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주 안에서 자녀와 부모” (골로새서 3:20-21)

                                             “주 안에서 자녀와 부모” (골로새서 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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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예찬
자녀들이 훌륭하게 자란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와 그들의 기도와 정성이 있는 반면에, 어머니가 훌륭하지 않아서 자녀가 잘못되는 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신에,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녀가 잘못되는 예는 성경 안에서와 밖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부정적인 영향은 그의 인격이나 인간 자질이 떨어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 대한 무관심이나 대화의 결여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한 삶을 산 사람들의 어머니 예찬은 끝이 없을 지경입니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오 주님, 만약 제가 당신의 자녀라면, 그것은 먼저 당신의 자녀다운 어머니를 제게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했고, 미국의 화가 벤저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는 “어머니의 입맞춤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고 했고, 미국의 6대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 1767-1848)는 “어머니가 현재의 나를 만드셨다”고 했고,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현재의 나와 앞으로 희망하는 것 모두가 천사 같은 어머니 덕분이다”라고 했고,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 1847-1931)은 “나를 만든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나를 대할 때 언제나 진실하게 대하셨으며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항상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썼고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행하려고 했다”고 했고,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모르와(Andre Maurois, 1885-1967)는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랑을 배워야 한다. 특히 아동은 모성애로 사랑을 배운다. ... 어머니와 자녀를 결속하는 감정은 완전히 순수하고 아름답다. 거기에는 어떤 형태의 알력도 없다. 자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모든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있어서 자녀는 하나의 신이다.”라고 했고,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나의 성격 형성에 있어서 어머니의 영향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매일 성경을 여러 장씩 외우도록 시키셨다. 어머니의 신중하고도 안목 있는 배려에서 나온 그러한 훈련 덕분에 나는 땀흘려 일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문학적인 감각도 갖게 되었다”고 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영국의 정치가 세실(E. A. R. Cecil, 1864-1958)은 “내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경건한 어머니의 삶이 자녀에게 끼치는 강한 영향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에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古事)를 만들어낸 맹자의 어머니, 정몽주의 어머니, 한석봉의 어머니, 이율곡의 어머니 등 훌륭한 어머니들로 말미암아 훌륭한 자녀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에게 찬사를 돌리는 자녀들의 예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찬사보다는 잘못되면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유명 정치인들의 자녀라든가, 큰 교회 목사님들의 자녀들이 잘못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아버지가 너무 바쁘거나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서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의 사랑을 표시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큽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도 아들들의 성장과정 중에 성격 형성이나 비리에 연루되게 된 동기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정치경력과 옥중생활 탓이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큰 교회 목회자들도 자녀들에게 신경 쓰기보다는 시간의 거의 전부를 교회에 쏟아 부은 탓에 자녀들이 방황하거나 불신앙에 빠지는 예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사춘기와 청년기에 이해하지 못하였던 아버지의 소명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그것에 감동을 받아서 자신이 개척하여 성장시킨 현재 담임하고 있는 대형교회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것이 오히려 무리를 빗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존재는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 아니고, 자녀들이 그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 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 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 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 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 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 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 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 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 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助言)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아버지에 대하여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자녀의 평가에 대한 또 다른 글을 소개하면,

    4세 때에는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7세 때에는 "아버지는 이것도 모를 거야."라고 생각하고,
    14세 때에는 "아버지는 가망이 없을 만큼 케케묵었다."고 생각하고,
    21세 때에는 "아버지와 같은 구세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25세 때에는 "아버지는 조금은 안다."고 생각하고,
    30세 때에는 "이 일을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알고 싶다."고 생각하고,
    35세 때에는 "우리 부부가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고 생각하고,
    50세 때에는 "아버지는 내 나이 때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을까?"고 생각하며,
    60세 때에는 "내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 일만은 꼭 의논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어릴 때에는 아빠를 ‘최고’로 여기던 아이가 나이가 듦에 따라 아버지를 별로 대단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하다가 그가 장가가거나 시집가서 자식을 낳고 살다보면 ‘아버지의 존재’가 다시 크게 느껴지고 그리워집니다.

부모로써 하나님의 사랑
부모 된 사람들은--특히 아비 된 사람들은 바쁜 중에도 자녀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사랑을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와 음녀 고멜과의 결혼과 사랑을 통하여 바람직한 남편상을 보여주신 (성도들의 영적인 남편 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말씀과 비유를 통하여 부모상의 전형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신명기 32장 11-12절에서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이스라엘)을 인도하셨고”라고 모성애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누가 13:34)에서 예수님도 성도들을 향하신 부모의 사랑으로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에게 분배해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절망과 불안감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하여, 아직 거리가 먼데 그 아들인 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누가 15:20) 아버지에게서 부성애(父性愛)가 어떠해야 할 것을 발견합니다. 이 아버지는 탕자인 아들을 야단치는 대신에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입니다. 작은 잘못들은 깨닫고 고치게 야단을 칠 필요가 있지만, 큰 잘못은 야단을 치지 않아도 자녀가 알 것이기에 오히려 위로하고 감싸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방탕하고 미운 짓을 골라서 하는, 그러나 지금이라도 ‘아버지’ 부르면서 돌아오면 품어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로마서 12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순종치 아니하고 제 갈 길로 가고 있던 자녀들을 위해서 사랑을 보여주심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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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에 대한 효도--순종과 공경은 유교사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공자보다 훨씬 이전에 이를 천륜-인륜의 일로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에서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출 20:12)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영생과 축복의 비결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자녀가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부모에게 순종하되, 학문적 지식을 가지고 분별해가면서 순종할 것은 순종하고 부모의 무식의 소치에서 나온 것은 순종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in everything)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되”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명확히 한 것같이 “주 안에서” 그리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란 “주님의 뜻 안에서”란 말로 혹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도적질하라’ ‘우상숭배 하라’ 명할 때 이는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것은 부모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배치되므로 “주 밖에” 있는 것입니다. 곧 “주 안에서”는 세상을 살 때 우리에게 주어진 부모에 대한 순종의 한계를 설정하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 안에서”란 말도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피하거나 순종하지 못함을 변명하기 위한 구실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3-6절(또한 마가 7:10-13)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자녀된 자들이 유전(遺傳)을 악용하여 부모공경의 의무를 벗어나고자 하는 약삭빠른 마음을 나무라십니다.
부모를 공양할 의무가 있는 자녀가 아비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제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재물을 드림으로 효도할 마음이 충분히 있는데, 하나님께 드리기로 이미 약속하여서 고르반(=하나님께 드릴 선물로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바친 것)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므로 부모 부양을 거부하는 것은 “주 안에서”란 말을 악용하는 행위입니다.

“순종하다”란 말은 헬라어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입니다. 훞(ὺπ)은 “아래”란 뜻이고, 아쿠오(ἀκούω)는 “듣다”란 뜻이므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순종하다”는 “아래에서 듣다,”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다”란 말입니다.
순종(順從)이 실천적(實踐的)인 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에베소서 6장 2절에 나오는 “공경하다”(τιμάω)는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하다”란 의미로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자녀로서 부모를 대하되,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부모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할 때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쁘게 함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는데, 한글성경은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everything, for this pleases the Lord."(RSV)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도 공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치 않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21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비들아 자녀를 격노케 말라
자녀의 반대편에 있는 부모를 향한 권면에서 “부모들아”라고 하지 않고 “아비들아”라고 한 것은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자녀를 사랑함에서 거의 절대적임을 인정할 때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머니 때문에 잘되는 자녀들은 많지만, 잘못되는 자녀들은 적습니다. 반면에, 아버지 때문에 잘되는 자녀는 그리 많지 않지만, 잘못되는 자녀들은 많습니다. 자녀의 성공에 아버지의 역할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이 더 크고, 자녀의 실패에 어머니의 탓보다는 아버지의 탓이 더 큰 것이 현실임을 인정할 때, 바울의 권면은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아비 된 성도들은 자신의 역할을 증대시켜야 할 것입니다. 해서, 잘 안 되는 경우에만 책임이 있는 아버지가 되지 말고, 자녀의 잘됨에 기여(寄與)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사회적인 성공도 중요할 것이지만,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바른 성장과 성공에도 일조(一助)하는 아버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를 격노(激怒)케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회초리와 훈계로 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모의 성냄이 그 원인입니다. 부모들이 종종 자녀들을 소유물 취급한다든가 가볍게 대하며, 자기 화풀이 대상으로 삼을 때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며 그들에게 낙심(落心)을 줄 수 있으며 마음에 응어리를 남길 수 있습니다. 형제간에 비교하는 것도 금물(禁物)인 것은 이로써 마음에 상처(傷處)를 받을 자녀도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서는 이에 더하여, “오직 주의 교양(敎養)과 훈계(訓戒)로 양육하라”고 권고합니다.
‘주 안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는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훈계함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를 한 인격으로 대하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일입니다. 부모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자녀를 격노케 하고, 낙심케 하며, 그의 소망과 자질을 헛된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네가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냐?’ ‘너는 아무리 해도 안 돼’ ‘너는 밥이나 축내는 놈이야’ 등등 자녀들의 인격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은 부모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순종과 무조건적인 사랑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의 바울의 권면에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권면하는 말에서는 “부모(父母)”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것도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잘해주기에 어머니에게는 순종하지만, 아버지는 별로 잘해주는 것도 없고 무관심하고 밖으로만 돌아다니시기에 아버지께는 순종과 공경을 보이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함은 자식된 자의 절대적인 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어느 한 쪽이 없이는 그 자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그 자식의 성장에 아무 것도 도움이 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순종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물론 부모의 의무는 부모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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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부모로서 성도들은--특별히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인 사랑을 본받아 자녀들을 대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를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훈계와 교양으로서 양육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필요로 할 때 항상 거기 있어주고, 위로와 권면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그들에게 심어주는 부모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로서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고 그 징계를 잘 받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시고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예에서 육신의 부모와 영의 부모에 대한 순종(順從)과 공경(恭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모친 마리아의 말씀을 들으심과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받는 가운데도 모친 마리아를 한 제자에게 부탁하는 것과, 영의 아버지인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자녀로서 모든 일에서 부모에 대한 순종은 불순종과 불효로 점철되어 있는 현대 사회를 가정에서부터 정화(淨化)하려는 우리의 노력이며 출발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의 올바른 질서확립이 이웃에게 주님 안에서의 질서와 사랑을 증거하고 사회 전체를 밝게 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또는 자녀로서 주어진 환경과 주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사랑과 순종의 의무를 다하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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