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9, 2013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온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로마서 11: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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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과 한국인들간에는 비슷한 점들이 많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외세의 영향과 지배를 많이 당하면서 살아온 것,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 강하고, 족보를 중요시 여기고, 자녀들의 교육에 정열을 많이 쏫는 것, 미국 땅에서의 삶에서  그들의 직업변천과정--가게 종업원에서 출발하여, 가게 주인이 되고, 자녀들을 의사나 변호사를 시키는 것등. 종교에 열심을 내는 것도 비슷한데, 유대인들이 옛언약인 유대교에 머물러있는 반면, 한국인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새언약에서 두드러짐을 보면 현재시점에서는 한국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축복받은 백성이라 할 것입니다.
어떤 학문이나 분야에서건 콧대높은 미국인이 한국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경우가 없는데,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에서는 한국 신학과 한국교회 성장의 연구에 관한 과목이 있고, 관심있는 미국신학생들이 과목을 택하고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임을 깨닫게 되고, 이들의 이제까지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이란 분이 과연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유프라데스강 하류--지금의 지도로는 이란에 해당하는 곳이겠죠--의 갈대아·우르땅에 아브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아브람아, 아브람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고, 땅과 민족을 주리라.”
아브람은 유프라데스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행하여 하란에 이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르(רבע)에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하(ה)를 덧붙여서 된 단어인데 해서,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강을 건너옴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약속을 지키심에 조금도 오차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인도하시어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고 아브라함은 여행자로서 그 땅에 머물고 있지만 약속하신 대로 그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시간과 날을 짐작할 수 없어 초조한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조금도 착오없이 약속하신 바를 지켜가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시고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해주시겠다던 약속의 기초를 다지십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으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씨름하다” 혹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란 축복의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약속의 땅--가나안을 얻기까지 430년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하시는데 먼저 요셉을 그곳 땅에 끌려가게 하시고 가나안땅에 가뭄이 들매 야곱의 자손 70인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약속하신 430년의 기한이 차매 모세로 장정 60만을 포함하여 250만 혹은 300만의 이스라엘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대로 그들의 믿음을 보시며 그들을 축복하시는 생활을 하시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이방 우상에게로 기울어진 마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하셨던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이 젊어서는 지혜와 명철의 왕이었지만, 아무리 지혜자요 하나님께 신앙이 있던 사람도 세상과 짝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왕이기도 합니다. 천명이나 되는 이방의 처첩들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고, 치명적으로 북방왕국 이스라엘과 남방왕국 유다로 갈리는 계기(契機)가 됩니다.
갈린 다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에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듣는 귀가 둔한 왕과 방백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징계를 당합니다.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피섞임을 당하여 혼혈민족이 되어 결국은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며 예수님 때에는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조롱(嘲弄)꺼리가 됩니다.
남방왕국 유다왕국의 왕과 방백과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은 결과 이스라엘이 망한지 140년 뒤인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70년의 포로생활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처음 돌아왔을 때에는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하고 성전도 개축하여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은 또 다시 옛모습의 삶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은 그들을 헬라인, 시리아인과 로마인의 손에 부치십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께서 “길과 진리와 부활과 생명되심”을 말씀하셨지만 복음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그를 로마인의 손에 내어주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고 흩어짐을 당합니다.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두 차례에 거쳐 죽을 힘을 당하여 투쟁해보지만 역부족입니다.

132-135년 2차 투쟁을 벌였던 바-코흐바(Bar Kokhba) 혁명에서 패하고는, 유대인은 법으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얼씬할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렀다가는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의 방황이 2,000년 가까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후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시 건설됩니다. 이것이 경이(驚異)가 아닐 수 있습니까? 세계 역사상 어느 나라와 민족이 그렇게 오랜동안 흩어짐을 당한 다음에 다시 나라로서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족속을 일시적으로는 징계하시고 버리신 것같이 보이지만,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말씀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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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인 1-12절에서는 남은 자의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13-24절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역사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이스라엘중 얼마가 현재에는 원 참감람나무에서 꺾이움을 당하고 부러진 상태로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고 종국에는 다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구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소망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25-36절은 1-12절과 대조적으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13-24절이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미래입니다.

25절에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비밀(秘密)이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밀(隱密)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을 향한 경륜(經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구원의 오묘한 섭리를 말함입니다.
에베소서 1:9-10에서 바울은 “그 뜻의 비밀(秘密)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비밀은 보통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비밀은 알리지 아니하셔서 비밀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고자 아니하여서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비밀을 모든 이방종족에게까지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해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그리스도의 피로서 담력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오고, 이로서 이스라엘도 시기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합니다.
11장 첫부분에서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할 때, 남은 자란 뉴앙스가 적다는 느낌을 주지만 숫적으로 소수라기 보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을 가리킨다 말씀드렸습니다.
대조적으로, 온 이스라엘은 많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뜻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하나님의 예정의 경륜에 따라 믿음을 지킨 이스라엘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될 것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28절에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말씀합니다. “복음으로 하면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인하여 원수된 자”라 함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방인 가운데는 받아들여지고, 해서, 이스라엘중 얼마는 꺾이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일시적 버림의 대상이 된 반면,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택하심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뿌리--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을 조상으로 둔 까닭에 여전히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29-30절에 “하나님의 은사(恩賜)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하는 일에는 홧김에 혹은 다른 일시적 감정으로 저지르는 일이 많습니다.
해서, 일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라 식언(食言)치 아니하시고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바울이 후회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말씀함은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을 내 백성이라 부르신 뜻”이 사람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고 불순종한 것이 화가 나서 그들을 버리시고 이방인을 그의 백성 삼으신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깊은 경륜 가운데는 때가 이를 때에 이방인에게도 아들의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고, 그들도 구원할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해진 것이 이스라엘의 순종치 않음으로 된 것이지만, 이는 그 경륜의 때가 이름을 말씀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일시적 감정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마련되었던 구원을 이방인에게 돌리신 것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33-34절에서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判斷)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느뇨?” 말씀합니다.
하나의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백의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을 헤아려 알고자 하고, 그를 나름대로 평가하고자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그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여 평가할 수 없으며 그의 마음과 생각을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가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자기의 능력의 한정된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의 경륜과 그 섭리를 다 알 수 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우리의 부족함으로 불완전함으로, 죄와 허물의 속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헤아려 알 수 없으며, 그분의 계획을 다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5:8-9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합니다.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감사함으로 순종함으로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질문합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것을 먼저 드리는 의를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갚으심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값없는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말씀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바 인간이었지만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예를 따라 타락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던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찬 비밀의 경륜이 때를 따라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만주의 주되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의 그 어느 한 가지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 “아멘”으로 그 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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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삼분지 이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들려지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즉,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완악하였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망하는 예수니의 재림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선한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11:13-24)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11: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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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일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슬쩍 지나치는 눈길로 책을 보았을 때가 아니라 적어도 여러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할 때입니다. 잠깐동안 책을 보다가 다시 책을 붙잡으면 처음부터 새롭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논문을 쓰려고 할 때,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잠을 자면서도 그 문제를 생각하고 꿈을 꾸기까지 할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얼핏 지나치면서 하는 신앙생활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평생을 지나치는 자세(姿勢)로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은 평생 어린아이의 믿음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책 한번 펴보지 않다가 주일 날 먼지가 쌓인 성경책을 툭툭 털어서 갖고오고 목사님의 설교본문 말씀을 찾기 위해서만 성경을 펼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가 발견될 리 없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말씀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루에 오분 내지 십분씩 잠깐 잠깐 성경을 읽는 사람이 성경을 전혀 안읽는 사람보다야 낫겠지요. 이 사람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또, 운이 좋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알아질 때도 간혹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역부족(力不足)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알아야지 믿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알면 알수록 믿어질 수밖에 없고,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긴 보화를 발견하게 되고, 읽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크신 비밀의 경륜(經綸)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목사님이 여러 목사님들에게 권면하기로는 기도의 무릎을 많이 꿇으면 꿇을수록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받는다고 하십니다. 30분이하로 기도할 때는 그것은 단지 나의 바램을 아뢰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드리는 기도가 아닐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의 기도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가면서 나의 기도내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른 대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러가지 여건상, 매일 오랜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기가 어려우면 일주일에 한 날을 정하셔서 하나님께 무릎꿇는 시간을 갖기로 작정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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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짐작하여 알 수 있듯이, 참감람나무는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가운데 선택하신 이스라엘이고, 돌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었던 이방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비유로서 말씀하고있는 이 감람나무의 예는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歷史)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중 상당부분의 가지들을 잘라내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대신에, 원래 선택 밖에 있었던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중에 얼마를--즉, 돌감람나무 가지들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참감람나무--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방인중에 얼마가 참감람나무--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반열에 들어감은 그들이 당연히 누릴 권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이방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grace)요 인자(kindness)입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榮光)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내 골육(骨肉)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돌아서 계시고 그들을 버리신 것같은 것은 일시적인 일이요, 종국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15절 전반에,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버리심으로 세상의 화목(和睦)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다리를 건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로마서 5:10에서 바울은 이를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和睦)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15절 후반에 “잘라내어진바 되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그들이 죽은 목숨과도 같았는데, 그들이 일시적 유기(遺棄)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이 있게 됩니다. 그들이 유대교에 머물면서 현재에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믿음을 인정치 않으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시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본체를 그 안에 간직하시고 우리에게 오신 까닭입니다.
                                                   
바울의 믿음과 소망중에 종국에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라고 함은,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까지 포함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바인과 이스라엘은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16절에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나 뿌리는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이스라엘 믿음의 첫 열매된 아브라함을 가리킴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낳은 야곱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곡식가루가 거룩한 까닭에 그 곡식가루로 만들어진 떡덩이가 거룩할 수 있고, 그들의 뿌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즉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에 붙은 가지도 거룩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가지가 벌레먹음으로 또한 다른 환경으로 더러워지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17-18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중 얼마가 그들 가지의 벌레먹음으로 인하여 농부(農夫)이신(요한 15:1) 하나님에 의해서 잘려지고 대신에 이방인중 얼마가 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그 뿌리의 진액(津液)을 받는 자 되었다 하더라도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은 꺾임을 당한 이스라엘의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自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警告)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나무에 접붙여지고 보전을 받는 것이 그들 스스로 보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여주는 뿌리--곧, 이스라엘의 선조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그들의 노력이나 공로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9-20절에,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꺾이운 것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그렇게 된 것이요, 이방인 중에 얼마가 접붙임을 당한 것은 믿음으로 그렇게 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믿음조차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또 일의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자고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믿음의 대상과 주체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고하여질 때, 우리는 믿음의 교만에 빠져 결국은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되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리할 때, 이 사람 또한 다시 꺾임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 원(元)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서고 넘어지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2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두 가지 다른 속성입니다. 사랑은 부족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속성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불의한 자와 함께 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속성입니다. 22절에서는 사랑대신에 인자로, 공의대신에 엄위로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거하지 못하므로 심판에 이르고 자기들의 불신앙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불평하면서 넘어지는 자마다 엄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해서, 어떤 사람은 동일한 하나님의 앞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뒷모습을 보지만, 그들에게 달리 보이는 그분이 바로 그들에게 각각 달리 응답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로 눈을 돌립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말씀합니다.
헬라어 문법의 이중 부정(否定)은 매우 강한 긍정(肯定)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이라 함은 “진실로 이스라엘이 믿는 데 거하면”의 뜻이고, 본절은 해서, “진실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믿는 데 거하면 접붙임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본래대로 참감람나무에 붙게 할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능력이 없으셔서 능력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할 동기(動機)가 이스라엘 가운데 아직 없기 때문에 능력 발휘를 유보(留保)하고 계신 것입니다.

24절에,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말씀합니다.
우리 돌감라나무의 가지들인 이방인이 품종이 다른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는데, 원 참감람나무에서 일시적으로 꺾인 이스라엘의 가지들이 원래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은 그만큼 더 쉽다는 뜻입니다.

왜 이 말씀을 이와같이 반복합니까? 이는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교만한 마음 까닭입니다. 별 대단한 것도 없는 믿음이면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깔보거나 하나님을 일시적으로 떠난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마음 (anti-Semitism)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거나 이스라엘이거나 간에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제가 버지니아에서 아직 평신도로 신앙생활하고 있을 때, 그 교회에 담임목사님이 안 계셔서 종종 침례교 목사님을 모시는데 이 분은 설교를 마치시면 어김없이 교인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씀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십니다. 그런 다음, “아직 구원의 확신은 없지만, 이 시간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초청의 시간을 갖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대놓고는 반대의 뜻을 표시하지 않지만 뒷전에서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그 목사님은 왜 오실 때마다 그래?”
후에 그 목사님이 왜 그렇게 매번 초청의 시간을 갖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상태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기본문제인 구원(救援)에 관하여 확신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평신도이었을 때는 나 한 사람의 구원문제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지만, 목사가 되고나서는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 같은 교인에게는 더욱 신경이 쓰이는 나의 마음을 보면서 그 목사님이 왜 매번 구원을 강조하셨는가 깨달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믿음생활 하시기를 바라고, 그 위에 자고(自高)한 마음이 아니라 겸비(謙卑)하고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남은 자의 구원(救援)” (로마서 11:1-12)

                                             “남은 자의  구원(救援)” (로마서 11:1-12)

                                                                         1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앞서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人間)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남들이 가진 것만큼 갖고 싶어하고 남들이 입는 것만큼 입고 싶어하고 남들이 먹는 것만큼 먹고 싶어하고 남들이 사는 것만큼 나도 그렇게 해놓고 살고 싶어합니다. 아니, 남들보다 한층 더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믿음생활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큰 욕심이 없습니다.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더 많이 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만일 남들보다 신앙이 어떤 면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것 같으면, 이 사람은 그 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비난이나 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서 혹은 유학생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그렇게 큰 도전(挑戰)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이민와서는 또는 유학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버지니아(Virginia)에서 저와 같이 공부를 하며 교회생활을 하던 대학원생 중에서 80%는 미국에 와서 처음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이 이민와서 혹은 유학와서 교회생활을 하긴 하는데 한국에서 갖고있던 그 열심은 온데간데 없고 그럭저럭 이민교회의 남들 하는 만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잘못된 생각은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나와의 긴밀한 관계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민교회에는 남들 보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듣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은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왜, 이와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운가 하면 그것의 결과가 현 세상에서 당장에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믿음생활의 어떠하였음을 가늠하는 구원과 믿음생활을 잘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얼마나 좋은 것을 알면 우리는 그렇게 변변치 못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 직접 우리에게 한번 보여주시기만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 것인데 말할 교인들이 많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가 아닙니다. 아니,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나라의 권능과 축복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40년동안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옷과 신발이 닳지않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물의 흐름을 정지시키시고 역류(逆流)하게 만드셨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모형인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지만, 그 땅을 음란과 범죄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시고, 바울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반복하였지만, 우리를 살리는 믿음은 입술에서만 맴도는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숙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21) 하셨고, 바울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안다면, 이렇게 시시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자녀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려고 특별과외를 시키는데 그 비용이 엄청나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과목당 100만원이 넘는 특별한 선생의 지도를 받게 하는데,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가 일류대학을 나올 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그들의 일생에 평안하고 출세의 삶이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민온 부모 가운데 또 많은 분들이 자녀들을 의사나 변호사, 혹은 특별 직종의 전문가로 만들려고 본인들은 허리를 동이면서도 자녀들은 명문대학에 보내는 것을 봅니다. 이들 또한 한국에 있는 부모들과 같은 동기로 이와같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에서의 입신양명(立身揚名)·출세(出世)는 고작 삼사십년을 위한 것인데, 본인과 자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영원한 평안과 하나님 안에서 입신양명이 보장되는 구원을 위해서는 그러한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이 없음이 이상합니다. 삼사십년의 불확실한 출세의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과 재산의 반이라도 바치는 사람이 어째 이 지상의 삼사십년의 평안한 삶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마음과 재물을 나눔에 그렇게 인색(吝嗇)한지 모를 일입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함은 이스라엘이 믿음이 없는데도 그들을 구원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남겨두셨다는 뜻입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하나님이 고난의 시대에, 평안의 시대에 교회를 버리셨느뇨? 그럴 수없느니라” 말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말함은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음에도 교회에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에 속한 사람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남겨두셨다는 뜻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한 말이 사실임을 보이기 위해서 엘리야의 예를 듭니다. 엘리야는 북방왕국 이스라엘의 네번째 왕 아합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악한 왕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의 더 악한 아내 이세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남아있는 선지자들은 오직 아합에게 빌붙어 아부(阿附)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삼년반의 가믐 뒤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권능 가운데, 사르는 불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인을 기손 시냇가에서 죽였지만, 이세벨이 “내일 이맘 때쯤 너를 죽이리라” 말할 때, 그것이 무서워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달라고 떼를 씁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물과 떡으로 배를 채운 다음 40일을 걸려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른 엘리야는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물어보실 때 두번씩이나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3절에서,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祭壇)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변변치않은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힘쓰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단--바알과 타협하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의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따름이지, 구원을 위하여 여전히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해서, 바울은 5절에서,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로마서 9장 27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이 남은 자의 구원이 선한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이 남은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함으로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죽을 때까지 교회 출석을 잘 하였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켰다는 것은 계산과 실용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봄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잘 가지않는 협착(狹窄)하고 좁은 길로 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셨고, 또 24장 12-13절에서 마지막 때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3장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確實)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리라”함은 구원의 보편성이요,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함은 구원의 선택성이요 제한성입니다. 해서, 구원얻을 사람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적은 것 같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모든 인간들이 다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해서, 천국의 합격자 수를 제한시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사는 관계로 합격자 수의 제한이 없음에도 많은 숫자가 그곳에 미치지 못함을 말씀합니다.

7절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頑惡)하여졌느니라”고 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 자는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지킨, 남은 자를 가리킵니다.

8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昏迷)한 심령(心靈)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이는 신명기 29장 4절에 있는 말씀인데,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이적과 기사를 보고 들었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지 않음을 의미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혼미한 심령을 주신 까닭이 아니요,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준 까닭이 아니요,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고 미련하여 재리를 찾는 데는 밝으나 하나님을 찾는 데는 먼 까닭입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報應)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9-10절) 한탄의 기도를 올립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스라엘이 실족하여 넘어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영 끊겨진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골육의 친척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와 간구 가운데 바울이 믿기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완악(頑惡)한 마음을 돌리시기 위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에게 들려지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해서, 그들의 넘어짐과 실패로 인하여서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이방 가운데 전파되었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부요함 가운데 들어옴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원래 택한 이스라엘이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가 그리스도의 부요함에 이를 때 이를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3
접붙인 가지 이방인 가운데도 원가지 이스라엘 가운데도 구원은 하나님의 값싼 은혜로 대수롭지 않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은혜가 공짜이긴 하지만, 그 은혜의 가치는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매우 귀하게 여기는 물건을 어떤 사람에게 선물하였는데 받은 사람이 그것을 멸시하거나 함부로 땅바닥에 팽개치거나 굴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의 모양으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이 찢기심을 당하고 자신의 몸 속에 있는 모든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를 경히 여기는 사람은 그 약속의 선물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며 결국은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구원(救援)의 약속(約束)을 굳게 믿고 소중히 여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며 믿음을 끝까지 견고(堅固)히 지킴으로 남은 자의 구원을 얻을 수 있으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

Wednesday, December 25, 2013

“신약 교회의 시작” (행전 1:12-15상)

                                            “신약 교회의 시작” (행전 1:12-15상)


                                                                             1
어떤 분이 초대교회와 평균의 현대교회를 비교하여 놓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오는 대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한 반면에 현대교회는 서로 물건을 뺏으려고 애쓰고;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나, 현대교회는 1주일에 한번 각자 제 마음대로 필요에 따라 성전에 모이고; 초대교회는 한 집에서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으나, 현대교회는 각자 살기 위해 각자 제집에서 밥을 먹고; 초대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으나 현대교회는 교회 밖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고; 초대교회는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여진 반면에 현대교회는 간혹 어쩌다가 한 두 사람의 새신자가 더하여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든 것이 다 좋았고, 현대교회는 모든 것이 그저 그렇다고 무조건 깎아 내릴 것은 아니지만, 현재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의 지체로서 나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성경에 ‘교회’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가 118(백 열 여덟)번 나옵니다. ‘에클레시아’는 ‘무엇으로부터’란 뜻의 에크(εκ)와 ‘부르다’란 뜻의 칼레오(καλεω)의 합성어로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무리’란 의미를 갖습니다.
이 ‘교회’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실 때에 베드로는 선뜻 대답할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라고 고백하였는데,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신 후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며 세상과 구분되어 주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의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에서 스데반은 신약교회가 있기 전 구약시대에 애굽이라고 하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홍해를 건넌 모세와 그가 인도한 이스라엘의 회중(assembly)을 ‘광야교회’(the church or assembly in the wildernes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광야교회는 하나님께서 직접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시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게 하셨지만, 그렇게 모범적인 교회는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실 땅, 가나안으로 가야하는지 목적의식이 분명치 않았고 따라서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특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그들을 위하여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를 향하여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발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가야 했습니다. 성인으로 홍해를 건넌 사람들 중에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요단을 건너 그들이 바라보고 소망한 가나안 땅을 밟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삶을 사실 때 그를 따라다닌 무리들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업 중에 부르신 열 두 명의 제자들과 또한 전도를 위하여 파송하신 칠십 명의 제자들의 무리는 교회라고 하기에 족합니다. 그밖에 그저 구경 삼아, 양식을 얻기 위하여, 병 낫기를 원하여서, 예수님의 능력 행함을 보기 위하여,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듣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의 무리도 넓은 의미의 교회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구경 삼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때 이것이 이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한 때는 일만 명 이상 모이는 대형교회였습니다. 물론 교회당이라고 하는 유형건물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라는 의미에서 교회 되기에 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고난 당하실 때에는 다 흩어져서 한 사람도 교회를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교회가 이와 같이 힘이 약하였는가 하면, 아직 주님께로 향한 헌신이 없었으며, 믿음의 고백이 없었으며, 몇몇 믿음의 고백을 한 제자들도 그들의 믿음을 고백을 뒷받침하여 줄 성령의 역사가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본 무리 가운데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므로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신약시대 교회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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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고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곳이라.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3절에 기록된 대로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곧 교회의 지상 사명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의 증인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마치신 다음에 감람산 꼭대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의 수는 500여명인데(고전 15:6), 이 중에 380여명은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본 후에도 각각 제 길로 가고, 오직 120명의 무리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한 곳에 유합니다.

13절: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열심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그들이 유한 다락은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었는데, 그의 집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커다란 집이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의 열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14-15절: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외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여인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도(마태 13:55)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적 동생들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는 그를 따르지 않던 사람들이며 때로는 그가 하시는 일을 못마땅히 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후에는 온전하게 그를 좇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으로 후에 예루살렘의 공회장까지 되었고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밖에 이곳에 모인 120명중에는 예수님께서 전에 전도훈련을 위하여 파송하셨던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서, 그들도 나중에 귀하게 쓰임을 받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한 자리에 모여 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실 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또한 성령을 받을 때 역사하시는 권능을 받기 위하여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마음을 같이하였다”(ὁμοθυμαδόν: with the same mind, with one mind)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는 다른 표현으로는 ”동일한 마음으로,“ ”한 마음으로“인데, 그들의 각기 다른 사람들의 마음들은 접고 하나님으로 향한 동일한 마음으로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양이 다양합니다. 그들의 성격도, 생각하는 것도, 환경도 각각 다릅니다. 그들의 주장도 각각 다름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의 이해도 다릅니다. 저 사람이 왜 내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할까 답답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해 못함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만일 서로 다른 성격과 생각과 주장과 이해와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교회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이는 항상 갈등이요 다툼뿐일 것입니다.
해서, 통일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마음을 같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는 한 가지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마음을 같이한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다”(All these devoted themselves to prayer)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한 성도들이 할 일은 “전혀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을진대, 성도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주심을 믿을진대, 더욱 기도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기를 일주일 간 계속할 때, 사도행전 2장 1-4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한 대로 성령의 강림하심과 역사하심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본 무리 가운데 120명이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것이 신약교회의 태동을 위한 준비라고 한다면, 성령의 무리들 가운데 강림하심과 역사하심은 신약교회의 시작이요 신약교회를 사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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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광야교회가 성부하나님의 역사요 사역이셨는데, 그들 중에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이 적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성육신하신 성자하나님의 역사요 사역이었는데, 그들 중에 헌신함과 그 중에 얼마가 갖고 있던 믿음의 고백을 뒷받침하여줄 성령의 능력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바탕으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믿음의 고백과 헌신, 그리고 그들의 고백을 버리지 않게 하는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과 소망이 있기에 2,000년 동안 계속 성장하여 왔습니다.
때로 교회가 대체적으로 타락한 시대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때에도 바알이라고 하는 세상 신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성도들이 있었기에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하여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할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바른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지고 놓여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을 가진 성도들의 연합입니까?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의 함께 떡을 뗌과 구제에 대한 마음이 있습니까?
그 위에,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을 향한 동일한 마음으로 전혀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하는 열리고 낮아진 마음이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풍성히 있는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우신 이름 예수” (마태 1:18-25)

                                           “놀라우신 이름 예수” (마태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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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기를 갖게 되는 가정은 그 아이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을까 오랫동안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이러 이러한 이름을 주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저러저러한 이름을 주어야지.’
세상에 사는 60억의 사람의 이름이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그들의 이름은 대부분 특별한 의미와 기대와 소망을 갖고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저의 집에 네 아이가 있는데 가운데 이름(Middle Name)은 성경의 인물들 중에 P자로 시작되는 이름을 따왔습니다. 굳이 P자로 시작되는 인물을 따온 것은 제가 바울(Paul)을 좋아하기에 첫 아이의 가운데 이름(Middle Name)을 Paul이라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태어나는 아이들의 가운데 이름들에 P자 돌림을 주고 싶었고, 해서 Paul, Priscilla, Peter와 Philip이라고 붙이게 되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이 성경 속의 인물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섬기며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소망 중에 그런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히브리인들도 한국인 못지 않게 이름짓는 일에 신중하고 그들의 의미와 소망과 기대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부모로서 그들의 자녀에게 원하는 이름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런 이름을 짓게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다고 해서 흙을 뜻하는 ‘아다마’를 남성명사화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 하와는 ‘산 자의 어미’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은 한 민족의 아비란 뜻인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많은 민족의 아비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형을 속이고 아비를 속인 야곱은 ‘교활한 자’란 뜻인데 그가 얍복강 가에서 주의 천사와 밤이 맞도록 씨름하매 그의 하나님 축복 사모함을 가상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곧 ‘하나님과 씨름한 자’란 이름을 주십니다.

모세가 ‘건져낸 자’란 의미의 이름을 얻은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 패역한 세대를 물로 멸망하신 것과는 달리, 그의 백성들을 구하실 때 ‘멸망의 물 가운데서 건져냄을 받은 자같이 구하시겠다’는 계획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건져낸 자’--모세라고 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란 뜻의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미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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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도 의미와 소망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딸은 사람의 소망과 기대를 담고 있지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소망과 기대와 예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은 그들의 부족하고 포기함으로 인하여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하나님의 소망과 예언은 착오가 없으십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이름이 임마누엘(Immanuel)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다”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신 다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임마누엘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메시아의 또 다른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는 기묘자(Wonderful)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기묘자인 것은 그가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놀라운 일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일입니다.

모사(Counselor)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아갈 바, 행할 바를 가르쳐주시며,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Everlasting Father)이라고 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되시며, 세상 전에도 계셨고 세상 이후에도 계신 분이십니다.
성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같으신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불화의 강에 다리가 되시기 위하여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Prince of Peace)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와는 구원”이란 뜻의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영적인 이스라엘을 영적 가나안 땅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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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의 이름은 놀라운 이름이요, 기이한 이름이요, 전능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요, 우리에게 위로와 화평을 주시는 이름이요, 구원을 베푸시는 자의 이름입니다.
다같이 이 땅에 평강의 왕,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탄생하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임마누엘의 예수님” (마태 1:18-25)

                                              “임마누엘의 예수님” (마태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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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한국전쟁 직후의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했듯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선물 같은 것은 도저히 기대도 할 수 없었는데, 크리스마스를 유난히 기다렸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다른 날은 교회에 나가지 않다가도 크리스마스날만은 교회에 꼭 가고 싶었던 것은, 크리스마스날에는 교회에서 모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도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것은 캐롤송이 거리에 울려퍼지고 산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맘 때 쯤이면 연말 보너스를 받고 또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한 잔 하고 밤도 새는 재미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어떤 연유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왔고 어떻게 지난 크리스마스를 보내왔든,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성장해나갈 때 우리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이유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신앙의 결심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지키는 행사는 원래 이집트(Egypt)의 산출의 여신인 이시스(Isis)를 숭배하는 데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언제부터인가 이시스 여신을 기념하는 날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탄생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전례대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는 반면에, 아르메니안(Armenian) 크리스천들은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12월 25일이냐 1월 6일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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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땅 갈릴리 나사렛이라고 하는 마을에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요셉이라고 하는 목수 청년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왔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히, 여호수아, 예수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구원을 주실 것임을 미리 알려주심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백성 유대인들에게 하신 약속(미가 5:2; 이사야 7:14)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여 오셨습니다. 구약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같이하신 역사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우리는 이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으로부터 인도하여낼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행진할 때 그들의 의복과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습니다.

구약을 통하여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많은 환난을 당했음을 압니다. 이는 그들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신들을 섬기며 자신들의 탐욕과 부정함 가운데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앗수르에게, 바벨론에게, 페르시야에게, 그리-스에게, 또한 로마제국에게 핍박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여주신 메시야가 그들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가 그들에게 오실 때 그가 그들을 로마제국의 억눌림에서 해방시켜주시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그리하여 그들이 그와 더불어 왕같은 삶을 살리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로마황제 아구스도의 명에 따라, 요셉도 그의 정혼자인 마리아와 같이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유대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로마황제의 명으로 고향으로 가고 있으므로 길들과 여관들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인 베들레헴에 다다랐을 때에는 여관은 이미 먼저온 다른 사람들로 만원(滿員)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고향을 떠나 나사렛으로 이사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으므로 베들레헴에 그들이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했찌만 아무 곳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어두워지기 시작한 날을 쉬기 위하여 마굿간에 머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바로 이날 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분만하였습니다. 마굿간에 예수님을 누일 곳이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그들은 말구유에 짚을 깔고 그곳에 예수님을 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이야말로 그분이 우리의 가까이에 계신 분이 되시게 하고 우리의 주님이 되시게 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로마제국의 왕자로 태어나셨다면,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낮고 천한 데로의 탄생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색인이나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를 수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그를 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을 통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이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여 주고 계십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한 것같이, 우리가 이와같은 낮아지는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초대교회 성도들과 함께 하셨기에 그들은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마음 속에 예수님이 역사하셨기에 그는 두려움으로 세 번씩이나 부인(否認)한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수 있었고, 스데반에게 주님이 함께 하실 때 그는 주님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으며, 바울의 마음에 임마누엘의 주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는 옥에 갇히고 매를 맞으면서도 그에게 그러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 부함과 가난함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유대인 소설가 엘리 위젤(Elie Wiesel)은 그의 자서전적(自敍傳的) 작품인 「밤(Night)」에서 자신의 독일 수용소 생활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 노인과 여자를 포함한 많은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지고, 어떤 사람들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갑니다. 어린 그가 그렇게 열심히 신봉하고 의지하던 하나님은 유대인의 비극 가운데 잠잠하기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실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 가운데, 눈물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실 때 함께 고통 받으셨고, 우리가 혼인잔치로 기뻐할 때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죄에서,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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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우리 모두가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하여 육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며칠의 연휴를 얻을 수 있다는, 선물을 받고 보너스를 받는다는 이유로서만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 그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서 발견한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좌절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신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같이하심을 발견하기를 축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하는 천군천사의 찬송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찬양합시다.  아-멘.

“다스릴 자의 오심” (미가서 5:2)

                                                    “다스릴 자의 오심” (미가서 5:2)


                                                                                1
1-2세기의 기독교는 히브리 당국, 유대교나 로마제국 중 그 어느 것과도 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역사적 장소들의 흔적들을 지워버리고자 하였습니다.
주후 324년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e) 황제 하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과 관련된 원래의 사적지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갈보리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자리인 성묘(Holy Sepulchre)는 132-135년의 유대인들의 반란 후에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 CE)의 명령으로 로마의 엔지니어들에 의하여 깎여졌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조만간 나사렛 출신 목수의 십자가 처형을 잊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주후 326년 팔레스틴 지역을 여행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지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출생지뿐 아니라 여러 군데의 기독교의 성지들을 찾아 보호하고 경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거의 300년이나 경과하였지만 그러한 기독교의 성지들의 위치를 확인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는 박해 당하는 크리스천들이 입에서 입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러한 장소들을 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 때의 로마정부가 이러한 성지들을 없애기 위하여 그 장소들에 이방신들을 위한 제전이나 사당을 짓게 함으로 오히려 이것들이 후에 성지들을 확인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의 출생지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인 아도니스(Adonis)의 사당이 위치한 곳이라 쉽게 그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헬레나 때로부터 예수님의 출생지는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수세기에 걸쳐 개조되고 하면서 귀하게 경배되어왔습니다.
베들레헴이 평강의 왕인 예수님의 탄생지이지만, 평화로운 장소이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1967년의 전쟁 등 여러 세기 동안 싸움이 계속되어진 곳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해방기구(PLO)간에 소유권의 대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과 대치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거룩한 장소는 예배와 예식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인생들에게 알려진 장소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베들레헴에는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매일의 행진이 있으며, 성탄전야에는 교회와 마을 광장에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모여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베들레헴이 성경에 처음 언급된 것은 사사 시대 때의 이야기인 룻기에서입니다. 흉년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이 사는 곳인 베들레헴에 닥쳤을 때 그들은 사해(死海) 동쪽인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모압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그의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하여 룻은 이삭을 줍는 일에 나섭니다. 그가 우연히 일한 밭의 주인인 보아스는 이 낯선 얼굴의 처녀가 누구인지 묻고, 그가 그의 친척 뻘 되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온 룻인 것을 알게 되고 그를 선대합니다. 결국에 룻은 ‘토지 무를 자’(redeemer)가 되는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되고 아들 오벳을 낳습니다. 이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로서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낳고 이새는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다윗을 낳습니다. 다윗도 해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베들레헴에서 사무엘은 다윗에게 처음 기름 붓습니다(삼상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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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주전 8세기 무렵에 당시의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앗수르는 북방왕국 이스라엘을 결국 주전 722년에 멸망시키고 남방왕국 유다도 위협하고 있습니다. 주전 700년경에 쓰여진 미가서에서 미가 선지자는 오늘 본문 2절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복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5장의 시작 절인 1절에서 미가는 예루살렘을 “딸 군대(city of troops)”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의 힘을 동원하여서 앗수르의 침공을 막고자 할 것이지만 결국에는 이스라엘 유다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치욕꺼리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를 구원할 사람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할 자는 왕과 제사장들과 장관들과 기타 귀족들이 몰려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아니하고 작은 고을이라고 여겨진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작은 고을 베들레헴, 그러나 다윗의 고향이기도 했던 이 베들레헴에서 하나님 백성의 영원한 왕으로 그들을 다스릴 자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을 때, 이로 인하여서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다고 했습니다.
헤롯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을 때에, 그들은 마태복음 2장 5-6절에 기록된 대로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다윗의 가계를 통하여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이 그랬듯이 군대의 힘을 빌어서 다스리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평강의 왕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평강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오늘 2절에서 미가는 메시아의 탄생지를 유다의 베들레헴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유다의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5마일 정도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구약(舊約)에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곳이 두 군데 등장합니다. 하나는 스블론 지파의 땅으로 갈릴리 하류에 위치하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남쪽 유다의 베들레헴입니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었을 때 창세기 35장 19절에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유다 땅 베들레헴은 더 이전에는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라고 불려지던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가 선지자는 장소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고 부름으로써 스블론 땅 갈릴리 남쪽의 베들레헴이 아니라 유다 땅 예루살렘 남쪽의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미가는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서술합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메시아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권으로 영광 중에 임하셔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실 때가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는 왕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미가는 메시아의 인물됨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심으로 그의 복음을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 살던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습니다. 만일 로마황제 아구스도가 호적하라는 명을 내리지 아니하였다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이고 미가의 예언은 응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5절에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미가의 메시아 탄생지에 대한 예언은 오묘하게 응답되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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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은 떡집(House of Bread)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 되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집”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그 계획의 성취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해주시고,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계절을 대강절 또는 강림절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헬라어 원어로는 페루시아(περυσια)라고 합니다. 페루시아는 왕이나 귀한 사람의 도착을 의미하는 말인데, 바로 우리의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심의 의미를 더욱 더 되새기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다스리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Sunday, December 1, 2013

“이스라엘의 거부(拒否)” (로마서 10:16-21)

                                         “이스라엘의 거부(拒否)” (로마서 10: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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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적(宣敎史的) 입장에서 고려해볼 때,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한국이 36년동안 일본에 종속되어있었던 것과 유관하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기독교가 들어가긴 했지만 한국에서와 같이 발전되지 못한 것은 그 나라를 식민지화(植民地化)하려는 나라에 의하여 전해졌기 때문에 민족정신을 깨어주지 못했고 그 식민기간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믿지만 식민기간이 끝남과 함께 기독교에 반감내지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시들어져 갑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을 통하여 전파된 것이 아니라 제삼국인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파된 까닭에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적대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민족의식이 고무되고, 일본이 한국인을 돕는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그 자생력을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 출신 선교사님들은, 해서, 한국이 일본에 36년동안 예속(隸屬)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攝理)라고 말합니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고통당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통해 한국의 교회를 성장케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란 말씀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가난으로 하나님을 원망만 하고있는 사람은 그러한 극한 환경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그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작은 교회이든 큰 교회이든 목사님들의 공통적인 아쉬움은 교회에 일군이 적다는 사실입니다. 소수나마 교회의 일을 자기 일처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것은 마치 어떤 운동팀에서 코치를 고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좋은 코치로부터 좋은 작전을 지시받아 운동경기에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입니다. 그들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좋은 작전을 그들에게 알게 하여 그들이 그 작전에 따라 열심히 경기장에서 뛰는 것입니다. 해서, 교인들은 그들로 경기에서 승리하게 할 수 있는 목사라고 하는 코치를 청빙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문가 코치를 청빙하였는데, 그로 코치의 직분을 감당케 하는 것이 어찌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해서, 교인들이 선수 노릇을 하려고는 하지 않고 대부분이 보조코치를 자원하고 그들이 청빙한 목사로는 코치 대신에 선수의 일을 감당케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향하여 작전(作戰) 지시를 합니다. 목사님, 이것 하셨어요? 목사님, 저것 하셨어요? 목사님, 이쪽으로 가야 해요. 목사님, 아무개 말은 듣지 말고 내 말만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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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택하신 족속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더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그 땅과 그 족속 가운데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여의 공생애를 그들 가운데 사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규정함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의 복음은 전 인류를 향한 것이지만, 그의 지상생애는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잃은 양 이외에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의 숫자가 한 때는 남자만 치더라도 5,000명 가량 되었는데 공생애가 끝날 즈음에 그에게 남은 제자의 수는 11명에 불과하였습니다. 11명도 그분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여 남은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시면 한 자리 해야지 하는 심산으로 그렇게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그 남은 11명마저 다 도망갑니다. 그들이 복음의 생명력을 깨달은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다음에야 입니다.

16절에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순종치 않은 것은 그들의 편견과 교만한 마음으로 인하여 성육신하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들을 귀와 깨달아 알 마음을 갖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입장이 바뀌면 생각하는 것도 바뀌는가 봅니다. 제가 아직 목회자가 되기 전에는 목사님들이 답답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저분은 목회를 왜 저렇게밖에 못하실까? 목사가 된 후에는 마음 속으로 답답해하던 어떤 목사님의 그 정도밖에 하지 못하던 형편이 깨달아 알아집니다. 때때로, 성도들의 하나님 말씀 깨달음이 더디고 삶이 눈에 띄게 변화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이라고 자위하여 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함으로도 믿지 않던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족한 나의 전하는 것으로야... 그러나,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게 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거부(拒否)하였습니다.

18절에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말씀이 전파되긴 전파되었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한 까닭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버려진 모습으로 남아있던 것입니다.

19절에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하심이 나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猜忌)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32장 15절이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수룬(=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15). ...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라.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猜忌)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20-21).”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직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이요, 그들이 살찌고 부대하여지고 윤택하여지기도 전인데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 나올지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발로차고 경홀히 여기는 것은 그들이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여지므로 인함이라 했습니다. 세상 삶에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것 같지만, 그리 아니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집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삶의 내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갑니다.
이스라엘이 모양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지 않았지만, 내용이 없는 삶을 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6)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까닭에 선지자들의 이러한 외침이 거북스럽게 들리고 그들을 외면(外面)하고, 멸시(蔑視)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다시 이사야의 말을 인용(引用)합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이사야 65: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21절에 이스라엘에 관하여 이르기를, “순종(順從)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사야 65:2)말씀하십니다.

구약(舊約) 시대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 머문 것이지만, 그들의 믿음없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실 때, 그들이 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심이 아니요 그들로 시기(猜忌)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해서,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되, 하루 종일 팔을 벌리시고 계십니다. 집나간 방탕한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되, 그가 오면 기꺼이 맞겠다는 약속으로 노란 리본을 나무에 주렁주렁 달고 기다리는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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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잘 믿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믿어지기 위해서는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에게 신뢰가 가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하여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못마땅하고 신뢰가 가지 않으면 그 분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따라서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더더욱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도 듣지 않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데 하물며 사람을 통한 말씀이야 더욱 거부하기가 쉽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훌륭하고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사가 어딘지 미덥지 않고 신뢰가 가지 않을 때 그 의사를 통하여 나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들려지게 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것은 바울의 말씀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까닭입니다. 그것이 원래부터 예정된 것이든 아니면 변경된 예정의 섭리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고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우리를 돌아봄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마음에서 주님을 떠난 삶을 살 때, 원가지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또한 아끼지 아니하시고 꺾어버리실 것이라고 바울은 11장 21절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 (로마서 10:11-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 (로마서 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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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무언가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특별히 어디에서 좋은 소식이 올 것도 아닌데 하루에 한 번 우편함을 체크해야 합니다. 만일 공휴일이 들어있어서 우편배달부가 안 오는 날이면 왠지 답답함을 느낍니다.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는 이곳 저곳 산골 구석에 사는 사람에게도 소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다닙니다.
소식을 전하여주기 위하여 다니는 그들의 발이 튼튼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소식을 제 때에 전달받을 수 가 없을 것입니다. 해서, 그들의 모든 수고에 감사하며 그들의 발에 이상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한국에서처럼 기독교가 단기간 내에 널리 속속들이 퍼지고 기독교 역사 100년만에 전체인구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이 된 사례가 없습니다. 이는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미국인 선교사들--언더우드(Underwood), 알렌(Allen), 그리고 아펜젤러(Appenzeller) 등의 공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 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일시적인 부흥운동이 아니라 성경보급을 통한 말씀역사로 말미암아 튼튼한 기초를 쌓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성경보급에 힘쓴 사람들을 '권서(勸書)'라고 부릅니다.
‘권서’는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걸어 물건을 운반한다는 뜻으로 행상인을 가리켰는데, 그 말이 후에 성경책을 사서 읽도록 권하는 사람, 성격책이나 전도 책자를 파는 행상인의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권서’가 시작된 것은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될 즈음이었습니다. 만주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Ross)에 의하면, 이 무렵 간행된 복음서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에 반입되었는데 그들은 무보수로 수백 권의 단편성경을 팔거나 배포했습니다. 로스는 1882년 10월 6일 한국 최초의 권서인 서상륜에게 500권의 단편성경과 그 밖의 기독교 관계 소책자들을 주어 평안도 의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권서들’은 초기 한국교회에 몰려온 온갖 시련과 모진 풍상을 온몸 으로 감당하며 황무지를 개척한 믿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일제하의 민족 수난기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성경봇짐'을 메고 다니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이들의 헌신과 봉사의 발이 한국 교회 설립의 모태이자 그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좋은 소식 또는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3절에서 그 좋은 소식 또는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서 61장 1-3절의 말씀을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인용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 자체가 좋은 소식이, 아름다운 소식이 우리에게 임함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10절에 나오는 팔복에 관한 설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과 구원과 영생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이 그를 찾아오매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먹이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병든 자들, 눈먼 자들이 찾아오매 그들의 병을 치유하시고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영혼이 병든 자들이 찾아오매 영혼의 병을 고치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하나님의 사람들 사랑하심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신 것입니다. 그가 3년의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걸으신 발걸음 하나 하나가 좋은 소식을 전하신 아름다운 발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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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절에서 바울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이사야서 28장 16절인데, 원래 이사야서에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되어있는데, 해서, 바울이 말씀하는 부끄러움이란 “그리스도를 믿고도 죽음을 당함”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헌데,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른 삶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봐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정하신 인간구원 방법에 따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함은 하나님의 구원이나 하나님 나라 기업을 허락하심이 제한적이거나 인색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한적이거나 한정적이어서 그 은혜가 사람이 많아지면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여 다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께 나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해서,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부요한 은혜를 전하는 사람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알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이미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약속입니다.
요엘서 2장 31-32절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를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은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요 그를 찾는 자를 내치시는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함은 주님을 그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요,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그를 바라보고, 그를 믿을 때 우이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 구원의 축복이 우리에게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기쁨이 너무나 크기에 가족에게 전하게 되고 해서 우리 가정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바울은 그의 옥문을 지키고 있던 간수에게 증거하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 나의 집이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 예수님을 믿은 기쁨을 내가 가족에게 증거할 때 그들도 주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해서 온 집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기쁨과 평안이 내게 없을 때 나는 나의 삶을 가장 잘 아는 가족에게 주님을 삶으로 증거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기쁨이 내게 클 때, 나는 가정식구들에게만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는 감격과 기쁨을 전하고자 할 것입니다.

1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내가 믿고 부르는 그 예수님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려지기 위하여는 그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들려지기 위하여서는 내가 예수님을 그들에게 전파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 된 다음에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주위에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10년이 넘도록 자기에게 교회 가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이 좋았는데, 믿는 사람이 되고 나서는 그 사람이 자기에게 한 번도 교회 가자는 얘기를 안한 것이 섭섭했다고 얘기합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 가자’거나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전도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 이유는 그 말을 하다가 거절 당함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면 어떡하나? 그 말을 함으로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싫어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점잖음’이라고 지적합니다.
전파하는 사람이 없이 좋은 소식은 들려지지 않을 것이요, 좋은 소식이 들려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주님을 믿을 수가 없고, 사람들이 주님을 듣지 못하여서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주님을 부를 수가 없기에 구원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사람들로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주님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죄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입니까?
좋은 소식을 우리 가까이에서부터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서 52장 7절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표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미 예수님에 의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계 곳곳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널리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좋은 소식이 먼저 전파되어 한 사람도 좋은 소식을 전해듣지 못한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며, 좋은 소식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전파되어지기를 바라되 우리 교회가 이 일에 앞장 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발이 아름다운 발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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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그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의 삶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좋은 소식을 증거하기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바울과 그를 위하여 주변에서 조용히 도운 바나바를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파송한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의 교회처럼 그렇게 커다란 교회가 아니었으며, 그 당시의 복음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 비하여 그저 변두리 이방인의 땅에 위치한 작은 교회였지만, 이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인하여 세계를 향한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만일 안디옥 교회가 우리는 작은 교회란 이유를 들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지 아니하였다면 안디옥 교회의 이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며 안디옥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이나 사람들의 칭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사역은 다른 교회에 의하여 감당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주변에, 그리고 땅끝까지 전하는 교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주변사람들에게는 긍휼의 마음을, 세계를 향해서는 더욱 커다란 비전을 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외경 바울행전에서 바울의 생김새를 기술한 것을 보면, 그는 대머리와 매부리코에 안장다리를 한 키가 작은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그 마음에 품은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나’만을 생각하는 좁은 마음이 아니라 주변과 세계를 생각하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로마서 10:5-15)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로마서 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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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밝은 사랑이면 이 말은 더더욱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생각하며 조금은 흥분되며 그에게 어떻게 잘해줄까? 생각할 때,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의 정신이 건강해지고 이것이 밖으로 드러나 사람의 외모도 아름답게 만듭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이 말이 또한 사실입니다. ‘믿음이 크다’고 함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인데, 해서 좋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 마음이 아름답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장례식에 갈 때 마다 저는 우리 인생(人生)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닌데 왜 짧은 삶을 살면서 서로 다투고 서로 잘났다고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지려고 할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여 “주님의 일은 나중에, 내게 시간과 물질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미루지만 생을 주관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 삶에 열중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하는 중요한 일이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큰 결실을 이루는 일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도, 아무리 큰 부자도 고관도 손을 놓고 겸손하게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나의 나이가 젊다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 부르시지 않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 삶의 마침인 불길한 사형선고는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서의 영원하고 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에 더욱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라면 어떠한 삶을 산들 어떻겠습니까? 음란하고 방탕한 삶을 산들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다음에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질 세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되어지는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의 쓰임은 세상에서 우리의 학문(學問)이 아니요 우리의 지위(地位)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잘 지키고 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큰 즐거움에 참여케 하실 것입니다.
찬송가 85장의 작사자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소망 가운데 주님뵈올 것을 고대하였는데 이러한 소망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이 생을 살동안도, 떠날 때에도 우리의 삶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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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에서 바울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라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무감으로 준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함으로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하실 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레위기 19:18; 신명기 6:5, 30:6)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껍데기를 지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맹이인 법정신을 가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이 부모 된 여러분의 명함을 어떤 의무감에서나 마지못해하는 마음으로 혹은 계산적인 마음으로 하고있음을 발견하실 때 그 100% 완전한 행함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은 안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행하되 그것이 다소 부족하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러한 자식에게 더 큰 애정이 생겨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로마서 본문 6-8절 말씀도 원래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신명기 30장 12-14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인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 지키는 삶을 살았지만 다 하나님의 의에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바울이 오늘 본문 앞에서 말했는데, 모세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 말씀 지킴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요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신명기 30:11)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의 마음이 있을 때 그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이르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우리나 하나님 앞에 의로와짐은 율법을 통하여도 아니요 우리에게 있는 성경을 통함도 아니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습니다.

바울은, 신명기 30장의 “(하나님의) 명령” 이란 단어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6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말하기를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영원히 사는 길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그 별을 따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방안을 모색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인데 우리는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모셔내리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형상으로 이미 오신 까닭입니다.

7절에,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를 이루게 하실 분인 줄 알았는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 여김을 받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끌어올리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원함은 단지 그들이 영원히 살기를 원함이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올리는 일이 불가능하게 보여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계속 머물러 있으시지 않으시고 사람들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사흘만에 음부에서 올라오셨습니다.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의와 구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가까이 있습니다.
전에 한자어 가운데 포함되어있는 신기(神奇)함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두 글자 “의(義)와 신(信)” 중에, 의(義)자는 말씀드린 대로 어린 양(羊)되신 그리스도 아래에 내(我)가 있을 때 내가 의로와진다고 풀이했습니다.
신(信)자가 뜻하는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신(信)은 사람이 말씀을 믿는다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깝다” 함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도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우리 가까이에 계신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입니다.
9-10절에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是認)하며 또 하나님꼐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是認)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절에서 바울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이사야서 28장 16절인데, 원래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온에 세운 돌--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급절(急切)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하셨는데, 해서, 바울이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그리스도를 믿고도 죽음을 당함”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13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바울의 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요엘 2:32).

바울은 이어서, 우리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보증을 받은 우리에게 말씀할 때, 이 복음의 기쁨을 우리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나가 전파하라고 합니다.
14-15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복음의 소식이 곳곳에 전해지도록 주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고, 다른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을 “아름다운 발”이라고 이미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삶을 살므로 더욱 우리의 구원의 보증을 다져가고, 하나님의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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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미래의 일이요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은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 중에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확실하게 마음에 부딪쳐 오는 사람에게는 구원은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 되며, 현재 나의 삶이 구원과는 별도의 삶이 아니라 구원으로 향한 과정의 삶입니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늘에 올라가는 불가능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음부에서 올라오셔서 지금 우리 가운데 영으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오직,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일 뿐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이 기쁜 소식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삶이 여러분 가운데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로마서 9:30-10:4)

                                              “이스라엘의 실패” (로마서 9: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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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하고 오신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일본에 가면 신간생이라고 하는 기차가 있다고 합니다. 그 기차는 보통의 특급열차보다 훨씬 빠르다고 합니다. 보통의 기차들은 객실을 끄는 기관차가 맨 앞쪽에 있습니다. 한 기관차가 여러 동의 객차를 끌고달립니다. 그 기관차가 힘이 좋다고 하여도 여러 객실을 끌어야 하기에 힘이 가해집니다. 그러나 신간생이라고 하는 기차는 각 객실 마다 기관(motor)이 달려 있습니다. 이 기관이 달려있는 각 객차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자 할 때 힘이 한 방향으로 모아져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이로써, 신간생은 보통의 기차보다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교회를 우리가 기차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끄는 사람이 혼자 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혼자 끌기에 힘이 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객차의 역할을 감당하고 그 객차에 ‘열심’이라고 하는 기관(motor)을 달고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면 그 기차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잘못되어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없느니만 못한 ‘열심’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가는 길을 느리게 할 것이며 혹은 전복(顚覆)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이 신간생과도 같은 열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그 뜻을 이루는데 신명나게 잘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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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구절을 보니까 9장 30, 31절에 의(義)와 법(法)에 대해서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30절에 보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했고, 31절에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란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는데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아니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는데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한 의가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아니한 율법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한 의가 나타났을 때 이방 사람들은 그 의--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믿음의 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1절에 이른 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법을 좇아갔습니다. 이 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잘 지킬 수 있지 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따라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따라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법대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대로 법을 유추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임의해석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법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법보다는 사람의 법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것인데 사람들이 법을 편의해석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았기에 결국에 하나님의 의의 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면 다 하나님의 율법의 의에는 미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의의 삶을 살아왔노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들 역시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삶을 산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32절에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예에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은 준법정신을 의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참고: 창세기 15:6)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리 법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그들은 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의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의로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고속도로 속도제한이 55마일입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55마일로 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70마일 안팎으로 달립니다. 교통경찰이 잡으려고 마음먹으면 거의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차 만 대가 하이웨이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전부 속도위반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마일 안팎으로 달리는 많은 차들 가운데 다른 차들보다도 훨씬 속도가 빠른 80마일 이상의 차만을 잡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같습니다. 법으로 따진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한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한 처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서 모든 사람을 대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다소 법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을 때 그들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십니다.

33절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했는데, 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 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그 길 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돌이 놓여있습니다. ‘부딪히는 돌이, 거치는 반석’이 놓여있습니다. 그 돌을 통과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 돌 속으로 난 통로를 통하여 천국에 이르려 하지 않고 그 돌을 무시하고 천국에 이르려고 하다가 부딪히고 거치게 됩니다. 그 돌을 우회하여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돌은 천국에 이르는 길 한 가운데 아주 크게 놓여있기 때문에 피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아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란 동화책이 있습니다. 아리바바가 숨어서 도적들이 금은보화를 동굴 속에 숨겨놓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도적들이 다시 도둑질하어 사라졌을 때 그 도적들의 주문을 외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보화들을 갖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주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열려라 참께(Open sesame)”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큰 돌이 놓여있는 길을 통과하기 위하여 아리바바가 한 대로 주문을 외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문은 다름아닌 믿음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문이 열리고 그 길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시요,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10장 1절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9장 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까운 형제·자매의 구원을 위한 이러한 사모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귀한 구원을 우리 가운데 갖고 있을 때, 확실하게 믿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이 확실한 소망의 구원을 증거하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2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열심히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이 잘못된 열심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이기에 교회 안에 시끄러움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열심은 사람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열심입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장정 가운데 20세 이상의 장정의 숫자가 60만 가량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지 갈렙과 여호수아 둘 뿐이었습니다.
왜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출애굽한 육십만이상의 장정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있었습니다. 그거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여 보기 위해서 열두 지파의 대표 열두 사람으로 가나안 땅 정탐을 하게 하셨는데 그 중에 열명은 하나님 앞에 믿음이 없는, 불신실한 보고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믿음의 보고를 하였기에 그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행위와 믿음을 대조시켜 놓았는데 행위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무모(無謀)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하는 일이 현실적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 같습니다.
열 명의 정탐군들의 보고가 불신실한 것이라고 말씀했는데 사실은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더 타당한 보고입니다. 열 명이 보고한 것은 그들 자신들을 돌아본 것입니다. 자신들을 제대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형편에 있었습니까? 제대로 훈련된 군대도 아니요 전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식량도 없으며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습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그 중에 있으며, 광야에서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입니다. 제 정신으로 싸운다 하더라도 가나안 거민들을 상대하여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은 어떤 땅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장대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연적인 요새(要塞)를 갖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두 군대가 맞붙어 싸우면 이스라엘이 백전백퇴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열 명이 보고한 것은 현실적으로는 지피지기(知彼知己)한 지혜로운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성적이고 합당한 보고를 한 그들을 믿음이 없다고 물리치셨습니다. 물리치셨을 뿐아니라 그로 인하여 그들을 광야에서 사십년간 유리(琉璃)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상실케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쓰러져 죽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들의 보고가 참으로 무모합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면 능히 이기리라” 외칩니다. 이 얼마나 무모한 외침입니까? 그 사람들이 가진 무기도 변변치 못합니다. 그들의 육십만은 장정이라고는 하난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와같이 무모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좋아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의 발언이 참으로 무모한 것같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현실적으로는 무모한듯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은 믿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이 필요했습니까?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오심이 필요했습니다.
육십만의 장정이 출애굽하였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뿐입니다.
율법 지킴은 차치하고, 믿음의 법만으로 따지더라도 구원에 이를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해서 나와 같이 부족한 믿음의 소유자가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너는 천국에 들어갈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더라도, 내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을 볼 때, 나의 믿음이 신통치 못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봅니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믿음의 순종함으로 교회생활을 합니까? 아마 교인들중에 극소수만이 이러한 믿음으로 교회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라, 나의 자녀라’ 부르심이 은혜요 긍휼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달려갈 길을 달려가지만 하나님의 의를 좇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와같이 불완전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나 믿음이 없는 인간들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마다 그의 믿음이 변변치 못하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베푸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구애(拘碍)받음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음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말씀대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성화(聖化)되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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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우리 삶 가운데 항상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 것으로 충분하지 하는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받을지언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늘 안타깝게 해드리며 근심시켜 드리는 삶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말썽꾸러기 아들과 딸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부모님께 기쁨과 자랑을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상급을 풍성히 받으시는 그러한 믿음과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November 24, 2013

“성숙(成熟)한 감사” (하박국 3:16-19)

                                                  “성숙(成熟)한 감사” (하박국 3:16-19)

       
                                                                           1
저는 예수님의 기적들 중에 남자 장정만 5,000명(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지 않은 수)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좋아하고, 비유들 중에는 ‘달란트의 비유’를 가장 좋아합니다. 아마도 제가 경제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과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인간구원(영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경제계획의 놀라우신 비밀과 우리 인간들을 경제적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한 미국 목사님이 ‘달란트의 비유’를 현대판으로 개작하여 표현하였는데 미국사람의 정서에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현재 실정에 맞게 제가 약간 각색해 보았습니다..
한 회사의 사주(社主)이며 최고경영자(ceo: chief executive officer)인 사람이 6개월 간 외국여행을 떠나면서 세 사람의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업무수행 능력과 과거의 실적에 비추어, 첫 번째 사람에게는 50,000불을 주면서 ‘자네의 능력대로 이 돈으로 무언가 해보게’ 말했습니다. 또 두 번째 사람에게는 20,000불을 주면서 똑같은 말로 당부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사람을 불러서도 10,000불을 주면서 똑같은 말로 당부하였습니다.
50,000불을 맡은 직원은 시장조사를 철저히 한 후에 50,000불로 컴퓨터 및 부품 판매 대리점을 차렸는데 사업이 잘되어 점포를 하나 늘이고, 또 하나를 늘일 수 있었습니다. 20,000불을 맡은 사람도 시장조사를 잘 한 후에 인터넷을 이용한 옷장사를 하였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0,000불을 맡은 사람은 경영주의 돈으로 사업을 했다가 혹 실패하여 돈을 잃기라도 하면 힐책을 당할까 두렵기도 하고,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벌여놓은 일이 많아 시간도 별로 없을 것같아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가 거래하는 은행에 있는 안전보관함(safe-deposit box)에 경영주가 그에게 맡긴 10,000불을 고스란히 집어넣었습니다.

6개월 뒤에 경영주가 돌아와서 그가 돈을 맡겼던 직원들을 부릅니다. 50,000불을 맡겼던 직원에게 묻습니다: “그래, 자네는 그동안 그 돈으로 무엇을 했나?” 그 직원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지난 6개월 동안 컴퓨터 대리점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번창하여 50,000불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참 잘했네. 그렇게 열심히 사업을 구상하고 확장시킨 자네가 마음에 드네. 나의 사업 파트너가 되어주게. 이제부터 자네는 직원(employee)이 아니라 나의 동업자(partner)이네.”
다음에는 20,000불을 맡았던 직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네, 저는 요즘 인터넷 장사가 유망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인터넷을 이용한 옷 판매를 하였는데, 지난 6개월 간 20,000불의 순이익을 남겼습니다.” “참 잘했네. 그렇게 독창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성실로 일한 자네가 마음에 드네. 이제부터는 자네를 직원(employee)이 아니라 동업자(partner)로 대하겠네. 내 동업자가 되어주게.”
마지막으로 10,000불을 맡았던 직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저는 사장님이 안 계신 동안 제 마음대로 사업을 한답시고 일을 벌이다가 혹 손해를 보면 사장님이 노하실 것 같아서 사장님의 돈을 안전한 저의 은행의 금고함에 넣어두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사장님이 저에게 주셨던 지폐 그대로 여기 있습니다.” 경영주는 그에게 말합니다: “자네가 나를 잘못 보았네. 만약 자네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손해를 보았더라도 자네가 그 일을 열심히 하였다면 나는 그것을 더 기뻐하였을 것일세. 자네가 그렇게 실패하는 것이 두려웠다면 적어도 나를 위해서 이 돈을 6개월짜리 CD(certificate deposit, 정기예금)로라도 은행에 예금하였더라면 내가 5% 이자 수입은 얻었을 것 아닌가? 자네는 무사안일주의의 사람이구먼. 자네는 사업하기에 적합지 않으이. 자네를 직원으로라도 두고 싶은 생각이 없네. 우리 회사를 떠나게.”
이 비유에서 경영주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의 회사는 그의 교회이고, 직원들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며, 그가 맡긴 돈은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달란트이며, 직원들에게 원한 사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시장조사를 하였다’고 함은 주님의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로 준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감당하다가 혹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해보는 것이 두려워서, 비난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 일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보다는 혹 실패하고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열심히 주인의 일을 자기 일같이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을 더욱 칭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교회 일이나 교회 안의 기관의 일이 이 비유에서 경영주가 그 직원들이 감당하기를 원했던 사업입니다.
교회 또는 기관의 사업을 감당할 때 우리는 그 일이 바로 내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과 성실로 창의적으로 기도하며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기관은 사람이 적어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많고 적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십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열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아니면, 다섯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열심있는 다섯 명으로 못 이룰 사업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바울은 그의 나이 35세를 전후하여 다메색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래 30여 년을 주님의 사업을 경영하였지만 늘 두 세 사람, 많아야 십명 안팎의 사람들과 동역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실라, 바울과 디모데 등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경영하는 비결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가? 나에게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업 파트너로 삼으시고 같이 일을 해나가고 사업을 확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게도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번뿐아니라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기를 원하시는 까닭이며, 실패와 고난을 통하여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마음을 갖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추수감사의 의미는 열심히 일하여 마땅히 거둘 바를 거둔 사람이 이를 거둘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허락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혹 수확이 나의 노력과 예상보다 적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함은 수확이 전혀 없을 수도 있는데 이만큼이라도 허락하신 데 대한 감사입니다.
추수철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버려 수확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어도 좋습니까?
성경은 이럴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하는(thank God)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think God) 사람이요, 이러한 사람에게 종국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평안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박국의 감사를 봅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 경에 살았던 남방왕국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핍박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악이 관영(貫盈)하고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는 유다를 갈대아인을 들어 징벌하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하박국은 또, ‘하나님께서 어찌 하나님을 경외치 않으며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인 갈대아인(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징벌하려고 하시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이 장차 속히 다가올 것인데, 그때에 모든 악인은 그들의 악으로 징벌되고, 의인은 그들의 믿음으로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에 하박국은 3장에서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 찬양의 기도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고 했습니다.

갈대아인을 들어 유다를 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박국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심한 두려움에 쌓입니다.
갈대아인의 무리가 유다 백성을 치러오는 환난의 날이 임박한 것을 알기에 그의 뼈속까지 두려움이 저미어오며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의 집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겨보지만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으며 떨리고 또 떨립니다.
임박한 환난으로 인한 그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갈대아인들이 유다를 유린(蹂躪)할 때 예루살렘의 집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며 산과 들과 밭은 황폐케 될 것입니다.
그때 무화과나무는 무성치 못할 것이며,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적인 상실( total loss)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상실의 슬픔과 고통으로, 낙담함이나 좌절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늘 평안하고 고통이 없고 좌절이 없고 슬픔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 하기에 때로는 더욱 큰 고통을 받고, 슬픔을 당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크리스천은 거기서 그저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줄 압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과 무력감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승화(昇華)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감사와 기쁨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취한 몇 가지 일로 인하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잠간의 감사와 기쁨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외형적인 환경으로 따지면 하박국에게는 감사할 건덕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현재 악인의 번성함을 보며 고통 당하고 있고, 이 세상에서 앞으로 그와 그의 조국 유다에게 일어날 일이란 기쁨이나 즐거움하고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를 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가 바라보는 감사의 조건들은 이 세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까닭입니다.
이 세상의 감사의 조건들이 순간적인 것에 불과한 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감사의 조건들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한 순간의 기쁨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외적인 모습으로는 내가 다 잃은 사람이요, 고통중에 있는 사람이요, 절망에 쌓여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때에도 내게 감사함이 넘쳐남은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의 무거운 짐을 벗기신 까닭이요, 내게 구원의 즐거움을 베푸신 까닭이요, 내 앞에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기쁨을 두신 까닭입니다.
이를 믿으시고 소망하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즐거움과 기쁨과 찬양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신앙고백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의 근원은 세상의 권세도 재물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주장하시매 나에게 힘이 샘솟습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사슴의 발은 가볍고 빠릅니다.
여기에 낙담하고 좌절하여 주저앉아버리는 모습이 없습니다.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사슴과 같은 민첩한 발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십니다.
높은 곳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과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곳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애굽 땅에서 그 동포 히브리인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땅에 피하여 40년을 죽은 듯이 소망도 없이 지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은 곳,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엘리야가 850인의 이방 선지자들을 물리쳤지만, 악녀(惡女) 이세벨의 말을 들었을 때 낙담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하여 유다 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두려움으로 차라리 죽기를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부르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강건케 하시며,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편기자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부르시되, 하나님의 거룩하신 산 시온에 오르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갱신하기 위함이며, 이제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케 하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를 지킨 그의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이 세상의 갇힘으로부터 자유케하시며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도(now and here)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셔서 우리로 그의 성산(聖山)에 올라 소망(所望) 중에 하나님과 교통케 하십니다.                                                   

                                                                          3
오늘 본문의 하박국은 사람의 눈에는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는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양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감사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은 바울은 매맞음 가운데, 갇힘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상실로 인한 슬픔이 있을 수 있으며, 헐벗음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 수 있으며, 절망 중에 하나님께 원망을 발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아주 쓰러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 소망을 발견하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혼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감사를 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와 같은 성숙(成熟)한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November 17, 2013

“희락의 기름으로” (이사야 61:1-3)

                                              “희락의 기름으로” (이사야 61:1-3)


                                                                           1
대머리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있었습니다. 낙관주의자인 대머리의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역시 대머리는 좋아요. 우리는 힘들여서 머리를 빗질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그러자 비관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아, 하지만 우리는 씻어야 할 얼굴이 너무 넓지 않소?"
비관주의자는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릴 것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먼지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어제가 오늘보다 더 나았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오늘도 좋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벌을 보고 사람을 쏘는 곤충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꿀을 만드는 곤충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죽어야 하는 게 슬프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현재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선 속에서 악을 찾고, 낙관주의자는 악 속에서 선을 찾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문학적 재능은 뛰어난데 신체적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냉소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은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요 시인인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1771-1832) 역시 다리를 절었지만, 생활태도는 바이런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자신의 다리가 멀쩡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기회만 있으면 계속 불평을 해댔습니다. 스코트는 정반대였습니다.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는 듯했습니다.
한 번은 바이런이 스코트를 만나게 되자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내가 누리고 있는 명성을 모두 주겠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닌 장애에 대해서 서로 반응이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그것을 빌미로 방탕한 생활방식을 택했으나,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부자유함을 감사와 기쁨으로 승화시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수도원을 찾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수도원 원장은 부지런히 수도원을 정리하고 청소했습니다. 손님이 당도하자 원장은 이곳저곳을 소개하느라 부산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왠지 울적하고 심각해 보였습니다. 구경을 모두 마친 손님과 원장이 접대실로 들어섰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수도원은 아주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장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손님의 동의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되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원장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시간에 맞게 기도하고 일하고 있으며, 수도사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손님이 말했습니다.
    "기쁨입니다. 기쁨이 빠지고 나면 기도와 봉사도 고역이 되고 마는 법이지요."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입니다.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습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습 3:17).

                                                                         2
1-3절: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에서 꽤 자주 사용되는 수사법으로 ‘모순어법’이라고 합니다. 모순되고 상반된, 정반대의 단어의 결합(combination of contradictory words)이라고 사전에 해석된 이 말은 예리하고 총명하다는 뜻의 헬라어 ‘oxys’(sharp)와 어리석고 바보 같다는 뜻을 가진 ‘moros'(foolish)의 합성으로 그 어원자체가 상충하는 두 단어의 결합이며,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합성시켜 상황의 특이성을 강조하며, 단어에 감정을 불어넣어 언어에 맛과 멋을 내는 독특한 비유법입니다.
예를 들면 'open secret'(다 아는 비밀), 'bitter sweet'(씁쓰르 달콤한), 'cruel kindness'(끔찍한 친절), 'thunderous silence'(천둥칠 것 같은 침묵), 'laborious idleness'(고된 나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힘들고 고된 상태), 'sweet sorrow'(달콤한 슬픔), 'crowded solitude'(군중 속의 고독) 등이 있습니다.

3절은 옥시모론의 절정을 이루는 표현입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3).
재대신 화관, 슬픔대신 희락(=기쁨)의 기름, 근심대신 찬송의 옷, 이 얼마나 멋있는 옥시모론적 은혜와 영광의 장면들입니까?

바울의 서신에도 옥시모론적인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6장 9-10절에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면 세상적으론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인내(perseverance)를 생산해내고, 인내는 우리를 연단 된 성품과 인격(character)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그 변화된 인격으로 온전한 소망(hope)을 품고 일어서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것”, 이것이 희락의 기름이 있는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옥시모론적인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까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안수하실 때 성령의 열매인 기쁨(=희락)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신이 아담과 하와를 떠날 때 사라졌던 그 기쁨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사람의 기준으로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기에만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슬픔이 있으며, 고통이 있으며, 근심이 있지만, 내 영혼이 구원받음을 알기에, 내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주님 되심을 알기에 오는 기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기록된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기에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항상 기뻐하라”(Πάντοτε χαίρετε)에서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의 명사형 카라(χαρά)가 희락 또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삶은 우리 먼저 믿은 성도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나중 믿은 자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여서 여전히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더하여줄 기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이 걱정과 근심과 고통으로 삐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락의 기름을 발라서 원활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름통을 들고 다니던 괴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다 삐걱대는 문이나 뻑뻑한 출입문이 있으면 경첩에다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의 기름 바르는 습관은 그의 뒤에 오는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의 매일 우리는 문제들 때문에 삶이 심하게 삐걱거리고 뒤틀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희락의 기름으로 그들의 삶에 발라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몇몇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가지고 있어 기름 역할을 하는 한 마디의 동정적인 말을 그리워합니다. 낙망하여 포기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기름 한 방울 같은 말이 그들의 희망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습니다.
비열하고 죄로 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친절이라는 기름을 정기적으로 발라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순응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일 어디에서나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기름을 부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함께 기쁨의 기름을 가지고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3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릅니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쁨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