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8, 2012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 20:24-29)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 20:24-29)

       
                                                                               1
자연인(自然人)으로서 우리 인생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恐怖)가 사람들에게서 소망과 기쁨을 빼앗아가고 절망하게 하고 슬퍼하게 합니다. 중국 한무제(漢武帝)는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하여 승로반(昇露盤)의 찬 이슬을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진시황(秦始皇)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한다는 불로초(不老草)를 얻기 위해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인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삼 년여 공생애 사역은 그가 죽으실 십자가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이는 우리에게 그렇게 큰 소망과 기쁨은 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은 여전할 것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는 여느 다른 종파와 다름없이 철학적이며 윤리적일 따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그 이후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믿지 않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그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가고는 “주가 부활하셨다”라고 우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변화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던 동안에 제자들은 그를 따라 다니며, 때로는 같이 죽겠다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담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 병정들이 지키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올 수는 있었겠으며, 설령 훔쳐왔다고 하더라도 그 축 늘어진 시체가 그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외치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 맹수에게 찢김을 당하면서, 또 때로는 화형에 처하여 지면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라고 증거하면서 담대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겠습니까?
그들에게 그런 놀라운 담대함과 소망을 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짐승에게 찢겨 죽게 하고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끔찍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안한 미소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망 중에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죽인 네로는 절망 속에 미쳐서 죽었습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일정기간을 산 다음에 다시 죽는 “회생(또는 소생: resuscitation, restoration)”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회생은 일시적으로 살아나지만 다시 죽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됨을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시고(눅 7:13-15),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눅 8:49-56), 죽은 지 사일이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시는 사건(요한 11:43-44)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생(回生)이지 아직 부활(復活)은 아닙니다. 회생은 부활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자가 다시 일어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요한복음 20장은 안식후 첫날--곧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서 자신을 나타나신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하여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무덤 돌이 옮긴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제자는 급하게 달려와서 무덤 속이 빈 것을 확인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의 향방을 알지 못하여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데 예수님꼐서 그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가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의 파송’을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24절에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권능이 크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이 숙제를 푸느라고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도마에 관한 기사는 11장 16절에 처음 나오는데, 여기서는 체념적이지만 인상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도마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고자 하실 때, 도마는 예수님께서 그의 반대자들이 많은 예루살렘 근처로 향하심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두 번째로, 14장 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의 기사에서 우리는 충성되지만, 자신의 확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다소 상상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마의 모습은 또한 현재를 사는 많은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삶이 순조로이 진행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인생에서 세찬 바람이나 파도를 만날 때는 견디지 못해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인생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갖가지 증거--마리아와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는 도마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기 위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고 하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면밀히 검토해보고 이상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도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여드레’는 유대인식의 날짜 계산 방법으로 기산일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라고 할 때 그 사흘은 죽으신 금요일부터 기산(起算)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드레를 지나서’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날을 가리킴입니다.
일주일 전 주일날과 상황이 똑 같습니다. 다른 것은 다만 도마만 그 자리에 더해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문이 닫혀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집 안에 들어오셔서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와 같이(19, 21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νη)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어 인사말 “샬롬”(םולשׁ)입니다. 이 “샬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평안)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인데, 이 평강은 환경을 이기게 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열한 제자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온통 도마에게 머물러 계십니다. 다른 열 제자는 지난 번 방문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따로 그들의 상태를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일주일전 의심의 마음으로 인하여 일주일 내내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었을 도마에게 예수님의 관심이 쏠리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그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다 듣고 아시는 듯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도마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인데, 그의 마음 속을 훤히 드려다 보시며 그에게 가벼운 책망도 포함되어 있지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믿기 위하여 도마에게 무슨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렇게 점잖은 서술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Ὁ κύριο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극한 감격으로 인한 부르짖음입니다.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신앙고백한 적은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제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셨지만,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한 14:8)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반문하셨었습니다(요한 14:9-10).

제가 아는 성도님 가운데 어떤 분이 최근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지 않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분의 신앙이 열심인 것을 볼 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아침에 도마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To see is to believe"란 말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뜻인데 세상사람들의 생활법칙입니다,
그러나, 기실 보는 것은 보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했는데, 즉 믿음이란 바라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현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To believe is to see"--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는 신앙법칙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기 때문에 믿는 자“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믿을 때에 그 믿고 소망하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좋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의 증언대로(고전 15:6),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성도들의 수는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본 형제들 중에 380명 정도는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만으로는 “부활의 증인” 되기에 아직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필요하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한 후에는 이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체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삶으로 부활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를 직접 목격하지 못하고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운데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욱 복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지금도 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다른 제자들처럼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증거할 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갈 때에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 바울이 만난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인생 여정 중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절망 중에 방황할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방황을 청산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별개의 두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임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영접한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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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도마행전)에 의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도마는 멀리 인도에까지 복음을 증거하러 갑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결국에는 붙잡혀서 창으로 찔리는 죽음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 육신의 죽음을 당하여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그도 부활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수치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 장사지낸 바 된 자가 부활함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이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는 사건을 증거하는 제자들의 죽음도 불사하는 무모한 담대함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재정적으로 쪼들리고, 홀로 된 외로움이 사무치고, 육신의 아픔으로 고통 당하고, 또 세상 일로 너무 쫓겨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소망을 생각할 여유도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임하셨습니까?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He is risen!)”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를 감싸는 감격의 부활주일 아침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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