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31, 2012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 (골로새서 4:10-18)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 (골로새서 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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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이기는 사람들
성경 외의 인물로서 제가 좋아하는 차오추우(Chao-chou, 778-897)라고 하는 선교(禪敎, Zen)의 대가가 있습니다. 그가 선교에 처음 입문한 것은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은 이제 인생의 거의 끝 부분이라고 생각하던 60세이었습니다. 그가 추구하던 것은 선교의 마스터(Master)가 되는 것인데 100명이 선교에 입문하면 20-30년의 수련기간 뒤에 한 명이 마스터가 될까말까 한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이 힘들 일인데, 청년이 아닌 60세 고령의 차오추우는 이에 감히 도전한 것입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20년 뒤인 80세에 선(禪)의 이치를 깨달아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80세까지 산다는 것은 지금도 장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 당시에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마스터에 도달한 것으로 끝난다 해도 별로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80세에서 40년을 더 살면서 선교의 체계를 완성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냅니다. 그가 미리 120세까지 살 수 있음을 알고 60세에 선교에 입문하였겠습니까? 그가 120세까지 장수하면서 선교의 대가(大家)가 된 것은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선교에 많은 마스터들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있었지만 그의 선의 깊이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은 자기 앞에 놓인 환경을 이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환경을 탓하고, 자기의 부족한 신체 조건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신감은 자신을 의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신앙고백한 대로 믿는 사람은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의 환경극복과 열심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이름은 유명하여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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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골로새서를 마치는 문안인사에서 두기고와 오네시모 (7-9절) 이외에 8명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와 데마, 눔바, 그리고 아킵보)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아리스다고(Aristarchus)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행전 20:4, 27:2)의 유대인으로서 에베소 지방에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행전 19:29). 그가 그 후에 바울을 따라 아시아까지 동행하고,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할 때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행전 27:2).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 감당하기를 좋아하기에 그를 따라 감옥(가택연금)에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갇히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함께 갇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가(Mark)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육신의 피곤 또는 다른 이유를 들어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전 13:13). 1차 전도여행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나, 바울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탐탁치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밤빌리아에서 먼저 돌아간 것을 들어 데려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합니다. 결국 마가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고 각각 다른 전도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가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이 덜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마가는 깊은 회개를 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새사람으로 거듭 납니다. 그는 그의 실패를 바탕으로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되고, 베드로는 그를 (믿음 안에서)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마가가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곳에 커다란 집을 소유한 부유하고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초석이 된 120명이 모여 기도한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그의 집이었습니다(행전 1:13-15, 2:1). 또한 그의 집은 그 이후에도 사도들과 제자들의 모임의 장소로 제공되어졌습니다(행전 12:12).
                                                   
이와 같은 경건하고 주님과 그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드리기를 즐겨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마가는 신앙에서 실패한 때도 있었으나 아주 넘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에 바울도 마가의 변모된 모습을 보고 그를 기쁨으로 다시 영접하고 그를 동역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몬 1:24). 한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두 번째의 동역은 마가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었으며 다시는 넘어지거나 거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에는 하나님의 일에 무익한 자였는데, 이제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유스도(Justus)
유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사도행전 1장 23절과 18장 7절, 두 번 나오는데 동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스도가 어떤 일로 바울을 도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도 바울의 여러 동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맡은 일이 사소한 것이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심정으로 감당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유스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할례당--즉, 유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믿음보다는 율법을 고집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못마땅히 여기고 반대하였는데, 이들은 바울의 사역을 귀히 여기고 그 사역에 기꺼이, 희생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상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29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여전히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기에 이것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심령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와 같이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는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기에 바울은 이들로 인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바라기는 더욱 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길임을 깨닫고 동참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2-13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간에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에바브라(Epaphras)
에바브라는 본래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요 사역자인데, 그 교회 안에 거짓 선생이 다른 교리와 주장을 갖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으매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와서 그의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해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라는 “항상 너희(=골로새 성도들)를 위하여 애써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바브라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골로새 교회를 사역해왔기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은 함께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줌이 필요합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이 나타납니다.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율법주의와 천사숭배와 세상의 철학을 좇는 이단이 들어온 관계로 에바브라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뜨겁습니다. 그가 지금 몸으로는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더욱 완전하고 믿음에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4절: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누가(Luke)
누가는 의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직업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을 만나매 그의 3차 전도여행부터 자청하여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되는 바울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자원함으로 바울의 고생 길에 동행하였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현재에도 바울 곁에서 그의 건강을 돌보며 바울과 함께 더욱 넓은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누가는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서 놓임을 받았다가 그의 왕성한 전도활동으로 다시 체포되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때에도 누가는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데마(Demas)
데마는 이 당시만 하더라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바울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갑니다. 디도데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이 데마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For Demas, in love with this present world, has deserted me and gone to Thessalonic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육신--겉사람은 사단의 유혹에 매우 약합니다(롬 7:18-24).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죽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die every day).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활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갈 2:20). 해서, 데마와 같이 곁길로 빠지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5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라오디게아의 형제들과 눔바(Nympha)
바울이 지금 쓰는 편지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이 편지가 후에 라오디게아인에게도 읽힐 것이기에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하여 아울러 라오디게아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집 주인 눔바와 그 가정교회에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교회가 공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고 때로는 당국의 눈을 피해 모여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변변한 건물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성도들 중에 자신의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제공하는 가정교회의 형태였습니다(행전 12:12, 16:40; 롬 16:5; 고전 16:19; 몬 1:2). 눔바도 자신의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제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역의 크기와 성도들의 수에 따라서, 한 도시에 가정교회가 하나 있을 수도 있고, 그 이상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가정교회의 예배는 요즘 교회들의 구역예배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6절: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바울 서신의 회람(回覽)
바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바울 사후에 이루어졌고, 신약성경이란 말의 사용은 바울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위대한 사도의 서신은 참으로 귀하고 아직 신약성경이 편집되기 전부터 하나님 말씀에 버금 가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바울의 사도권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그 때에도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보내는 편지는 한 교회에만 머물지 않고 전 성도가 다 읽은 다음에는 그 편지를 인접한 지방의 교회에 보내어 그 교회에서도 회람하였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편지의 원본은 보관하고 복사본을 만들어 이웃교회에 보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골로새 서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해서, 골로새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성도들간에 왕래가 있었기에, 바울은 그가 지금 쓰고 있는 골로새서를 그들과 함께 나눠 읽고,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그의 서신을 골로새 성도들이 나눠 읽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아킵보(Archippus)
아킵보(몬 1:2)는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던 빌레몬의 아들로서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사역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빌레몬서 1장 2절에서는 아킵보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군사 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 머물고 있는 형편에서 바울은 더욱 그의 믿음을 공고히 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See that you fulfill the ministry which you have received in the Lord)”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성도들, 또 직분을 맡은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부르시고 직분을 맡기시고 일꾼을 삼으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더욱 충성으로 맡기신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직분을 맡은 사람이 기분이 내키면 열심히 감당하고 수틀리면 직분을 팽개쳐 버린다면 이는 그가 맡은 직분이 “주 안에서 받은 직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 자신의 문안과 축도
바울의 서신들은 대부분 사람들에 의하여 대신 쓰여졌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빛 가운데 임하셨던 그리스도를 만났던 이래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다시 볼 수 있게 되긴 하였지만 그 이후에 계속 안질로 고생하게 되었던 같습니다. 이 심한 안질이 그의 선교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하나님께 치료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하시며 바울의 눈병이 그대로 있게 하십니다. 즉, 이 눈병도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임하신 증거이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그에게 눈병(=육체의 가시)을 머물게 하심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장해요인 가운데 여러 교회들에게 대필로 편지를 보냈고 현재 13 서신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한 안질로 긴 편지들의 본문은 쓸 수 없었지만, 성도들을 권면하고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더하여 주기 위하여 편지 끝마침의 문안인사는 친필로 합니다. 그 편지가 분명히 그들의 친구요, 동역자요, 위대한 사도인 바울로부터 온 것임을 그들로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당부하는 바울이 형편이 얼마나 힘들고 제한적인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악한 형편 가운데 바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그리스도에게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행전 28:31). 그를 지키는 시위대 병사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빌 1:13). 이러한 바울의 행적에 관한 소식이 바울을 아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우리보다도 못한 처지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여전히 잘 감당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나은 환경에 있는 우리가 더욱 힘을 내야지’라는 생각이 그들 가운데 들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4절에서 바울은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축도로서 마칩니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로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교인이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임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가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낙담치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부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형편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전파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태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온 빛입니다. 빛을 받은 우리가 그 은혜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것이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나누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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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두기고와 오네시모, 그리고 오늘 바울이 소개한 아리스다고와 마가, 유스도, 그리고 에바브라, 누가, 데마, 눔바와 아킵보 등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던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동역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열심히 잘 감당하였습니다. (마가와 같이) 과거에 실패한 자도 있고, (데마와 같이) 장차 세상으로 떠나가는 자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현재는 신실한 듯 하지만 믿음의 교만에 빠지거나 자고하여지는 사람은 나약해지고 허물 가운데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 그 자체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은 그 바라봄과 의지함으로 인하여 완전하여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가운데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환경을 이기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노라’고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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