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감사” (골로새서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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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吳起)의 연저지인(吮疽之仁)
증자(曾子)의 문하생 가운데 오기란 사람이 있었는데 손자와 더불어 손오로 불릴만한 병법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까지는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오기는 장군이 된 뒤에도 계급이 가장 낮은 병졸들과 의식(衣食)을 같이 했고, 잠잘 때도 깔개를 쓰지 않았고, 외출할 때에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 스스로 양식을 싸서 등에 지고서 병졸들과 노고를 같이 하였습니다.
한번은 오기가 종기를 심히 앓고 있는 병졸의 종처(腫處)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 주었습니다. 이 소식이 그 병졸의 어머니에게 전해지자 그의 어머니는 소리내어 울어댑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의아하여 묻자 그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그 전 해에 오 장군은 그 아이 아비의 종처에서 고름을 빨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격한 나머지 전쟁터에 나아가 뒤로 물러설 줄 모르고 싸우다가 적병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 장군이 아들의 고름을 빨아 주었으니 저 아이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슬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오기가 병졸을 사랑하되 “종기를 입으로 빨았다”고 하여서 연저지인(吮疽之仁)이란 고사성어가 유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종처에서 고름을 빨아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의 짐을 벗기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르시되 ‘한 몸의 지체들인 성도들을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감사함
영국의 작가 아이작 윌턴(Issac Wilton)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천국이요, 또 다른 곳은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음으로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Think God)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과 원망의 마음대신에 우리가 욕하는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Think"(생각하다)와 “Thank"는 그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도 중에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쳐나게 됩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으로 향한 감사가 많은 것은 그가 늘 기도 중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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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바울의 감사기도
골로새 교인들은 바울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에서 목회를 하는 에바브라 편에 골로새 교회 안에 이단의 가르침이 침투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에 대하여 경계하고 바른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경계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들로 말미암는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의 편지를 받아 볼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을 열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사도로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감사가 단지 입에 발린 감사는 아닙니다. 사람이 생을 살면서 감사가 없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여건이 나쁠 때에도 불평과 원망을 발하여야 할 때에도 감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느끼며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감사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주신 분이십니다. 형편이 좋지 않은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기만 하면 우리 입술과 심령에 감사가 나옵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감사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기도하기 시작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각납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을 열거합니다.
첫째는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τὴν πίστιν ὑμών ἐν Χριστῷ Ίησού)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인데, 세상에 속한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주(Savior) 되심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며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도에 대한 사랑
둘째는 골로새 성도들의 사랑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거의 (한시적, one time action) 고백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믿음 있음의 현재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했는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 이 세 가지는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믿음의 각기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은 믿음이 현재적 삶에서 나타나지는 표현이요, 소망은 믿음의 미래지향적 표현입니다.
성도들의 사랑의 대상은 먼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신데,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눈에 보이는 성도들을 사랑함으로 확증되어집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 예수님의 육적 형제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또한 약 2:17). 야고보가 말씀하는 행함은 가난하고 헐벗은 형제와 자매를 돌아보는 사랑의 행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믿음의 고백은 하지만, 믿음의 외적 표현인 사랑의 행함이 없는 것은 그가 고백하는 믿음이 생명력이 없는 죽은 믿음--즉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5-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자유케 하는 것은 믿음뿐인데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하면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믿음이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삶에서의 믿음의 바른 표현이 있었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5절: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하늘에 쌓아 둔 소망
소망은 믿음의 미래적 측면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낙심과 절망 가운데 소망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이는 스스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그에게 용기를 주고 좌절과 절망에서 일어나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소망의 닻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소망의 닻 되시기에 바람이 거세게 일고 물결이 높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중에도 우리는 믿음을 잃지 않고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찬송가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 1-3절)
믿지 않는 사람들의 소망이 땅에 쌓아 둔 것이라면 믿는 사람들의 소망은 하늘에 쌓아 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소망하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우리가 소망하는 바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얻기 위하여 주일에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헛된 수고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여러분의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믿는 편이 빠를 것이요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그 방면으로 노력하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기업입니다.
그리스도를 잘 믿던 사람이 그 믿음의 순서대로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로 살았습니까?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바울과 바나바, 디모데와 디도 등등 이 세상에서 변변한 생활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간증집회를 하러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소망하는 바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세상 살 동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전혀 소망을 두지 말고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세상 살 동안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소망과 계획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더욱 믿음의 사람 되게 해달라 기도하고 소망해야 할 것이며,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 믿는 사람 되게 해달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요, 따라서 하늘에 소망을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래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의 생활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일수록 그 바람을 하늘나라에 쌓습니다.
6절: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음
골로새 성도들이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 있는 것은 그들이 에바브라에게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합니다.
은혜를 깨달음
복음의 진리를 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의 진리를 듣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귀를 막고 들었든지 아니면 흘려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그 사람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당신에게 보장되었습니다.”라는 복음의 증거를 듣고도 맹숭맹숭한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지가 않은 까닭입니다.
열매를 맺고 자람
은혜를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반대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믿음의 시작은 성령의 역사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믿음의 고백”을 한 그 사람을 성령께서 안에서 도우시기에 신앙의 열매맺는 삶이 따라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이 따라오며, 하늘에 소망을 쌓는 일이 나타나며, 또한 그의 믿음이 증거되므로 전도의 열매를 맺고 또한 그의 믿음의 자라남과 함께 그가 속한 교회도 자랍니다.
7-8절: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에바브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바울은 에바브라를 언급함에 있어서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할 때에 그곳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인데, 그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린 사람입니다. 그가 후에 골로새 지방에서 목회를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신실한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신실하다”(faithful)는 표현은 '믿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신 것처럼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실한 일꾼은 매일 매일 믿음을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하여 믿음이 많은 것 같다가도 큰 어려움이 닥치면 하루아침에 믿음을 몽땅 까먹기도 합니다. 하기에 계속 신실하기 위하여 믿음을 쌓고 또 쌓아가야 합니다. 에바브라가 신실한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인한 적은 믿음에 만족하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충만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전도와 사역의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서 중단 없이 힘쓴 까닭입니다.
에바브라는 또한 골로새 교인들의 그리스도와 성도 사랑함의 소식을 성령 안에서 바울과 디모데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홀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삶의 형편과 신앙을 서로 교통함으로써 기도 중에 서로를 기억할 것이며 위하여 간구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를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 사람의 바른 신앙의 모습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여러분들에게 교우들로 인한 하나님께 감사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이와 같이 온유하고 친절한 교우들을 허락하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우들의 부족과 허물이 먼저 보이기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장점과 칭찬할 일이 보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부족과 허물이 먼저 보이더라도 칭찬하고 감사할 일이 뭐 없나’ 살펴보기로 합시다. 해서, 저와 여러분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입술만의 고백 뿐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우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적인 표현이 자주 나타나지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의 어려운 처지에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 도울 일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위에 낙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소망의 넉넉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소망은 세월이 경과하면 경과할수록 쇠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성하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사람이 됨으로써 여러분의 입술과 삶으로 구원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로 인하여 여러분의 깨달음이 여러분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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