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8, 2013

“너희가 믿을 때에” (행전 19:1-7)

                                                     “너희가 믿을 때에” (행전 19:1-7)


                                                                           1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이 말합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성령 안에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며, 우리의 본성과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짜이고, 우리의 고백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화 되는 것은 절대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화 되지 않도록 하는 믿음은 부패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거룩에 대한 열망과 예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마귀의 믿음에 불과하며, 그것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어찌하여 여전히 전통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가 만약 성령의 다루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신실하고,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욱 더 훌륭해지고 더욱 능력 있고, 더욱 신실하고 더욱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이 왜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삶은 늘 우울하고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지하게 그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 그 성령께서 자신의 삶을 주장하시는지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부정적인 삶의 자세와 부정적인 말로 교회의 다른 사람들까지 낙담시키거나 언짢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흠이나 트집거리를 찾아내는데 귀재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 삶의 모습이 여전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언행과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기에 교회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말과 행동이 부정적인 사람은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자신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세상일에는 열심인데 교회 일에는 자신의 시간이나 열정을 쏟아 붓기에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또한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자신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일을 즐겁고 자원함으로, 열정적으로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성령을 받지 않고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면, 내가 도무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8:9).
성령을 받지 않고는, ‘내’게 의로와짐도 없고, 구원함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더 더욱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나’의 교회생활은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낭비(浪費)이기 때문입니다.                                                   

                                                                          2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는 바울의 뒤를 이어 고린도 교회의 목회를 감당한 설교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바울은 그의 3차 전도여행을 소아시아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에베소에 이릅니다. 에베소는 그가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때 잠깐 들러 전도한 곳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9-21절에 기록된 대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더러 오래 있기를 청할 때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하고 떠난 곳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에 다시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 때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제자들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도 그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을 통하여 1세기말 2세기까지 지속된 흔적이 있습니다.

2절: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우리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며, 우리에게 여러 종류의 은사가 나타나게 하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는 힘입니다.
교파에 따라서는 중생(거듭남)과 성령세례를 구분하기도 하지만(순복음교회 계통),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할 때 성령(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 입술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며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는데, 그리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는데도 내 안에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누구신지, 성령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성령을 시인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신지 안 계신지의 첫 번째 증거는 내 마음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나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곧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께서 나를 이끌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올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나오신 여러분은 적어도 성령님이 이끄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이 아직 마음 속에 들어오시지 않고 문밖에 서 계신 사람에게도 성령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증거는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입술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계시지 아니하고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있는데도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고백이 건성으로 하는 고백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증거는 입술뿐만 아니라 나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모든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최우선입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함에 예수님을 위한 일이 1순위요, 그 다음에 나나 나의 자녀를 위한 일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지로나 부담으로 여겨지지 않고 나의 삶의 자연적인 모습일 때 이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고 하더라도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요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또 로마서 8장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네 번째 증거는 성령의 은사들이 있음입니다.
세 번째 증거가 있는 사람에게는 네 번째 증거인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은사를 발견하지 못할 따름이요, 그 은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심은 다양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열거된 성령의 은사들을 보면, 고린도전서 12장 6-10절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이 있고,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사도의 직분, 선지자의 직분, 교사의 직분, 능력, 병 고침,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말함”이 있고,
로마서 12장 6-8절에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이 있고,
에베소서 4장 11절에 “사도의 직분, 선지자의 직분, 복음 전하는 직분, 목사의 직분과 교사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외에 열거되지 않은 많은 성령의 은혜의 선물, 은사가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드리기를 원하고 하기를 원하는 모든 봉사와 수고와 열정이 은사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 증거는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권능에 해당하는 헬라어 두나미스(δύναμις)에서 다이나마이트(dynamite)나 다이나믹(dynamic)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내게 주어질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에 힘이 생기며, 전도할 열정이 일어나며, 그저 현재에 만족하며 머물러 있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섯 번째 증거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처음 교회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이기적이고 나와 나의 가정을 위한 신앙생활이었는데 성령이 내게 임하실 때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전에는 교회 일에 관계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거나 그저 마음에 내키는 일만 겨우 겨우 감당했는데 그리고 “예”라는 말 대신에 “아니오”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성령이 내게 능력으로 임하시매,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교회 일을 부탁하면 할 수만 있으면 많은 것을 맡아도 불평하지 않고 즐거움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증거는 삶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환경이 어려워지면 믿음도 아울러 식어졌는데, 이제는 환경이 어려워도 고통스러운 일이 닥쳐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믿음으로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고통 가운데도,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를 발하게 됩니다.
주위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즐거움과 평안과 축복을 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합니다.

3-4절: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성령의 세례말고 무슨 다른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할 때 ‘요한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요 죄사함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생명을 주는 능력은 없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 자체로서 온전한 것이 아니요 다만 장차 올 온전한 세례의 예비적인 세례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세례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증거한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예수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하여 증거 받은 요한의 제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5-7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그들은 바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를 통하여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증거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의 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과 예언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마가의 다랑방의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46절에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놀임을 들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역에서 성령의 임하심이 이와 같이 주로 귀에 들리는 방언이나 예언을 통하여 임함은 기독교 사역과 전도의 초기이므로 쉬운 방법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되기 쉬운 증거로 임한 것은 좋은데, 그것을 주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방언과 예언의 문제로 그 안에 소란함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심은 그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증하고 증거하기 위함이심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아울러 주심으로서 교회에 유익을 주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3
우리에게 성령을 받는 일이 왜 필요합니까?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구원과 영생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방문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3장 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우리가 도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고 바울은 단언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교회생활 그 자체가 온통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명령 지킴도, 우리의 봉사도, 우리의 수고도, 우리의 노력도, 우리의 직분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다만 헛것일 뿐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자신들에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며, 이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엡 5:18).
아직 성령 받음에 확신이 없는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입술과 삶의 고백으로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게 성령 받음에 확실한 증거를 주시옵소서. 성령이 나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교회를 변화시키는 여성: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행전 16:11-15; 18:1-4, 24-28)

       “교회를 변화시키는 여성: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행전 16:11-15; 18:1-4, 24-28)


                                                                              1
흔히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말이 많다고 합니다. 여자들의 뇌 구조는 남자들보다 말을 많이 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 많은 것이 반드시 단점만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쓸 데 없는 것에 말이 많은 것은 장점이 될 수 없지만, 복음 증거에 말이 많은 것은 반드시 단점이라고 할 수 없고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사 복음서에 공히 여자 혹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목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만일 남자들이 부활을 목도했다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잠잠했을 터인데,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기에 나가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속히 전파했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가르치는 일과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허락지 아니한다"(딤전 2:12)고 하여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교회를 기피함으로 교회에 남자들만 나온다고 하면 교회는 삭막할 것입니다.
봉사하는 일, 음식 만드는 일, 설거지하는 일, 성가대의 찬양 등 모든 일들을 남자가 한다면 남녀가 조화하여 봉사하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찬양도 남녀가 어우러져 부르는 것이 음역이 넓으므로 남자들만의 중창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교회에 남-여 선교회가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을 보아도 남선교회보다는 여선교회가 활발합니다. 교회가 남성을 위한 교회와 여성을 위한 교회로 분리된다면, 장담하건대 여성들이 모인 교회들은 문제가 있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지만, 남성들로 구성된 교회는 문제가 적은 대신에 모이기도 적게 모일 것입니다.
                                                   

발자크는 말하기를 "여자는 훌륭한 남편을 만드는 천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훌륭한 남편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유대인 랍비 마빈 토케어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착한 부부가 어쩌다 이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곧 재혼하였습니다. 그는 불운하게도 악한 여자를 만나 악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여자도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여자도 악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새 남편은 곧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 의하여 조종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좋은 신앙의 부인이 좋은 남편을 만듭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는 착한 여인들과 믿음이 없는 악한 여인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숨겨준 여리고의 여인 라합,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나오미와 룻, 엘리사를 곁에서 잘 도와주고 죽은 아들을 다시 얻은 수넴 여인,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하던 이방 수로보니게의 여인 등은 믿음과 행실이 아름다운 여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악한 여성의 대명사인 아합왕의 처 이세벨, 자신의 남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던 욥의 아내, 딸을 시켜 세례요한의 목을 쳐서 소반에 담아오게 했던 헤로디아, 남편과 공모하여 성령을 속이려고 했던 삽비라 등의 어리석고 악한 여인들도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8장 2-3절에는 예수님을 도운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 곁에 교회를 함께 섬기던 좋은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루디아,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율리아 등 참 좋은 여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런 여인들이 없었으면 사역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루디아와 브리스길라의 전적인 헌신이 교회에 어떤 유익을 가져왔느지 살펴 보기로 합니다.
루디아가 믿음으로 인해 그의 가족이 믿게 된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세계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16장은 세계 선교적으로 중요한 장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환상을 보게 됨으로 인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인데 기독교인이지만 유대인이기도 한 바울은 기도할 곳, 즉 회당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무리의 여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자주장사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16장 14절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전해진 복음을 들었을 때 그와 온 집이 다 세례를 받고 그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 설립의 근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40절에 보면 "두 사람(=바울과 실라)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처럼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도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에 먼저 찾아갔습니다.
만약 루디아가 없었다면 빌립보 교회는 그렇게 칭찬이 있는 교회가 되지 못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교회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루디아는 돈을 버는 만큼 제대로 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질 때도 루디아가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한 여성으로 인해 그의 가정이 예수를 믿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선교의 토대가 다져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약한 것 같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기회나 권한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고자 하면 굉장한 일을 이룰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또 한 명의 여성 브리스길라는 사도행전 18장에 등장합니다. 그의 남편의 이름은 아굴라인데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부부가 같이 신약성경에 5번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금실이 매우 좋았던 것같이 보이고 두 사람이 마음이 일치하여 주님을 위하여 그 자신들을 드리는데 열정이 있었습니다.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경우는 한 번이고(고전 16:19), 나머지 네 번은 모두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행전 18:18, 26; 롬 16:3; 딤후 4:19).

브리스길라가 어떤 여인인가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브리스길라는 가정과 일에 충성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브리스길라는 가정과 일에 충실한 굉장히 가정적인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좋은 아내이며 가정에 충실한 주부였을 것입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더라면 교회 일도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같이 나온 5번에서 4번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미루어 브리스길라의 믿음이 아굴라의 믿음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서 아굴라는 브리스길라에게 좋은 협력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굴라의 관용적인 외조와 협력 없이 브리스길라가 좋은 성도가 되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브리스길라가 가정적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의 눈에 벗어났다면 교회의 좋은 일꾼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여성 직분자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모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일만 아니라 가정의 일, 직장의 일 등 이 모든 일을 잘 하는 자가 좋은 일꾼이란 말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장막 깁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이 일을 하여 돈을 벌어 전도에 쓸 만큼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전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 최고의 성도입니다. 자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동시에 자기 일만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합니다.

둘째, 브리스길라는 교회를 잘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교회 설립 당시 바울을 협조한 부부입니다(행전 18:1-4). 본도(Pontus)에서 나고 로마에서 살던 유대인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에 동행하여 에베소로 갔습니다(행 18:18). 그리고 글라우디오가 죽음으로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낼 때에 로마에 있었던 흔적이 로마서에 나타납니다. 로마서 16장 3절에는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서는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한 것으로 봐서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바울을 전심으로 도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목회서신 저작 당시에는 에베소에 거주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는 말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은 교회였습니다. 그 집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셋째, 브리스길라는 잘 가르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성경에 능하였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더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앞에 나온 것으로 봐서 브리스길라가 주로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볼로는 당대에 최고의 목회자입니다. 당시에 가장 인텔리이고 가장 박식한 목회자였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 파가 있을 만큼 그는 힘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만큼 아볼로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에는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합니다.
당시에 가장 헬라문화가 번성하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인 고린도의 교회가 아볼로를 청빙하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가 청빙할만큼 유능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당시의 최고의 목회자를 브리스길라가 데려다가 가르쳤습니다. 그는 학식은 많았지만 영적 지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모자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브리스길라가 보충해 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요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또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의 고린도 지방의 환경은 젊은 여성들이 지나치게 나서면 오해를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신전에는 젊은 여 사제들이 음란하고 부도덕한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도서 2장 3절에는 "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고 합니다. 늙은 여자는 가르치고 젊은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는 당대 최고의 목회자를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는 영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교회의 여성은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풍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3
나는 약한 여자라, 나는 어린아이라, 나는 노인이라, 나는 병든 자라 할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루디아를 통하여 아름답고 칭찬이 있는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것 같이, 브리스길라를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시작되고, 로마에 가정교회를 이룬 것 같이, 또한 아볼로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가 배출된 것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할 때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충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행전 13:1-3)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행전 13:1-3)       

                                                                               1
세상의 일들은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는 것을 장려합니다.
경기를 하더라도 우승을 해야지 준우승을 하는 사람이나 팀은 빛이 바랩니다. 마라톤을 해도 1등을 하는 사람은 두고두고 기억되지만 2등을 하는 사람은 0.1초 차이로 2등을 하더라도 금새 잊혀집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주연배우는 화려한 각광을 받지만, 조연배우나 엑스트라는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엑스트라나 조연이 주연배우가 되기 위한 한 과정으로는 몰라도 엑스트라나 조연에 만족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요즘은 어떤 영화에서는 조연배우의 뛰어난 연기로 영화가 사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조연배우의 개런티가 주연배우보다 높은 경우도 있지만 매우 드문 경우이고 누구나 주연을 하고 싶어합니다.

바울 주위에 많은 조연 또는 엑스트라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역할이 크든지 작든지 만족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나바, 실라, 디모데,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소스데네, 더디오, 뵈뵈,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도왔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주연배우가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엑스트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평가기준에서는 모두가 다 중요한 인물들이요 인격들입니다.
세상에 글을 남긴 것이 없거나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사람들의 평가에서는 엑스트라 취급되거나 무시되어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에 있어서는 사도들보다 더 칭찬이 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직분은 목사이고 설교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성가대의 찬양도 중요한 것 같고, 대표 기도하는 일 등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모든 직분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평가는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는 그 기준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외형적인 것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직분이 목사이든지, 장로이든지, 권사이든지, 집사이든지, 아니면 아직 아무런 직분이 없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일을 위하여 내가 내 자신을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스타 목사나 스타 장로 때문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나있는 장로님이 있는 교회라든가 지식층이 많은 교회가 오히려 그렇지 못한 교회보다 성장하지 못하고 시끄럽기까지 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일인자나 주연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엑스트라나 2인자 되는 것에 만족하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성장합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금방 납득이 가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교인들만 2인자나 조연이 되는 일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도 조연이나 2인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주연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심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달란트, 봉사를 드리기에 열심일 때 그 성도는 주님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시는 성도이며 그 교회는 주님이 축복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2
바나바는 2인자가 되기를 즐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바울을 위해서 2인자가 되기를 자청한 사람입니다.
만일 바나바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바울이 사도들과 교제하며 어떻게 주류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바나바는 중요한 신앙의 선배요 동역자요 친구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때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만난 것과 주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행전 9:27).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함으로 가이사랴를 거쳐서 다소로 피하여 갔을 때 다소까지 그를 찾아가서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바나바입니다(행전 9:29-30, 11:25-26).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니라.”고 기술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good man)이라고 했습니다. 바나바의 성품이 근본적으로 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았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의 의미는 격려자(encourager) 또는 권위자(=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 comforter)입니다. 격려나 권면과 위로를 잘 한다는 것은 커다란 은사요 축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나바의 격려와 권면과 위로가 사울을 바울 되게 하였습니다.

일본에 가쿠(加來國生)라는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성적표를 나눠줍니다. 가쿠의 차례가 되어 성적표를 받으러 나갔더니 선생님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에도 이처럼 잘하라.”고 말하고는 성적표를 건네 줍니다. 사실 그는 성적이 하위였기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날 따라 선생님이 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지 의아하여 성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성적은 전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그에게 성적표를 보여달라고 졸랐지만 그는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중요한 변화가 그의 신상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에게 자신감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나도 노력하면 상위성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요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이 즐겁고 학과과목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나중 믿음을 시작한 사람들을 칭찬할 때, 목회자가 성도들을 칭찬할 때,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감사할 때, 교회는 아름다운 발전을 이루어나갈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나 증거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할 때 바나바의 격려나 위로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이지만, 주위에 나를 격려해주고 함께 같은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됩니다.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며 하나님의 길로 날마다 날마다 꾸준히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왔을 때, 그곳 안디옥 교회에서 둘이서 함께 일 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일컬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만난 이래 그 둘은 거의 모든 곳을 함께 다니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들의 공동사역 초기에는 바나바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안디옥 교회에서는 그 힘대로 부조를 마련하여 바나바와 바울 편에 보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안디옥에 1년을 머문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따로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한 후에 그들을 파송하였습니다.
해서, 바나바와 바울과 또한 바나바의 조카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함께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들의 전도지는 소아시아의 남부 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밤빌리아에 이르렀을 때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소아시아 지방을 다니면서 끝까지 전도여행을 잘 마쳤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이방인 크리스천의 구원문제로 시비를 걸어왔을 때에도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 함께 참석하여 그들의 이방인 전도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변론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그들의 변론을 옹호하여 좋은 성과를 갖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안디옥에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의 말씀 가르치는 일에 힘씁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바나바에게 그들이 전에 전도 여행한 지역을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지 방문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일차여행 때에는 밤빌리아에서 그들을 떠나 먼저 예루살렘으로 간 마가이지만 다시 한번 그에게 함께 일할 기회를 주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반대를 합니다. 그와 같이 자기 육신만을 생각하는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팁니다. 해서, 이 일로 둘이 심히 다투고 각각 다른 길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수로로 여행을 떠나자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육로로 여행을 떠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 중에 누구의 것이 맞습니까?
둘 다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바나바가 잘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마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나중에도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을 것이지만, 삼촌인 바나바가 자기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줌으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고 후에 베드로와도 교제하여 베드로의 영적 아들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번 변변치 못한 믿음을 보인 사람일지라도 그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음을 봅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과 헤어진 바나바가 어떤 전도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으로 미루어 이 사람 저 사람을 격려하며 위로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일꾼 되게 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울이 후에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다시 협력목회를 한 것을 보면, 마가에 대한 바나바의 판단이 옳았음을 더욱 알게 합니다.
바울의 후기서신인 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니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골 4:10-11)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정해진 직무가 따로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잘 띄는 일로 봉사할 수도 있고,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일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기관이나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보조적인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맡든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감당하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마음으로 하느냐 하지 못 하느냐입니다.
우리가 맡은 바 어떤 일을 감당하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마음으로 감당할 때 하늘에서 우리 상급이 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