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9, 2012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 (사사기 6:19-24)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 (사사기 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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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들의 오래된 인사 가운데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혹은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까?’란 인사가 있습니다. 한반도의 역사 중에 전쟁과 가난이 없던 때가 드물었기에 밤중에 무슨 변고라도 없었는지또는 다음날 끼니에 대한 고민 없이 잠을 잘 잘 수 있었는지 묻는 인사였습니다.
요즘은 한국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과정 중에 있으니 이런 인사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전쟁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려가 몽고에게 항복하여 다스림을 받고, 조선이 명과 청에 조공을 드리고, 일본에 의하여 36년 간 지배를 당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시련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족속이 애굽에 의하여 430년 간 종살이를 하였으며 솔로몬 이후 분열된 북방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무너진 이후 피섞임을 당하며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인이라 칭하여지며 멸시를 당하다가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었던 남방왕국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무너져 내린 후에 일부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지내다가 놓임을 받은 이래 메대와 바사에 의하여, 시리아에 의하여, 그리스에 의하여, 로마에 의하여 지배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던 것이 로마제국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무너뜨려 내린 후에는 190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다가 194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재건하게 되기까지 그들이 겪은 고초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세계 제2차 대전기간 중에는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 등에서 처형되기도 하였습니다.

1999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하였을 때 므깃도 평원의 발굴장소에 들렀었는데, 므깃도 평원은 지난 수천 년간 수십 번의 전쟁의 장소였다고 합니다. 근동지방의 주도권을 갖기 위한 애굽과 앗수르, 애굽과 바벨론과의 싸움 등 크고 작은 싸움이 수십 차례 일어난 곳이며 그 장소가 묻히고 또 그 위에 새로이 건설되고 하여 십여 층(layers)이 쌓였다고 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16:16)에서 장차 인류의 마지막 싸움 장소로 예언되어진 ‘아마겟돈'(Armageddon)은 번역하면 ’므깃도의 언덕 또는 산‘이니 이 므깃도 평원 또는 언덕에서 또 한 차례의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이후에 공중에 재림하셨던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평안, 평강 또는 평화’란 뜻의 ‘살롬’은 한국사람들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또는 ‘밤새 평안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만큼이나 흔한 인사였습니다. 지금도 어떤 크리스천들은 뜻도 모르면서 편지 끝에 ‘살롬’이라고 쓰는 것을 멋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살롬’은 전쟁터에서 사용되어지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적과의 전쟁 중에 성 밖에서 말을 타고 혹은 걸어오는 사람이나 무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때, 또는 그가 또는 그 무리가 전쟁의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휴전 또는 평안의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모를 때 '살롬?=평안이뇨?' 하고 물어 그 또는 그 무리의 목적을 확인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2
오늘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과 여호와의 사자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사사로 부르시는 이야기 중에 시작부분입니다.
기 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밀을 넓은 타작마당에서 타작하는 대신에 좁은 굴 어귀에 마련된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 앞에 나타나서 그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라고 말씀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미디안이 우리를 압제하는 일이 어찌 계속됩니까?"(13절)라고 반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된 성경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 또는 천사라고 그랬다가 그 다음 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여호와의 사자의 말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때로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가 혼돈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밤새도록 씨름하고도 죽지 아니하였을 때 그곳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네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기드온은 '나의 집은 이스라엘의 별 볼일 없는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지극히 약하고 나는 지극히 약한 나의 아비 집에서도 제일 작은 자인데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16절)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은 그렇게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참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이신지 증명할 수 있는 표징 즉 증거를 구하였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꿈인가 생시인가 긴가민가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내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주 앞에 드리기까지 떠나지 마시라고 간청하고, 그는 그리하겠노라고 대답하십니다.
기드온이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잡고 무교전병을 만들어 고기는 소쿠리에 담고 국은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사자에게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사자(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쏟으라"(20절)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니 반석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사르고 여호와의 사자는 그곳을 떠나 더 이상 그곳에 없습니다.
반석에서 불이 나와 고기를 살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식물(食物)을 기뻐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걱정이 됩니다. 히브리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본 사람은 죽고 살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도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으므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나타나 보인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일 것입니다.
보통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떨리는 분이요 진노와 징벌의 하나님으로 여겨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들 중에 영지주의자들과 마르시온에게 속하였던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 약의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세에게 십계명을 준 하나님은 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일을 맡기신 일곱 천사(Hebdomad)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그를 떠나 다른 신을 섬기고자 하는 이스라엘을 힘으로 꽉꽉 누른 가짜 신으로서 '진노와 징계'로 표시되는 존재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참 하나님은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Unknown God)으로 '사랑'으로 표시되는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사랑의 참 하나님'이 '진노와 징계의 가짜 하나님'을 무너뜨려 내리고 진정한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구약성경을 읽긴 읽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듯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잘 알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할 때, 구약에서 보여주는 '오래 참으시고,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용사로 쓰임 받는 일로 기뻐하는 대신에 징계와 진노의 하나님의 사자를 봄으로 죽을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는 기드온에게 여호와께서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으며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이유가 세상에 잘 되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죽음이 두렵고 세상의 불확실함 가운데 마음에 평안을 얻고자 함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은 그에게 “안심하라,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 곧 ‘여호와는 평강’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에 앞서 이미 모세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민수기 6장 26절에서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이스라엘 자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시편 85편 8절에서 시편기자는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사야는 26장 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 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 '여호와 살롬'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2장 14절에서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관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7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사람과 사람을 화평하게 하시고 사람과 하나님을 화평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 울은 또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시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염려하며 근심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 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신가 하면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시고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을 믿을진대 또한 ‘평안을 주시는 여호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고의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장 27절에서 그가 주시는 평안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전쟁의 위험과 다툼과 분열과 걱정꺼리가 있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놀라며 살아갑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평안을 주시는 주님, ‘여호와 살롬’의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들에서 문안인사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의 평안을 전하는 문안인사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또한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평안 또는 화평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열거된 성령의 열매들 중에 '화평의 열매'가 있습니다. 화평이 성령의 열매인 것은 ‘여호와 살롬’의 주님을 믿고 모든 염려와 근심을 그에게 맡긴 사람들에게는 화평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살롬'의 주님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매 우리 또한 늘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을 나누어주며 평안의 본을 보이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Friday, January 27, 2012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22-40)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22-40) 
 

                                                               1
히브리어로는 '레햄'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아르토스'라고 하는 떡 혹은 빵은 인간 기본 생존권의 문제입니다. 해서, '먹기 위해서 사냐?' '살기 위해서 먹냐?'하는 말이 있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도 있지만, 인간의 모든 욕망 가운데 가장 큰 욕망은 물욕이나 명예욕이 아니라 식욕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빵의 문제'가 인간의 가장 기본 문제일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나온 것인데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을 구제하는 이치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경제'라는 --오이코노미아--가 구원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곧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을 경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간구원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육적인 구원이요 또다른 하나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사람들이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사안은 육적인 구원이요, 하나님께서 더 관심을 두고 계신 사안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심에 영혼구원이 궁극적이기는 하지만 육적인 구원을 무시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육신 구원의 문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문제에 더 관심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서 40일 금식을 하셨을 때 마귀가 먹는 문제--돌덩어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하신 것은 육적인 떡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떡이 무엇입니까?
육적인 구원의 문제입니다. 배고픔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이 사는 것은 육신의 구원의 문제-곧 육적 배고픔의 해결-뿐 아니라 영혼 구원의 문제-영적 배고픔의 해결과 영생의 문제--를 위한 삶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2
22-25: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무리가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들도 구원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배고픔으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썩는 양식"은 오직 배고픔의 문제만 해결하여줍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곧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줍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세상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님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니까, 군중 속의 사람들이 질문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질문합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가 쉽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즉 인자를 믿을 때 우리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자를 믿는 것입니다.

30-31: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들은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인자가 양식-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준다고 했는데 그 양식은 무엇입니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는데, 우리는 무슨 양식을 먹을 것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32-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배고픔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 만나가 예표하는 '하늘로부터의 참 떡'-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떡-'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생명의 떡'입니다.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청합니다.
'이 떡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 위하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항상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먹는 것입니다. , 듣는 것입니다.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떡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군중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은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를 내어쫓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예수님께 주시고자 함'이심이요 또한 '예수님께 주신 바 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 살리심을 입는 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온 자,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심을 입는 것--생명에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3
무엇을 위한 신앙생활입니까?
썩는 양식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 (고전 2:14-3:3; 마태 13:3-23)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 (고전 2:14-3:3, 마태 13:3-23)


  성경구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고전 2:14)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덕경(德經)」제 41장):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上士聞道, 勤而行之)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간수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듯하기도 하며
     (中士聞道, 若存若亡)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When the be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practices it assiduously;
        When the average student hears about the way, it seems to him one moment there and
       gone the next;
      When the wor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laughs out. If he did not laugh,
       it would be unworthy of being the way.)

노자의 도를 듣는 세 종류의 사람의 구분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장)에서 세 종류의 밭의 사람과 바울의 세 종류의 영적 상태의 사람(고전 2:14-3:3)의 구분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노자의 ‘어리석은 사람’(下士)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가’의 사람이요, 바울의 예에 있어서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입니다. ‘길가’의 사람은 천국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주로 듣기를 거부하고, 혹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닫힌 마음으로 들으며 그 속에서 이를 비웃거나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마태 13:19)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석은 사람이 비웃지 않는 천국 말씀’은 ‘천국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한다”(고전 2:14)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육에 속한 사람’을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는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자의 평범한 사람’(中士)은 예수님의 돌밭’이나 가시 떨기’의 사람이요, 바울에게는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듣고 긴가 민가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태 13:21, 돌밭’의 사람)이거나 혹은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마태 13:22, 가 시 떨기’의 사람)입니다. 바울의 ‘육신의 사람’은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자라지 않는 사람이요, 시기와 분쟁 등 육신의 소욕을 따라 행하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 3:1-3). 갈라디아서의 예로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갈 3:3)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 리가 가시나무가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되고 찔레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말림을 당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는 베임을 당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자의 뛰어난 사람’(上士)은 도를 듣고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좋은 땅’의 사람이요, 바울의 ‘신령한 사람’ 곧 ‘성령에 속한 사람’(고전 2:15)입니다. ‘좋은 땅의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자요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에 관한 구분은 비단 도(道)를 수학(修學)하는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사업을 하는 사람, 가정을 돌보는 사람 등 모든 분야, 모든 사물과 사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上士)이 반드시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사업이나 학문 등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교회생활을 하나 ‘십자가의 도’를 깨달음에는 둔하고 따라서 성령의 열매맺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십자가의 도(道)’(고전 1:18)를 깨닫고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뛰어난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는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사안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들을 귀, 볼 눈,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들을 귀, 볼 눈,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듣고자 함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듣고자 함이 필요하고, 발견하지 못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볼 것이 아니라 발견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보고자 할 것입니다.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인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위에 자신의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음을 솔직하게 시인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기 과신(過信)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임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영, 성령)가 그의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지 못함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출석함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그를 이끌기에(요한 6:44 참고) 그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성령의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되, 머리로뿐 아니라 가슴과 마음으로 영접함이 필요합니다.
 

"사이비 목자, 사이비 신자" (고후 11:13)

"사이비 목자, 사이비 신자" (고후 11:13)


성경구절: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3)

공 자(孔子)는 군자인 체하는 사람을 향원(鄕原)이라 하여 ‘덕을 훔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맹자의 제자 만장(萬章)이 향원에 대하여 맹자(孟子)에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마을 사람들이 다 그를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는 어딜 가더라도 성실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공자님은 그를 ‘덕을 훔치는 자’라고 말씀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맹 자는 대답합니다. “그를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것이 없지만, 그는 시류(時流)에 영합하고 혼탁한 세상에 담합한다. 집안에서는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듯 하고 밖에서의 행실도 청렴하고 고결한 듯하여,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긴다. 하지만 그와는 함께 요순의 도(堯舜之道)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그를 ‘덕을 훔친 자’라고 한 것이다.”
공 자는 “나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들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 가라지를 미워하는 것은 곡식의 싹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간사함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구변이 좋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신의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정나라 음악(鄭樂: 음탕한 노래를 뜻함)을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음악(正樂)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붉은 색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향원(鄕原)을 미워하는 것은 덕있는 군자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맹자(孟子)》「진심장구(盡心章句)」下).

원 래 향원(鄕原)은 한 마을의 성실한 사람인데 훌륭하다는 말을 듣거나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성실함이 자신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겉모양만 덕 있는 군자인 체 처세하기 때문에 공자가 ‘덕을 훔친 자’라고 비판한 것이며, 사이비(似而非)-비슷한 것 같지만 아닌 것-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교 회 안에도 사이비(似而非) 목자가 있고 사이비(似而非) 신자가 있는데 참 목자와 참 신자와 혼동되어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이비 목자가 참 목자보다 목회에서 더욱 잘 하는 것같이 보이고, 사이비 신자가 참 신자보다 더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니 문제입니다.
예 수님의 천국비유에서도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좋은 씨를 뿌린 밭에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면 원수(=사단)가 곡식 가운데 혼동을 주기 위하여 덧뿌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묻는 종들의 질문에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대답합니다.
가 라지가 아직 충분히 자라기 전에는 곡식과 비슷하여 혼동을 주기에 가라지를 뽑는다고 하다가 곡식을 다칠까 염려함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 자라서 추수할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곡식과 가라지는 확연히 구분되기에 이제 가라지만 뽑아 불사를 수 있게 됩니다.

바 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참 사도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거짓 사도인 자들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인물인양 행세합니다. 그들의 가르침만이 옳고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요 진리가 아니라고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침의 보수를 요구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시시한 선생이요 사도인지 알 수 있다고 바울을 비하(卑下)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서 그들의 언변과 수사와 논리가 그럴 듯 하고 위대한 선생을 자처하여 높은 보수를 요구하고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대단한 선생이요 사도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그들은 사이비(似而非) 거짓 사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합니까?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못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면서도 참 신자인 체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몰아 세우고 쉽게 비난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각자가 먼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가 20명 가까이 목사님과 사모님이 참석한 가운데 목사·사모 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다. 순서 중에 목회하는 동안 겪은 어려움과 고통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실망하는 것은 사람을 ‘너무’ 믿은 까닭”이라고 한 목사님이 말했다. ‘너무’ 믿은 까닭에 그 성도가 기대에 어긋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럴 줄 몰랐어!” 하고 실망한다는 것이다. 다른 목사님이 반문한다. “목사가 성도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목회를 하나?” 맞는 말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믿을 수 없다면 목회 현장은 지옥이리라. 지혜로운 목사님은, “믿었던 성도가 기대에 어긋난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럴 줄 알았어!’ 할 때 목사의 실망과 고통이 작을 것”이라고 답변한다. 수련회에 참석한 모든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 그것이 바른 지혜라’고 동의한다. 그래서 “그럴 줄 알았어!”가 수련회 이틀 간 유행어가 되었다. 그 목사님이 “그럴 줄 알았어” 말하는 뜻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믿되, 그가 실수가 많은 약한 인간이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 혹 나의 상식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를 이해하려고 하고, 혹 실수나 허물을 범하더라도 용납할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을 가지라는 것이다.

  목회자만 교인에게 실망하고 고통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도 목회자에게 실망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많은 경우에 교인이 목사에게서 받는 실망이 더 클 것이다. 이는 목사가 교인에게 갖는 기대감보다 교인이 목사에게 갖는 기대감이 더 큰 때문이리라. 그러나, 교인에게도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부르시되, 흠없고 티없는 완벽한 인생 중에서 부르신 것이 아닌 까닭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서 지적하듯이, 주님의 온전하시고 지혜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오히려 약하고 미련한 인생 중에 택하신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실망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교회 밖에는 “그럴 줄 몰랐어!” 할 일들이 더 많다. 부모를 난사해서 죽인 ‘메넨데스(Menendez) 형제'의 사건을 듣고 재판을 지켜보며, 미식축구(Pro-football)의 영웅 심슨(O.J. Simpson)의 재판의 결과를 접하며,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두 사람의 뇌물성 비자금 조성 액수가 각각 수천억원을 헤아린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망언을 들으며, “아니, 이럴 수가?” “정말, 그럴 줄 몰랐어” 분노하며 실망한다.

예수님도 인생들을 ‘지나치게’ 믿지 않으셨다. 그를 따라 다니던 수천 명의 무리가 그를 떠난 것에 대해서 실망치 아니하셨고, 그의 12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그를 팔 자임을 알게 되셨을 때에도, “아니, 네가 이럴 수가?” “그럴 줄 몰랐어!” 하지 않으셨다. 그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그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견하실 때, 그의 연약함까지도 아셨기에,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마음으로 그를 용납하셨다.

  “그럴 줄 알았어!” 함은 신앙공동체인 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목회자를 믿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을 불신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조언이 아니다. 상호 신뢰와 신실함의 바탕 위에서 교회와 사회에 속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되,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도 허물과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나와 같은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는 지혜이다.

"믿음에 있습니까?" (고후 13:5)

"믿음에 있습니까?" (고후 13:5)


성경구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중국 무협영화를 보든지, 요가나 선(禪) 기타 어느 도를 닦기 위하여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사부(師父) 혹은 마스터(Master)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시키는 일이 거의 비슷합니다. 물을 길어오는 일이라든지, 장작을 패는 일이라든지, 마루를 닦는 일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단순 노동을 반복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이 단순하고 유치하며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서 거부하는 사람은 그가 원하는 무술이나 도(道)의 높은 경지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왜 이와 같이 지루할 정도로 단순한 일을 반복하게 하고 순종을 요구하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무술이나 도의 기초를 닦는데 걸림돌이 되는 불필요한 자존심을 버리게 하고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주장을 배제하게 합니다.
일정 기간 묵묵히 잘 견디어 냄으로써 기본적인 순종의 자세를 인정받은 사람에게 이제 무술이나 도의 기본을 배울 기회를 주는데, 무술의 기본기나 기본적인 도의 연마에 또한 많은 기간과 공을 들이게 합니다. 그런 다음 본격적인 무술의 동작이나 도의 진리를 가르쳐주는데, 이렇게 하여야지만 비로소 단단하고 바른 무술인이나 도인(道人)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여서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은, 그렇지 아니할 때 저차원적이고 경망스럽게 자기를 드러내는 무술인이나 도인밖에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도의 기본을 익히는 훈련을 잘 견디어 냈음에도 중간에 (허세의)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무술이나 도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또한 허다합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이 바르고 잘 다듬어진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기본을 익힘이 필요합니다. 기본을 제대로 잘 갖추지 못한 사람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항상 젖이나 빨고, 여전히 세상에 속한 것을 따라 살며 자신을 드러내는, 크리스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있기 쉽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특히 교인들이 귀한 이민교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1-2세기 당시의 교회들은 신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이라고 하여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그가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기에 필요한 신앙 교리와 고백을 갖추었는지 살피는 일정한 기간을 두었습니다. 이 기간을 잘 견디지 못하고 카테키즘(Catechism: 교리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비로소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세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세례문답을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를 주며, 아직 크리스천으로서의 죄사함의 확신도 없고 믿음의 고백이나 삶이 없는데도 직분자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바른 교회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자기 확신이 있음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스님이 “나는 30년 동안 좌선(坐禪)을 해왔기 때문에, 번뇌(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어지럽히고, 귀찮게 하고, 사로잡혀 방황하게 하고, 더럽히는 정신작용)가 말끔히 없어졌습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를 듣고 있던 어떤 큰스님이 초상집에서나 하는 조문(弔問)의 인사를 합니다. “정말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습니까?”
그러자, 자기의 오랜 좌선 수련을 자랑스럽게 말했던 스님은 화를 내면서 그런 조문의 인사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대듭니다. 큰스님은 대답합니다. “번뇌가 있어야만 벗어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번뇌는 벗어나고 깨닫는 밑천입니다. 스님은 (번뇌가 없다고 하니) 그 밑천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어질 때는 사람이 죽은 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상심이 되셨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송원스님의 「알기 쉬운 반야심경(般若心經) 」에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곤고(困苦)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 자신만으로는 곤고함이 있음을 말씀함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참고)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죄에 노출되고 죄로 인하여 넘어지기 쉽습니다.
교 회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나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다 순조롭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 자신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과 생각으로 인하여서 안타까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느 크리스천들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본받고 있던 바울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험상궂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의 거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이르른 까닭입니다.
만 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오랜 교회생활을 하여 이미 거룩하여져 있다면, 여러분에게 이제 성령도 필요 없고, 기도도 필요 없고, 교회생활도 필요 없을 것이며, 부족한 목회자의 설교말씀과 성경공부는 더더욱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심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삶의 부족함을 주님께 아뢰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더욱 강하신 능력과 은혜를 간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Check up on yourselves. Are you really Christians? Do you pass the test? Do you feel Christ's presence and power more and more within you? Or are you just pretending to be Christians when actually you aren't at all?"(너희 자신을 점검해보라. 너희들은 진실로 크리스천들인가? 시험에 합격했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너희 속에 더욱 더 느껴지는가? 아니면, 너희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그저 크리스천들인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는가?” 또는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울만한) 믿음(의 삶)을 갖고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하늘에 올리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도 안에 계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곧, 성령께서 그의 안에 계심이 느껴지고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성도의 안에 있는 줄 무슨 증거로 알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예로서는 성령의 은사들(고전 12:8-10, 28-30; 롬 12:6-8 등)과 열매들(갈 5:22-23)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또한 그의 깊은 속으로부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납니다.
만일 이러한 증거들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아직 믿음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버 리운 자들”(ἀδόκιμοί: failing to meet the test, disqualified)이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의 시험(점검)에 불합격한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믿음의 삶 가운데 거하지 못한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심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교인이라고 하는데, 교인이 곧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교인은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느끼지 못하고도 (정기적인) 교회 출석만으로도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또한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는 보증이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에게 믿음이 있는가? 너희가 믿음에 속하여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는지,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울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알쏭달쏭합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줄 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역사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시험에 통과한 성도들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그 믿음의 결과로서 악을 멀리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기 진단에서 아직 크리스천의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고 하여서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주님의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고 자녀 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징계와 심판으로 임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랑과 긍휼로서 임하십니다.
 

Sunday, January 22, 2012

"성경 속의 오이코노미아(=경제)의 의미"

 성경 속의 오이코노미아(=경제)의 의미

 

성경에서 경제(經濟)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iκονομία)는 세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계 혹은 가사의 경영,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경영, 관리 및 감독, 또는 청지기 (=오이코노모스:  οiκονόμος)의 직무’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6:1-4). 즉,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부여받은 각 크리스천 청지기의 달란트의 경영입니다. 각 크리스천은 자신이 청지기(=오이코노모스: 집 맡은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소유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따라 ‘나눔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로, 오이코노미아는 ‘복음 증거의 사명. 혹은 복음 증거를 위한 청지기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9:17). 복음 증거란 지상(至上) 사명을 맡은 크리스천이 개인으로 또는 공동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셋째로, 오이코노미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경륜(經綸)’이란 뜻입니다 (에베소서 1:9). 즉, ‘하나님의 경제(經濟) 혹은 경제계획(經濟計劃)’입니다. 하나님의 경제계획은 다름아닌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구원(人間救援)입니다. 이 시대상황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의 경제계획도 인간구원임은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이 물론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육적·경제적인 빈곤으로 신음하는 이웃을 구원함도 교회가 감당하여야 할 일입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성경을 ‘크리스천들을 위한 (하나님의) 경제학 교과서’라고 봅니다. 성경은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 이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9절) ......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不足)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13-15절)고 함으로써 ‘평균의 경제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이미 찾을 수 있습니다(출 16:18).

 빈들에서 오천 명(남자의 수만)을 먹이신 예수님의 5병 2어의 기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나눔의 사역’을 보여주신 예입니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바울의 예에서도 그러했듯이, ‘나눔의 사역’을 통해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눔의 경제사역’을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셨고, 19절에서 보면, “... (예수님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함으로써 제자들을 ‘나눔의 사역’에 동참시키셨습니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초대교회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나누고 통용할 때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행전 2:44-47, 4:32-35).

 필자는 저서 「Y2K, 무엇이 문제인가?」와 바울서신을 강해한 설교집들(로마서, 고린도전서-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빌립보서)에서 ‘21세기 한국교회’의 모델로 ‘평균의 경제원리’를 실천하는 ‘나눔의 교회’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청지기의 일과 복음 증거의 사명과 하나님의 구원계획(=경륜)을 온전히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경제원리

                                                    성경에 나타난 경제원리



1. 성경에 나타난 '경제(오이코노미아: οiκονομία)'의 의미 
경제원론 교과서에 보면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자원의 희소성(scarcity)을 전제하고 있는 경제학은 '사람의 필요와 소용에 따라, 희소한 자원을 최적으로(optimal) 이용하기 위하여, 행하는 선택 (choice)과 행동(action)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비자(consumer)의 소비경제행위와 생 산자(producer)의 생산경제행위,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시장에서의 시장경제행위를 다루는 분야를 미시경제학 (microeconomics) 이라 하고, 국가차원에서 재정정책(fiscal policy)과 금융정책 (monetary policy)을 적절히 운용하여 물가와 임금, 고용, 이자율 등의 조정을 다루는 분야를 거시경제학 (macroeconomics)이라고 부른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국제무역(international trade)도 이 거시경제학에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제행위는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에서와 같이 재화(財貨)와 직접·간접적 으로 연관이 있는 행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광의(廣義)의 경제행위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보는 대로 한 나라를 움직이고 백성을 다스리고 구제(救濟)하는 전반적인 통치·행정행위를 의미한다.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도 말하자면 경제행위의 전반이라 할 수 있다. 수신(修身)은 개인의 경제원리 (individual economic principle)요, 제가(齊家)는 가정의 경제원리 (domestic economic principle)요, 치국(治國)은 국가의 경제원리 (nation's economic principle)요, 평천하(平天下)는 세계의 경제원리 (global economic principle)를 제시하여주는 것이다.

경제(economy)란 말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
οiκονομία)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에서 오이코노미아의 일차적인 의미는 '가계 혹은 가사의 경영,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경영, 관리 및 감독, 혹은 경영자, 감독자, 청지기(οiκονόμος)의 직무' 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16:2-4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의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청지기의 사무(16:4), 청지기의 직분(16:3, 4)이 경제(經濟)란 말에 해당한다. 경제 를 맡은 청지기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전문(專門)) 경제인(經濟人) 혹은 경영인(經營人)이라고 할 수 있 다.
둘째로,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증거의 사명 혹은 복음증거를 위한 청지기, 관리자(管理者)의 직분(職分)'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9장 17절에서 바울은 "내가 내 임의로 이것(=복음을 전함)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職分)을 맡았노라"고 했는데, 여기서 직분은 '성경적 경제인(=복음증거자) 의 사명'을 뜻한다.
셋째로, 성경에서 오이코노미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경륜'이란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장 9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 (plan, RSV)을 위하여"; 3장 2절 에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stewardship, RSV)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장 9절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plan, RSV)이 어떠한 것을"에서 경륜(經綸)은 오이코노미아 의 번역인 데, '하나님의 경제' 혹은 영어성경이 plan으로 번역했듯이 '하나님의 경제 (혹은 경세제민) 계획'을 뜻한다.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하나님의 경륜(office, RSV)을 따라"고 함과 디모데전서 1장 4절에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 (training, RSV)을 이룸보다"라고 함도 하나님의 인간구원(人間救援)이란 경세제민 (혹은 경제) 계획 또는 정책을 뜻한다.


2. 성경의 경제원리: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공생주의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인간(소비자 혹은 생산자)의 경제원리는 극대화(maximization) 혹은 최적화(optimization)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효용(效用) 혹은 만족(滿足)을 극대화하는 삶을 살아간다. 현대인에게 만족의 척도는 흔히 돈의 많고 적음이다. 직장을 선택 할 때도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다른 조건들은 대충 받아들인다. 또,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위한 경영을 한다.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하여 때로는 경쟁사의 상품을 비방하고, 또 부정한 방법으로 판매이익을 늘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원리는 극대화(極大化)가 아닌 평균화(平均化=balanced out 혹은 averaged out)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 게 만나를 내려 주시고 그들에게 이를 거두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판에서 만나를 거둘 때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또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출애굽기 16장 18절에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금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이 '평균(平均)의 경제원리'을 설명한다. 고린도후서 8장 12-14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함을 보충함은 저희의 유여한 것으 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J. Calvin)도 평균의 경제원리에 대해 서 말할 때, "부한 자는 그들의 물질적 부를 가난 한 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가난한 자는 영적 부를 부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따라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나누어주는 일군(δι
ακονος: minister 혹은 servant)이요, 가난한 자는 영의 풍요로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대리자=vicar)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될 때, 그 사회는 물질적, 영적인 부가 평균화되고 모두가 형편이 더 좋아지는(better off) 사회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공유생활 (common life: Commonism=공생주의)을 하였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 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한 몸 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생활을 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공생주의(Commonism)는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생활이다. 자본주의(Capitalism)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벌어서 자기가 번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비하는데, 한 가 지 단점은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공산주의(Communism)는 각자의 능력에 상관없이 똑같이 벌어 똑같이 사용하자는 것인데, 이상적인 것 같지만 능력이 많은 사람의 일할 의욕을 저하시켜 생산성(productivity)을 떨어뜨리고 따라서 사회 전체가 빈곤(貧困)하게 된다. 그러나, 평균화의 경제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욕 을 제한하거나 무시하는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 교회를 중심으 로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하게 한다. 평균화 경제원리의 실행은 정부나 기타 권력기관의 강제적 혹은 물리적인 법집행으로 가능한 것 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린도후서 8:1-5: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 공생주의(Commonism)는 자기 능력껏 일하여 일한만큼 벌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고 통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균화 경제원리 에 따른 삶이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경제원리를 실천하는 교회상
하나님의 경제계획 (=경륜)은 인간구원(人間救援)이라고 했다. 이 시대상황(時代狀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경제계획도 인간구원이다. 영적인 구원이 물론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경제적 빈곤(貧困)으로 신음(呻吟)하고 자살(自殺)로까지 치닫는 이웃을 외면(外面)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양의 반열(班列)에 선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 25:35-36)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교회가 모으기에 열심이었다면 이제는 '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재벌(敎會財閥)로서 발돋음하고 대형교회 목사라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이 신 그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첫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다.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는 한 사람의 점심식사 분량이지만 이를 떼서 나눌 때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기는 기적이 일어났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선포하는 교회는 인간 의 얕은 계산방법을 버리고 주님의 경제원리에 따라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앞장서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생애(生 涯) 자체가 평균케 하시기 위함 이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말씀한다.  대형교회는 '주님의 이름'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교회의 부(富)를 자신의 몸체 불리기에 무익(無益)하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원래 부요(富饒)하신 분이시나 가난하게 되신 주님의 모범(模 範)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 위에 교회는 크리스천의 경제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부정한 이익을 취함이 아니요, 지나친 낭비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요, 근면하고 분수에 맞는 적절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허례허식의 삶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건전하고 모두의 형편이 좋아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롭 고 선한 청지기(=경제인 혹은 경영인)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시간 역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부지런히 내게 맡기신 달란트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경영(經營)하는 삶을 살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