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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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친해지기 위한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는 것, 여행을 같이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목욕탕에 같이 가는 것, 또는 식사를 같이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그 사람의 고상한 면뿐만 아니라 약점 혹은 나쁜 버릇이나 성격까지도 알게 됩니다. 그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알면서 그 사람을 좋아할 수만 있으면 이로써 진짜 친하게 됩니다.
이 여러 가지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들 중에서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식사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식사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적(政敵)과 어떤 사안을 협상할 때도 식사를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딱딱한 분위기를 피하고 좀더 열린 마음으로 대화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요즘은 정치인들이나 사업가들이 골프회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식사회동이 더 많습니다.
식사를 같이 함으로써 서로 친하여지고 원만한 협상의 결과를 얻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새로운 계약관계에서도 행하여졌고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봅니다.
창세기 15장 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체결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준비하고 그 모든 짐승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창 15:9-10). 창세기 15장 17절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차려놓은 음식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식사계약’입니다. 이어 18절에 보니까,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言約)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도 ‘식사계약’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짐승(=소)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고 말한 다음 9-11절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였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언약(言約)을 맺으시되, 식사 자리를 허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 자리에 같이 하심은 하나님 편에서 친근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구약(舊約)을 영어로 “Old Testament"라고 하고, 신약(新約)은 “New Testament"라고 하는데 “Testament”는 라틴어 “Testamentum”에서 온 것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각각 “옛 계약(=언약)”과 “새로운 계약(=언약)”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식사계약’을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때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제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되, 모세가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계약을 선포한 것과 같이(출 24:8), 예수님은 식후에 자신의 피의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 예수님은,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 11:25 참조). 그리고, 그날 밤에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켜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축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아니, 그 이전, 예수님의 삼년여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고, 함께 주무시고, 수도 없이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그들과 친해지시고 신약백성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계약의 자리를 마련하셨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들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새로운 계약 내용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도 믿는 성도들은 주 만찬(또는 약식으로 성찬)의 식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간의 ‘식사계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씀하실 때 식사를 통한 친밀한 계약관계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요한계사록 3장 20절의 그리스도의 초청을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과 새로운 계약관계에 들어가실 터인데, “더불어 먹는” 친근한 ‘식사계약’ 관계에 들어가십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과 그 자녀간의 계약 혹은 언약은 쌍방계약입니다. 한쪽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때, 다른 쪽이 자신의 약조를 파기하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맺은 계약은 조건부, 제한적 계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예비하신 축복을 거두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믿는 성도들과 맺는 계약은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칭합니다. 이 계약을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다소 실수를 하여 죄와 허물을 범하여 계약을 잘 이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로 자녀를 다시 받아 주시며 주님의 언약의 약속을 끝까지 온전히 이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의 예는 노아와 맺은 언약 이외에 다윗과 맺은 계약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의 임종을 맞이할 때 사무엘하 23장 5절에서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 하시랴?”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의 계약 위반으로 당신의 축복의 약조를 깨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가문에서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시고 그 가계를 축복하시되 메시아, 그리스도를 그 가문에서 나오게 하시기까지 축복하셨습니다.
2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던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날,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 디베랴 바다(또는 호수)에 나타나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요한 21:10)고 말씀하시고, 식단을 마련하신 다음에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한 21:12)고 제자들을 다시 식사 자리에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조반 식사를 같이 하셨다는 것은 용서와 친근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약간은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약의 의미를 일깨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본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대화는 다른 모든 제자들을 위함도 되지만, 그 중에 특히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모든 제자들 가운데 자신의 의협심이 제일이요 주님으로 향한 충성심이 최고라고 늘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마가 14:29)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고 35절(마가 14:31)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는 “저(=베드로)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그 밤과 새벽 사이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되, 처음에는 그냥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여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부인함으로써 그 강도를 더해갔습니다(마태 26:70, 72, 74).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세 번의 연속적인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이 동일한 질문의 반복인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세 번이 각각 다르십니다.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심중을 드러내시는 질문입니다. 아마 동일한 질문을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에 받았었다면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었을 것입니다. “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제가 주님을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지않습니까?” 그의 대답은 자신만만하며 당돌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죽기까지 사랑함에 실패를 경험한 현재의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ναὶ κύριε,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ώ σε).
그가 주님을 부인하기 전에 했음직한 대답과 현재의 대답 사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첫째는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주님의 질문에 확신있게 “예 제가 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무모함이 그에게 없어졌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나 어떤 환경에도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를 물으시기 위해서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베드로는 감히 이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제가 주어진 형편과 때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할려고 노력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 한정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φιλέω)의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베드로가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으로,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마음이었을 때에는 아직 당부하지 않으시던 사명입니다.
만일 그 이전에 이러한 사명을 맡기셨으면, 그는 이 사명 감당함을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기분으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팽개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한 그에게는 그의 능력과 감정을 더 이상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부족을 알기에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함을 허락하시고 이를 우리로 인정하게 하는 것도 감사이고 은혜인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입니다.
16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 번째 질문하실 때에는 첫 번째 질문에서 사용하셨던 ‘비교’의 의미의 “이 사람들보다 더”를 빼고 질문하십니다.“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베드로가 잘 압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도 예수님은 “어떤 때에나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느냐?”의 의미의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질문하십니다. 이는 베드로의 마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럴 수 없는 제한적이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철저히 인정케 하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랑’에 관한 세 번의 질문의 강도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부인(否認)의 강도의 역순(逆順)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맹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는 순으로 강도를 더해가면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질문의 강도를 감해가면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의 ‘허물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는 이제 “이 사람들보다 더”라고 하는 비교(比較)의 부담(負擔)도, “아가파오”(ἀγαπάω)라고 하는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인 사랑”의 부담(負擔)도 빠져 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가 할 수 있음직한 대답의 수준에서 “필레오”(φιλέω)--곧, “너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세 번의 반복되는 질문이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의 마음을 (적어도 이 질문을 연속적으로 받는 당시에는) 불안하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근심하여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ώ σε). ‘주님께서는 저의 모든 것--마음으로부터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도 아시고, 그러나 저의 사랑의 표현이 환경 가운데 얼마나 부족한 것인 줄도 이미 보아서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대답입니다.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인정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사명을 당부하심으로 베드로와의 계약(covenant)을 마감하십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생이 어떻게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주후 39-44년) 때에 그의 원치 않는 감옥에 투옥되고(행전 12:3-19), 또한 후에 네로 때(64-66년경)에는 체포당하여 네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처형(외경 베드로행전 35장)을 당하였다는 전승(傳乘)이 있습니다.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베드로 앞에 어려움과 죽음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지만, 그러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대장되신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ἀκολούθει μοι, Follow me)”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불가능하거나 힘든 일처럼 보이지만,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고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나에게 사명을 맡기신 주님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인도하십니다.
20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풍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예수님께로부터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임을 들은 베드로가 돌아보니 함께 걷고 있는 베드로와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다른 제자를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제자가 ‘요한 자신’(어떤 성경학자들은 제삼의 제자로 추론하기도 하지만)임을 암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제자는 요한복음 13장 23-25절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주님을 팔 자가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할 정도로 예수님과 친근감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들은 다음에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뛰어가되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같이 빠르게 달려갈 정도로 베드로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 제자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베드로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어떤 모양의 순교를 당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 능력이 이만한 데 내가 왜 저 사람보다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거야?’
‘내 믿음이 저 사람의 믿음보다 나은데, 하나님은 왜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축복하시는거야?’
이러한 끊임없는 비교가 하나님께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비교는 사단의 미혹의 절대적 수단입니다.
이 비교가 최초의 사람, 하와를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옛뱀의 미혹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즉, “하나님만큼 너희도 지혜로와질 것”이라는 하나님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하와가 넘어진 것입니다.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과 계획은 상대적이거나, 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독특하고 개별적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인생의 계획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 못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과 뜻을 내가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못한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네 할 일이나 잘하라”(Mind your own business)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σύ μοι ἀκολούθει: You, follow me)고 다시 한 번 권고하실 때, “너는”(σύ)에 힘을 주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장래의 일에 지나친 호기심도 갖지 말고, ‘너는’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23절: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어떠한 생을 살도록 계획하시고 허락하시든지 신경쓰지 말고 너의 감당할 일이나 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네로의 기독교 핍박시에 체포되어 주후 65-66년경에 죽음을 당한 반면에,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된 적이 있긴 하지만,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90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100년을 전후하여 비교적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3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반을 나누심으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시고 그의 피와 몸으로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제자들이 주님과 쌍방계약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행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과 계약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허물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우리를 늘 인도하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그와 식사계약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일상의 삶 중에 그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하시는 삶을 즐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하되 부족함을 염려할 것이 없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며,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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