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31, 2015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18)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18)
           
  6:17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
옛사람들의 이야기들 가운데 징표 또는 정표를 나눠 갖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헤어지게 될 때 커서 만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고 우정을 계속 유지하자고 다짐하면서 장신구의 반을 쪼개어 나눠 갖습니다.
왕이 충직한 신하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도 그를 내치지 않고 그를 보호하겠다는 징표로 왕이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물건을 하사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가 어린 자식과 생이별하게 될 때 또는 자식이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그 태어날 자녀와 후에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자식의 징표로서 장신구의 반쪽을 쪼개어 줍니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몸에 지니는 장신구는 우정이나 신분확인의 징표 또는 보호의 정표로서 사용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징표 또는 정표로서 사용된 장신구는 몸에 늘 지니지만 분실 또는 도난 당할 경우가 있었기에, 신분확인을 위해서 태어날 때부터 몸에 갖고있는 어떤 표시(birthmark)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른쪽 어깨에 북두칠성 점이 있다든지, 등에 특이한 붉은 반점이 있다든지 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 어릴 때 입은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이 커서도 그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는 표시가 되기도 합니다.

몸에 특별한 표시가 없을 때는 의도적으로 표시를 새겨 넣음으로서 그 사람을 후에 만나더라도 알아보는 표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혹은, 어떤 비밀결사단체들은 독수리나 뱀, 기타 특이한 문양을 각 회원의 팔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새겨 넣음으로써 자신들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표시로 사용합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이 몸에 어떤 표시를 함으로써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고 또한 보호하는 방편으로 사용한 예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가인의 예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징벌로서 그를 유리하는 자가 되게 만드시는데, 이때 가인은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혹 죽일까봐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그 두려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벌주시기는 하지만 그에게 두려움을 호소하는 가인을 내치시는 대신에 그에게 보호의 표시를 주시는데, 즉 (이마에?) 표(תוא, mark)를 주시고 만일 어떤 사람이 가인을 죽이면 그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셔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내고자 하실 때, 강퍅한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떠남을 허락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천사를 보내셔서 애굽사람 집의 장자들을 죽이십니다. 이때 이스라엘사람 집의 장자를 구분하시기 위해서 어린 양을 잡고 그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사람 집의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라 표시함으로써 죽음의 천사가 이를 보고 이스라엘 사람의 집인 것을 알아보고 넘어가게(踰越) 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보호와 구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방왕국 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을 멸망하실 즈음에 한 천사(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에스겔서 9장 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의로운 자들의 이마에 표시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실 때 의로운 자들을 구분하여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에스겔서 9장 5-6절에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실 때,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이 방법을 흉내냅니다.
해서,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는 바대로, 후에 환난의 날이 이를 때 이 세상을 장악하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이르되 그의 우상을 만들고 그를 경배하라고 명합니다. 그의 말을 따르는 징표로서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을 무론하고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666’이라는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짐승의 표가 없는 자들은 매매를 할 수 없게 만들어 일상생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핍박과 죽음의 대상이 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때 삶이 곤란하고 핍박이 두려워서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을 저버리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의 때가 이를 때 그가 오른 손이나 이마에 받은 짐승의 표가 징벌의 표적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9-11절에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우리 각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된 표시가 없는 사람 곧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사람은 사단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소유된 흔적들이 우리의 몸과 삶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라’라고 주장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2
바울은 본문에서 글 쓰기의 천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셔서 성경의 오묘함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울이 “예수의 흔적"(the marks of Jesus)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할례의 흔적’(the marks of circumcision)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혹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이) 이방인이라도 (율법적인 두려움에서 형식적이요 외형적으로 행하여진) ‘할례의 흔적’은 결코 ”예수의 흔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보호와 칭의와 구원의 징표가 될 수 없음을 역설(力說)하고자 함입니다.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칭의와 구원의 표시로 여기는 것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몸의 일부를 베어내어 표시를 만드는 행위이긴 하지만 칭의와 구원의 요건이 전혀 될 수 없으며(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또한 ‘예수님의 흔적’(할례는 율법의 요구이지 예수님의 요구는 아니기 때문에)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할례의 흔적이 몸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흔적’도 ‘예수님의 흔적’도 아닙니다.
바울도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빌 3:5). 그러나, 이 할례의 표시는 바울이 말씀하는 “예수의 흔적”은 아닙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 복수는 στίγματα)로 ‘상처’, ‘표시’ 또는 ‘소유주를 표시하는 소인(燒印) 또는 도장’을 뜻합니다.
스티그마를 흔히 성흔(聖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못 박히실 때 손과 발 네 군데에 자국난 상흔(傷痕)과 창에 찔리신 허리까지 모두 다섯 군데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흔적--상처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의 표시요, 보호와 구원의 표시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신실한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상처의 흔적을 몸에 갖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이러한 상처들의 자국이 그 몸에 나타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이고 첫 번째 인물이 성 프란시스(St. Francis, 1181-1226)인데, 그는 43세 때(1224년) 알베르나 산(Mount Alverna)에서 기도하던 중에 십자가의 환상(vision)을 보게 되는데, 이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허리에 성흔(스티그마타)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예수의 흔적”은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난 성흔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받은 고난의 상처요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예수님의 자국입니다.
바울은 그의 세 차례의 전도 여행기간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맞고 고문당하고 갇히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온몸이 그리스도를 위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자랑스러운 것은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의 흔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사랑으로 오래 참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삶 자체가 예수님의 흔적을 자신의 몸과 삶에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그의 몸과 삶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을 따라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기를 원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닮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흔적”을 우리의 몸과 삶에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게 형식적인 어떤 외적 표시를 하여서 생기는 흔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속하여 있을 때 나타나지는 삶 자체를 통한 내적 표시입니다.

흔적은 또한 ‘소유주의 소인(燒印: 불 도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소인을 찍으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은 가슴으로 (참)믿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에 불 도장을 찍으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 “저가(=하나님이)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했고, 5장 5절에서 “곧 이것(=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하늘에 속하는’ 인을 치셨기에 우리가 어디에 있으나 하나님께 발견되어지며 다시는 잃은 자(lost child)가 되지 않습니다.

   18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축도(benediction)입니다. 인간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χάρις)가 그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을 때, 그들이 지금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너희 심령에”는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 영과 함께”(μετὰ τού πνεύματος ὑμών)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늘 생각하고 사모함으로 인하여 그의 은혜의 깊고 넓음을 맛볼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울의 축복기도입니다.

3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 안에 어머니와 서너 살 난 아이가 갇혔는데, 어머니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서도 아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온몸으로 아이를 감쌉니다. 지붕이 무너져 내림으로 그의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고 뜨거운 불길이 그의 곱던 얼굴과 팔을 흉하게 만들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의 보호막을 풀지 아니하고 더욱 단단하게 합니다. 마침내 소방대원에 의하여 어머니와 아이가 구출됩니다. 어머니는 얼굴과 팔을 비롯하여 전신에 화상을 입고 부상을 당하였지만 아이는 말짱합니다. 이 어머니의 화상과 부상의 상처(傷處)는 그 자식을 사랑하여 보호하고 구원하는  ‘어머니의 흔적’입니다.

‘예수의 흔적’(the marks of Jesus)이 여러분의 몸과 삶에 나타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를 증거하고 그를 위하여 살아가는 중에 여러분이 당한 고통과 중상과 핍박의 상처가 저와 여러분이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온전히 고백하고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이 있을 때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표시임을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갈 6:11-16)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갈 6:11-16)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니라.
     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개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서 떠나 편의적인 종교행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시대와 지역과 상황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 정도로 격하시키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있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다른 시대와 다른 지역과 다른 상황 가운데 산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들의 모음이지만 어떤 개인의 주장과 의견의 피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하신 뜻과 명령이 온전하게 드러나 있는 책입니다. 만일 개인들의 주장들이나 의견들의 모음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이후 2,000년(신약의 경우) 그리고 모세 이후 3,500년(구약의 경우)이 흐르면서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지역과 상황에 맞게 변경되고 수정되는 작업을 거듭해 나갔어야 했을 것입니다. 1,500년 간의 시간의 흐름 속에 살다가 간 불완전한 사람들의 불완전한 손들을 빌어서 쓰여진 기록들이 온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드러내는 말씀이 될 수 있는 그것이 참으로 오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는, 다수결의 원리를 동원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주장이 소수이던 것도 사람들을 접촉하고 설득시킴으로써 점점 지지세력을 얻고 나중에는 오히려 다수가 되게 하고, 그들이 소수일 때는 다수결의 원리를 주장하지 않다가 그들이 다수가 되면 이제 다수결의 원리를 들고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부인(否認),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인(否認), 십일조 무용론(無用論), 동성애자(동성연애를 실제로 행하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회개 불필요(不必要) 주장 등이 이러한 예들인데, 이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수 크리스천들의 동조를 얻고자 하며 그렇게 하여 다수의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주장 안으로 들어온 것 같으면, 이제 다수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바울 시대에도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인간의 주장과 생각에 기초하여 변경하고자 하는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졌습니다. 바울은 이방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고 구원함에 이른다는 진리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은 이를 반대하며 믿음이외에 할례와 율법 지킴이 있어야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문제의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공회가 소집되고(행전 15장), 베드로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지도자도 바울이 전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구원’이 복음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유대주의 선생들은 그들의 생각과 주장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개척하고 시무한 이방 교회들에 침투하여 그들의 교리를 끈질기게 주입하고 선동하여 이방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에게서 돌이켜 그들을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주의 선생들이 이렇게 함은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로부터 그들 교리의 타당성을 인정받고 세상에서 그들의 이름을 내며 따라서 이를 자랑거리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주의 선생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의 전 사역을 감당함이 세상에서 이름을 내기 위함도 아니요 그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와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갈라디아서 서신 처음부터 6장 10절까지는 대필되어진 부분입니다. 6장 11절부터 18절까지 바울은 친필로 편지의 끝 부분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함은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통하여 가르치고 권고하고자 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하고자 함이며, 크리스천의 믿음과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역설(力說)하고자 함입니다.

   11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의 서신들은 전부 혹은 대부분 대필(代筆)되어졌는데, 그 이유는 그가 글을 쓰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롬 16:22; 고전 16:31; 골 4:18; 살후 3:17 참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손이 떨리고 둔해져서라고 보는 성경학자도 있지만,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아마도 그의 눈병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에서도 그의 눈의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니까,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서술합니다.
바울의 눈병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본 까닭입니다. 찬란한 영광의 그리스도를 본 까닭에 그의 눈이 일시적으로 안보이게 되고, 다메섹으로 들어가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을 다시 보게 되었지만, 이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시력이 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전도의 장애거리가 되는 듯 하였습니다. 하기에, 그는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그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고후 12:7-8)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지내라고 응답하십니다. 그의 눈병을 보며 그리스도를 만난 그 사건을 항상 되새길 수 있으며 이것이 그에게 능력으로 역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눈병으로 심한 불편을 겪은 것도 사실이지만, 눈병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흔적(갈 6:17 참조)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그가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눈병으로 전체 서신을 직접 쓸 수는 없었지만, 서신의 끝 부분은 그가 친히 쓰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서신이 바울의 것임을 증명하고 그의 교인들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큰 글자(large letters)로 썼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바울의 눈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그가 친필로 쓸 때에 글자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그가 친필로 쓴 내용을 “큰 글자로 썼다”고 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의 가르침과 권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상기시켜 주고자 함입니다.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니라.

외식을 일삼는 유대주의 크리스천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전하되 할례를 받아야지만 온전한 구원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합니다.
우선,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주장임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외에 할례를 구원의 요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완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까닭입니다.

할례는 억지로 받게 할 것이 아닌데, 이는 할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자발적 결단이므로 이것은 강요나 억지로 되어질 것이 아니며, 이왕에 할례를 행할 바에는 겉모양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 중심의 할례를 행할 것입니다(롬 2:28-29)

유대주의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의도는 이방의 크리스천들까지도 그들의 교리에 참여시키고 동조케 함으로써 그들의 불완전한 교리를 완전한 교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함이요 따라서 ‘믿음으로만 의로와지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바울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진리 아닌 것을 진리인양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그 위에,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함은 그들의 주장이 일반 유대교인들의 할례 받음과 율법 지킴에서 어긋나지 않음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여전히 유대교 내에 한 가지로 머물게 하기를 원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혹 가해질지도 모를 유대교인들의 핍박을 피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와 구원(救援)’을 증거할 때에 많은 유대교인들이 그를 핍박하였습니다(행전 13:44-52 참고). 또한 갈라디아서 5장 1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크리스천 됨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합니다. 그렇게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놀림거리가 되고 때로는 어떤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색깔 없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뿐 아니라 카멜레온(chameleon)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임을 드러냄이 이익이 될 것 같으면 그렇게 하고, 크리스천임을 감추는 것이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또한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여러 가지 말로 변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13절: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유대주의 크리스천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지 구원받는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주장하고 강요하는 그들이 온전히 율법을 지켰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그들 역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율법대로 온전히 살지 못함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불완전한 가운데 믿음을 통하여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게 하시며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유대주의 선생들이 이것을 알면서도 이것을 인정치 않고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구원의 요건으로서 할례받고 율법지킬 것을 선동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들의 말을 따르는 그들의 제자들로 삼고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바울보다 나은 선생임을 자랑하고자 함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거짓 진리와 거짓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 거짓 복음 안에 가둠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 육체로 자랑함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설령 어떤 사람이 논리와 말의 현란(懸欄)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동조를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서 먼 것일 때 이는 다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에 속한 육체의 자랑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중에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울에게 자랑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가 세상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었는데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십자가에 의지할 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됨의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자랑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자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세기를 산 미국태생의 콩키(Ithama Conkey, 1815-1867)는 성가대 지휘자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성가대원이 한 명밖에 앉아 있지 아니함을 보고 너무나 실망하여 예배 도중에 그만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날 예배실을 빠져나오면서 들은 목사님의 설교 중에 “나는 십자가를 자랑하노라”는 말씀이 그의 귀를 떠나지 아니하고 자꾸만 생각났고 이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찬송가 148장을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주가 지신 십자가를 나는 자랑하노라. 성경 중의 모든 말씀 거기 중심 되었네.
           온갖 환란 덮쳐와도 십자가의 은혜로 버림받지 아니하고 평안함을 얻었네.
           밝은 아침빛과 사랑 나의 길을 비출 때 십자가의 빛난 영광 더욱 찬란하여라.
           온갖 기쁨 갖은 고초 십자가의 은혜로 참된 평화 한량없이 영원토록 누리리.
                                                                                                          (찬송가 148장 1-4절)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의 모든 일과의 결별을 선언함입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바울에게는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파하고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있습니까? 목회자로서 제가 바울이 아니지만, 또한 여러분이 목회자가 아니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5절: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우리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고 체면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하고 미련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게 될 때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할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세상의 재물이나 권세나 지위나 어떠한 성취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고백하는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까지는 교회생활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사람들의 생활방식(life-style)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에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고 우리의 중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16절: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平康)과 긍휼(矜恤)이 있을지어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고 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새사람으로 지음 받기를 사모하고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바울이 축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의 축복이 임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조금 부족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하신 평안과 긍휼을 주위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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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에 다닐 때의 일화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대학원 학생이었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사용하는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주중에 있는 대학생 소그룹 성경공부 인도, 금요일 대학원생 성경공부 인도, 토요일 저녁 기독대학생 전체 성경모임 인도, 주일 찬양대 지휘와 찬양대 연습에 할애하였습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의 눈에는 제가 하는 일이 어리석고 딱하게 보였습니다. ‘학생이면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지 저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짓이람?’ 저와 친하게 지내던 대학원생들 가운데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제가 드러내놓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내게는 제일 중요하기에, 학위를 받은 후에는 신학교로 진학하여 선교사가 되거나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말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화하던 중 저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최형, 형이 졸업하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말은 그저 해보는 소리지요?! 아니, 일반학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신학교에 진학한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현재 학위를 받지 않은 입장에서 크리스천의 이상론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일 겝니다. 만일 형이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 진짜로 신학교에 진학하고 목사가 된다면, 나는 형이 믿고 전하는 그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는 제가 졸업 후에 신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말을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가 저를 신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저의 말이 그에게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의 계획이 신속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중도에 다른 대학교로 전학하는 바람에 그는 저의 신학교 진학함을 보지 못했고, 저는 그가 과연 저와의 약속대로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저에게 ‘약속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며, 그가 지금쯤 크리스천이 되어있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거리로 여기십니까?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세상에 속한 것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귀함이 마음 속에 느껴지며, 우리의 삶 중심에 위치하며, 진정으로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