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0, 2012

"저주 아래 놓이신 예수님" (갈라디아서 3:13)

"저주 아래 놓이신 예수님" (갈라디아서 3:13)


성경구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10여년 쯤 전에 한국에서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1997년 6월 출간)는 책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어떤 목사(이윤호)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1999년 2월 출간)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인기 있던 배경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원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그 책들로 향하게 합니다.
교회를 꼬박꼬박 출석하고 신앙을 붙잡고자 하는데도, 여전히 사업에 실패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병이 항상 그 사람과 가정을 따라다니는 것은 그 사람의 가정에 대대로 흐르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인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계에 조상대대로부터 흐르고 있는 저주를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놓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며, 이를 끊어버려야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이 그 독자들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며(nullify),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이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갈 3:9 참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 세상을 살 때에는 병듦 가운데, 가난한 가운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한 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물론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이라면, 그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길지 않은 생은 하나님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각각 달리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신명기 21장 22-23절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돌로 쳐죽이고 사람들 앞에 경계를 삼기 위하여 죽인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달아 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흉악한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은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저주는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담당하신 것입니다.
아 담과 그 아내 하와가 범죄함으로 사망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게 되고, 그들 뿐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사망이 인간 세상에 왔으나, 율법은 '불순종이 죄인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롬 7:7).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라고 말씀함은, 율법 아래에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인 사망이 임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를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사망의 저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죄를 죄 되게 하는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인생들을 자유케 하셨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부추김을 받아 율법을 지키고자 함은 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저주에서 그들을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시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돌이켜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우리를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이나 기타 '부담'에 우리를 맡기는 삶은 우리로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의 삶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여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며,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어진 축복을 얻게 하며,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인지 발견하고자, 그것을 끊을 수 있는 비법을 발견하고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등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축복과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는 것이 더욱 유익합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등의 책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두려움과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모든 저주를 끊어주셨습니다.
이를 믿습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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