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8, 2012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 20:11-18)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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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eureka)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진공청소기(vacuum cleaner)의 유명 상품명(brand name)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유명하여지게 된 것은 주전 3세기의 헬라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발명가였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라큐스(Syracuse) 왕이 순금의 왕관을 소유하고 싶어서 금관 제작을 의뢰하고 드디어 금관이 완성되었는데 그것이 진짜 순금으로 된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당시의 유명한 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에게 그것이 순금인지 여부를 판명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을 두고 진위를 가려낼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도 그 문제로 고민하면서 물이 넘치도록 가득한 목욕탕에 몸을 담궜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몸 부피만큼의 물이 탕 밖으로 넘쳐났습니다. 이때 그는 “유레카, 유레카”라고 연달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유레카”는 헬라어로서 “I have found it"(나는 [그 방법을] 찾았어 또는 발견했어)라는 뜻입니다(정확히는 휴레카: εὕρηκα 이고 기본형 εὑρίσκω의 1인칭 현재완료임). 그는 물이 가득한 통에 금관의 무게만큼의 순금과 그 금관을 차례로 집어넣어 넘쳐나는 물의 양에 차이가 있음을 보고 그 금관에 금 이외에 다른 성분이 섞여있음을 밝혀냈습니다(동일한 무게이지만 순금과 불순물이 섞인 왕관과는 부피에 차이가 있음).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라는 탄성보다 더 큰 기쁨의 탄성과 찬양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 성도들의 입술과 심령에서 울려나오기를 축원합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한국에서 신앙생활 하던 신자들--특히 젊은 층--과 교회들에서 유행처럼 사용되던 뱃지(badge)와 스티커(sticker)의 표어가 있었는데 “나는 찾았네”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임을 찾았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음을 찾았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나의 주님임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발견도 이 “나는 찾았네” 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저의 10대 후반기와 20대 초반기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주님 되심’을 찾고자(발견하고자) 내면적으로 외향적으로 무척이나 애썼지만 찾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 기독서클이란 서클은 다 가입하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발견하고자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대학 2학년 때 겨울방학 3개월 동안 4시에 시작되는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 되심이 믿어질까 그렇게 해봤지만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왜 나의 믿음을 향한 노력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의지함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생기는 것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나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구 없이는--하나님께서 내게 다가오셔서 나를 만나주지 아니하시면 나의 찾음에 대한 노력이 헛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들어오시며 나를 찾아주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체험하는 경험은,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찾았다’고 표현함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해서, 찬송가 405장(Amazing Grace)에서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한글찬송은 “잃었던 생명 찾았고”라고 번역함)라고 자신에 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잃어버린 양이었는데 이제 주님에 의해서 찾아진바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찾으시고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여러분의 삶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과 기쁨이 여러분 안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신약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그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일 뿐 믿음은 없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는 헬라어 원어성경의 마태복음 28장 1절로부터 그리스도 부활 사건을 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절에 와서 눈길이 멎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οὐκ ἔστιν ὧδε ἠγέρθη γὰρ καθὼς εἶπεν).
“그가 살아나셨다”(ἠγέρθη)란 단어에 신학자의 눈길이 고정되더니, 이 말씀이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으로 그 교수의 심령을 뒤흔들었고 큰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가 이제까지 수도 없이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의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역사적 실체성을 믿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그 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뒤흔들 때 그는 이로 말미암아 깨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앉았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뛰쳐나오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날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그의 심령도 부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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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첫 번째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11-12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창기였으며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피의 대상이었던 이 여인을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사람 대접받지 못하던 그를 여느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하여 주신 그리스도시기에 그의 죽음은 마리아를 매우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지만 그가 예수님을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그의 시체에 정성스럽게 향을 발라드리는 일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안식일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려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자마자 무덤을 찾은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이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역시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대신에 두 천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에는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다른 여인들도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만이 나옵니다. 이는 다른 여인들도 곁에 있었는데 막달라 마리아만 대표격으로 이름을 적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복음의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만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으로 갔다고 증거하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사 복음서를 통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대표적인 여인인 것은 분명합니다(마가복음 16장은 향품을 준비하여 갈 때는 여인들의 이름들을 나열하고,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록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적고 있습니다, 막 16:9-11).
흰옷 입은 두 천사(누가복음 24:4-7; 마태복음 28: 2-7과 마가복음 16:5에는 한 천사)가 무덤 안에 머물러 있던 이유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찾아올 때에 그들에게 그들이 찾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 없고 부활하셨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13-14절: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묻는 것은 그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부활하셨음을 말하여 주고자 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물론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심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지만) 다만 그리스도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뒤에 어떤 사람이 서있는 것을 감지하여 뒤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그가 예수님이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이신 줄 알아보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죽으시기 전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는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제자 둘)에게 나타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동일하신 모습이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참 비슷한 사람도 다 있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께서 천사들이 했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마리아에게 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동일한 질문을 다시 하심은 그가 ‘그의 부활’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시신 찾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 생각날 리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은 다만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4절에서 마리아(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 마리아가 동일인물이라면)의 언니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내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확신 없는 믿음(?)의 고백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부활에 관한 한 마리아의 신앙도 마르다의 신앙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마리아는 거의 비슷한 말로 다시 대답합니다. 다만, 이제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에 대한 추측이 막연한 어떤 사람에서 동산지기같이 보이는 앞에선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마리아의 부활신앙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믿음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6절: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5절에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마리아에게 물으실 때와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실 때에 예수님의 음성이 아마도 달랐을 것입니다. 15절의 음성은 타인인양 들리는 것이었다면, 16절의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음성은 마리아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들어왔던, 꿈에도 못잊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친근감이 넘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돌이켜 그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랍오니여”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마리아는 그를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시는 음성의 주인공이 이제까지 죽으셨다고 여겼던 예수님인 줄 알고는 벅차 오르는 기쁨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해서,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매어 달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만류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9절에는 무덤을 떠나 달음질하던 마리아를 포함한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평안하뇨?”라고 물으실 때에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이 동일한 사건에 대한 약간 다른 기록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란 친근한 표현으로 호칭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 아버지”는 곧 “너희(=제자들과 여인들의) 아버지” 되심과 “내 하나님”은 곧 “너희 하나님” 되심을 또한 알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 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사십 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나중에 올라가시겠다는 말씀인지 불분명하지만, 그가 승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18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던 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외치되(요한 4:28)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침으로 전에는 부활의 믿음이 없었던 마리아의 마음에 부활의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의 복음증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사망이 더 이상 우리의 왕 노릇하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마리아와 제자들만의 증거제목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그 안에 속하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의 증거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라고 외쳐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영국시인 에드워즈(D. E. Edwards)는 다음의 시로서 그의 부활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쓰신 가시관을 보지 못했고,
        그 몸에 남은 상처를 만져 보지 못했으며,
        무덤 문을 막았던 바위도 내 눈으로 못 보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부짖는 사람들을 위로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본 일은 한 번도 없지만
        오늘 이날도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느니,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의 그림자를
        내 마음의 창문을 통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까?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라고 이웃을 향해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 외침의 증거로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더 든든해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간구를 드리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은혜의 주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시며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라고 외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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