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시편 42:1-1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시편 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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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영혼의 갈급함을 호소하는 우편의 극악한 강도에게는 낙원을 보장하셨지만, 영혼의 갈급함이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들 중에 영혼의 목마름에 대한 갈급함이 혹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그렇게 절실히 찾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나 정신의 번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수면제나 술로 그의 번민이나 고통을 달래고자 합니다.
몇 년 된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수면제가 1년에 700억 알이나 소비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 사람이 먹는 수면제가 1,900만 알이 됨을 말합니다. 하루에도 1,900만 명이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아스피린은 한 해 동안에 1,100만 파운드나 팔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1년에 750억의 두통 건수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에 시달리고 있으며 불안해하고 있는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욕체의 고통이 있을 때 병 낫기를 위하여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기보다는 의사를 찾는 일에 더 빠릅니다. 의사의 손을 하나님께 주장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손을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을 믿을진 데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직접 고쳐주시기도 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을 찾는 나의 영혼의 갈급함을 더욱 간절하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현대 교회의 젊은이들의 무미건조함, 감격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노인들 중에 어떤 이는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데, 청년들은 감동이 전혀 없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어느 힌두 소녀가 여자 선교사님의 설교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듣다가 흐느껴 웁니다. 선교사님은 소녀에게 “어디가 아픈가?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나?”라고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아니에요, 주님이 참으로 나를 위해 그토록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은 내가 차마 들을 수 없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선교사님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자주 들으면서도 그저 그렇게 들었던 자신과 그토록 감격하고 아파하는 힌두 소녀의 순수한 구원경험을 비교하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마비되어 있었는지 깊게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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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있습니다. 고라는 모세 시대에 살던 사람입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반역할 때에 그들과 함께 그들 가족의 대부분이 갈라지는 땅 속으로 삼킴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고라의 가족이 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라와 그 배반하는 무리와 함께 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민수기 26장 10-11절의 기록을 보면,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고라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은혜입니다. 다윗 시대에 고라의 자손들 중에 얼마는 성가대원으로(역대상 6장), 또 얼마는 성전의 문지기로 봉사하였습니다(역대상 26:1).시편 42편은 고라의 자손들 중에 찬양대의 일원으로 찬양을 하던 사람에 의해서 지어졌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시편기자를 외면하고 돌아선 듯한 비참한 지경에서 오로지 하나님을 부르는 시인의 심경이 연약한 사슴의 갈급함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오로지 눈물뿐임을 밝히면서 그 옛날 자신의 즐겁던 신앙생활을 회고합니다(1-5절). 이어서 시편기자는 고난의 신앙적 승화를 더욱 전개시켜서 난관에 봉착한 시인의 극단적 좌절상태를 표현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위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신앙을 끝까지 견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최후승리를 믿는 신앙인은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불사조같이 되살아나는 삶의 용기를 얻게 됩니다(6-11절).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이여”...시의 첫마디가 하나님을 찾아 저절로 터져 나오는 육성으로 되어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시편기자의 심경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사슴은 빠른 발을 가진 민첩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높은 곳을 좋아하는 고상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사무엘하 22장 34절에서 다윗은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높은 곳에 세우시며”라고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박국은 3장 19절에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민첩하고 고상한 사슴은 풀을 먹지 않고는 일주일 이상도 견딜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고는 몇 일을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은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은 간절합니다. 하루, 이틀을 사막에서 물을 찾지 못한 사슴은 이제 남은 하루 또는 이틀 안에 물을 반드시 얻어야 살 수 있습니다.
“갈급하니이다”...하나님을 향하는 애타는 심경이 육체의 목마름으로 묘사되어 더욱 실감나게 전해집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이와 같이 갈급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한 심령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은 자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의 참 의미는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통하여서만 확인되어질 수 있습니다.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편기자는 비록 자신이 지금 당장은 고통 중에 버려져 있으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패배하시거나 죽으셔서가 아님을 강력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시편기자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과거에만 역사하시고 활동을 중단하신 분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차마(אמצ)는 ‘갈증나다’란 뜻으로 사막에서 목이 타 샘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간절히 열망함입니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성막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향한 그의 사모하는 마음을 성소를 향한 갈망으로 표현합니다.

3절: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고통 당하는 의인에 대한 신앙적 모독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의인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그리고 종말적으로 심판대 앞에서도 끝내 의인의 하나님으로 살아 계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네 하나님을 보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여 러분이 평안하고 모든 것이 잘나갈 때에는 “나를 보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 못하느냐?” 당당히 큰 소리 칠 수 있겠지만, 어려움이나 육신의 고통 중에 있을 때에는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갇히거나 예배드릴 수 없는 형편에 있을 때에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편기자의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조롱하는 대적들의 비웃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눈물로 양식을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오 늘 시편기자도 잘 나가는 때에는 당당히 “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심을 보라.”고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쫓기는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전을 찾을 없는 형편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하고는 거리가 먼 상황에 있습니다. 해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며 사람들이 조롱할 때 거기에 산뜻한 답을 해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욥이 그의 모든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고 그 자신은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고통이 극심할 때, 그의 아내는 그를 향하여 말하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삼촌의 집으로 피하여 갈 때 그는 벧엘이라고 하는 곳에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 28:20-21).
여러분의 ‘상황의 좋고 나쁨’이 하나님은 계시다, 안 계시다 판단 내리는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축복하시느냐 아니 하시냐’가 나의 하나님이 되시냐 되시지 않느냐 판단하는 근거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심령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계속 발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함입니다.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편기자의 이전의 상태는 제사나 찬양대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주의 성소로 인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처지는 하나님의 전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전에는 기쁨과 찬송을 마음껏 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숨소리조차도 죽여야 하는 입장입니다.
“이 일을 기억하고”...예루살렘에서의 성소를 자유로이 기쁨과 찬송으로 드나들던 때를 생각하면서 지금의 자신의 제한적이고 성소에서 멀리 떨어진 현재와 비교해 봅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샤파크(שׁפך)는 ‘엎지르다’, ‘쏟아놓다’는 뜻으로 물을 엎지른 것처럼 생명이나 영혼의 기운이 다 소비되어 탈진한 상태입니다. 불신자들이 자신의 신앙과 하나님의 존재를 모독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도의 분노와 함께 상심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흥분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더욱 더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자기 자신의 영혼을 마치 2인칭처럼 객관화시킴으로써 지금 당장 나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슬퍼하지만 본래의 자아는 신앙 위에 굳게 서있음을 보여줍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과거의 그 놀라우신 도우심을 기억할 때 이 고통도 분명히 넘기게 해 주실 것임을 믿고 더욱 더 주님을 사모하겠다는 신앙의 지혜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통 중에서도 오히려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살아 계신 여호와 신앙과 최후 승리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도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고귀한 비밀입니다.

6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믿는 사람으로서, 그러나 현재는 하나님의 축복과는 전혀 동떨어진 듯한 상황에 처한 상황이므로 참으로 낙망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를 축복하시던 주님을, 그의 찬송을 기뻐 받으시던 주님을, 지금은 마냥 멀리 계신 것만 같은 주님을 기억해내고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요단 땅은 유대 광야를, 헤르몬 산은 갈릴리 북쪽 산악지대의 높은 산(2814미터)이며, 미살 산은 위치를 알 수 없는 작은 산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가 대적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임을 말해 줍니다.

7절: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헤르몬과 미살산의 이슬이나 샘 줄기가 요단으로 흘러나와 큰 강을 이루고 이것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생명의 소리를 발합니다.
폭포 소리와 깊은 바다의 출렁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시편기자는 생명의 근원되시며 거대한 힘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기억해냅니다.
생 명의 작은 줄기인 시냇물을 찾는 사슴과 같이 주님의 작은 임재를 찾기에 갈급하였던 그 자신이었지만, 그 작은 시내가 흘러 들어가서 이루어진 커다란 바다를 생각해내곤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광대하심이 다시 크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헤르몬 산의 물이 흘러 들어가 갈릴리 바다(또는 호수)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현재 고난을 당하는 시편 기자에게는 그가 갈급하여 시냇물의 존재같이 미약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는 (갈릴리) 바다와 같이 그렇게 깊고 광대한 것입니다.

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생각해보면 이와 같이 피하여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인자와 자비로 그와 함께 하셔서 적들로부터 안전한 것입니다. 환한 대낮에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피할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이와 같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이동을 중단하는 밤에 찬송하고 그에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9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눈물이요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반석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여호와께 기도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생존하심에는 전혀 의문이 없습니다.
다 만 하나님께서 왜 그를 이와 같이 버려 두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에 고통스럽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원함은 그가 찾기를 즐겨하던 성소에서 주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라도 그의 원수의 압제로부터 그를 구원하시어 그의 사모하는 성소에서 기쁨의 찬송을 드리기를 간구합니다.

10절: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시편기자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원수의 압제가 아니라 원수가 칼로 그의 뼛속을 찌르는 것 같이 비방하여 하는 말,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조롱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그의 삶 속에 함께 하여 오셨는데, 이러한 조롱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나와 함께 하심이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나를 지키심이 이것이라. 하나님의 너를 물리치심을 보라. 이래도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하며 까불래”라고 속시원하게 대답해줄 수 없음입니다.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5절의 부르짖음을 반복합니다. 그리함으로, 고통과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 의지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의인에게 어려운 일이 없습니까?
의인에게도 어려운 일이 끊임없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의인에게 낙담과 믿음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의 인에게도 믿음에 회의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의인은 자신의 회의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방금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의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8-10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가 평안할 때만 하나님이 계시고 나의 하나님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시며 나를 돌아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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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 삶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십니다.
예 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찾으며, 그에게 더 가까이 나가며, 우리의 여러 가지 다른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으로 인하여 늘 찬송하고 기쁨을 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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