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청년의 근심” (마가복음 10:17-22)
1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입니다. ‘빈 손 들고 왔다가 빈 손 들고 간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말이지만, 이 말의 뜻을 잘 아는 만큼 담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공수래 공수거’는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삶의 법칙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삶의 법칙입니다.
전도서기자는 5장 13-15절에서 재물이 주는 폐단과 연관하여 공수래공수거의 진리를 기술합니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폐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6-8절에서 족한 줄 아는 생활과 연결하여 공수래공수거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살던 오두막을 빌려 ‘선택한 가난의 삶’을 사는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범우사, 1976, 1999)란 수필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만한 것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를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 신앙생활의 실제(實際)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지혜와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고 더욱 더 많은 것에 얽매이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기도의 제목들이 무엇입니까?
주님, 더욱 더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더욱 더 좋은 집을 주시옵소서.
더욱 더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주시옵소서.
더욱 더 높은 지위를 주시옵소서.
우리가 듣는 신앙의 간증들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살 때 이것저것 얻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랐더니 이런 것들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 간증이 주류를 이룹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많은 간증의 내용들이 과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까? 바울의 기쁨과 감사와 일치한다고 여겨집니까?
아니면, 시편에 주를 이루는 많은 다윗의 찬양과 감사의 시들과 일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속화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2
17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달려왔습니다.
그 사람은 마태, 마가와 누가복음을 종합해보면, 부자인 것을 알 수 있고(마태 19:22; 마가 22; 누가 18:23), 청년인 것을 알 수 있고(마태 19:20, 22), 관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 18:18).
이 사람은 부자, 청년, 관원입니다.
게다가, 뒤에 나오는 대로 도덕심도 뛰어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혼이라면 일등 신랑의 조건을 갖춘 사람인 셈입니다.
세상에서 부러워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에게도 인생의 고민이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부자, 청년, 관원의 고민은 보통사람에게는 너무 사치하게 여겨지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약간의 돈만 더 있어도 삶이 편하여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젊음만 있어도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지위가 있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부자, 청년, 관원은 부러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 달려온 청년은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꿇어앉았다”고 함은 예수님께 겸손과 경의를 표함이요 그의 말씀을 듣겠다는 태도를 보임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에서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16)라고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18:18)에서는 ‘선한 일’ 대신에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는 것이 선한 행위로써 얻어지는 줄 알았기에 ‘무엇을 해야 또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청년의 그 짧은 질문에 몇 가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하신 분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 청년이 예수님을 윤리선생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은 그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 되시지만, 청년관원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윤리선생으로 여기며 ‘선하다’고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우리 인생(人生)은 선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저희는 부패하고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 14:1-3; 53:1-4)라고 했고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는 영생에 관하여 가르쳐 줄 분은 하나님이시지 세상의 선생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유한하며 약한 존재인데 어떻게 영생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까?
공자님은 솔직하여 그의 제자들 중에 자로(중유)가 죽음에 관하여 물을 때 대답하기를, “아직 사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했습니다(논어 선진편).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생은 죽음도 그 이후에 있을 영생에 관하여는 더욱더 알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19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세 번째는 영생이 무슨 선한 일을 통하여 얻어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영생의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지만,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음은 더 더욱이 몰랐습니다. 부자 청년이 생각한 영생의 개념은 아마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없이 형통하게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현재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와 젊음을 그냥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모든 권세와 부를 소유한 다음에 불로장생(不老長生)하기 위하여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고자 사방으로 사람들을 보낸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도 언젠가는 자기도 늙을 것이라는데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인데, 해서 세상에서 오래 걱정 근심 없이 오래오래 사는 의미로서의 영생의 비결을 혹 사람들의 말에 선지자라고도 하며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이 사람이 알지나 않나 하여서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계명들은 십계명 중 6, 7, 8, 9, 10 계명과 5계명입니다. 부모공경의 5계명을 포함하여 6계명에서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런 계명들을 지킴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20절: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부자 청년은 ‘아 그거였구나’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자신 있게 한 대답이 거짓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이러한 계명들을 의무감으로 지킨 것이지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지킨 것은 아닙니다. 보통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현재에도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 청년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삶의 모습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별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나오고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되어져야 할 것인데, 아마 이 청년도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듣고 배운 교육을 따라 별 생각 없이 그렇게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6가지 계명을 나열하셨습니까?
영생이--물론 청년이 생각한 영생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지만--이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계명들이 무엇이며 왜 지키는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계명들은 이웃사랑-형제사랑의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의 의미에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형제사랑의 마음 없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사랑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계명들을 지키기 때문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들을 사랑하기에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부자 청년이 기대한 것과 같은, 이 세상에서 늙음과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신령하고 영원한 삶입니다.
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부자 청년의 말과 생각 가운데 있었던 네 번째 잘못은 영생이 움켜쥐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에 관하여 질문한 것은 그가 현재 갖고 있는 부와 지위와 젊음에 금상첨화(錦上添花) 격으로 영생을 더하기 원함에서였습니다.
그러하면 그의 삶이 완전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요 나눠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사랑하시기에 말씀을 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때로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말씀들처럼 여겨집니다. 해서, 종종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겠지,’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여전히 들어주시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찜찜한 마음은 줄어들지 않고 기도는 점점 사그러집니다.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도,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함 가운데도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 주심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그가 계명을 지키는 정신 또는 마음입니다. ‘왜 이러한 계명들을 지키는가’인데 곧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커다란 도전의 말씀입니까?
‘네가 참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느냐? 그러하다면, 너의 있는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그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했지만, 기실은 외형적 모습 뿐이요 진정한 사랑의 마음에서는 아니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년의 부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함의 장애요인임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물로 드리라”(창세기 22:2).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도전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로 주님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주변 조건들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할 때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버릴 때 하늘에 보화를 쌓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것을 움켜쥐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아무 것도 주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청년이 원하였던 영생의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던 일을 계속하며 더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지만 그것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9장 27절(마가복음 10:28)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29절에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좇기 위하여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그의 삶의 전부인 ‘배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그들의 ‘아비’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는-덜 사랑하는-삶을 사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청년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간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근심케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 도전의 말씀을 주심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 위에 무엇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여전히 세상 속에 있는 것들은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무엇을 잡으려고 손을 움켜쥐기를 원합니까?
손을 펴고 우리의 마음 속에, 머리 속에, 삶 속에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