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16, 2016

“지혜있는 자의 삶” (에베소서 5:15-21)

“지혜있는 자의 삶” (에베소서 5:15-21)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注意)하여 지혜(智慧)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  세월(歲月)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放蕩)한 것이니오직 성령(聖靈)의 충만(充滿)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感謝)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敬畏)함으로 피차 복종(服從)하라.

1
교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존재가 처음부터 믿어지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면 좋겠지만 이역시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바램입니다.
그런데 제게 부딪혀오는 심각성은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처음에, 주님을 믿고싶은 마음과 보고싶은 마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생을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님을 믿는다, 주님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지혜 없는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보고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경험했다고 주장한 것은 헛된 생각과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메색(Damascus)으로 가는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무엇에 근거를 둔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전도를 할 때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담대함을 주는 것은 예수님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느끼거나 체험한 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싶은데 믿어지지 않는 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확신을 갖고싶은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에 확신이 안옴을 어떻게 합니까? 목사님, 하나님을 믿고싶은 마음, 천국을 보고싶은 마음 이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그러나, 믿고싶어하는 마음은 믿음의 단계를 향한 시작일뿐이지 아직 믿음은 아닙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여러분에게 믿어지지 않는 주님을 믿고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주님의 임재를 느낀다고 시인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주님을 믿기를 사모하고 간구하는 마음과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노력을 주님께서 기뻐받으셔서 여러분의 생 가운데 그분을 느끼시고 체험하는 순간들이 있기를 바라며, 해서 여러분의 삶이 근본적으로 주님 안에서 거듭나고 바뀌시기를 간구합니다.

17세기초 영국을 통치하던(1603-1625)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의 즉위 초에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라고 하는 사람의 진언에 따라 왕실작가 54명에게 명하여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게 하여 8년이 지난 1611년에 현재까지도 널리 읽혀지고있는 킹제임스역(King James Version)을 세상에 내어놓았습니다.
당시 영국 내부에는 도둑이 많아 도둑질을 근절시키는 방안으로 크든 작든 도둑질하다 잡힌 사람은 모두 사형을 시켰습니다. 암스트롱(Armstrong)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염소 한 마리를 훔치다가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옥에 갇혀 사형당할 날을 기다리던 암스트롱이 교도관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으리, 듣자하니 이번에 임금님께서 성경을 영국말로 번역하셨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그것이 사실이지.” “교도관 나으리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얼마 못살고 죽을 목숨인데, 죽기 전에 임금님께서 번역하신 성경을 꼭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제 소원을 꼭 한번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임금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네.” “죽을 사람의 소원이니 꼭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도관은 상관에게 암스트롱의 말을 전하고 결국 제임스 왕에게 이 말이 전하여졌습니다.
제임스 왕은 자기가 번역하게 한 성경을 읽고싶다는 사형수가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합니다: “그것 참 기특한 일이로다. 그에게 성경을 넣어주어 읽게하고, 그가 성경을 한 번 다 읽을 때까지 사형집행을 연기하라.” 성경책을 암스트롱에게 전해주면서 교도관은 말합니다: “빨리 성경을 한 번 다 읽어라. 다 읽은 후에 사형을 집행하라는 왕명이시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빨리 읽으면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소가 풀을 먹은 후에 자리에 누어 천천히 새김질을 하듯 그렇게 읽어야 하는거지요. 그래서 나는 하루에 한 절씩만 읽기로 했습니다.”
성경책이 몇 절로 되어있습니까? 성경은 장으로는 1,189장이고, 절로는 31,202절이나 됩니다. 해서 하루에 한 절씩 읽어 성경 전체를 다 읽기 위해서는 85년 하고도 반년이 더 걸립니다.
교도관은 암스트롱의 말을 상관에게 전하고 이 말을 전해들은 제임스 왕은 큰소리로 웃고선 말합니다:
“좀 도둑치곤 대단히 지혜있는 녀석이로다. 그렇다면 성경을 감옥에서 읽을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서 읽으라고 하라.” 암스트롱은 성경 때문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성경을 읽되 이젠 궂이 한 절씩 읽지 않아도 되어서 계속 읽고 또 읽어 말씀 속에서 자기의 죄와 허물을 깨달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심군식목사의 글 중에서).

2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있는 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5-16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골로새서 4장 5절에서는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함으로 지혜 있는 자는 그 행할 것을 돌아보고 주님 안에서 바른 행함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바른 행함의 한 방편으로 16절에서는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얼핏 보기에 별 연관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세월을 아끼다”고 번역된 단어의 원뜻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킹제임스역(KJV)은 이를 “redeem(구속하다, 사다)이라 번역했고, 다른 영어성경들(RSV, NRSV, NIV)은 make the most of the time(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하라)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헬라어 엑사고라조(ἐξαΥοράζω)의 뜻은 “...으로부터 사다, 무르다, 놓아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사단의 종노릇하던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시간 모두가 사단에게 속하여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피값으로 사신 바되었는데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사신 주님은 우리의 생명만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까지 사신 바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우리의 자아와 인격과 재물과 시간 사용을 포함한 우리 전체의 삶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악한 때와 세상 가운데 여전히 사단의 기뻐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권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된 성도의 마땅히 할 일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두 번째 권면은 17절에 있습니다.

17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바울이 말씀하는 어리석은 자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조롱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혜있는 자”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이해하는 자”입니다.
주의 뜻(=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경은 여러군데서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50과 마가복음 3장 35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8장 5절에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했고, 에베소서 6장 6절에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17절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듯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4장 2절에서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에게 부탁할지어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요한1서 2장 16-17절에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나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뜻은 성경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되어지는 환경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향한 나의 마음 속에서 들려지는 ‘작고 세미한 음성’을 통하여 그리고 나의 사모하는 마음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주의 뜻 알기에 감각있는 자 되시고 해서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삶 가운데 늘 이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지혜있는 자는 여기 “술 취함”으로 표현된 것과 같이 세상 일에 너무 지나치게 탐닉(眈溺)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많은 유익한 은사가 나타나고 풍성한 열매맺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혜있는 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를 위한 바울의 네 번째 권고의 말씀은 19절에 있습니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간에, 또 하나님과의 사이에 이러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의 화답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간에는 시기와 불평의 목소리가 드높은데 그 동일한 입술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한다고 하더라도 그 찬미는 주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찬송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찬미(讚美)하되 입술로서만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 중심에서 노래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바울은 감사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현재 처해있는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노래하고 감사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종일 주를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21절에서 지혜자의 삶을 살기 위한 여섯 번째 권면의 말씀을 줍니다.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섬김과 복종의 삶의 본을 보이시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섬기시며, 하나님을 복종하되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철저히 죽으셨습니다.
21절은 남편과 아내에게 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성도 일반에게 주는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를 대하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상대방 속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대하는 자세로 피차에 복종하고 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먼저 자신과 성도안에서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하거나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하고 주님께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구드려야 할 것입니다.
온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지혜자의 삶을 살되, 악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시간을 아끼고 선용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이해하며, 세상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하나님을 시와 노래로 찬미하되 성도간에 먼저 아름다운 노래와 말로 교제하고 화답하며,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성도간에 서로 섬기며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Sunday, April 10, 2016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에베소서 5:6-14)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에베소서 5:6-14)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외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
물질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는데, 비본질적인 외형을 구성하는 요소를 accident라고 하고 본질적인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를 substance라고 합니다. 그 물질을 그 물질처럼 보이게 하는 것--곧, 형태, 맛, 색깔과 냄새 등은 accident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표현할 때, 이 실상(實狀)을 영어성경은 substance 혹은 assurance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본질적인 실체라는 뜻입니다.
한 물질의 외형인 accident는 비본질적인 요소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또는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우연하게 혹은 돌발적으로(accidentally) 다가오는 환경이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다만 비본질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해서, 이로 인하여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거나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비본질적인 환경과 조건 속에 내재하시는 우리 믿음의 본질, 본체이신 주님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각기 다른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가 넘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나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환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을 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라고 비본질적인 여건 가운데서도 본질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립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는 유다 나라가 갈대아인의 침공을 받고 예루살렘이 훼파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심히 두렵고 마음에 분함마저 생깁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설혹 약간의 악행과 불순종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아닌 더 악독한 갈대아인을 들어서 심판하실 것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나? 하박국은 강한 불만과 분을 발하며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러나, 궁극적(窮極的)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믿음을 지키는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구원계획을 이해한 하박국은 하나님께 기쁨과 찬양을 돌립니다.
하박국 3장 17-19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비본질적인 현상인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절정적인 믿음의 고백을 바울의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우리의 실패함과 부족함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고통스럽고 두렵게 하여 우리의 믿음을 없애고자 하며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다함 없는 본질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여전히 감사와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우리 모두가 제각기 다른 환경 가운데 이와 같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2
6-7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에게서 제일 먼저 느껴지는 변화는 말에 있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에베소서 4장 25절에서와 같이 거짓말을 하던 사람이었고, 4장 29절에서 볼 수 있듯이 더러운 말을 하던 자이고, 5장 4절에서와 같이 누추한 말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을 하던 자이었습니다. 또한 6절에 있는 대로 헛된 말을 하던 자이었습니다.
거짓말과 더러운 말과 누추한 말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과 헛된 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해야 할 말은 4장 25절에서와 같이 참된 말이며, 4장 29절에서와 같이 선한 말이며, 5장 4절에서 보는 대로 감사하는 말입니다.
불순종의 사람들이 우리를 미혹(迷惑)하여 그들과 같이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리할 때 우리도 불순종의 아들들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영적으로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을 때,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을 때, 우리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사단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어 빛 되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밝은 빛 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빛이 됩니다.
요한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요한복음 1장 9-10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했으며, 3장 19절에서 “그 정죄(定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대로, 바울이 다메색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도 빛 가운데 임하신 주님이었습니다.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비취시매 그의 본질적인 삶이 변하고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의 이름이고, 꼭 같은 외형이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는 자의 이름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삶은 떳떳합니다. 밝음 아래 있기에 솔직하고 숨길 것이 없습니다.

9-10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함과 같이 빛의 자녀의 행위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이와 같은 빛의 자녀들의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한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한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의 열매가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의 삶입니다.

11-12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어두움의 일은 열매가 없다고 했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함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줄뿐이라는 뜻입니다.
어두움의 일은 거짓말, 더러운 말,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이며, 5장 3, 5절에서 보는 바대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의 생각과 행함입니다. 이 어두움의 말과 생각과 행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방해합니다.

13절: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책망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인 저에게 다른 사람이 “목사님,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목사님, 성격이 급하신데 이 일은 조금 천천히 하십시오“ 하면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적하는 분이 저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알 때, 저의 결점에 관하여 듣는 순간에는 기분이 좀 언짢다 하더라도 돌아서서 생각해보게 되고 또한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성(罪性)이나 허물에 관하여 지적을 받거나 책망을 받을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근심하게 되나 이로 인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고치고 이에서 돌아설 때, 전에는 어두움의 일이던 것이 이제는 빛의 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쓴 바울은 이에 대해서 자신의 아픈 마음과 의도를 전하는데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이어지는 편지 7장 8-9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後悔)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悔改)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허물들을 고치고 이에서 돌이킴으로써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함이 빛으로 나타나지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이사야서 60장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를 인용하여,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잠자는 자와 죽은 자란 구별된 표현을 사용하는데, 사실 잠자는 자도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깨어날 소망이 그들에게 있기에 잠자는 자라고 구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는 바대로 모든 인간이 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에서는 “허물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빛을 비취실 때 그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날 뿐 아니라 우리의 작은 빛의 삶으로서 아직도 죽은 자들 가운데 잠자는 심령들의 영적 잠을 깨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우리에게 빛을 비취실 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육신(肉身)의 잠에 흠뻑 취하여있을 때에는 아무리 목이 갈하여도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물 컵조차 잡기가 귀찮고 싫습니다. 누가 그를 깨우려하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생리적으로 아랫배가 더부룩하여 화장실에 다녀오면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밤새도록 거북한 잠을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혼(靈魂)의 잠을 자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목이 갈하여 하나님께서 공급하여주시기를 원하는 생수의 컵을 마음 속에서 찾기는 찾지만 손을 뻗어 그 컵을 잡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양식에 주려하지만 잠에서 깨어 일어나 생명양식을 먹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매일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매일 시간을 내어 10분-20분 정도 성경말씀의 꼴을 먹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영혼의 잠에 취하여 그리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옆 사람이 나의 영혼의 잠을 깨울라치면 그 사람에게 도리어 그에게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고 화를 냅니다.
잠에 취하여 있습니까?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밝은 빛 되신 주님께로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Sunday, April 3, 2016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에베소서 5:1-5)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에베소서 5:1-5)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祭物)과 생축(牲畜)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나니
 

1
찬송은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을 부르는 재미로 교회생활을 하고 그 이상은 더 하려고도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찬송을 부르게 하시는 목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까닭입니다.
에베소서를 통하여 바울도 반복하여 말씀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미(찬송)케 하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통하여 우리 강퍅하고 자고한 마음이 녹아져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고 그 분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성가곡을 들을 때 혹은 부를 때 은혜스럽다,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쓰지만 잘못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종종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소위 크리스천 록 그룹(rock group)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요란한 찬송 가운데는 그 가사의 내용을 알면 사단을 찬양하는 것이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즐겨 듣고 불러온 구노(Gounot)의 아베마리아도 사실 그 라틴어 가사내용을 알면 크리스천들에게는 금기(禁忌)의 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베마리아(Ave Maria)란 말 자체가 '마리아 찬양'(Hail Mary)이란 뜻으로서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할 크리스천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가사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더 멀리 하여야 할 곡임을 깨닫게 되는데, “아베 마리아(=찬양받으실 마리아여) 은덕이 넘치는 성모님이시어! 사랑에 넘치시도다. 거룩하신 성모시여! 기도를 받으소서. 예수님의 어머니 되시는 산타마리아(=거룩하신 마리아여), 번민(煩悶)하는 나를 구원(救援)하옵소서. 이 몸이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때나, 아멘.”
그런가 하면 슈베르트(Shubert)의 아베마리아(Ave Maria)도 마찬가지로 그 내용은, “아베마리아 성모여! 거칠고 험한 이 세상에, 이 몸이 정성을 다하여 기도함을 들으시나요? 우리를 아침까지 지켜주시고 이 세상 험하오니 돌봐주소서. 내 서러움을 들으사 구원하옵소서. 아베마리아.”
마리아가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받은 여인이지만 우리 기도와 경배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도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기도의 대상도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자시요, 구속하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이 아들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같은 찬송이지만 전에는 내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어떤 상황 가운데 동일한 찬송을 들을 때 그 찬송을 통하여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강한 감동을 주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노회모임에 참석하였는데, 한국인 2세로서 미국장로교 총회 대표단 가운데 한 명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오신 장로님의 북한방문 보고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한 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가르치고 있는 분인데, 보고 마지막에 그분이 북한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그곳 교인들하고 같이 불러 은혜를 느꼈다는 410 장 찬송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장로님은 체구가 참으로 외소하신 분이었는데, 이 찬송을 본인이 직접 부르기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그분의 세련된 전주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고 그가 1절과 4절을 한국어로 찬송할 때 그 내용과 그가 북한교회 교인과 함께 이 찬송을 부르는 장면이 연상되며 제게 한없는 성령의 감동이 임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공산정권의 독재 가운데 있을 때도, 세상이 주는 슬픔과 상처 가운데 있을 때도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쓸 데 없던 자이던 나를 사랑하셔서 구속하시고 구원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통하여 우리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접하게 되지만, 그러나, 찬송이 우리 신앙생활의 긍극적인 목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한 방편이며 해서 겸손하고 열린 심령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더 잘 알고자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
1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하고, 또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본받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메오마이(μιμέομαι)는 ‘따라 행하다’(imitate)의 뜻과 함께 ‘(본받는 자에게) 순종하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본받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을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가 사람의 행동을 잘 흉내내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본받는다의 의미가 아닙니다. 본받는다 함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따르는 행함입니다.
하나님의 무엇을 본받으라는 뜻입니까?
에베소서에 나오는 것으로는 4장 24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진실하심-거짓이 없으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레위기에서 반복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음란과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holiness)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4장 32절에 나오는 대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온전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전하다(perfect)’고 함은 흠과 티가 없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의 죄된 마음과 그것이 밖으로 표현된 허물을 주님께 자백하고 고쳐나감으로 주님의 온전하심(perfectness)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 길잡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흠과 티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고 이를 우리가 제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가까이 이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하다’(merciful)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를 받아야 할 자에게 구제를 베푸는 마음과 행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사랑을 베푸신 그 자비하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권면하는 말씀이요,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할 때, 그는 자신의 전적인 순종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을 말씀한 것입니다.

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들의 형상인 그리스도 예수로 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되 구약의 희생가축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단번에 우리의 과거 죄와 현재 죄와 미래 죄를 사하여주시는 피제사로 드려지셨습니다.
이와같이 진실하시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본받고자 하는 우리에게서 제하여 버릴 것이 있습니다.
 
3-4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열거된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우리가 여전히 이런 것을 마음과 입술과 우리 육체에 갖고있을 때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원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5절: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3절에 열거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 죄성(sinful nature)이라고 하면, 5절에서 말하는 바는 이 죄성을 행하는(practice)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와같이 죄성을 버리려고 하지않고 죄성에 따라 사는 자들을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재물이나 명예나 지위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만이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 온전함, 자비함과 사랑함 보다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에 따르는 삶을 살아나가 하나님을 본받는 삶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자도 우상숭배자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강한 경고의 말씀을 합니다. 곧, 세상의 죄성에 따라 여전히 썩어져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입술로는 주를 고백하였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믿지 않는 자이며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온전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을 본받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를 위해 사단에 의하여 여러분에게 덧입혀진 죄성들-음욕과 더러움과 탐욕과 기타 모든 부정한 것들을 주님께 자복(自服)하고 이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떠나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이 이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