는 성도들에게 은혜의 증거 또는 표현으로서 선물(gift as an expression of divine grace)을 주십니다. 이 ‘은혜의 선물’을 카리스마(χάρισμα)--(성령의) 은사(恩賜)라고 하는데, 이는 좀더 구체적이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강(εἰρήνη; 히브리어로는 샬롬[םולשׁ])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화목케) 되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롬 5:1-2). 이 하나님의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쉽게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3
성도의 결단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떤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갇힌 자 된 것도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 여러분에게 임하신 축복을 자랑하되, 남의 눈에는 안 된 것처럼 보이는 축복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을 사시되, 성도들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주시고, 성도들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받는 자가 되십시오. 또한 목회자들에게는 협력자요 동역자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 속한 것들을 교회를 위해서,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는 헌신적이고 넓은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여러분 삶 가운데, 여러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강(평안)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