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0, 2012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명기 10:12-22)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명기 10:12-22)


1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1908~67)의 연시(戀詩) <행복>에 나오는 내용인데, 시조시인인 정운 이영도씨에게 보낸 수많은 연애편지의 모음을 출간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책 중에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시조시인 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여인으로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뒤이어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그의 마음 전부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서른 여덟 살의 유치환은 스물 아홉의 청상 과부 이영도를 행하여 사랑의 불길을 태웠습니다.
당시의 유교적 전통의 규범을 깰 수 없기에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영도에게 유치환은 거의 매일 편지를 쓰고 시를 써서 보냅니다.
20 여 년 동안 5천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불타던 유치환의 사랑은 1967년 2월 13일 부산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끝이 납니다. 이영도가 소장하였던 유치환의 연애편지들은 그가 타계한 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짝사랑이든지 쌍방의 사랑이든지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우리는 더욱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생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사랑을 함으로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함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을 사랑하므로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인생의 행복의 비결에 대하여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원하시고 허락하시는 행복의 비결을 깨닫기 위하여 우리에게 선행되어질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에 할례(割禮)를 받는 것입니다.
창 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가정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쌍방계약)을 맺기를 원하시는데, 그 언약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가속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인 것 같지만 인생들을 축복의 말씀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남자에게 중요한 재생산 기관(reproduction organ)의 표피(foreskin)를 베는 행위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표시, 즉 나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림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육체에 할례를 행하였지만, 만일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그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표시’의 할례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은 ‘과연 아브라함의 할례가 유효한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심입니다.
아 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삭을 온전한 번제물로 드리고자 함으로써 그의 할례가 유효한 것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고, 그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 리고 창세기 22장 16-18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그의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은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의 씨로 ‘대적의 문을 얻게 하는’--즉 메시야가 그의 씨로 임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곧 하나님의 구원함에 이르는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그가 할례의 언약을 따라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림으로 얻어진 것인데, 하나님은 사자를 통하여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12-13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말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을 사랑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까?
13절에 이른 대로, 우리 각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복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14-15절: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준행하였기에 그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NLT: "Therefore cleanse your sinful hearts and stop being stubborn.")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께 헌신이요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결단의 표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는 않고 자기의 육체에 있는 할례의 표시만을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와 같이 자기의 육적 할례 받음을 자랑하는 유대인 할례당에 속한 사람들에게 표피 조금을 베고 그같이 자랑할 것이면 아예 잘라내고 더 자랑하라고 그들을 책망합니다(갈 5:12).
할례는 하나님께 그의 마음과 삶의 가장 중요한 드리는 것이며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외적인 할례를 자랑하며 전혀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할례의 신약적 표현은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부, 성자와 성령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드리겠다는 결단이요 헌신인데,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세례의 효력을 상실한 채의 삶인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circumcise your hearts)고 말씀함은 진정한 의미의 헌신과 결단을 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기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신 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요”라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서 4장 4절에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고, 예레미야 6장 10절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 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보다는 그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즐겨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곧 진정한 결단이요 헌신임을 선포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circumcise the foreskin of your heart, cleanse your sinful hearts)은 “마음의 표피”를 도려낸 사람인데, 여기서 “마음의 표피”란 교만한 마음, 완악한 마음, 자고한 마음 등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목이 곧고 자고함”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죄된 마음을 도려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된 마음을 도려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데, 이것을 버리는 사람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7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다시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신들 중에 신이시요 주들 중에 주시요, 크고 능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만유의 주님 되십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장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위에 그는 사람들의 중심을 보시고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8-19절: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므로 그들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나그네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살 때 나그네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 리 인생들이 평생에 어떤 삶을 살지는 다 살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불행해질 수도 있고, 현재는 남편이 있는 사람이 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주변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외면하는 자가 아니라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동정이나 동냥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이웃 사랑함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한 행복하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20절에서 모세는 12절에서 역설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그에게 친근히 하라-곧 그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우리의 맹세는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닌 오직 그의 이름에만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21-22절: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듯이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할 것은 그는 우리의 찬송이시요 우리의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크고 두려운 일이란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처음 애굽에 내려갈 때는 70인밖에 되지 아니하였지만 그 자손들이 430년 후에 애굽을 나올 때는 남자 장정만 60만이요 어린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을 계수하면 족히 200-300만이 되고 또한 많은 가축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200-300만의 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세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7절에서 주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3
인도 태생의 예수회 사제인 안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1931-1988)가 쓴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두 친구가 아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한 친구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래 자네 요즘 교회에 다닌다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 잘 알겠구먼! 그래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떤 분인가? 어디서 태어났나? 몇 살에 죽었지? 무슨 일을 했나?"
그러자 교인이 된 친구가 말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니,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난 얼마 전부터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되었지. 그러나 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어. 사실 나는 얼마 전에 술주정뱅이에다 빚까지 지고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술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다네. 산산조각이 났던 우리 가정도 화목해졌지. 이게 모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나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야. 이 사실만은 나도 알고 있어!"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므로 우리의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 전부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더욱 행복하여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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